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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009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www.itk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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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동성
손변(孫抃)은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경상도 안찰부사(慶尙道 按察副使)가 되었는데, 그 도민(道民) 중에 송사를 벌려 서로 다투는 남매가 있었다. 남동생은 주장하기를, `우리 남매는 이미 한 핏줄을 타고난 동기인데, 어떻게 누님만 유독 부모님의 전 재산을 독차지하고 동생에게는 그 몫이 없습니까?' 하였고, 이에 대해 누이는 반론하기를,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에 집안의 모든 재산을 통틀어 나에게 물려 주셨다. 네가 받은 것은 다만 검은 옷 한 벌, 검은 갓 한 개, 미투리 한 켤레, 그리고 종이 한 권뿐이다. 유언장이 갖추어져 있으니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리하여 유산 문제를 놓고 송사(訟事)한 지 여러 해가 지났건만, 그 때까지 미결로 남아 있었다. 이에 손변이 그들 두 사람을 불러 앞으로 나아오게 하고 물었다.
“너희들의 아버지가 죽을 때 어머니는 어디에 있었는가?”
남매들이 대답하였다.
“어머니는 먼저 죽었습니다.”
손변이 또 묻기를,
“너희들은 아버지가 죽을 때 나이가 각각 몇 살이었는가?”
하니, 그들이 ‘누이는 이미 시집을 갔었고, 동생은 한창 코흘리개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나서 손변(孫抃)은 다음과 같이 그 남매들을 타일러 말하였다.
“부모의 마음은 어느 자식에게나 다 똑같은 법이다. 어찌 장성하여 출가한 딸에게는 후하고 어미 없는 코흘리개에게는 박하겠는가? 다만 이 경우 동생이 의지할 데란 누이뿐인데, 만약 어린아이에게 재산을 누이와 균등하게 나누어준다면 누이의 동생에 대한 사랑이나 양육이 혹 지극하지 못하거나 전일하지 못할까가 염려될 따름이다. 그러나 아이가 이미 다 자라서는 이 종이를 가지고 소장을 써서 검은 옷과 검은 갓을 외출복으로 착용한 채 미투리를 꿰어 신고 관가에 고소하면 언젠가는 이 사건을 잘 판별하여 줄 관원이 나올 터이니, 너희 아버지가 오직 이 네 가지 물건만을 동생에게 남겨 준 것은 그 의도가 대개 이와 같았을 것이다.”
누이와 남동생은 이 말을 듣고는 느끼고 깨달아 서로 부여잡고 울었으며, 손변은 마침내 그 재산을 반분하여 그들 남매에게 나누어주었다.
위의 이야기는 『고려사(高麗史)』 권102 「손변전(孫抃傳)」에 나온다. 손변이 송사의 처리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하면서 한 가지 현저한 사례를 들어 보인 것이다.
「전(傳)」은 유명한 개인이나 집단의 사적(事迹)을 기록한 정사(正史)의 「열전(列傳)」을 이른다. 「열전」에 실리는 인물은 대부분 훌륭한 사람들이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열전」 중의 사람들은 대체로 대단한 학식과 덕망을 갖추고 사회에 기여한 이들이지만, 그 중에는 나쁜 행동을 저질러 사회에 해악을 끼친 인물들도 더러 들어 있다. 전자는 후세에 귀감을 보여주려는 의도임에 비해 후자는 후대에 경계를 남기려는 목적에서이다. 옛 선비들의 문집에 많이 보이는 행장(行狀)은 바로 ‘이 사람은 이처럼 훌륭한 인물이니, 나라에서 시호(諡號)를 내려주시고 아울러 이 글을 채택하여 정사의 「전」에 실어주십시오' 하는 의도에서 쓰는 죽은 사람에 대한 사적기(事迹記)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많은 문집에 실려 있는 수많은 행장들은, 조선이 일제에 의해 망하고 정사를 편찬할 기회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서양 문물이 곧장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관찬 사서가 편찬되지 못했으므로 「열전」에 실리지 못하고 말았다. 물론 정사의 「전」은 『홍길동전』이나 『춘향전』 따위와 같이 문학 작품으로 쓰여진 『…… 전(傳)』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사물을 의인화(擬人化)하고 정사의 「열전」을 모방하여 쓴 가전(假傳)도 문학 작품으로서의 『전(傳)』이다.
다시 손변의 「전」으로 돌아가 보면, 손변은 앞서 말한 대로 재판에 남다른 능력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평소의 행실도 모범적이었기 때문에 「열전」에 실린 인물이다.
손변(孫抃)은 초명(初名)이 습경(襲卿)인데, 고려 때 수주(樹州; 지금의 경기도 부평) 사람이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천안 판관(天安判官)에 임명되었는데, 근무 성적이 제일 좋았으므로 품계를 뛰어넘어 공역서 승(供驛署丞)이 되었으며, 관직이 계속 올라 고려 고종(高宗) 때에는 예부 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그 때 무고하게 죄를 입고 외었으나, 곧 경상도 안찰부사가 되었다. 그 뒤로도 계속 승진하여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지냈고, 고종 38년(1251)에 수 사공 상서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로서 생을 마쳤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였는 데다 사무 처리를 잘하여 사건을 막힘없이 처결하였으므로, 가는 곳마다 이름을 떨쳤다. 부인의 가계가 왕실의 서출 계통이었으므로 그는 대성(臺省), 정조(政曹), 학사(學士), 전고(典誥)의 관직에 임명될 수가 없었다. 이에 그의 부인이 그에게 말하기를,
“영감께서는 저의 계통이 천(賤)한 탓에 유림(儒林)의 청요직(淸要職)에 오르실 수 없으니, 저를 버리시고 귀족 집안에 다시 장가를 드시기 바랍니다.”
