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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3장 16-17절 "너는 내 사랑하는 자요"
임인년 새해입니다. 해마다 1만명의 교수들이 그 해의 사자성어를 뽑는데 2021년의 사자 성어로 ‘묘서동처(猫鼠同處)’를 뽑았다고 합니다. 고양이와 쥐와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도둑을 잡는 자가 도둑과 함께 한통속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도둑을 잡는 자를 세워놓았더니 그 사람이 가장 큰 도둑이었음을 알게 된 한해였습니다. 그래서 중소기업인들이 2022년 새해의 사자성어로 중력이산을 뽑았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치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올해가 호랑이의 해인데 호랑이는 용맹스럽고 호기가 있으면서도 우리나라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호랑이들은 천지난만한 순수함이 있습니다. 곶감하나에도 무서워할 줄 알고 토끼와 호랑이 이야기에 보면 꼬리로 낚시를 하면 더 많은 고기를 먹을 수 있을거라는 토끼의 꾀에 넘어가 한겨울에 꼬리가 얼어 오도가도 못하는 어리숙하면서도 순진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머리 굴리지 않는 순박함 그러면서도 용맹스러운 호기로 힘을 합쳐 우리에게 닥친 위기들을 넘어가고 어둠속에서도 눈물속에서도, 아픔과 고통속에서도 삶의 의미와 보람을 길러내며 은총으로 주어진 시간들을 춤추면서 노래하면서 잘 살아내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해를 시작하면서 예수님 목회 시작의 첫 이야기인 세례이야기를 나누면서 신년메세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집 아버지가 아들을 극진히 사랑합니다. 그래서 어릴 때 조기교육으로 가난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건가를 알려주고 싶어서 어린 자식을 데리고 시골 가난한 마을에 갑니다. 둘이서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의 집에서 2-3일을 보냅니다. 그리고는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묻습니다.
“그래 어땠니? 재미있었니?” “네, 아버지 아주 좋았어요.”
“그래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좀 알겠니?” “네 아버지!!”
“그래 무얼 배웠냐?” “네 아버지, 우린 개가 한 마리인데도 집안에 가두어 놓고 키우는데 그 사람들은 네 마리 개를 키우면서도 자유롭게 키우더군요.
우린 수영장이 마당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끝없는 개울들이 쫙 펼쳐져 있더라고요.
우리 정원에는 수입 전등만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밤 하늘의 별들이 총총이 빛을 내면서 구석구석을 비춰주더군요.
우리의 테라스는 앞마당에만 있는데 그 사람들은 지평선처럼 끝이 없더군요.
우리는 고작 작은 정원에서 사는데 그 사람들은 넓은 들과 강과 산과 냇물이 모두 정원이더라구요.
우린 하인이 우리를 도와주는데 그 사람들은 동네사람들이 다 도와주더라고요.
우린 음식을 사서 먹는데 그 사람들은 직접 길러 먹더라고요.
우리 집은 담장으로 둘러쌓여 있는데 그 사람들은 친구들에게 둘러 쌓여 있더라고요.”
아버지는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는 말을 합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가를 알게 해 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얼마나 많은 삶의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담을 쌓고 자기만을 수영장을 만들고 이런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붇습니까? 그런데 가운데서도 관계에 투자하고 사람을 섬기면서 그 어느 보험보다도 더 따뜻하고 훈훈하고 지속가능한 행복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허상과 진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사람은 행복합니다. 무엇이 삶에 있어서 허상이고 삶을 풍요롭게 가꾸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진실로 참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누군가의 시처럼 소유는 역대급 늘어났지만 행복과 만족은 줄어들고 평화는 어느 시대보다 많이 이야기하는데 전쟁은 늘어나고 여가시간은 늘어나는데도 마음의 평화는 줄어들고 학력과 정보는 풍요로운데 상식과 지혜는 모자라고 약은 많아졌는데도 건강은 나빠지고 더 편리해지고 빨라졌는데도 시간은 더 모자라는 시대에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에 집중하면서 그 안에 충분히 머물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제 뜻을 세우고 일을 시작하려는 예수님 안에 한결같이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에게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지극한 사랑안에 있는 존재인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었고 그것이 예수님 목회(마음껏 베풀고 나누고 섬기고 사랑하는 예수님 목회)의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음>을 고백해주고 있습니다. 저수지에 물이 차고 가득하면 저절로 넘쳐서 흐르고 흘러 온 동네 논에 물을 가득채워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수지에 물이 없으면 물을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지요. 사람들은 우리 안에 없는 것을 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저수지에 <존재의 선함, 존재의 아름다움>온생명이 나를 감싸고 있다는 신뢰와 사랑을 가득품고 사셨고 그 힘이 예수 목회의 넉넉하고 풍요로운 사랑을 가능케 했습니다.
