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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013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www.itkc.or.kr
공부를 하다가도 불현 듯 불안해집니다. 올해는 얼마나 뽑을까, 내가 보는 책에서 시험이 나올까, 한문과목 없어지면 어떡하나 등등 어떤 날은 걷잡을 수 없어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수험생활일지도 모릅니다. 너무도 당연한... 그러나 그 상태를 넘어서야겠지요. 파고들어보자. 즐기자 이런 마음으로요. 예를 들어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김시습 문집을 한 질 구하는 겁니다. 그리고 『김시습평전』을 한권 구합니다. 그러고서 ‘김시습이 되어’ 김시습과 함께 일평생을 보내보는 겁니다. 몇 번이고 평전을 읽으면서, 그 일대기에 따라 김시습 문집의 작품도 읽어나가고요. 뭔가 와닿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물론 다산의 시문집도 좋고 연암의 시문집과 열하일기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임고 준비하면서 열하일기(원문+번역)를 몇 번이고 보고, 합격하면 열하일기의 무대로 중국 여행을 떠나자! 자, 힘들어도 한발한발 나갑시다.
아내의 마음
글쓴이 : 김성애
1. 부인송씨가 문절공(文節公 : 柳希春의 시호)에게 답한 편지
- 공이 홍문관 관리로 서울에서 벼슬하는 동안 넉달 간을 홀로 살면서 일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는데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어 홀로 사는 괴로움을 과장하고 심지어 갚기 어려운 은혜를 입은 줄 알라는 내용으로 자랑하자 부인이 담양(潭陽) 본가에 있으면서 이 글로 답장을 보냈다.
삼가 편지를 보니 갚기 어려운 은혜라고 스스로 자랑하셨는데 우러러 사례할 바가 없습니다. 다만 듣건대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본래 성현의 가르침이지 어찌 아녀자를 위해 힘쓰는 것이겠습니까? 마음이 이미 정해져서 물욕에 가리워지지 않으면 자연 잡념이 없는 것이니 어찌 규중 아녀자의 보은을 바라겠습니까? 3~4개월 동안 홀로 지낸 것을 가지고 고결한 척하며 덕을 베푼 생색을 낸다면 반드시 담담하게 무심한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깨끗해서 밖으로 화려한 유혹을 끊어버리고 안으로 사념이 없다면 어찌 꼭 편지를 보내 공을 자랑한 뒤에야 알겠습니까? 곁에 나를 알아주는 벗이 있어 공론이 펴질 것이요, 아래로는 권속 노비들의 눈이 있으니, 굳이 애써서 편지를 보낼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아마도 겉으로만 인의를 베풀고 남이 알아주기를 서둘러 바라는 병폐가 있는 듯합니다. 제가 가만히 살펴봄에 의심스러움이 한량이 없습니다.
첩도 당신에게 잊을 수 없는 공이 있으니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당신은 몇 달 동안 혼자 지내고 매양 편지마다 구구절절 공을 자랑하지만 60이 가까운 몸으로 그렇게 홀로 지내는 것이 당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크게 유리한 것이지 첩에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는 하나 당신이 높은 관직에 있어 도성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는 처지에 몇 달 동안이라도 혼자 지내는 것은 또한 보통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는 일이기는 합니다. 저는 옛날 어머님의 상을 당했을 때 사방에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고 당신은 만리 밖에 귀양가 있어 그저 하늘을 울부짖으며 통곡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극한 정성으로 장례를 치르어 남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곁에 사람들도 혹 봉분이나 제례가 비록 친자식이라도 이보다 더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3년상을 마치고 또 만리 길을 나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찾아간 일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지성을 바쳤으니 이것이야말로 잊기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이 몇 달 홀로 지낸 일과 나의 몇가지 일을 비교한다면 그 경중이 어떻습니까? 원컨대 당신은 영원히 잡념을 끊고 건강을 보전하여 수명을 늘이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크게 바라는 바입니다. 그리고 나의 뜻을 이해하고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 송씨
