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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任道 1585 1664 咸安 德勇, 致遠 澗松
간송집 제5권 / 행장(行狀) / 희정당 행장〔喜靜堂行狀〕
李屹 1557 1627 碧珍 山立 蘆坡, 三山樵隱, 喜靜堂
선생의 성은 이씨(李氏), 이름은 흘(屹), 자는 산립(山立)이며, 자호는 노파거사(蘆坡居士)이고 혹 삼산초은(三山樵隱)이라고 일컬어졌다. 선대의 가계는 고려 때 벽진장군(碧珍將軍) 총언(悤言)에서 나왔다. 16대를 지나 휘 약동(約東)은 관직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평정공(平靖公)이며 청백리에 봉해졌는데, 이분이 선생의 5세조이다. 고조 휘 승원(承元)은 선전관을 지냈고 후에 절충장군에 승진되었다. 증조 휘 유량(有良)은 부호군을 지냈으며, 조부 휘 통(通)은 장사랑(將仕郞)이었다. 부친 휘 하생(賀生)은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는데, 간솔하고 조용하여 선조의 유풍을 지녔다. 부인 이씨(李氏)는 광평군(廣平君) 이능(李能)의 후손이자 해남 현감(海南縣監) 이순조(李順祖)의 손녀이며 부사직(副司直) 이사훈(李士訓)의 딸인데, 가정(嘉靖) 36년 정사년(1557, 명종12) 6월 30일 신해일에 선생을 낳았다.
자품이 맑고 깨끗하며 총명하고 영리하였다. 태어난 지 7일 만에 다른 사람의 젖을 먹지 않았고, 일찍이 남의 등에 업혀서 잠들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7세 때 능히 글을 지었고, 말은 어눌하였지만 기억력은 매우 뛰어났다. 11, 2세 때 합천의 주국신(周國新)과 함께 수학하였는데, 어느 날 밤 주국신이 가위에 눌린 채 기절을 하자 이불로 그를 덮어주고 그 곁을 굳건히 지켰다. 다음 날 주국신이 소생하였다.
14세 때 〈사략부(史略賦)〉를 지었는데, 사문 이칭(李偁)이 그 글을 가지고 갈천(葛川) 임 선생(林先生)에게 보여주자, 선생이 말씀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장차 크게 이름을 떨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백부 진사공(進士公)에게 수학하였는데, 친아버지처럼 섬겼다. 백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심상(心喪)을 하였다. 그 때 조부모의 상복을 입고 있어 또한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상기를 마쳤다.
정해년(1587, 선조20)에 비로소 향시에 응시하여 양시(兩試)에 모두 합격하였다. 그리고서 무자년(1588, 선조21) 정언눌(鄭彥訥) 방의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해 6월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는데, 선생이 숨이 끊어질 듯이 슬피 울부짖었는데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를 잃은 것과 같았다. 그러나 사과공(司果公)이 살아계셨기 때문에 억지로 소식(疏食)을 하며 상을 마쳤다. 상을 마치고는 실의에 빠져 우울해 하였고, 어떤 때는 술에 취해 울음을 삼키며 오열하였다.
공의 성품은 지킴이 굳세고 지조가 개결하여 유행하는 습속에 부응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서 과거공부를 그만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고 부친이 노쇠하여 감히 함부로 결정하지 못하였다. 을미년(1595, 선조28) 사과공이 과거공부를 그만두는 것을 허락하자, 선생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옛말에 ‘자식을 알아주는 이는 아버지만한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그러합니다.”라고 하고서 마침내 〈삼공불환차강산부(三公不換此江山賦)〉를 지었다. 이때 선생의 나이가 39세였다. 그 뒤에 또 〈죽정주인종국설(竹亭主人種菊說)〉을 지어 자기의 뜻을 서술하였다.
이때부터 낯빛을 온화하게 하고 부친을 봉양하는 데에 오로지 뜻을 두어 곁에서 모시며 부친의 뜻을 어김이 없었다. 한 달 동안 곁을 떠난 적이 없었으며, 갈 곳이 있으면 반드시 날 수를 정해놓고 기한을 어기지 않았다. 부친에게 드릴 맛있는 음식은 또한 구차히 얻으려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부친의 성품은 준엄하고 고결하여 무릇 올리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출처를 물으시니 속일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매일 혼정신성(昏定晨省)하며 화목하게 서로 즐거워하니, 사과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만일 네가 과거에 합격하여 먼 지방으로 벼슬하러 갔다면, 내가 어찌 이런 즐거움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평생 발걸음이 성내에 이르는 것이 드물었다.
