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암(三菴) 중 가장 먼저 해월과 인연
김연국은 해월이 임명한 집단지도체제인 ‘삼암’의 맏형격이었다. 그리고 세 명 가운데 가장 먼저 동학에 입도해 가장 오랜 기간 해월을 모셨다. 김연국은 1857년 2월 강원도 인제군 남면 달리촌(현 신월리)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이름은 용진(龍振)이었다. 인제에는 김계원이 가장 먼저 동학에 입도했는데 김연국은 그의 친척으로 불린다. 김연국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인제 무의매리에 사는 숙부인 김병내 집에서 형 연순(演順)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김병내(金秉鼐)가 동학에 입도하자 김연국 형제도 김병내를 따라 입도했다. 김병내는 수운의 둘째 아들 최세청(崔世淸)의 처당숙으로 수운 집안과 연결돼서 동학에 입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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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국. 해월의 수제자 ‘삼암(三菴)’ 중 한 명으로 해월이 도통을 전승한 손병희를 따르지 않고 이용구를 따라 시천교로 갔다가 다시 상제교를 만들었다. |
김연국은 16세였던 1872년 3월 25일 인제로 숨어든 해월에 의해 입도했다. 당시 해월은 1871년의 영해 교조신원운동 때문에 강원도로 두루 피신하던 시기였다. 김연국은 이때부터 해월을 평생 모시다시피 했다. 해월이 김병내의 집을 나서자 김연국은 해월을 10리나 따라갔다. 해월이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자 연국은 오늘부터 선생님을 모시겠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했다. 해월이 김병내 집으로 되돌아가 연국의 뜻을 전하자 김병내도 흔쾌히 받아들여 그때부터 연국은 해월을 가까이에서 모셨다. 일찍 부친을 여윈 연국에게 해월은 스승이며 부친과 같은 존재였다.
이후 해월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면서 김연국도 교단의 핵심적인 인물로 성장해 나갔다. 교단에서 김연국의 이름이 드러난 것은 교조신원운동 때였다. 1892년 삼례와 공주에서의 교조신원운동에 김연국이 직접 관여돼 있지는 않았지만, 1893년 2월의 광화문 복합상소(伏閤上疏) 때 강시원, 손천민, 손병희와 함께 신원 운동을 주도했다. 이어진 3월의 보은 교조신원운동에서도 보은포(報恩包) 대접주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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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천교역사(侍天敎歷史)>의 김연국 관련 부분. <시천교역사>하 제2세교주 해월대신사 편의 끝부분에 김연국이 해월을 이어 동학의 종통을 계승했다고 적고 있다. |
동학혁명 이후 해월 섬김에 최선
이듬해 동학혁명 당시 3월 기포 기포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9월 해월의 총기포령이 내리자 김연국은 황하일, 권병덕 등과 함께 보은에서 기병해 참전했다. 공주공방전에 참전했다 패전한 후 전봉준, 손병희와 함께 태인 전투까지 참전한 후 동학혁명군이 해산하자 손병희와 함께 임실에 숨어있던 해월을 강원도까지 피신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런 연국의 활동은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전에 구전으로 듣기에는 해월 선생님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는 거예요. 밤중에 업고서 피난도 가구, 관원들이 오면 해월 선생 대신에 방에 들어가 앉아 있던 사람도 있고. 연자 국자 할아버지가 했다는 게 아니고 제자들이 그런 식으로 보호를 했으니까, 그분이 시간을 지체해서 피하기도하고, 일본군 왜놈들이 해월 선생을 포위해서 집중적으로 총알을 쏘아 보냈는데도 제자들이 다 호위를 해서 피난시킨 것이거든요. 피난하시는 데 주력을 기울여서 밥도 짚신을 신은 채 잡수시고 이랬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이러한 해월과의 오랜 인연과 활동을 인정받아 김연국은 1896년 1월 해월로부터 구암(龜菴)이라는 도호(道號)를 받고 손병희, 손천민과 함께 해월로부터 교단의 운영을 위임받아 집단지도체제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손병희에 도통이 전수되자 낙담
1년 가까이 해월은 김연국・손천민・손병희 3인의 집단지도체제로 교단을 운영했으나 보다 효율적인 교단 운영을 위해 ‘삼암(三菴)’ 가운데 손병희에게 도통을 물려주었다. 해월은 동학혁명 이후 위기에 빠진 교단을 일으켜 세우는 데에는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대담하고 진취적인 기상을 가진 손병희가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김연국은 가장 오랜 기간 해월을 모신 자신에게 도통을 전수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가 손병희에게 도통이 전수되자 낙담했다. 그렇지만 스승의 결정을 수용하고 해월을 가까이에서 보살피는 일에 전념했다. 1898년 4월 5일 해월이 강원도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고 6월 2일 순도한 이후 손병희와 김연국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김연국과 손천민 두 명은 스승을 따라 순도하는 것이 제자의 도리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손병희는 우리가 살아 스승의 뜻을 이 세상에 펴는 것이 스승의 뜻을 잇는 것이며 스승님을 처형한 조정에 복수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 일을 계기로 손병희와 김연국은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김연국은 도통 전수에 불만을 표시하고 교단 일에 소홀히 했다. 이에 손병희는 1900년에 설법식(設法式)을 열어 도통 전수 문제를 매듭지으려 했다. 설법식에 참여한 김연국은 도통이 손병희에게 전해졌음을 인정했다. 이듬해인 1901년에 손병희는 지목을 피하고 세계 대세를 살피기 위해 일본으로 외유를 떠날 때 같이 가자고 권유했지만, 국내에 남아 있겠다고 거절했다. 손병희가 외유를 떠난 직후인 6월에 연국은 공주 무성산에서 공주 진위대 이민직의 부하에게 체포돼 3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의암은 일본에 있으면서 민회 활동을 통해 교단의 개혁을 이끌고자 1904년 갑진개화혁신운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의암의 명을 받고 개화혁신운동을 주도하던 이용구가 송병준의 꼬임에 빠져 일진회를 만들어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이용구가 친일 활동에 동학 교단을 이용하자 손병희는 이를 말렸지만, 이용구는 듣지 않고 오히려 손병희를 비난했다. 이에 손병희는 일본에 있으면서 동학의 이름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꾸고 이용구의 일진회와 결별했다. 그러자 일제의 힘을 얻고 친일(親日)을 하던 이용구는 송병준과 함께 추종자를 모아 시천교(侍天敎)를 만들어 손병희와 대립했다.