<원문>
眉巖先生集卷之七 / 日記 刪節○上經筵日記別編
庚午 隆慶四年我宣廟四年
十二日 辰末 赴玉堂一會 初箚用柳成龍 再箚用尹卓然 開草 尹作甚佳 ○夫人作長書 令光雯寫送 其辭曰 伏見書中 自矜難報之恩 仰謝無地 但聞君子修行治心 此聖賢之明敎 豈爲兒女子而勉强耶 若中心已定 物欲難蔽 則自然無渣滓 何望其閨中兒女報恩乎 三四月獨宿 謂之高潔有德色 則必不澹然無心之人也 恬靜潔白 外絶華采 內無私念 則何必通簡誇功然後知之哉 傍有知己之友 下有眷屬奴僕之類 十目所視 公論自布 不必勉强而通書也 以此觀之 疑有外施仁義之弊 急於人知之病也 荊妻耿耿私察 疑慮無窮 妾於君亦有不忘之功 毋忽 公則數月獨宿 每書筆端 字字誇功 但六十將近 若如是獨處 於君保氣 大有利也 此非吾難報之恩也 雖然 君居貴職 都城萬人 傾仰之時 雖數月獨處 此亦人之所難也 荊妻 昔於慈堂之喪 四無顧念之人 君在萬里 號天慟悼而已 至誠禮葬 無愧於人 傍人或云 成墳祭禮 雖親子無以過 三年喪畢 又登萬里之路 間關涉險 孰不知之 吾向君如是至誠之事 此之謂難忘之事也 公爲數月獨宿之功 如我數事相肩 則孰輕孰重 願公永絶雜念 保氣延年 此吾日夜顒望者也 然意伏惟恕察 宋氏白 夫人詞意俱好 不勝歎伏 ○追記初十日夕講 臣希春啓曰 內需司別坐尹參 元衡之族也 用之於姦謀 初錄三等功臣矣 旋令尹春年上疏 刑訊殺之 亦以爲滅口 此亦爲構陷之一驗也 成世昌奉命赴京 而姦兇等以爲與尹任等有密計 其爲誣陷 大抵類此 承旨特進官柳成龍 皆迭進言乙巳被戮之冤 姦兇之當討 上曰 乙巳之事 不可從也
2. 묘비를 세우려는 글(1571년 7월에 쓰다.)
남편 미암(眉巖)이 종성(鍾城)에서 귀양살이를 한 지 19년 만인 1565년(명종 20) 겨울에 성상의 은혜를 받아서 다음해(1566) 봄 은진(恩津)으로 양이(量移)되자 나도 모시고 돌아와 함께 지내었다. 온갖 고생 중에도 오직 바라는 것은 친정 선영의 곁에 비석을 세우는 일이었는데 마침 은진에서 생산되는 돌의 품질이 가장 좋았으므로 즉시 석공을 불러다 값을 주고 사서 배에 실어 보내 해남(海南)의 바닷가에 두게 하였다. 그 후 1567년(명종 22) 겨울에 공이 홍문관 교리로 성묘를 하기 위해 고향에 돌아갈 때 비로소 담양(潭陽)에다 돌을 옮겨두었으나 인력이 모자라서 깎아 세우지는 못하였다. 그러다 1571년(선조 4) 봄에 공이 마침 전라감사에 제수되었으므로 숙원을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하여 마음이 부풀어 있었는데, 공은 백성의 폐단을 제거하는 것만 잘하고 집안 일을 돌보지 않으면서 나에게 편지하기를, “반드시 사사로이 비용을 마련한 뒤에 이루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내가 나의 졸렬함을 잊고 이 글을 지었으니, 한편으로는 남편이 읽고 감동해서 도와주기를 바라서요 또 한편으로는 후손들에게 남겨주고자 해서이다.
착석문(斲石文)
천지만물 중에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은 성현을 세워 교화를 밝히고 삼강오륜의 도를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이를 용감히 행하는 자가 적었으니 이 때문에 진실로 뒤늦게라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은 지극한 마음은 있으나 힘이 부족해서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인인 군자가 불쌍히 여겨 유념하여 구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첩이 비록 명민하지는 못하나 어찌 강령을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어버이께 효도하고픈 마음에 옛사람을 따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2품의 관직에 올라 삼대(三代)가 추증을 받고 나도 고례에 따라 정부인이 되어 조상 신령과 온 친족이 모두 기쁨을 얻었으니, 이는 반드시 선세에 적선을 한 음덕의 보답입니다. 그러나 내가 홀로 생각하며 잠못 이루고 가슴을 치며 상심하는 것은 옛날 우리 선군이 항상 자식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정성을 다해서 내 묘 곁에 비석을 세우도록 하라.” 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쟁쟁하게 귀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우리 어버이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였으니 매양 이것만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집니다. 이는 족히 인인 군자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인인 군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어렵고 곤궁한 사람을 구해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나에게 편지하기를, “형제끼리 사사로이 비용을 마련하면 그 밖의 일은 내가 도와주겠다.” 하니, 이는 무슨 마음입니까? 청덕에 누가 될까봐 그런 것입니까? 처의 부모라고 차등을 두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우연히 살피지 못하여 그런 것입니까?