임자년(1612, 광해군4) 겨울에 사과공이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나니, 향년 81세였다. 사과공의 병환이 위급해졌을 때, 선생은 변이 단지 쓴지를 맛보아 길흉을 가늠하였다. 불행히도 공이 돌아가시자, 애통해하며 울부짖기를 마치 살고 싶지 않은 듯이 하였다. 당시 선생도 이미 노쇠하여 병이 많아서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그러나 초상부터 졸곡(卒哭)까지 죽만 먹어 몸이 상하는 데에 이르렀으며, 묘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는데도 끝내 별 탈이 없었다.
사과공에게 측실이 있었는데 늙도록 자식이 없었다. 사과공이 돌아가신 후에도 그녀를 대접하는 것이 변함없었고, 논과 노비를 주어 생계를 꾸리게 하였다. 선생의 병환이 위급해지자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살아 있을 적에 서모(庶母)가 먼저 돌아가시면 내가 마땅히 죽은 이를 보내는 도리를 극진히 할 텐데, 지금 내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훗날 서모가 돌아가시면 누가 후하게 장례를 치러 주겠는가.”라고 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는 선생의 진실한 효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성품과 도량이 높고 깨끗하여 재화와 이익에 담담하였는데, 사양하고 받을 적에나 취하고 줄 적에는 털끝만큼도 구차히 하지 않았다. 선생의 장인 군수공(郡守公)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장모 최씨가 일찍이 그 집안의 재산인 농토와 노비를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자녀들이 모두 모일 때 장모가 사람을 보내어 선생도 참석하기를 청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처가의 재물을 취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또 처가에서 자기 딸에게 나누어 주는 것인데, 내가 어찌 그 자리에 참여하겠는가.”라고 하며 끝내 가지 않았다.
백부 진사공의 계실(繼室)은 상주 주씨(尙州周氏)인데, 자식이 없어 선생에게 후사를 부탁하였다. 주씨의 부친이 딸에게 준 문권(文券)이 상자 속에 있었는데, 주씨의 친정 조카 주국신(周國新)이 찾아 왔을 적에 선생이 문서를 주며 말하기를 “이 문권은 그대 할아버지의 묵적이니, 그 자손들에게 돌려주어야 마땅하네. 더구나 나에게 준 토지와 노비가 나와 무슨 상관이겠는가.”라고 하며 모두 돌려주었다.
병란 중에 유랑하다 성주(星州)에 우거하여 의지할 바가 없자, 동년(同年)의 벗이 편지를 보내 선생을 돕고자 청하였는데, 선생은 끝내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상신(李尙信)이 또한 선생과 함께 동년(同年)으로 서로 잘 지냈다. 일찍이 전조(銓曹)에 임명되어 있으면서 선생을 재랑(齋郞)에 천거하려고 하자, 선생이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가령 내가 벼슬로 영달하기를 구하였다면 과거를 포기하고 참봉이 되기를 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뒤에 이공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는데, 선생은 그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고, 그가 안부를 물으면 답장만 할 뿐이었다. 글을 읽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는데, 간혹 밥 먹는 것조차 잊었다. 경전(經傳) 이외에 제자백가도 거의 다 섭렵하였다. 한유와 유종원의 시문, 《문장정종(文章正宗)》, 《문한유선(文翰類選)》, 《문장궤범(文章軌範)》, 《구양논범(歐陽論範)》, 《동래박의(東萊博議)》 등의 책을 손수 베껴 여러 아들에게 주었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병화로 서적을 잃어버렸다. 우연히 길가에서 권수가 빠진 성리학의 여러 책을 얻었는데, 바로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의 〈관물내외(觀物內外)〉편이었다. 간혹 훼손되어 마멸된 곳이 있었는데, 선생이 이를 애석하게 여겨 다른 판본에 의거하여 손수 써서 채워 넣었다. 또 고금의 이름난 학자들이 지은 잠(箴)ㆍ명(銘)ㆍ도(圖)ㆍ서(書)를 구해 합쳐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고 말하기를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과 〈경재잠(敬齋箴)〉 이 두 잠은 배우는 자가 진실로 마음으로 터득하고 몸으로 체득하여 입과 귀로만 익히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일생 동안 받아 쓸 수 있는 것이 무궁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또한 이런 학문으로써 자처하지 않고 항상 말하기를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 나 같은 사람은 장구(章句)나 따지는 보잘것없는 유자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집안에 거처할 적에는 내외의 분별이 있어 젊어서부터 늙어서까지 일찍이 처자식들과 함께 뒤섞여 거처하지 않았다. 서재에서 정좌(靜坐)하고 책상 앞에서 책을 보는 일은 큰 추위나 찌는 더위라도 조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책 속에 군신과 부자간의 간절한 내용이 있으면 반드시 슬퍼하며 눈물을 머금었다. 또 거처하는 곳마다 반드시 매화와 국화를 심었고, 만년에는 삼산(三山)의 옛집에 작은 못을 파서 그 안에 연꽃을 심고서 이리저리 거닐며 시를 읊조리는 것으로써 자락하며 평생 세속의 일에 뜻을 두지 않았다. 상례, 장례, 제사, 부역 등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기한이 되기 전에 준비하였다가 때가 되면 취하여 사용하였다.