하니, 그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자신의 벼슬길 때문에 30년 된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리는 일은 내 차마 못하겠소. 더군다나 자식까지 둔 마당이겠소?”
하고, 끝내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위 송사의 내용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유산 문제를 둘러싼 이름없는 서민의 기지와 명판관 손변의 판단이 서로 잘 맞아 떨어져서 어려운 사건이 원만히 해결된 점에 대해서는 절로 감탄이 나온다. 여기에서 옛날에는 일반적으로 재산 상속이 자녀들 간에 균등히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원문>
孫抃, 初名襲卿, 樹州人. 登第, 調天安府判官, 政最, 超拜供驛署丞. 高宗朝, 累遷禮部侍郞, 非罪流海島, 尋授慶尙道按察副使. 人有弟與姊相訟者. 弟曰, “旣爲同産, 何姊獨得父母之財, 弟無其分耶?” 姊曰, “父臨絶, 擧家産付我. 汝所得者, 緇衣一·緇冠一·縄鞋一·兩紙一卷而已. 文契具存, 胡可違也?” 訟之積年未決, 抃召二人至前, 問曰, “若父沒時, 母安在?” 曰“先亡.” “若等於時年各幾何?” 曰, “姊已有家, 弟方髫齕.” 抃因諭之曰, “父母之心於子均也, 豈厚於長年有家之女 而薄於無母髫齕之兒耶? 顧兒之所賴者姊也, 若遺財與姊等, 恐其愛之或不至, 養之或不專耳. 兒旣長, 則用此紙作狀, 服緇衣冠, 穿縄鞋, 以告於官, 將有能辨之者. 其獨遺四物, 意蓋如此.” 弟與姊聞而感悟, 相對而泣, 抃遂中分家産, 與之. 抃官累樞密院副使, 三十八年, 以守司空·尙書左僕射卒. 性剛毅, 長於吏事, 剖決如流, 所至有聲. 以妻派聯國庶, 不得拜臺省·政曹·學士·典誥. 妻謂抃曰, “公因我系賤, 不踐儒林淸要, 敢請棄我, 更娶世族.” 抃笑曰, “爲己之宦路, 棄三十年糟糠之妻, 吾不忍爲也. 況有子乎?” 遂不聽. 子世貞, 亦不得赴擧. -고려사102列傳
건강과 섭생(攝生)
글쓴이 : 성백효
“선생은 평생에 약(藥)을 드시지 않고 침구(針灸)를 사용하지 않으시고는 한결같이 마음을 보전하여 성(性)을 기르며 음식을 절제하고 언어를 삼가며 욕심을 끊고 사려(思慮)를 정돈하는 것을 종신(終身)의 섭양(攝養)하는 절도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온화한 기운이 충만하고 진원(眞元)의 기운이 고갈되지 않으셨다.
하루는 선생을 모시고 밥을 먹었는데 선생의 식사하시는 양(量)의 많고 적음을 물었더니, 선생은 답하시기를 ‘젊었을 때에도 반 되를 넘지 않았고 노쇠한 나이에도 또한 반 되에서 줄지 않는다.’ 하였다. 조임도(趙任道)가 묻기를 ‘반 되 이외에는 한 수저도 더 자실 수 없습니까?’ 하였더니, 선생은 말씀하시기를 ‘더 먹고 싶으면 못먹을 것은 없으나 반 되 이외에는 더하거나 줄이지 않는다.’ 하셨으니, 이것을 가지고 보면 선생은 음식을 자심에 있어서도 또한 공부가 있으셨던 것이다.”(원문: 先生平生不服藥餌 不用鍼灸 一以存心養性 節飮食愼言語 斷嗜欲整思慮 爲終身攝養節度 故和氣充滿 眞元不渴 一日侍食於先生 問先生食量多少 答曰 少時不過半升 衰境亦不减半升 任道曰 半升之外 未可增加一匙乎 先生曰 欲加則非不能 而半升之外 不復增减 以此觀之 則先生於飮食 亦有工程 -就正錄[門人趙任道]/旅軒先生續集卷之九 / 附錄)
“신유년(1621) 계하(季夏)에 김휴(金烋)의 아들 만웅(萬雄)이 태어난 지 겨우 몇 달이 되었는데, 선생께서는 나그네의 우거하는 곳으로 왕림하시어 아이를 안고 나오라고 명하시고는 이어 그 어미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다. ‘이 아이는 골격이 깨끗하고 준걸스러우며 신채(神彩)가 사람을 놀라게 하니, 매우 축하할 만하다. 그러나 부디 너무 지나치게 보호하여 기르지 말라. 너무 지나치게 보호하면 후일 질병의 빌미가 될까 두려우며, 또한 교양하여 성취하는 방도가 아니다. 나는 어렸을 때에 곤궁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또 성품이 소탈하여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옷을 두껍게 입지 않고 또한 일찍이 음식을 잘 차려서 먹지 않았으며, 추워도 버선을 신지 않고 맨발로 눈을 밟으며 겨울을 났고, 아침저녁 밥을 다만 채소와 거친 밥을 먹으면서 장성하였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몸에 질병이 없고 오장육부(五臟六腑)가 깨끗하니, 네가 아이를 기를 적에도 이 노부(老夫)가 한 것처럼 한다면, 병이 없고 장수할 뿐만 아니라 덕(德)을 이루고 훌륭한 일을 하는 기본이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원문: 辛酉季夏 烋子萬雄 小名 生纔數月矣 先生下臨于餘次寓所 命出抱之 因敎其母曰 此兒骨格淸俊 神彩動人 可賀可賀 然愼勿護養太過 恐爲他日疾病之祟 亦非敎養成就之道也 余在兒時 育于窮家 性且疎放 絶無溫飽之念 未嘗厚其衣 亦未嘗美其食 寒不着襪 踏雪過冬 朝夕之飯 只喫蔬糲 以至長成 故至今身無疾病 臟腑淸凉 汝之養兒 亦能如老夫所爲 則不惟無病而得壽 所以成德做事之基 亦在於此矣 -敬慕錄[門人金烋]/旅軒先生續集卷之九 / 附錄)