또 선군께서 당신이 장가오던 날 금슬백년(琴瑟百年)이란 구절을 보고 훌륭한 사위를 얻었다며 너무나 좋아하셨던 것을 당신도 반드시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당신과 내가 지기(知己)로서 원앙처럼 함께 늙어가는 마당에 불과 4~5섬의 쌀이면 될 일을 이렇게까지 귀찮아 하니, 통분해서 죽고만 싶습니다.
경서에 이르기를, “허물을 보면 그 인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남들은 반드시 이 정도를 가지고 허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선유들의 밝은 가르침을 따라 비록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완벽하게 중도에 맞게 하려고 하면서 이제 어찌 꽉 막히고 통하지 아니하여 오릉중자(於陵仲子)처럼 하려고 하십니까? 옛날 범중엄(范仲淹)은 보리 실은 배를 부의로 주어 상을 당한 친구의 어려움을 구해주었으니 대인의 처사가 어떠하였습니까?
형제끼리 마련하라는 말은 크게 불가하니 저의 형제는 혹은 과부로 근근이 지탱하고 있는 자도 있으며, 혹은 곤궁해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자도 있으니 비용을 거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원한만 사게 될 것입니다. 예(禮)에 말하기를, “집안의 있고 없는 형편에 맞추어 하라”하였으니 어떻게 그들을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친정에서 마련할 힘이 있다면 나의 성심으로 진작에 해버렸을 것입니다. 어찌 꼭 당신에게 구차히 청을 하겠습니까? 또 당신이 종산 만리 밖에 있을 때에 우리 선군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오직 소식(素食)을 했을 뿐이요, 3년 동안 한 번도 제전(祭奠)을 안 했으니 전일 그토록 간곡하게 사위를 대접해주던 뜻에 보답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만약 귀찮아하는 마음 없이 비석 세우는 일을 억지로라도 도와준다면 구천에서도 선인이 감격하여 결초보은하려고 할 것입니다.
나도 박하게 베풀고 당신에게 후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시모님이 작고했을 때 갖은 정성과 있는 힘을 다하여 장례를 예대로 하고 제사도 예대로 지냈으니 나는 남의 며느리로써 도리에 부끄러운 것이 없습니다. 당신은 이런 뜻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이 만약 내 평생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면 나는 죽더라도 지하에서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지성에서 느끼어 나온 말이니 한자 한자 자세히 살피시기 바랍니다.
<원문>
斲石文
天地萬物之類 惟人最貴者 立聖賢明敎化 行三綱五倫之道也 然自千千萬萬古而來 能勇而行之者蓋寡 是故人苟有追孝父母至誠之心 而力不足以遂願者 則仁人君子 莫不愓然留念而欲救之 妾雖不敏 豈不知綱領乎 孝親之心 追古人而從之 君今守二品之職 追贈三代 余亦從古禮而得叅 先靈九族 咸得其歡 此必先世積善陰功之報也 然吾獨耿耿不寐 拊心傷懷者 昔我先君 常語子等曰 吾百歲之後 須盡誠立石於墓側之言 洋洋在耳 迨未得副吾親之願 每念及此 哀淚滿眶 此足以致仁人君子動心處也 君抱仁人君子之心 操救窘拯溺之力 而簡余曰 私備於同腹 而吾當以佐其外云 此獨何心 得非惡累淸德而然耶 等差妻父母而然耶 偶然不察而然耶 且家君 自君東來之三日 見琴瑟百年之句 自以爲得賢壻 而矢喜欲狂 君必記憶 況君我之知音 自比蚷蛩而偕老 不過費四五斛之米 工可訖功 而厭煩至此 痛憤欲死 經曰 觀過知仁 聞者必不以此爲過也 公遵前修之明敎 雖至微之事 盡善盡美 求合於中道 今何固滯不通 如於陵仲子耶 昔范文正公 以麥舟 救友人之窘 大人之處事何如耶 私備同腹之意 有大不可者焉 或有寡婦僅能支保者 或有窮不能自存者 非但不能收備 必起怨悶之心 禮云 稱家之有無 何足誅哉 若私家可辦之力 則以余之誠心 業已爲之久矣 豈必苟請於君耶 且君在鍾山萬里之外 聞吾親之歿 惟食素而已 三年之內 一未祭奠 可謂報前日款接東床之意耶 今若掃厭煩 而勉救斲石之役 則九泉之下 先人哀感 欲結草而爲報矣 我亦非薄施而厚望於君也 姑氏之喪 盡心竭力 葬以禮祭以禮 余無愧於爲人婦之道 君其肯不念此意耶 君若使我 不遂此平生之願 則我雖死矣 必不瞑目於地下也 此皆至誠感發 字字詳察 幸甚幸甚
