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이방에서 동학의 핵심인물로 성장한 손천민(孫天民)
손천민은 1857년 충청도 청주에서 태어났다. 청주 관아의 아전 집안에서 태어난 손천민은 아버지를 이어 청주 관아의 이방을 지냈다. 손천민은 손병희(孫秉熙)의 큰형 병권(秉權)의 아들이었지만 나이는 손병희보다 4살 많았다. 동학의 제3세 교조인 손병희와는 삼촌과 조카 사이로 손병희를 동학에 입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동학을 금지시켜야 할 직책에 있었던 그가 동학에 입도했다는 점은 이채롭다. 어릴 때 글을 배웠는데 명석해 일찍 문리가 트였고 글씨를 잘 적었다. 교조신원운동 시기의 소장과 상소문은 모두 그가 지었다.
손천민은 동학에 입도하기 이전에는 청주 관아에서 이방을 맡았다는 것 말고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집은 청주 관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외면 솔뫼마을(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신송리)에 있었다. 청주 관아에 있다가 선대에 이곳으로 와서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솔뫼마을의 넓은 들판이 대부분 손천민의 소유로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자랐다.
손천민은 26세였던 1882년 12월에 동학에 입도했다. 동학에 입도한 동기는 중인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해 출셋길이 막혀 있었고 ‘민심이 날로 떨어져 나가고 국세가 날로 외로워지는’ 시대적 상황을 직시했기 때문이었다. 동학에 입도한 이후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지도를 받으며 동학에 대한 수행에 충실해 신임을 받았다. 1883년 1월부터는 동학을 전파하는 포덕을 시작했다. 손천민이 동학에 입도시킨 자가 1만 명에 달해 동학 교단의 주도적인 인물로 성장했다.
▲ 손천민의 집터. 청주 산외면 솔뫼의 손천민 집터는 현재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신송리 202번지다. 동학혁명으로 불타버린 후 마을 사람들이 다시 이곳에 집을 세워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
교조신원운동의 소원문과 상소문 작성
동학의 핵심적인 인물로 성장한 손천민의 뛰어난 문필을 알게 된 해월은 그에게 동학 교단의 각종 문서를 담당하게 했다. 1880년대 중반 이후 동학의 각종 문서는 대부분 손천민이 기록한 것이다. 특히 해월의 곁에서 보좌하며 해월이 제자들에게 전하는 가르침을 글로 정리해 법설(法說)로 남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손천민의 문필은 교조신원운동의 의송문(議送文)과 상소문 작성에 빛을 발했다. 해월은 교인들의 요구를 수용해 교조신원운동을 결정하고 솔뫼 손천민의 집에 의송소(議送所)를 설치했다. 당시 해월은 교조신원운동을 위해 도차주(道次主) 강시원을 중심으로 서인주, 서병학, 김연국, 손병희 등이 협의해 일을 진행하게 했다. 이때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과 전라도 관찰사 이경직(李耕稙)에게 보낼 의송단자(議送單子, 소원문)를 손천민이 집필했다. 문필가였던 도차주인 강시원이 손천민에서 의송단자를 맡긴 것을 보면 손천민의 필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손천민이 작성한 의송단자에는 동학의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교조신원의 내용뿐만 아니라 외세의 침탈과 도둑 떼의 횡행 등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동학도가 관에 보낸 첫 문서인 손천민의 의송단자로 인해 관에서는 동학이 무지몽매한 무리가 아니라 학식을 갖추고 역사 인식도 가진 조직으로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지방 관찰사들이 동학의 인정이 자신들의 권한 밖이라고 하자 동학 교단은 1893년 서울에서 열리는 과거를 기회로 복합상소(伏閤上疏)를 해 교조신원(敎祖伸寃)을 요구하기로 했다. 이때 봉소도소(奉疏都所)를 역시 손천민의 집에 두었고 상소문도 손천민이 지었다. 그리고 손천민은 서병학(徐丙鶴)이 무력을 사용해 조정에 대응하자는 강경론을 무마시켰다. 그리고 이어진 보은 장내(帳內)에서의 교조신원운동에 청의대접주(淸義大接主)로 참가했다.
전봉준이 일으킨 동학혁명에는 부정적
1984년 1월에 이어 3월 전봉준이 본격적으로 동학혁명을 일으켰을 때 손천민은 해월과 같이 청산 문바위골에 있었다. 전봉준의 기포 동기가 부친의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전봉준의 기포를 반대했다. 그는 해월 최시형의 의견을 따라 ‘도로써 난을 지어서는 안 된다’라는 입장이었다. 전봉준의 기포에 따르지 말라는 통문과 효유문을 보내 동학혁명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
9월에 전봉준이 재기포하자 해월의 명을 받고 삼례로 전봉준은 만나 거사의 진의를 파악하고서도 기포를 막으려 하자 전봉준 등 남접 지도자에 의해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해월의 명을 받았기에 되돌아올 수 있었다. 오지영과 손병희의 노력으로 호남과 호서의 동학이 연합해 해월은 9월 18일 총기포령을 내렸다. 손천민도 최시형의 지시에 따라 청안(淸安) 근방의 각 포(包)를 기포시켜 청주 북면에 1만여 명을 회합시켰다. 청주 목사 이장희가 이끄는 관군과 청주 북면에서 교전했으나 대패하고 장내로 물러났다. 그가 살던 솔뫼도 이때 관군에 의해 불살라졌다.