후배를 가르치는 일에 부지런히 힘쓰며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배우려는 자들 중에 누구는 취하고 누구는 버리겠는가. 사람들이 와서 물어보면 반드시 알고 있는 것으로써 정성을 다해 가르쳐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진ㆍ계사년의 난리를 겪은 후, 선비들이 독서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자 선생이 가숙(家塾)을 세우고 학도들을 가르쳤는데, 인재를 성취시키는 것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고, 방백에게 글을 올려 한정(閑丁)을 뽑아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이에 원근의 배우고자 하는 자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학업을 물으니, 몇 년이 지난 뒤에 문풍(文風)이 조금씩 새로워졌고, 선비들은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되었다.
재주 있는 아들이 두 명 있었는데, 모두 당세에 이름이 알려졌다. 맏아들은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진사가 되었고, 다섯 번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개연히 자신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자 선생이 그것을 허락하였으니, 사과공(司果公)이 선생에게 대했던 것과 같았다. 무오년(1618, 광해군10) 이후 4년 사이에 연달아 아들과 사위를 잃고 선생이 애통해하며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되자, 〈곡망부(哭亡賦)〉와 〈원춘풍(怨春風)〉 시를 지어 아프고 슬픈 마음을 달랬다.
이때부터 세상에 뜻이 없어 논과 집을 버리고 농사와 누에치는 일을 그만두고서 노파(蘆坡)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생애를 마칠 계획을 삼았는데, 단표(簞瓢)조차 자주 떨어지고 집 안은 썰렁하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보다 앞서 고을 사람 어화곤(魚化鯤)과 최중해(崔仲海)가 산 아래에 초정을 지어 선생이 쉴 수 있는 곳으로 삼았는데, 선생이 ‘무금정(無禁亭)’이라고 이름 지으니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육언시를 지어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강의 서쪽 산의 남쪽에 / 水之西山之南
칠십 노인이 사는 몇 칸의 집 / 七十翁數間庵
분수는 짚신과 대지팡이를 달게 여기고 / 分甘芒鞋竹杖
꿈에서도 자색 인끈과 푸른 적삼을 끊었네 / 夢斷紫綬靑衫
청풍과 명월은 돈 한 푼 들지 않고 / 風月不費錢一
솔과 국화는 절로 세 오솔길을 이루었네 / 松菊自成逕三
단지 인의예지를 닦을 뿐이지 / 秖修仁義禮智
어찌 높은 벼슬을 부러워하겠는가 / 何羨公侯子男
용암서원(龍巖書院)은 노파에서 소 한 마리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가까운 거리였는데, 사림이 선생을 추대하여 원장으로 삼았다. 선생은 서원의 일을 마음을 다해 관장하고, 여러 원생들에게 공부를 권면하고 《소학》을 통독(通讀)하게 하였다. 일찍이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은 여러 역사서의 핵심을 모으고 주자(朱子)의 필삭을 거친 것인데, 《춘추》 이후로는 이러한 사법(史法)이 없었다. 역사를 공부하는 자는 오로지 배워야 마땅하지만, 편질(篇帙)이 매우 많아 끝내 두루 궁구하기가 어렵고, 총명함이 미치지 못하는 자는 대부분 망양지탄(望洋之歎)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반드시 줄이고 교감하여 《소미통감(少微通鑑)》처럼 ‘강목절요(綱目節要)’라고 이름한 연후에야 요점을 탐구할 수 있었다. 이에 문생 정이도(鄭以道) 등과 함께 뽑아 베껴 썼지만, 불행하게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김산(金山)의 종족(宗族)들이 평정공(平靖公)을 높여 향현사(鄕賢祠)를 만들고자 하여 편지를 보내 친족들에게 통지하였다. 이에 대해 선생이 말하기를 “이 일이 한 고을의 공의에서 나왔다면 괜찮지만 자손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불가합니다. 가묘를 세우고 제사를 올리는 것은 자손 된 자로서 주장할 수 있지만, 향사의 건립에 대해서는 자손들이 감히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반복하여 깨우치고 말이 정밀하고 적절하여 향사의 논의가 마침내 잠잠했다.