이용구의 꼬임에 빠져 천도교를 떠나 시천교(侍天敎)로
이후 급히 귀국한 손병희는 김연국을 찾아 같이 교단을 발전시킬 것을 의논하며 교단 업무에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권유했다. 천도교중앙총부를 설립하고 교단 체제를 근대화시킨 손병희는 1907년 8월 천도교 대도주(大道主) 자리를 김연국에게 물려주고 성도사(誠道師)로 임명해 교단의 이인자로 삼았다. 이렇게 천도교의 중책을 맡아 있던 김연국은 이해 12월 이용구가 만든 시천교에서 행한 제세주 강생기념식(濟世主 降生記念式, 최제우의 탄신기념식)에 초빙돼 갔다가 이용구로부터 시천교로 올 것을 제안 받았다. 이 제안에 마음이 흔들린 김연국은 결국 1908년 1월 천도교의 대도주 자리를 내던지고 시천교(侍天敎)로 들어가 최고직인 대례사(大禮師)가 됐다. 김연국이 천도교를 떠난 것은 손병희의 교주 선정에 대한 불만과 자신의 석방에 도움을 준 이용구에 대한 보답 때문으로 보인다.
시천교는 김연국을 대례사로 맞이해 의암에 맞설 수 있는 인물 영입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용구의 연이은 친일 행각과 정치적 행보에 대해 김연국이 종교 활동을 주장하며 갈등이 나타났다. 1912년 5월 22일 이용구(李容九)가 죽은 뒤 송병준(宋秉俊)의 조종을 받은 박형채(朴衡采)와 대립해 1913년 서울의 종로구 가회동에서 시천교총부(侍天敎總部, 일명 제세교)를 별도로 조직해 동학(東學)의 종통(宗統)을 유지하려 했다. 1920년부터 4년간의 준비작업을 거쳐 1925년 교단본부를 충청남도 계룡산(鷄龍山)의 신도안으로 이전하고 교명을 상제교(上帝敎)라 하고 교주(敎主)가 됐다. 김연국은 신도안에 이주한 뒤 황무지를 개간해 원예를 하고, 신도초등학교의 전신인 신도유신학교를 설립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상제교는 한때 50만 신도를 자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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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진교의 대성전. 김연국의 아들 덕형은 부친을 이어 상제교의 교주가 됐다. 그는 상제교의 교명을 천진교로 바꿨다. 신도안에 3군사령부가 들어오자 충북 영동군 심천으로 본부를 이전시키려다 사망했다. 사진의 전진교 대성전은 청양군 장평면에 있다. |
상제교(上帝敎)를 만들어 신도안에서 1944년 사망
신도안 일대가 상제교의 땅이었으며 이곳에 자성보양원이라는 자선기관과 수예원이라는 학교도 운영했다. 신도안에 정착한 그는 그곳에서 동학의 본류를 계승하고자 했다. 동학 당시의 교단 체제를 그대로 지키려고 애쓰던 김연국은 1944년 8월 7일 8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1944년 김연국이 사망하자 상제교는 김연국의 아들 덕경(德卿)이 뒤를 이어 교단을 이끌었다. 덕경은 1961년 교명을 천진교(天眞敎)로 바꿨다. 1984년 계룡산에 3군사령부를 만들기 위한 민간인철거계획에 의해 천진교도 신도안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덕경은 교단본부를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기호리에 옮겨 지어 신도들을 이주시킬 계획을 세우고 활동하던 중 1985년 5월에 사망했다. 덕경의 사망 이후 본부 건설 작업이 여의치 않아 한때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 본부를 이전했다가 1996년에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송정리로 이전했다. 덕경이 사망하기 전에 교주제를 폐지하고 민주적 선거를 통해 통관제를 쓰라는 유시를 남겼기 때문에 그동안 배덕양(裵德陽), 정성구(鄭聖九) 등이 통관을 맡았으며, 1997년 1월부터 문경장(文敬章)이 통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삼암(三菴)’ 가운데 의암 손병희는 해월에 이어 종통을 계승했고,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고 근대적 종교체제를 갖추어 국내 최고의 종단으로 성장시켰다. 손병희는 천도교 교세를 바탕으로 3.1독립만세운동을 영도했다. 손천민은 해월의 순도를 따르겠다고 해 1900년에 체포돼 순도했다. 김연국은 의암과 같이 천도교 개창에 동참했지만, 이용구의 회유로 친일종단인 시천교로 가는 치명적인 잘못을 범했다. 김연국은 이용구 사후 상제교를 만들어 동학 시대의 전통을 이으려고 했으나 자신의 잘못을 벗어나지 못했다. 해월의 말대로 이 세 사람이 힘을 합쳤으면 동학은 또 어떻게 변했을까? 그나마 의암 손병희가 해월의 뜻을 가장 잘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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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룡산 산제단. 천진교에서 계룡산의 주봉인 천황봉(천단)에 산제단을 세우고 종교 행사를 했다. 천황봉은 상제봉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는데 김연국은 상제봉이라는 이름을 보고 신도안에 본부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