위에 소개한 두 편의 글은 여헌 장현광(張顯光 1554∼1637)선생의 문집인 《여헌집속집(旅軒集續集)》에 실려 있는 내용으로, 하나는 여헌의 문인인 조임도(趙任道)가 기록한 취정록(就正錄)의 내용이고, 하나는 김휴(金烋)의 경모록(敬慕錄)의 내용이다. 특히 김휴의 글은 현대인의 육아(育兒)문제에 큰 경종을 울려주는 내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어린이들은 부모의 과보호와 영양과다로 예전에 비하여 키와 몸무게는 크게 향상된 반면, 상대적으로 허약하여 인내력이 부족하고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특히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져 병원신세를 지지 않고는 제대로 생장하지 못한다. 우리 선조들은 섭생(攝生)이니 양생(養生)이니 하여 건강관리에 유념하였다. 섭생과 양생은 같은 뜻으로 위생(衛生)이란 말과 비슷하다. 다만 수양의 뜻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선진 문화인이라면 위생관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지나친 위생관념은 도리어 병약한 체질을 만들고 만다. 맹수들은 높은 벼랑으로 새끼들을 데리고 가서 떨어뜨려 병약한 새끼는 죽게 하고 건실한 새끼만 기른다고 한다. 인간이야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지만 지나친 보호는 건강을 해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또한 건강을 보약으로만 유지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물론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약물을 복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허약한 체질을 강화하려면 보약도 필요할 것이다. 건강하게 장수를 누리는 것은 인간 누구나 추구하는 최대의 욕망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권력으로 얻을 수 있고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각종 진귀한 약재(藥材)와 비방(秘方)을 총동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진시황(秦始皇)은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고 동남동녀(童男童女) 8백 명을 해도(海島)로 보내었고, 한무제(漢武帝)는 방사(方士)들을 동원하여 온갖 비방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 황제는 끝내 염라대왕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하였다.
요즘 우리나라 남성들은 정력제니 보양식품이니 하면 사족을 못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력에 좋다는 것이면 동물이든 식물이든 씨를 말린다. 동남아 관광을 나가서도 상당수가 이러한 약재를 사오는 실정이며, 심지어는 살아있는 곰의 쓸개를 빼먹어 국제적 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이에 편승하여 가짜 비아그라가 대량으로 유통되고 있다 한다. 그러나 보약재의 과남용은 도리어 몸에 해롭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과욕을 부리지 아니하여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과음, 과식을 피하며 적당한 운동을 하고 자연에 순응하여 순리대로 살아가는 지혜를 익혀야 한다.
옛말에 ‘재화당기(栽花當妓), 독침당약(獨寢當藥)’ 이라 하였다. `아름다운 꽃을 가꾸면 기생을 당할 수 있고 혼자서 자면 보약을 당할 수 있다.'는 뜻으로 과도한 부부관계를 경계한 말이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도 지나친 합방은 단명(短命)을 재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건강관리에 지나치게 급급하여 열병을 앓는 오늘날 여헌선생의 섭생이 다시 한번 존경스러워 보인다 하겠다.
백성들에게서 얻은 이순신장군의 전략
글쓴이 : 성백효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처음 호남좌수사(湖南左水使)에 제수되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창궐하는 왜적을 막는 길은 오직 해상(海上)을 방어하는 길밖에 없었으나 충무공은 부임한 지가 일천(日淺)하였으므로 해상의 요충지(要衝地)를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충무공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날마다 포구(浦구)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관청의 마당에 모아놓고 저녁에 들어왔다가 새벽에 나가게 하였는데, 남자들은 신을 삼고 여자들은 길쌈을 하되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으며 밤이면 이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곤 하였다. 충무공은 편복(便服)차림으로 이들을 친근하게 대하면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게 하였다. 포구의 백성들이 처음에는 장군을 매우 두려워하여 서먹서먹해 하였으나 오래되자 차츰 익숙해져서 서로 함께 웃고 농담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백성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면서 실제로 경험했던 일과 수로(水路)들에 관한 것이었다.