병인년(1626, 인조4) 여름 4월 선생이 병에 걸려 오래 누워 있었다. 다음 해 정묘년에는 능라동(綾羅洞)에 우거하였는데, 2월 20일 정사일에 우거하던 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1세였다. 병환이 생긴 초에 선생이 손수 시를 지어 정이도에게 주었는데 다음과 같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진나라 때 습착치는 / 君不見晉時習鑿齒
일신이 반쪽 사람이란 말로 천하에 명성 얻은 것을 / 一身有半名四海
사람된 이치는 형체에 있지 않으니 / 爲人之理不在形
어찌 작은 것으로 큰 것을 혐의하겠는가 / 豈以小者嫌其大
온전히 태어나 온전함을 못 얻은 것이 한스러울 뿐 / 只恨全而生之不得全
어버이의 은덕을 생각하니 천지에 부끄럽네 / 念及劬勞愧覆載
평생 전전긍긍해도 증자에 미칠 수 없고 / 平生戰兢不能及也魯
빈 문구멍으로 바람이 불어오니 누구의 죄인가 / 空穴來風是誰罪
원컨대 그대는 마음 다스리고 기운 길러 이지러짐 없게 하여 / 願君治心養氣俾無虧
의로 외면을 바르게 하고 경으로 내면을 곧게 하게나 / 義以方外敬直內
비록 질병이 위독한 중이었지만 정신이 혼미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이때에 문하의 제생들이 와서 곡을 하고 초상을 치르며 염습하고 운구하는 것을 한결같이 예절에 맞게 따랐다. 노파로 되돌려 초빈(草殯)을 하고 3월 17일 갑신일에 선생의 유언을 따라 보장산(寶藏山) 기슭 신좌 을향(辛坐乙向)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아, 선생은 순진하고 화락하며 충신(忠信)하고 근후(謹厚)하여 남을 해치려는 생각이 마음속에 있지 않았고, 남을 헐뜯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소탈하고 질박하여 용모와 마음이 옛사람과 같았으며 의관 또한 예스러웠다. 세속에서 이른바 시체(時體)라고 하는 것은 몸에 걸친 적이 없었다. 중국식 저고리와 바지에 대해서는 식견이 있는 자도 간혹 그것을 입었지만 선생은 쓰지 않았다. 매사에 옛 것을 사모하여 당시 유행하는 것을 따르지 않았다.
정신을 수양하고 참된 마음을 길러 분수에 편안하고 천명에 맡겨 곤궁함이 심하더라도 지조를 지킴이 더욱 견고하였다. 50년 동안 시골에 기거하면서 괴이하고 과격한 행동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상에 선생을 아는 자가 드물었고, 선생을 아는 자도 문사가 웅대하고 훌륭하며, 흉금의 운치가 소탈하여 세상에 구하는 것이 없고 외물에 부림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말할 뿐이었다. 이것이 어찌 족히 선생이 지니고 있는 덕을 다 말했다고 하겠는가.
평상시 뭇 사람을 대할 때는 온순하고 공손하며 곧고 부드러웠다.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아 그 언어와 기상이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없는 듯하지만, 일에 임해서는 분발하고 정신은 꿋꿋하여 견해가 한번 정해지면 누구도 그 뜻을 바꿀 수 없었다. 항상 말하기를 “나의 성품은 남에게 구속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또 남에게 농락을 당하고 싶지도 않다.”라고 하였다.