지난 주 넷플릭스에서 "기적"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 엄마는 아들을 낳다가 돌아가시고 철도 기관사인 아버지가 아들과 딸을 키우는데 아들이 자라는 동안 아버지가 거의 말도 없고 밥먹을 때도 돈 줄 때도 거의 아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아요. 참 엄마도 없는데 냉정해보이고 정말 무심해 보입니다. 졸업식 입학식 때 한번을 가지도 않고 상을 받아 와도 말한마디 따뜻하게 해주지도 않고 그러던 아들이 장성해서 해외로 유학을 가게 되요, 그래서 헤어져야하는 시간이 가까워오는데 거기서 술 한 잔이 들어가면서 진짜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 묵뚝뚝한 아버지가 "미안하데이, 미안하데이" 말하면서 자식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겁니다. 아내가 이 아들을 낳다가 죽었는데 진통온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일 때문에 아이낳는 곳에 못 온거예요. 고통스러운 통증 속에서 아이를 낳다가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겁니다. 그게 너무 미안해서, 혼자서 좋은 것을 보는 것이 너무 미안해서, 혼자서 누리는 행복이 너무 죄스러워서, 그 모든 행동이 무심함의 행동이 아니라 자책감에 죄스러운 행동이었다는 겁니다.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평생을 얼굴도 한번 못 마주치고 쳐다보지도 못하고 살아왔던 겁니다. 사랑하는 방식이 너무나 왜곡된 거죠. 그런데 실제는 그 모든 왜곡되고 서툴고 때로는 냉정하리만큼 무심해 보이는 태도들이 사랑과 미안함과 걱정과 죄스러움의 표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실수하고 잘못하고 내 자신의 무능함에 좌절하기도 하고 그리고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사실 어떤 느낌이 들기도 하냐면 교인들이 다 저를 이상하게만 볼 것 같은 느낌이 찾아들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런 순간에도 실제 교인들은 어때요. 누구도 잘 됐다 샘통이다 꼬시다 하지 않으십니다. 무능하거나 실수하거나 약함을 비난하거나 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안타까워하고 잘 이겨내야할텐데 어떻게 하면 도와주고 기다려주고 함께 하고 위로해 주고 맘 써 주고 헤아려주고 애쓰고 노력하고 그러시더라구요.
어느 누구도 타인과 잘못지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비로운 손길을 싫어하는 사람도 없구요. 지난 성탄예배때 추운 겨울 영하 10도가 넘는 실외에서 한 시간 이상을 서 있었더니 생각보다 몸이 훨씬 더 춥더라구요. 사람들에게 누군가가 손난로 하나씩 나눠주기 시작하니까 안받는 사람이 없어요. 본능적입니다. 사람은 따뜻하고 자비롭고 훈훈한 걸 좋아합니다. 죽기 전에 화해하지 못하면 목에 걸린 가시처럼 평생 가잖아요. 그게 왜 그러냐면 풀지 못한 게 한으로 남아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비로운 본성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때로는 거칠게 나타나고 서투르게 나타나고 때로는 무뚝뚝하게 나타나서 그렇지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따뜻한 품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순간들도 있습니다. 예수님 조차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보면 피눈물을 흘리시면서 이렇게 나를 버리시나이까 울부짖습니다. 혼자 버려진 것 같고 사람들이 다 나에게 손가락질 하는 것 같고 모두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고 기도를 해도 벽에 튕겨나가는 것만 같고, 끝없이 어둔 터널을 지나는 그런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런 시간을 16세기의 영성가 성 요한은, 그리고 아빌라의 성 데레사 수녀님은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합니다. 사실 되돌아보면 우리 안에 충만한 사랑이 없던 시간들은 없었지만 그 사랑이 나에게 느껴지거나 경험되지 않는 시간들입니다. 성요한은 수도원을 개혁하려다가 반대파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그 감옥에서 캄캄 어둠, 짙은 어둠 사이로 들어오는 강열한 빛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토록 빛을 강열하게 느껴본적이 없던 겁니다. 그리고 그 어둠의 시간속에서 그는 교만하고 자만했던 자신이 변화되는 걸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되지요. 영혼의 어두운 깊은 밤 속에서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치유하고 회복하고 계시다는 것을요.
그 단계를 넘어서면 노자가 말하는 마치 무위의 단계죠. 삶의 어떤 순간에도 그분이 이미 나를 감싸고 계심을 알기에 애쓰려고 하는 마음 잘 하려고 하는 마음, 꼭 해야하는가 하는 그런 모든 마음을 넘어서 그냥 맘없는 마음으로, 이유없는 마음으로 그냥 무위의 마음으로 방을 쓸고 설거지를 하고 사람을 섬기고 사랑을 하고 그게 좋게 다가오든 나쁘게 다가오든 그 모든 것이 나를 향한 사랑의 순간임을 알기에...
"도토리 안에는 거대한 참나무가 들어있듯 자기 안에는 더 큰 내가 숨 쉬고 있고 진정한 나만의 때가 있음을 어려운 순간마다 기억하게 하소서"
사람은 작게는 지극히 개인적인 자아가 있기도 하지만 내 안에는 관계적 자아, 사회적 자아, 더 나아가 생태적 자아, 종교적으로 보면 우주적 자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국은 그 자아들이 건강할 때 바로 그 내안에 있는 거대한 참나무가 나를 살려가고 관계를 살려가고 사회를 살려가고 지구를 살려가고 생태계를 살려가고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갑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온 우주에 가득한 생명과 평화의 기운이 어떤 순간에도 나를 감싸고 있다는 존재의 깊은 성찰, 단 한번도 사랑안에 없었던 적이 없었다는 그 깊은 깨달음이 우리안에 있는 거대한 참나무를 키워가고 그것이 영혼의 저수지를 채워 온땅으로 온관계로 온생명으로 흘러 많이 용서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그래서 충만한 한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첫이야기에 나오는 그 아들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정말 삶에서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삶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하는 것들이 무엇들인지 호랑이의 눈으로 가려내면서 그에 대한 선택과 집중으로 넉넉하고도 충만한 지금 여기의 삶을 길러내시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그런 풍요로운 한해를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