이들은 말하기를 “어느 항구는 물이 소용돌이쳐서 이 곳에 들어가면 반드시 배가 전복되며, 어느 여울에는 물속에 암초가 숨어있어서 이 곳을 지나게 되면 반드시 배가 부서진다.” 하였다. 충무공은 이들의 말을 일일이 기록해 두었다가 다음날 아침이면 직접 현지에 가서 지형을 시찰하였으며, 먼 곳인 경우에는 비장(裨將)들을 시켜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과연 그들의 말과 똑같았다. 충무공은 왜적과 싸우게 되면 번번히 선단(船團)을 이끌고 피하면서 왜선(倭船)을 물길이 험한 곳으로 유인하니, 왜선들은 즉시 모두 침몰하였다. 그리하여 힘들게 싸우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었다.
송좌상(宋左相)은 일찍이 문객(門客)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주고 말하기를
“단지 장수만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재상이 되어서도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충무공이 수전(水戰)에 익숙했던 것은 단지 포구 백성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영담(魚泳潭)이 여러번 해진(海鎭)의 장수가 되어 물길에 익숙하였는데, 이분이 충무공을 보좌한 것이 매우 많았다. 충무공이 견내량(見乃梁)과 명량(鳴梁) 해협에서 승리한 것은 오로지 지리(地利)를 이용하여 거둔 것이었다.
이상은 조선 정조(正祖) 때의 학자이며 문신인 성대중(成大中)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 보이는 내용이다. 장군이 현지에 부임하면 그 지방의 지형을 자세히 파악해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다. 맹자(孟子)는 일찍이 `천시(天時)가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가 인화(人和)만 못하다.'고 하였다. 천시란 기상 상태를 말하고, 지리란 천연적인 요새와 견고한 성지(城池) 등의 전쟁에 유리한 지형을 이르며, 인화는 문자 그대로 상하간의 화목과 단결을 의미한다. 맹자의 이 말씀은 각종 병서(兵書)에도 자주 보인다. 충무공이 명량 해협에서 조수(潮水)를 이용하여 왜적을 섬멸한 일은 우리 국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충무공의 승리는 뛰어난 지략과 수로의 파악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지한 해안의 어민들을 친근하게 대하면서 음식을 제공하여 인화를 얻음으로써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옛말에 `백성들은 물과 같아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고 하였다. 군주를 배에, 백성을 물에 비유하여 백성들은 군주를 떠받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정권을 전복시킬 수도 있음을 명시한 격언이다. 또한 `군주는 백성을 하늘처럼 섬겨야 한다〔王者以民爲天〕'하였으며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 고도 하였다.
지도자의 덕목(德目)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도 겸허한 자세로 인화를 이룩하는 것이 제일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잘난체하지 않고 아랫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여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지혜와 의견을 수렴하여 반영하는 것이야말로 위정자의 도리요 또한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동안 문민정부를 거쳐 국민의 정부에 이르렀지만 위정자들은 아직도 밑바닥에 있는 국민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듯하다. 큰 정치는 구호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충무공처럼 겸허한 자세와 치밀함, 자기 한 몸의 명예와 이익을 돌보지 않고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충성심이 있어야 한다. 충무공의 위대한 인간상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한다.
■ 宋左相 : 영조 때 좌의정을 지낸 송인명(宋寅明 1689∼1746)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원문>
李忠武公舜臣,始除湖南左水使,倭警方急,禦之在水,而海防險阨,莫之悉也。公乃日聚浦氓男女於庭,夕入晨出,捆屨績麻,恣其所爲,而夜輒犒以酒餐,公便衣狎嬉,誘使之言,浦氓始甚畏懾,久益馴習,相與笑謔,所語皆漁採所踐歷也。曰某港水洄,入必船覆,某灘石匿,冒必舟碎,公一一記之,翌朝躬出視之,遠則褊裨往察其地,果然。及與倭戰,輒引舟回避,誘納之險,倭船無不立碎,不勞戰而勝也。宋左相嘗以此語其客曰,非惟將帥然也,爲相亦當如是,然忠武之習於水,不獨聽於浦民也。魚泳潭屢爲海鎭將,熟於水阨,贊佐公爲多,見乃梁鳴梁之戰,專用地利勝。-靑城雜記卷之五 / 醒言
효자(孝子) 왜가리
글쓴이 : 이승창
왜가리[臥傑]라 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 내력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숭정(崇禎 : 明 毅宗의 연호) 갑신년(인조 22, 1644) 간에 때마침 남쪽 지방이 큰 흉년이 들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버리고 먹고 살길을 찾아 다른 지방으로 떠돌며 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때 왜가리도 자기 아버지를 등에 업고 걸식을 하면서 부여(扶餘) 지방 몽도촌(蒙道村)이라는 동네에 와서 살게 되었다.
그때 그의 아버지 나이는 80살이었고 왜가리의 나이도 40여 살이 되었다. 그는 자기의 성명(姓名)을 아무에게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그의 생김새가 큰 키에 껑충하게 다리가 긴 것이 흡사 수경조(脩脛鳥 : 왜가리)와 같았으므로, 수경조의 방음(方音)을 따서 그를 왜가리라고 불렀는데 그도 왜가리를 자신의 이름으로 여겼다.
왜가리는 이 마을 몽도촌에 살면서부터 날이면 날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아버지에게 밤사이에 추웠는지 따뜻하였는지와 또한 시장하신지에 대해 문안을 여쭌 다음 자기가 직접 불을 때어 밥을 지어서 아버지께 진지상을 올렸다. 그 진지상에는 언제나 맛있는 반찬이 있었고 아버지가 진지를 다 잡수신 다음에야 아침을 먹고 밭에 나가 농사일을 하곤 하였다.