선생의 심지는 툭 트여 명랑하고 흉금은 깊고 넓어 일을 처리할 때에는 용기있게 결단하고, 사람들을 응접할 때에는 관대하고 공평하여 일찍이 머뭇거려 기다리게 하거나 은폐하고 감추는 병폐가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언제나 ‘공(公)’ 자를 손바닥 위에 써 보면서 마음 쓸 때나 일 처리 할 때에 생각을 여기에 둔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나는 아이들에 대해 가르쳐주는 것은 없고 단지 사특하고 그릇된 것을 보여주지 않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선생의 문하에서 20년 동안 공부하였는데, 은밀히 남의 일을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 선생의 마음과 행실은 비록 귀신에게 물어보더라도 의심이 없을 것이 분명하다. 노복이 남과 싸우면 자기 집 노복만 곤장을 치고 저쪽의 죄는 있는지 없는지를 묻지 않았다. 마을에 공평치 못한 일이 생기면 이치로 설파(說破)한 뒤에 치지도외(置之度外)하여 개의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뻐하여 복종하면서 마음으로 귀의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마음이 공평한 자는 자신만 옳고 남은 그르다고 여기는 마음이 없으며, 오직 의리에 합당한가의 여부만 따질 뿐이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자신을 위한 실질적인 공부를 한 뒤에 남에게 미칠 수 있으며, 사리를 통달한 뒤에 일을 처리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런 말은 마음에 새기고 벽에 써서 스스로 경계하는 바탕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낮추는 것으로써 자기를 기르고, 재주나 학식으로써 남에게 거만하지 않았다. 비록 평범한 사람이나 속된 자라도 모두 그들과 더불어 진정을 다하며 겉으로만 드러내는 짓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 중에 나이가 많거나 덕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예를 더하여 대우하였다. 내가 일찍이 인동(仁同)을 왕래하였는데, 장 선생이 “원컨대 살아생전에 한 번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받들어 올렸더니, 선생이 얼굴빛을 고치고 말하기를 “이와 같이 이름난 현자가 평범하고 천한 나에게까지 안부를 묻는 것은 반드시 내 성품이 졸렬하여 악한 짓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취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여기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편지를 써서 사례하였는데, 그중에 ‘진흙 속에서 썩은 풀이 좋은 호박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라는 등의 말이 있었다.
계축년(1613, 광해군5) 사이에 지금 참판 정온(鄭蘊)의 언사가 임금의 비위를 저촉하여 화가 거의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되자, 여론이 흉흉하고 놀라워했다. 사림들이 소장을 올려 신원하는 일이 있어 의령에서 모였는데, 선생이 맏아들에게 명하여 소를 짓게 하였다. 또 제자 몇 명을 보내 한양에 들어가게 권하였는데, 요직에서 권세를 부리던 자들에 의해 위협을 받아 소장이 받아들여지지 못하자, 선생이 개탄하였다. 어떤 유생이 붕당(朋黨)에 관한 논의(論議)를 좋아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이는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가 남을 투기하는 것과 같아서 매우 우스운 일이다.”라고 하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명언이라고 여겼다.
만년에 이르러 수양하는 바가 높아질수록 덕행과 기국이 순일해져서 비난과 칭찬, 옳고 그름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부족하였고, 득과 실, 곤궁과 영달이 그의 지조를 혼란스럽게 하기에 부족하였다. 도리에 벗어난 일이 닥쳐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지지 않았으며, 평생 동안 발걸음이 명성과 권세가 있는 집에는 이르지 않았다. 혼자 외롭고 쓸쓸히 지내 마음 맞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또한 자득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믿고 마음을 텅 비운 자세로 자락하였다. 즐기고 좋아한 것은 산수와 문묵(文墨)을 벗어나지 않았다.
사장(詞章)에 대해서는 다듬어 꾸미는 것으로 공교로움을 삼지 않았다. 지은 시문, 부(賦), 표(表) 몇 권이 집안에 전해져 온다. 일찍이 지은 절구는 다음과 같다.