해월은 동학혁명 이후 교단을 정비하면서 젊은 인재들을 전면에 내세웠는데 이때 손천민도 포함됐다. 1896년 1월 손천민은 해월로부터 송암(松菴)의 도호를 받고 의암(義菴) 손병희, 구암(龜菴) 김연국과 함께 ‘삼암(三菴)’이라 불리며 해월로부터 집단지도체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해월은 당시 “너희 세 명이 마음을 합치면 천하가 이 도를 흔들고자 할지라도 어찌하지 못하리라”라고 하면서 교단의 전면에 내세웠다.
▲ 손천민의 글씨. 손천민은 문필이 뛰어나 1880년대 중반 이후 동학 교단의 문서를 대부분 작성했다. 이 문서는 3인 집단지도체제와 관련한 내용이다. |
해월 순도(殉道) 이후 순사(殉死) 주장
그러나 1897년 12월 24일 해월은 세 사람 가운데 주장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손병희에게 도통을 물려줬다. 해월은 어려운 시기에 교단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가장 강단이 있고 진취적이었던 손병희가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이듬해인 1898년 4월 5일 최시형이 원주 송골에서 체포돼 6월 2일 순도(殉道)하자 손천민과 김연국은 해월을 따라 죽어야 한다는 순사(殉死)를 주장했다. 그러나 손병희는 살아남아 스승의 뜻을 이어가야 한다고 했다. 새로운 교주인 손병희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무리됐지만 손천민은 스승인 해월을 따라 순도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손병희 체제가 들어선 이후 손천민을 성도주(誠道主), 김연국을 신도주(信道主), 박인호를 경도주(敬道主)로 임명해 교단의 장로로 삼았다. 이는 동학 수행의 기본인 성(誠)·경(敬)·신(信)에서 유래했다. 이후 손천민은 서우순과 함께 청주 산외면 서장옥의 집에서 포덕에 열중했다. 충주 병정들이 동학도를 체포하러 다니던 1900년 8월 13일 서장옥과 함께 붙잡혔다.
경성 감옥서에서 교수형
충주 병정에 붙잡힌 손천민은 서울로 압송됐다. 체포될 당시 병정이 온다는 전갈을 받았음에도 손천민은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스승인 해월의 뒤를 따라 순도하겠다고 말했는데 말대로 도망가지 않고 있다가 체포됐다. 서울로 이감된 손천민은 8월 24일 수반검사 윤성보에 의해 심사를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5일 후인 8월 29일 오후 1시에 경성 감옥서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그의 나이 44세였다. 그의 시신은 청주 선향에 안장됐다.
솔뫼마을 손천민의 옆집에는 강영문(姜永文)이 살았는데 그도 동학의 접주로 활동했다. 강영문의 후손들은 강영문이 손천민의 동학 활동에 경제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이 마을에는 해월이 ‘며느리가 베를 짜는 것이 아니라 한울님이 베를 짠다’라는 천주직포(天主織布) 설을 이야기한 서택순의 집이 있었다. 손천민은 서택순, 강영문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솔뫼를 청주 일대 동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강영순의 손자인 대윤 씨는 아버지로부터 손천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들었다고 증언했다.
▲ 솔뫼마을.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신송리다. 이곳에서 손천민이 교조신원운동의 의송문과 상소문을 작성했다. 솔뫼마을은 서택순, 강영문 등이 함께 활동하며 청주 일대 동학의 중심지였다. |
방에는 항상 몇 분이 있으면서 얘기를 나누고, 대기하고 있는 거라. 여러 사람이 들락거렸는데, 손가라는 사람은 지금 얘기 들으니까 손천민 씨인가 보지요, 손 씨가 있다는 것은 들었어요. 왔다가는 자고도 가구 바로 갈 때도 있고. 그분도 오면은 상주나 스님 복색을 하고, 그런 사람은 지위가 있는 사람인 거라. 그러면 사정없이 아버지 방으로 들어간다고 해요. 우리 할아버지 방으로. 무명 인사가 오면 바깥사랑으로 행랑살이들이 대접을 하고 이런 식으로 했다고 해요.
강영순의 아들 학수 씨는 동학혁명 당시 열세 살로 손천민이 자기 집에 드나드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동학의 지도자들이 부친을 만나러 올 때는 평상복이 아니라 상주나 스님의 복장으로 찾아왔다는 점이다. 당시 동학이 탄압을 받고 있던 시기라서 동학 지도자들은 이동할 때 변복해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손천민이 죽고 난 이후 그의 아들 손재근(孫在根)은 그의 부친을 추종하는 신도들을 모아 천도교에서 분립해 1927년 천도명리교(天道明理敎)를 세웠으나 3년 후인 1930년에 해산했다. 이후 손재근은 시천교에서 활동했다. 시천교에서는 손천민을 성사로 높여 불렀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