하루 일을 끝마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도 아침 때와 똑같이 문안을 올린 다음 저녁밥을 지어 올렸다. 외지에 나갔을 적에는 간혹 맛있는 음식을 얻게 되면 자기가 먹지 않고 언제나 품속에 간직했다가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올리곤 했다. 그러므로 그의 정성어린 효성에 감동한 마을 사람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이들이 많았다.
왜가리는 그곳에 와서 살고는 있었으나 농사지을 논과 밭이 없었으므로 품팔이를 하여 아버지께 봉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몸이 건장하고 성품이 부지런해서 밭갈이와 김매는 일에 있어 언제나 몇 사람의 몫을 하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서로 앞다투어 왜가리에게 품일을 주고는 품삯도 배로 주었다. 그래서 그는 넉넉한 생활로 아버지께 봉양할 수가 있었으며, 그의 아버지도 따뜻한 옷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아주 즐겁게 지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왜가리 자신은 입을 만한 옷이 없었고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지냈다. 왜가리야말로 자기 몸을 자기의 소유로 삼지 않고 아버지의 분신(分身)으로 여겨 어버이를 잘 섬긴 효자 중의 효자라 할 만하다.
왜가리는 애당초 장가를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왜가리의 효행이 가상하자, 어느 사람이 그를 사위로 삼으려 하였다. 왜가리는 그에게 말하기를,
“제가 하루종일 품팔이를 해봤자 얻는 것이라곤 한 말 곡식에 불과합니다. 지금 만약 장가를 들어 아내를 맞는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옷은 입혀 주고 밥은 먹여 줘야 할 것인데 아내를 먹여 주고 입혀 주자면 아버지를 봉양하는 일에만 마음을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아버지의 연세가 지금 80살이신데 살아 계실 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차마 처자 때문에 늙으신 아버지의 봉양에 손상이 가게 하는 일은 정말로 못하겠습니다." 하고, 거절을 하였다.
그 뒤로 한 해 남짓되어 그의 아버지가 병석에 누었다. 그 병세가 위독하여 측간에 갈 수가 없어 침상에서 똥과 오줌을 누게 되었다. 왜가리는 식음을 전폐하고 슬피 울면서 아버지를 몸소 뉘고 일으키면서 대소변을 받아내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이 끝나면 더렵혀진 옷가지를 빨았다. 밤낮을 좌우에서 의대를 풀지 않고 여러 달 동안 간병을 하였으나 끝내 구완하지 못하게 되자 울부짖으며 하소연하는 것이 참으로 정성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는 사람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사를 치를 때는 자기가 직접 아버지의 시신을 지게에 지고 가서 광중(壙中)을 깊이 파고 잘 모시고 자기 손으로 흙을 모아 무덤을 만들고는 통곡하며 집에 돌아와서 참최(斬衰) 삼년 복을 입었다. 그는 삼년상을 마치자 그때서야 장가를 들었다.
그 뒤로 얼마 동안 살다가 몽도촌을 떠나 함열(咸悅) 지방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해마다 세시명절 때면 아버지의 묘소에 찾아와 성묘(省墓)를 하고 제수(祭羞)를 차려 제를 올리고 가곤 하였는데, 여러 해 동안 왕래가 끊겼다. 그 까닭을 물어 보았더니 죽었다고 하였다.
왜가리는 사람됨이 소탈하면서도 조심성이 있고 욕심이 적었으며 말이 없었다. 온종일 함께 있어도 벙어리처럼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를 바보인줄 알고 업신여기고 매우 심하게 욕하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왜가리는 그들과 따지지 않고 못들은 척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더더욱 바보로 여겼다. 하지만 오랫동안 살면서 그의 행실을 살펴본 뒤에야 비로소 다들 놀라 기이하게 여기고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를 공경하며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부자(父子) 사이는 피로 이어진 변할 수 없는 친함[天性之親]이 있는 것이다. 사람치고 그 누가 사랑하지 않겠는가마는 그 천성의 친함을 남김없이 다 실행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저 왜가리와 같은 사람은 촌구석에서 농사일을 업으로 하는 필부(匹夫)에 불과하며, 그 누구 하나 그를 문자(文字)오 이끌어 가르쳐서 견문(見聞)을 열리게 해 준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 순진(醇眞)한 효성과 탁월(卓越)한 행실이 이와 같았으니, 어떻게 그에게 부모에 효애하는 마음을 극진히 하여 천성(天性)의 본연(本然)을 상실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아니 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나이 50살이 되도록 아버지께 봉양하기 위하여 장가까지 들지 않았으니, 이 일은 더욱 탁월하고도 절륜한 독행(篤行)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옛날 중국 수(隋) 나라의 효자였던 화추(華秋)가 이미 행한 고사(故事)에 비교하더라도 백중지간(伯仲之間)이라고 할 만하니 또한 기특하게 여길 일이다.
옛날 구양수(歐陽修)가 <오대일행전(五大一行傳)>에 서문하기를, “세상이 어지럽고 교육이 해이하여 독행을 한 자가 겨우 이 몇 사람뿐이다.”리고 탄식하였는데, 지금 이 왜가리와 같이 지행(至行)을 행한 사람이 그 행적이 인몰(湮沒)된 채 일컬어지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럽게 여길 뿐이다.
