마음의 쉼 마태복음 11장 28-30절
지난 봄 야심찬 꿈을 가지고 커다란 뱅갈고무나무를 사서 교회 들어오는 입구에 놓았습니다. 아내는 그것을 에덴나무라고 부릅니다. 잎이 풍성하고 색깔이 예뻐서 에덴동산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모양입니다. 한 5개월 잘 키웠는데 어느 날부터 이놈이 잎이 하나씩 뚝뚝 떨어지는 겁니다. 잎이 떨어지는 경우는 대부분 습해서 잎이 떨어지는 건데 꽃집에서 주라는 데로 줬는데 환경이 실내이다 보니 빛도 없고 통풍도 잘 안되고 그래서 수분이 쉽게 증발하지 않고 그래서 과습이었던 모양입니다. 뒤늦게 창가로 옮겨서 이렇게 저렇게 다 해보았지만 결국은 하나씩 하나씩 가지들이 마르더니 다 죽어 버리더군요. 뿌리가 썩은 겁니다. 뿌리가 썩으면 제 아무리 어떤 일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비료를 주고, 햇볕을 주고, 통풍 잘 되게 선풍기를 쐬어 주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처음 우리 집에 온 손님이 6개월을 못 버티고 떠나가셨습니다. 화분 키운 지가 10년이 넘어가는데도 물 조절을 못해서 죽어가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다 보니 그렇게 속상하더라구요., 화분을 다 없애 버릴까... 싶은 생각도 들고... 안 키우면 죽일 일도 없도 속상할 일도 없잖아요. 덩치 큰 놈이 서서히 죽어가는 전 과정을 보니 막 화가 나더라구요. 결국 고민에 고민을 하다 썩은 뿌리채 다 들어내고 새로운 놈을 다시 사왔습니다. 저 친구는 새식구입니다.
적지 않은 시간동안 키우고 돌보아도 이렇게 실수합니다. 지난 번에는 몇 년동안 너무 화려하게 잘 키우던 아이비라는 놈이 어느날 한순간에 병들어 죽더라구요. 이유도 모르겠어요. 늘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같은 방법으로 물을 줬고 영양분도 줬는데 병들 환경도 아닌데 어느날 갑자기 그래요. 열심히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살아도 삶이 내 맘 같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화분 가꾸는 건 죽은 화분 조용히 치우면 되니까 그나마 낫지요.
옛날에 부목으로 있을 때 성교육 강사를 오후 예배 때 초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전날까지 확인하고 어떻게 가겠다고 체크 다 끝내고 오전 예배를 마치고 한 한 시간을 앞두고 다시 전화를 드렸는데 지방에 계신 분이 그대로 지방에 계신 거예요. 강연 때문에 홍보도 많이 하고 평소보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예배를 준비하고 있는데 강사가 펑크 난 겁니다. 이런 분은 대체하기도 힘들어요. 담임목사님과 성도님들께 얼마나 미안하고 죄송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또 이런 건 욕 한번 얻어먹으면 되지만 어떤 실수의 말이나 행동은 관계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의 씨앗을 남기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있고 나면 어떤 사람들은 심하게 자기 자신을 자책하고 나무라면서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냐 무슨 정신으로 사는 거냐 차라리 그만 두어라 내가 재능이 없는 건 아닌가 직업을 바꾸어야 하는 건 아닌가 심하게 자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우리가 남들에게 그러듯이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우리가 남이 실수하고 그러면 대부분 뒤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앞에서는 무척 관대하잖아요. 괜찮아요. 그럴수 있죠. 사람이 하는 일인데, 괜찮아요 괜찮아 담에 또 하면 돼죠. 우리 교회에서도 어쩌다 밥이 설거나 타거나 그러면 누구도 왜 밥을 이따위로 했어. 먹으라는 거야 죽으라는 거야. 치아 다 나가겠다. 이러는 분 없잖아요. 집에서 가서 혼자 있을 때 그런 말을 할찌는 몰라도 앞에서는 괜찮아 돌도 씹어 먹는데 뭐 괜찮아. 고기는 탄게 나쁘지만 밥은 소화도 잘되고 괜찮아, 그러잖아요. 자신에게 그러는 사람도 있지요. 괜찮아, 실수 할 수 있지 뭐 다음에 잘하지, 사람이 완벽한 존재도 아니고...
우리는 때로는 스스로를 위로해가면서 때로는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삶을 성찰하고 반성하며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어제보다 나은 나자신의 삶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조차도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앞의 수고하며 무거운 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완벽할 없는 존재가 뭔가 온전해지고 완벽해지고 실수를 줄이고 결핍을 줄이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모든 수고와 노력들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일 수 있겠다는 거죠. 때로는 그런 노력조차도 다 내려놓고 쉴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쉼을 이야기 하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맘의 쉼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에게서 뭘 배우라는 건가. 그리고 마음의 쉼은 또 뭔가...