처신과 처세는 도모함이 매우 졸렬하고 / 處身處世謀殊拙
이익과 명예를 구함도 계책이 또한 소원하네 / 求利求名計亦疏
어떤 사람이 와서 앞날의 일을 묻기에 / 有人來問前途事
웃으며 허공을 지나는 뜬구름을 가리키네 / 笑指浮雲過太虛
희정당(喜靜堂)에 걸린 시는 다음과 같다.
산에게 묻노니 어느 때 여기에 섰는가 / 問山何代立於斯
산이 답하기를 천지가 개벽할 때부터라오 / 山曰天開地闢時
푸른 봉우리 진한과 마한을 따라 변치 않았으니 / 翠巘不隨辰馬變
붉은 벼랑이 어찌 백제 신라와 함께 변했으리 / 丹厓寧與濟羅移
강풍과 폭우도 이 산을 꺾어 누르기 어려운데 / 顚風急雨難摧壓
뿌연 안개와 붉은 노을만 기이하게 드리웠네 / 彩霧彤霞謾幻奇
남쪽 창가에 기대니 보는 경치 더욱 좋구나 / 徙倚南窓看更好
고요함 속의 참된 취미 남이 알까 두렵네 / 靜中眞趣怕人知
또 다음과 같이 읊었다.
산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대는 이곳에 사는가 / 山曰胡爲某在斯
초동목부 따르길 좋아하고 시류 따르길 싫어서네 / 喜隨樵牧不隨時
재주는 축타 같은 말재주 없어 화를 면하기 어렵고 / 才無鮀佞難乎免
성품은 고시처럼 우둔하니 어찌 향상할 수 있으리 / 性有柴愚豈得移
뇌락하여 생계가 담박함을 스스로 가련하게 여기고 / 落落自憐生計淡
우물우물하여 말소리 기이한 것을 남들이 비웃네 / 期期人笑語音奇
아버지께 문안 여쭙자 손자들도 고개를 숙이니 / 椿堂問寢孫摩頂
이 외에는 나를 하늘이 알고 신이 또 알리라 / 此外天知神亦知
몇 편의 시를 보면 그 평생의 지조와 기개를 상상할 수 있다.
무릇 선생은 부모를 섬길 때는 효성스러웠고 이웃을 대할 때는 의로웠으며, 몸가짐은 온화하되 절개가 있었고, 남을 대접할 때는 충실하되 조심스러웠으며, 명리(名利)에는 초탈하였고 재화(財貨)에는 담담하였다. 비록 곤궁한 곳에 은거하여 광채가 잠겨버렸으나, 아름다운 풍화가 미치는 곳에는 사람들이 사랑하고 존모하였다. 그 고을에 수령으로 나온 전후의 문무지사(文武之士)들이 자주 그의 집을 예방(禮訪)하였다.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자, 삼가(三嘉)와 합천 두 고을의 수령이 모두 부의와 조문을 하였고, 유림들은 “철인이 돌아가셨다.”라고 하며 애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정묘년(1627, 인조5) 봄에 동계(桐溪) 상공이 병조(兵曹)에 있을 때 선생을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의망(擬望)하였는데, 명이 내려왔을 때 선생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선생의 아내는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좌찬성을 지내고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충간공(忠簡公)인 이숭원(李崇元)의 현손이며,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을 지낸 이구인(李求仁)의 딸이다.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회일(會一)로 진사가 되었고, 차남은 양일(養一)인데 모두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삼남은 심일(審一)이다. 장녀는 진사 성박(成鑮)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나에게 시집왔다. 회일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수억(壽檍)ㆍ수강(壽橿)이며, 장녀는 신동망(辛東望)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정계(鄭枅)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어리다. 양일은 두 번 장가를 갔으나 자식이 없어 수강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심일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수력(壽櫟)이고 딸은 모두 어리다. 성박은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한영(瀚永)ㆍ해영(澥永)ㆍ탑영(漯永)ㆍ제영(濟永)이고, 딸은 안몽진(安夢禛)에게 시집갔다.