<원문>
臥傑傳 己亥
臥傑者 不知何許人 崇禎甲申間 南土大饑 人多流徙 臥傑負其父 轉乞至扶餘蒙道村僑居 是時 父年已八十 臥傑亦四十餘 不自言姓名 形巍脚長 類脩脛之鳥 故里人以方音呼爲臥傑 臥傑 亦自以爲名 臥傑自居是里 每晨興 問父寒燠飢飽 躬炊爨作食以進 必有滋味 食已 乃敢詣田 暮歸亦然 出而或得一味 則輒懷以遺父 一不入口 人感其誠孝 多餽以物者 臥傑旣僑居 無田土 惟傭而養其父 身旣壯健 且性勤 凡耒鋤耕耘 常當數人力 以故 人爭傭臥傑而倍償之 臥傑能致其贏 以爲養 煖衣旨食 親極其歡 然臥傑則身衣未嘗完 口食未嘗飽 蓋不自有其身 以事其親者也 臥傑自初未娶 至是 人有願妻者 臥傑曰 吾終日勞力 所得不過㪷粟 今若娶妻 則不得不衣食之 衣食之則不專於養親 柰何 且親年已大耋 餘日無幾 誠不忍以妻子故 損老父養 終辭焉 歲餘 其父疾病 不能如溷廁 遺矢於床 臥傑輟食悲泣 躬自扶持 已則自澣濯穢衣 日夜嘗左右其傍 不解帶者數月 竟不救 則呼號哭訴 出於至誠 人無不潸然涕者 及葬 身自負屍以詣壙 手自捧土以就墳 復痛哭而返 持斬三年 服除 始娶妻 已而移居咸悅 每歲時一來省父墳 設食而去 其後絶往來者數年 訪問之則已亡云 臥傑爲人 愿謹寡默 終日無言 如瘖病者 里中人初癡之 侮辱殊甚 臥傑迺不較 若無聞 人益癡之 居久察其行 然後始咸驚異 雖蚩氓 亦知可敬而非常人焉 嗚呼 父子 天性也 人孰無是愛 而能盡其性者 鮮矣 若臥傑 不過村間匹庶 耨耒是業 非有文字所導 見聞開益 而醇孝卓行乃如此 豈非能盡其愛而不失其性之本然者耶 至於五十不娶 尤所卓絶 視古華氏之已事 足爲伯仲 亦奇矣 昔歐陽公序五代一行傳 歎其世亂敎弛 僅若而人 夫以至行如臥傑 而湮沒不稱 可慨也已
청나라와 왜국에 대한 견해
글쓴이 : 이승창
우리나라의 남쪽과 북쪽에 이웃해 있는 나라는 청(淸) 나라와 왜국(倭國:일본)인데, 청 나라는 육지로 연결되었고 왜국은 바다 건너에 있으며 청나라는 큰 나라이고 왜국은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청 나라의 경우 우리나라에 우환(憂患)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보장할 수 있지만 왜국에 있어서는 반드시 우환거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그럴 것을 아는가?
저 청 나라는 우리나라에 대해 애당초 국토의 이(利)를 탐내어 차지할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들이 처음 우리나라를 침입해 온 것은 저들이 명(明) 나라를 도모할 뜻을 가지게 되자, 우리나라가 명 나라를 도울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먼저 우리나라를 위협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우리나라를 침입하여 이기고서는 또 우리나라와는 의지하여 서로 안보할 수는 있어도 우리의 의식을 개혁시켜 오랑캐로 만들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명 나라가 이미 망하자, 저들이 천하사람들의 머리를 깎아 오랑캐로 만들고 있으면서도 우리나라에는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는 소유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 나라가 우리나라에 우환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저들이 지금 전쟁이 없기 때문에 우환이 되지 않는 것이지 만일 전쟁을 하여 상황이 급박하게 된다면 어떻게 우리에게 원조를 요구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저들이 그 무리를 들어 우리나라에 이입(移入)시키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느냐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우리에게 원조를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저들도 원조하고 하지 않음의 제한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심한 요구는 하지 못할 부분이 있으며, 무리를 들어 우리나라에 이입시키는 일에 있어서도 저들이 중국(中國)에 마음을 두고 있는 한 그것 또한 본래 오래도록 우리나라에 안주할 계획을 하지 않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는 하지 못할 부분이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저들이 한창 왕성하기 때문에 우리가 관계를 끊으려 해도 끊을 수가 없고 공격하려 해도 공격할 수가 없어 오직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나, 저들이 이미 쇠퇴한다면 원조할 의리가 있겠는가. 이래서 원조하고 하지 않음의 제한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만약 저들이 궁하여 원조를 구걸할 지경에 이르렀다면 오히려 우리나라가 원조를 하지 않는다 하여 그 이유로 행패를 부릴 힘이 있겠는가? 이는 우리를 의심하고 헛 공갈을 칠 따름인데, 우리나라가 들어 주지 않는다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게 원조하라고 요구하는 일은 하지 못할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세운(世運)이 쇠퇴하여 이적(夷狄)과 화하(華夏)가 번갈아 출입하기 때문에 저들이 그 틈을 잘 타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중국은 기생(寄生)할 수 있는 곳이요 막북(漠北:사막)은 귀착(歸着)할 수 있는 곳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저축[儲胥]과 백성의 집합[保聚]을 심양(瀋陽) 땅에다 하고 있는 것은 그 자손(子孫)의 달아나는 길이므로 그에 대비해 놓으려는 것이다. 저들의 계획이 중국에서도 안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안정할 계획을 세울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가 힘이 약해 저들을 섬기는 것이지, 좋아서 하는 게 아니다. 또한 저들이 패망해 달아날 적에 우리나라에 옮겨 올 경우 헤아리지 못할 위험이 잠복해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막북(漠北)으로 돌아가는 것은, 본래 이적(夷狄)이었던 처지로서 이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므로, 그들이 서로 받아 줄 것임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저들이 어찌 서로 받아줄 막북을 버리고 헤아릴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우리나라로 옮겨오겠는가? 그래서 그들이 그 무리를 들어 우리나라에 이입하는 일은 하지 못할 부분이 있다고 한 것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우환이 되지 않음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 왜국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전부터 하루도 우리나라를 해(害)할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저들의 풍속은 조급하고 독살스러운데다가 또 바다 생활에 익숙해서 꼭 크게 승리할 것을 생각한 뒤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요, 하고자하는 바 뜻이 있으면 움직이며, 발동하는 바 노심(怒心)이 있으면 움직여서 바다를 건너 와 한 성(城)을 노략질하고 한 고을을 함락하여 우리의 자녀(子女)와 금백(金帛)을 얻는 것으로 만족스럽게 여겨왔다.
