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6일 오전 베르노이어가 지하철역을 나가 브뤼넨가 쪽으로 접어들자 바닥에 구릿빛 걸림돌 두 개가 나란히 박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엘제 루프트 여기 살다”라고 적힌 걸림돌에는 그가 1861년에 태어나 1942년 8월17일 체코의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로 추방돼 28일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었다. “에르나 헤어만 여기서 살고 일하다”라고 적힌 걸림돌에는 그가 1898년에 태어나 1943년 5월18일 체코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로 추방돼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었다. 베를린에는 이 같은 걸림돌 7618개가 나치 폭력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걸림돌은 독일은 물론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2016년 기준으로 독일과 유럽에는 6만여개의 걸림돌이 있다. [출처]경향신문 (독일 홀로코스트) 집 앞에, 일터 옆에…박물관 아닌 일상서 추모와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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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조 할아버지의 전사를 다녀와서 궁금한 점이 생겼다.
우리는 5대조 할아버지를 후손들이 묘소에 모여서 1년에 한 번씩 기억하고 추모하는데 서양사람들은 5대조를 기억하고 추모하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다가 우리처럼 혈족의 조상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행사는 못 찾고 독일 나치의 억압에 피해를 입은 이들을 걸림돌에 적어 놓고 추모하는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제가 20여 년 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인 백인과 같이 2년 정도 근무한 적이 있는데 그 때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나 고조할아버지는 어떻게 추모하는지 질문해 볼 것을 하는 아쉬움도 지나갔습니다.
위의 인용문에는
『“에르나 헤어만 여기서 살고 일하다”라고 적힌 걸림돌에는 그가 1898년에 태어나 1943년 5월18일 체코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로 추방돼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었다.』이 있습니다. 이를 오늘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전사의 비석에는 한문으로 쓰여 있지만 대입해보면
“전익모 강릉시 교동에서 살고 일하다. 그가 1809년 11월 03일에 태어나 1886년 07월 13일 강릉시에서 사망하였다.“ 라고 표현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전사의 근본 취지가 아름다운 미풍양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식을 마련하는데 번잡하고 거리가 멀어 어려움이 있는 등 문제점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음식을 주과포( 술1병, 사과1개, 오징어1마리 )로 아주 단순화하여 번잡함을 줄이면 그 근본취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죽은 뒤 135년이 지나 후손 누군가가 1년에 한 번 기억해 준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오늘 아침 06시 51분에는 원큰댁 윤재 조카님이 전화를 해서 전사에 오느냐고 확인하고 산 밑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제물을 같이 들고 가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거의 잠결에 받아서 얼떨떨하였습니다.
09시 30분경에는 찬준 아우가 전화를 해서 약속된 택시부광장에 도착하였냐는 전화가 왔었습니다. 10월 15일경 아우한테 전화가 와서 10시 30분에 만나자고 한 적이 있는데 서로 잘못 이해하여서 부랴부랴 택시부광장에 나가서 원익 형님과 함께 금산리 묘소로 갔습니다.
찬흥 사무총장이 번지를 알려달라고 전화가 와서 금산리 122번지라고 카톡으로 보냈는데 나중에 네비게이션이 알려준 곳이 달라서 헤매다가 왔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과정을 알아보니 산 122번지여서 그냥 122번지하고 차이가 남을 알게 되었습니다.
홀기에 의해 여법하게 전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초헌관 윤재, 아헌관 성표 종헌관 찬흥 대축 찬균 집례 과웅 이었습니다. 오늘 참여인원은 10명이었습니다.
원큰댁 장손에 의하면 측량을 하였는데 우리 묘소 범위 안에 다른 집안의 묘소가 침범하였음을 알았다고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상의하였습니다.
모처럼 봉게를 받았고, 교동에 있는 마당갈비에서 갈비탕으로 점심을 먹고 산회하였습니다.
※ 봉게
전사에 쓰인 제물중 일부를 봉지에 싸서 참여자에게 골고루 분배해 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