장사를 지낸 며칠 뒤 선생의 아들이 울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제가 선친의 은덕(隱德)을 차마 민몰(泯沒)되게 할 수 없어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워 영원히 전해지기를 도모하고자 하는데, 갈문(碣文)을 청하려면 반드시 먼저 행록(行錄)을 갖춰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원컨대 형께서 선친의 평생 전말을 서술하여 고거(考據)할 바가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듣고서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아, 선생은 재주가 많고 학덕이 높은 사람으로 이미 당시에 큰일을 할 수 없게 되자 보배를 품고 세상에 은둔하여 도를 지키며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네. 그리고 재주 있는 아들은 또 먼저 요절하여 가문의 명성을 떨치지 못하게 하였으니, 하늘이 덕 있는 사람에게 보답하여 베푸는 도리를 장차 어디서 징험하겠는가. 선을 행하는 자가 이제 태만해질 것일세. 나는 선생에게 은혜를 받은 것이 매우 두터우며 정과 의리로 보아도 모두 사양할 수 없네. 다만 식견이 고루하고 글재주도 도덕과 아름다운 행실을 묘사하기에 부족할까 두려우니, 어찌 감히 맡겠는가.”라고 하며 사양한 것이 오래되었다. 집에 돌아온 후에 선생의 아들이 또 두 번 편지를 보내 구하였는데, 말이 매우 슬프고 간절하여 그만둘 수 없었다. 내가 듣고 본 것을 간략하게 기록한 것이 위와 같다.
황명 천계(天啓) 모년 여름 모월 모일 문인 금라후인(金羅後人) 조임도(趙任道)는 삼가 행장을 짓다
[주-D001] 이칭(李偁) : 1535~1600. 본관은 광평(廣平), 자는 여선(汝宣), 호는 황곡(篁谷)이다. 이흘의 외종숙이다. 조식에게 배웠다. 저술로 《황곡집(篁谷集)》이 있다.[주-D002] 갈천(葛川) 임 선생(林先生) : 임훈(林薰, 1500~1584)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중성(仲成), 호는 자이당(自怡堂)ㆍ고사옹(枯査翁)ㆍ갈천(葛川)이며,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1540년(중종35)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장악원 정,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지냈다. 효행의 정려를 받았다. 저술로 《갈천집》이 있다.[주-D003] 진사공(進士公) : 이희생(李喜生, ?~1584)으로,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경윤(景胤)이다. 조식에게 배웠다.[주-D004] 정언눌(鄭彥訥) : 《노파집(蘆坡集)》 〈노파선생연보〉에는 김의원(金義元)으로 되어 있다.[주-D005] 혼정신성(昏定晨省) : 어버이를 정성껏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자식이 된 자는 어버이에 대해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려야 하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한다.〔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라는 말이 나온다.[주-D006] 이상신(李尙信) : 1564~1610.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이립(而立), 호는 청은(淸隱)이다. 1588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경상도 관찰사, 대사간 등을 지냈다.[주-D007] 선생과 함께 동년(同年)으로 : 이흘과 이상신은 무자년(1588, 선조21)에 진사시에 함께 합격하였다.[주-D008] 정성을 …… 것이다 : 원문의 ‘고갈(叩竭)’은 《논어》 〈자한(子罕)〉편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물을 경우에는 그가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묻는 내용의 양쪽을 다 말해 준다.〔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子罕》[주-D009] 방백에게 …… 하였다 : 한정(閑丁)은 국가의 부역에 나가지 않는 장정을 말한다. 선생이 46세 되던 해에 순찰사(巡察使) 김신원(金信元)이 학문을 진흥시키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뜻을 드러내자, 선생이 편지를 보내어 죽정(竹亭)과 비암서당(鼻巖書堂)에 서책과 재직(齋直) 두 명을 청한 내용이 보인다. 《蘆坡集 蘆坡先生年譜》[주-D010] 4년 …… 잃고 : 1618년(광해군10) 맏아들 이회일(李會一)과 맏사위 성박(成鑮)이 세상을 떠났고, 1621년(광해군13) 둘째 아들 이양일(李養一)이 세상을 떠났다.[주-D011] 노파(蘆坡) :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노파리였는데, 1988년 합천댐 조성으로 수몰되었다.[주-D012] 단표(簞瓢) : 밥을 담는 대그릇과 물을 담는 표주박이란 뜻으로, 전하여 가난한 사람이 먹는 보잘것없는 음식을 뜻한다. 