그래서 중국에 자주 우환(憂患)이 되었는데 명 나라에 와서는 더욱 심하였으며 고려(高麗) 말엽에 와서는 더욱 심했다. 우리 조선에 이르러서는 교화(敎化)를 사모하여 정성을 쏟고 보빙(報聘)하는 사절(使節)이 계속되고 있으나, 그런데도 오히려 정덕[(正德:명무종(明武宗)의 연호] 경오년(중종5 1510)에는 영남(嶺南) 지방을 노략질해 갔고, 가정(嘉靖:명세종 연호) 을묘년(명종10 1555)에는 호남(湖南) 지방을 노략질해 갔으며, 만력(萬曆) 정해년(선조20 1587)에는 호남에 와서 노략질했다. 그리고 임진년(선조25 1592)에는 대대적으로 침략해 와서 조선 팔도를 유린하는 등 강화(講和)를 한 지 2백년 사이에 무릇 네 번이나 우환을 끼쳤으니 이것으로 그들의 마음을 이미 징험할 수 있다.
그러나 임진년에서부터 지금까지 아직껏 우환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임진의 전쟁에서는 우리나라가 참으로 크게 패하였고 저들 또한 온 나라를 기우려 쳐들어온 데다가 패하고 돌아갔으니 그 형세가 오래도록 떨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양식[蝕餉]을 교역하는 이로움으로 그들의 구미를 맞춰줌에 다라 저들이 탐내고 좋아하는 것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고, 또 우리나라가 패(敗)했던 일을 경계로 삼아 대비하는 것이 있을까 염려해서 못 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다행히 평수길(平秀吉)과 같은 자가 없으면 그만이거니와 불행하게도 또 평수길과 같은 자가 나오게 된다면 그들은 다시 떨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것이며, 저들이 만일 크게 침략해 와서 크게 뜻을 얻는다면 그 뜻을 크게 얻은 이로움이 양식을 교역하는 이로움보다 못할 것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지 않을 것이요, 우리나라가 참으로 대비하지 않고 있는데 저들이 또 교활하게 이웃나라를 엿본 경우, 우리가 그들에 대해 우리의 무방비를 틈타지는 않을 것이라 여겨 우리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있을 것이니, 그러므로 그들은 반드시 우리나라에 있어 우환이 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아직 아무 우환이 없이 지나기 때문에 국정을 모유(謀猷)하는 관리들이 편안함에 익숙해져서 지금의 무환(無患)이 앞으로의 대환(大患)이 있을 조짐임을 전혀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저들이 생각을 깊히 하지 않으면 움직임은 잦으나 환란은 작고, 생각을 깊이 하면 움직임은 더디나 환란은 큰 것이다. 융적(戎狄)이 중국에 대해, 그들이 약할 때는 자주 변방의 우환이 되었으나 그 우환은 소나 돼지를 노략질해 가고 벼곡식을 밟아 놓는 데 그쳤을 뿐이었으니, 그들의 생각이 깊지 않아서 그랬다.
그러나 강대해지면서 중국은 삼킬 뜻을 가지게 되자, 그들의 생각이 더욱 깊고 움직임이 더욱 더디어졌으며 날카로운 예봉을 감추고 전일(專壹)의 기운을 길렀다가 한번 움직임으로 마침내 대환(大患)을 만들었으니 송(宋) 나라가 북로(北虜)에게 당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소순(蘇洵)이 말하기를,
"변방에 어찌 기회를 탈만한 틈이 없겠습니까? 그들이 침략해 오면 크게는 한 군(郡)을 빼앗고 작아도 수천인을 죽이고 노략질하여 갈만할텐데도 저들이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의 뜻이 작지 않아서입니다. 이는 앞으로 그 예기(銳氣)를 기르고 우리의 틈을 엿보아 그 대욕(大欲)을 펴려는 것입니다." 하였던 것이다. 아! 어찌 저들도 앞으로 예기를 길렀다가 우리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아 그들의 큰 욕심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난번은 생각이 얕았기 때문에 움직임이 잦았고 지금은 생각을 깊이 하기 때문에 움직임이 더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드시 우리에게 우환을 끼칠 것임을 안다고 말 한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우환이 없음을 보장할 수 있다고 하여 막연하게 대비할 뜻을 두지 않고 있어서는 안된다. 마땅히 꼭 우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에 대해 깊이 대비하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청 나라에 대해서는 빙문(聘問)을 제 때에 하고 폐백을 신근히 이행하여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 의리를 상실함이 없이 할 뿐이지만, 왜국에 대해서는 성신(誠信)으로 대우하고 약속(約束)으로 조정을 하여 트집잡을 꼬투리가 우리 쪽에서부터 생겨서 저들이 말꼬리로 삼을 틈을 주지 말아야 하며, 또 모름지기 그들이 먼저 범할 수 없는 형세를 만들어 그들에게 보여서 저들로 하여금 기회가 될만한 틈이 없도록 해야 한다.