지난 주에 종영된 갯마을 차차차는 관계를 배배꼬지 않고 코로나 시절에 적절한 참 따뜻한 드라마였습니다. 공진이라는 바닷가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인데 그 안에는 스탠다드 형의 모범적인 사람들이 출연하지 않습니다. 아주 사소한 오해로 이혼한 부부들, 사리분별 잘 못하는 젊은 남편과 평생을 살아야하는 아내, 동네일을 미주알 고주알 다 떠벌리고 다니는 수다쟁이 아줌마, 자기 도취 속에서 살아가는 음악인, 인생의 깊은 상처로 자기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살아가는 젊은 총각, 옳지 않은 의료 구조에 저항하다 시골로 떠밀려난 젊은 치과여의사, 심지어는 동성애자에 이르기 까지 그저 우리가 일상에서 평범하게 만날 법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때로는 거칠기도 하고 때로는 호박씨도 까고 때로는 오해와 갈등이 초래되기도 하고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일날이 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누구가의 집에 제삿날이 다가오면 제사상에 올린 음식이라도 하나 챙겨주고 아프면 아무 말도 묻지 않고 고구마 한 바구니, 옥수수 한바구니를 쓱 밀어넣고 가고, 치고 박고 오해하고 갈등하고 싸우기도 하지만 그 마을에서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왕따시키고 살아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마을에 있으면 비록 혼자 살아가지만 내가 세상에 혼자 버려져 있지 않는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저는 갯마을 차차차를 쓴 작가가 말하고 싶은 여러 가지중 하나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잘 살아내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살아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갈등하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런 과정속에서도 존재자체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는 따뜻함의 중요함을 다루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희 교회에 택배 노동자 쉼터를 마련한지 8개월이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러 택배 아저씨도 다녀가시고 여러 어르신들도 쉬고 가시고 그러시는데 그 중에 한 할머님이 오늘 원흥으로 영구 임대아파트를 마련하셔서 이사하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런 말씀을 하셔요. 이 늙은이 못나고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늙은이가 그래도 여기와서 딱 앉아있으면 그렇게 맘이 편안하고 정말 쉬는 것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주 와서 앉아있다가 간다는 겁니다. 사람을 학연이나 지위나 나이나 돈이나 실력이나 이런 것으로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환대해주는 공간처럼 느끼신다는 겁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게서 말씀하신 이 마음의 쉼이 그런 쉼의 공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몸이 쉰다고 쉬는 게 아닙니다. 관계에 갈등이 일어나고 그래서 속이 복잡하고 감정이 오르락 내리락 하면 하루 종일 집에 누워있어도 안색이 변합니다. 더 힘들고 더 지치고 더 기력이 떨어집니다.
바로 앞에도 나오지만 예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권력과 사회가 버린 가난하고 몸이 아프고 질병이 있고 눈이 안보이고, 몸과 마음이 썩고 뭐하나 온전한 구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어느 한 사람 존재 자체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외모로 실력으로 헌신의 정도로 평가하거나 판단이전에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이러실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냐면 복음서 서두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 위로 올라오셨을 때 하늘문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다고 나오잖아요. 그 내면의 자각, 그런 자의식이 타자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힘으로 나갈 수 있게 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행복을 배우는 덴마크 학교 이야기>의 저자 제시카라는 사람은 "마음의 쉼이란 '자신이 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 자체를 긍정하는 능력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능력이나 실력이나 평가 이전, 부족하면 부족한데로 결핍이 있으면 있는체로 존재 자체를 긍정하고 존중하는 능력이 진정한 의미에서 마음의 쉼이라는 겁니다. 물론 사람이 실수하고 부족하고 뭔가 잘못하면 성찰하고 수정하고 때로는 자책도 하면서 살아야겠지요. 그런데 그런 순간조차도 모든 사람에게는 존재 자체를 긍정해주고 존중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시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감과 자존감을 구분합니다. 애쓰고 잘하고 성과를 이루고 해내고 성취해서 생기는 건 자신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감은 내가 못하거나 실수하거나 성과를 상사의 기대대로 해내지 못하고 그러면 그런 자신감은 언제든지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는 거죠. 외부적 상황에 의해 생기고 없어지는 자신감이 아니라 자존감, 자신이 뭔가를 이루어내고 성취하는 것과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를 존재자체로 있는 그대로 애정하고 존중하고 따뜻하게 바라봐 줄 수 있는 힘이 존재의 힘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덴마크 학교에서는 휘게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위로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고대 스칸디나비아어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개인이든 공동체든 혼자든 함께든 둘러앉아 절대로 정치예기 종교예기 논쟁이 될만한 이야기 자체를 끄집어 내지 않고 마치 텃밭에서 일을 하다가 내리 쬐는 따뜻한 볕에 자신을 맡기듯이, 때로는 음식으로 때로는 웃음으로 편안한 대화로 음악을 들으면서 영화를 보면서 게임을 하면서 무척이나 편안하고 아늑하게 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신성하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의식하고 또 그 시간을 서로 신성하게 가꾸어야한다는 의도를 가지면서 의도적으로 그런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연대하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스트레스, 불만, 자책, 공포, 두려움, 하루의 일들과 기억들 상처들을 우리가 집에 들어오면 코트와 신발을 벗는 것과 같이 다 내려놓고 이 시간만큼은 존재의 충만함으로 기쁨과 즐거움과 존중과 사랑으로 채운다는 것입니다.
제가 20-30대 때에는 어떤 이상적인 완벽한 꿈들을 많이 꿨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이상적인 꿈들 안에는 제가 생각하는 어떤 완벽한 그림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어떤 상태적 개념으로 많이 이해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를 거기에 끼워맞추려하고 사람들을 그런 쪽으로 변화시키려고 하고... 그랬던 시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이들어도 완벽은커녕 여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건 두렵고, 실수가 많고 살면서 잣은 후회와 실수는 반복되고 사람이라는게 관계라는게 자라고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이어서 끊임없이 롤로코스터를 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면합니다.
그래서 어느날부터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완벽한 공동체가 되려 하기보다는"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게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그 숱한 시간 속에서도" 나도 타자도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고 신뢰할 수 있는 따뜻한 공동체로 살아가자.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은 선물로 생각하며 살아가자!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일상의 마음의 쉼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한주간 동안도 틈틈이 이런 쉼과 안식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