《논어》 〈옹야(雍也)〉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질도다 안회(顔回)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一簞食一瓢飮〕로 누추한 시골에 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그 걱정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 하였다.” 하였다.[주-D013] 솔과 …… 이루었네 : 은자(隱者)가 사는 집의 정원을 말한다.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세 오솔길은 황폐해졌는데,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 있네.〔三逕就荒, 松菊猶存.〕”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14] 용암서원(龍巖書院) : 현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에 있던 서원이다. 1576년(선조9) 가회면의 회현(晦峴)에 세운 회산서원(晦山書院)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1601년(선조34) 재건하면서 향천서원(香川書院)으로 개칭하였다. 1605년(선조38) 조식의 위판이 봉안되었고, 1609년(광해군1) 용암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서원지가 합천댐에 수몰되면서 2006년 뇌룡정(雷龍亭) 옆에 복원하였다.[주-D015] 망양지탄(望洋之歎) : 심오한 학문에 자신은 도저히 미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는 것이다. 황하의 신인 하백(河伯)이 자신이 다스리는 하수(河水)의 물이 불어나자 의기양양하다가 북해(北海)에 이르러서는 그 끝없이 펼쳐진 물을 보고는 그만 탄식하면서 “내가 길이 대방지가(大方之家)에 비웃음을 사겠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秋水》[주-D016] 정이도(鄭以道) : 1596~?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거원(巨源), 호는 판곡(板谷)이다. 이흘,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35년(인조13)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저술로 《판곡유고(板谷遺稿)》가 있다.[주-D017] 시를 …… 주었는데 : 〈병중시정이도(病中示鄭以道)〉라는 시로, 《노파집》 권1에 실려 있다.[주-D018] 일신이 …… 것을 :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이 일찍이 양양(襄陽)을 함락하고 나서, 양양 사람인 습착치(習鑿齒)의 명성을 본래부터 들어왔던 터라, 승려 도안(道安)과 습착치를 수레에 태워 초빙하여 융숭히 대우하였는데, 습착치가 당시 각질(脚疾)이 있어 잘 걷지 못하였다. 부견이 일찍이 우복야(右僕射) 권익(權翼)에게 말하기를 “내가 양양을 취하여 오직 한 사람 반을 얻었을 뿐이다.〔朕取襄陽, 惟得一人半.〕”라고 하므로, 권익이 그가 누구냐고 묻자, 부견이 말하기를 “안공은 한 사람이고, 습착치는 반쪽 사람이다.〔安公一人, 習鑿齒半人也.〕”라고 하였다 한다.《襄陽耆舊傳》[주-D019] 어버이의 은덕 : 《시경》 〈육아(蓼莪)〉에 “아 애달프다 우리 부모님, 낳고 길러 주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던가.〔哀哀父母, 生我劬勞.〕”라고 하였다.[주-D020] 빈 …… 불어오니 : 유언비어가 틈을 타고 들어온다는 뜻으로 쓰인다. 송옥(宋玉)의 〈풍부(風賦)〉에 “굽은 가시나무에 새가 와서 둥지를 틀고, 빈 문구멍으로 바람이 들어온다.〔枳句來巢, 空穴來風.〕”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21] 시체(時體) : 당대의 새로운 풍습이나 유행을 말한다.[주-D022] 재주는 …… 어렵고 : 《논어》 〈옹야(雍也)〉에 공자(孔子)가 “축관(祝官)인 타(鮀)의 말재주와 송나라의 조(朝)와 같은 미모를 갖고 있지 않으면, 지금 세상에서 환난을 면하기 어렵다.〔子曰:不有祝鮀之佞, 而有宋朝之美, 難乎免於今之世矣.〕”라고 한 말이 있다.[주-D023] 성품은 고시(高柴)처럼 우둔하니 : 《논어》 〈선진(先進)〉에 “고시는 어리석고 증삼(曾參)은 노둔하고 자장(子張)은 치우치고 자로(子路)는 거칠다.〔柴也愚, 參也魯, 師也辟, 由也喭.〕”라고 하는 공자의 평가가 있다.[주-D024] 성박(成鑮) : 1571~1618.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선(而善)ㆍ흡여(翕如),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성여신(成汝信)의 장남이다. 정인홍에게 배웠다. 저술로 아들 성한영(成瀚永)의 문집과 합본으로 나온 《매균양세고(梅筠兩世稿)》가 있다.[주-D025] 신동망(辛東望) : 본관은 영산(靈山), 자는 자진(子眞)이다. 곽재우(郭再祐)의 외손자이다.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김익재 양기석 구경아 정현섭 (공역) |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