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앞으로 왜란이 있을 것을 분명히 안 사람은 조헌(趙憲)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조헌을 보고 요상한 괴물이라고 하면서 비방이나 할 뿐, 알아차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바라는 것은 지금의 군자들이 나를 보고 요상한 괴물이라고 하지 않았으면 세도(世道)에 다행이겠다.
<원문>
淸倭論(海左先生文集卷之三十七 / 論)
南北而與我隣者淸倭是已 淸陸而倭海 淸大而倭小 然而可保淸之無患於我 而若倭則知其必有患也 何以知其然也 夫淸之於我也 初非利土地而欲有之也 其始入我也 彼方有圖明之志 而慮我之助明也 故先䝱我 使無動也 旣入而勝我 則亦知夫我之可以因之以相安 而不可以革而夷之也 故明旣亡 彼方薙天下之髮而夷之 而於我則不能也者 知我之不可以有之也 故曰可保無患於我也 或曰 彼方無事故無患 若有事而急 則安保弗責我以相援也 安保不擧其類而移于我也 曰 責我以相援也 彼亦知援弗援制在我也 而深責之則有弗能也 擧其類而移于我也 觀於彼之於中國也 亦未嘗以久安計 而知其有弗能也 何也 彼方盛也 故絶之不得 攻之不得 而唯其所使 彼旣衰也 則其有可援之義乎 是援弗援制在我也 而彼方窮而至於乞援 則其尙能以我之弗援而有所逞也乎 恫疑虛喝而已 而我不應則無如之何也 故曰 責我以相援 有弗能也 世運而衰 夷狄華夏造爲出入 故彼固乘之以入 而亦知夫中國之可以寄 而漠北之可以歸 故儲胥保聚必於瀋 而以備子孫之走路也 彼旣計不能安中國 而能計安於我乎 我姑力屈而事彼也 非甘心也 彼亦知奔北而移于我也 有弗可測者存 而歸于北漠也 則以夷狄歸夷狄 而保其能相受也 彼又烏能違其相受之北漠 而移之弗可測之我乎 故曰擧其類而移于我 有弗能也 故曰可保無患於我也 彼倭則不然 未甞一日而忘其欲噬我也 彼其俗躁疾狼毒 而又習海 非必慮其大勝而後動也 意有所欲則動 怒有所發則動 跳海而來 掠一城陷一邑 而得其子女金帛而足也 故於中國屢爲患而於明尤甚 於高麗之末 又尤甚 而至我朝 慕化輸欵 報聘相繼 然而猶正德庚午 寇嶺南 嘉靖乙卯 冦湖南 萬曆丁亥 寇湖南 至壬辰 大寇躙八道 盖講和二百年間 凡四爲患 此其已驗也 然而自壬辰至今 尙無患何也 壬辰之役 我固大䘐 而彼亦擧國而來 覆師而還 其勢久而不振也 我有交易餽餉之利以㗖之 而彼有所貪戀也 且慮我懲敗而有備也 然而幸而無平秀吉則已 弗幸而又有平秀吉 則不患其不能復振也 彼若大入而大得志 則其大得志之利 不患其弗若交易餽餉之利也 我誠無備矣 而彼又黠於覘鄰 不患其不乘我之無備也 故曰 知其必有患也 然而至今尙無患 故謀國者狃而爲安 而殊不知無患將有大患也 彼慮淺則動數而患小 慮深則動遲而患大 戎狄之於中國 方其弱也盖數爲邊患 而所患止鹵掠其牛畜 躙蹂其稼穡而已 其慮淺也 及其彊大而有呑中國之志 則其慮愈深而其動愈遅 斂其鋒鍔而養其專壹之氣 一動而遂爲大患 宋之北虜是也 故蘇洵之言曰 邊境之上 豈無可乘之釁 使之來寇 大足以奪一郡 小亦足以殺掠數千人 而彼不以動其心者 此其志非小也 將以畜其銳而伺吾隙 以伸其所大欲也 嗚呼 安知不彼亦將以畜其銳 而伺吾隙以伸其所大欲 而嚮也其慮淺 故其動數 今也其慮深 故其動遅耶 故曰 知其必有患也 固不可以可保無患 而漠然不措意也 但當於必有患者而深備之也 故我之於淸也 時其聘問 謹其皮幣 無失以小事大之義而已 至於倭也 則待之以誠信 操之以約束 毋使釁自我始而彼得以爲辭 又須先爲不可犯之勢以示之 而毋使彼有可乘之隙可也 嗚呼 壬辰之難未作 而明知其將難者 趙憲也 然而當時視憲 爲妖祥恠物 而莫之省 今之君子 毋視余爲妖祥恠物 則世道之幸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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