그물손질과 정치
글쓴이 : 박소동
정원홍(鄭元鴻)군은 내가 귀양살이할 때 같이 지낸 사람이다. 그는 그물 손질을 잘하였다. 해어진 그물을 잘 손질해서 날마다 고기를 잡았지만 언제나 성하여 새 그물 같았다. 그 덕에 나는 조석으로 생선을 먹을 수가 있었고, 따라서 반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정군은 매일같이 그물을 손질하고 고기를 잡곤 하였지만 힘들어하지 않았다. 나는 그 일을 다른 노비들에게 대신 시켜 보았다. 하지만 제대로 해내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정군에게 "그물 손질은 아무나 해낼 수 없는 특별한 방도가 있는 것이냐?" 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정군은, "미련한 노비는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물이란 본디 벼리(網)와 코(目)가 있는데, 벼리는 코가 없으면 쓸모가 없고, 코는 벼리가 있어야만 펼쳐지는 것입니다. 벼리와 코가 잘 엮어지고 가닥가닥이 엉키지 않아야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물을 처음 만들 때에 맨먼저 벼리를 준비하고 거기에다 코를 엮는데, 가닥가닥이 정연하여 헝클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그러나 모든 물건은 오래되면 망가지게 마련인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게나 고기들이 물어뜯고, 좀이나 쥐가 갉아서, 처음에는 그물코가 터지고 나중에는 벼리까지 끓어지게 됩니다. 그러한 그물로 고기를 잡을라치면 마치 깨진 동이에 물붓기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너덜너덜 해져서 손질을 하기가 어렵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통상 버릴 때가 되었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왜 손질할 수가 없겠습니까? 저는 그 해진 그물을 가지고 돌아와서 바닥에다 펄쳐 놓고 해어진 부분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조바심 내거나 신경질 부리지 않고 끈기를 가지고 부지런히 수선을 합니다. 제일 먼저 벼리를 손질하고, 그 다음 코를 손질합니다. 끊긴 벼리는 잇고, 터진 코는 깁는데, 며칠 안 돼서 새 그물 같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버리라고 말했던 사람들은 모두, 헌 것을 고쳐서 새롭게 만든 것인 줄은 알지만, 골똘한 생각과 매우 부지런한 노력이 필요하였다는 것까지는 모릅니다.
만일 버리라는 말을 듣고 손질하지 않았다면 이 그물은 이미 쓸모없이 버려졌을 것입니다. 아니면 설사 손질하고자 하더라도 미련한 종놈에게 맡긴다면, 벼리와 코의 순서가 뒤죽박죽 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손질하려다가 도리어 헝클어놓게 되는 것이니, 이익을 보려다가 도리어 손해를 보는 경우가 될 것이 뻔합니다. 이후로는 잘 사용하고 잘 간수해서, 해어진 곳이 생기면 바로바로 손질하고, 어리석은 종놈이 헝클어 놓는 일이 없게 한다면, 오래도록 성하게 사용할 수 있을 터이니 무슨 걱정할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그의 말을 자세히 다 들은 뒤에 한숨을 쉬고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자네의 그 말은 참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이가 알아야 할 내용이다." 하였다. 아! 벼리는 끊기고 코는 엉키어서 온갖 것이 해이되어 해어진 그물과도 같은 이 말세임에랴!
끊기고 엉킨 벼리와 코를 보고 모른체 버려두고 어찌해 볼 수가 없다고 하지 않는 이가 몇이나 되며, 어리석은 종놈에게 맡겨 그르치게 하여 이익을 보려다가 도리어 손해를 당하지 않는 이가 몇이나 되던가?
아! 어떻게 하면, 정군과 같이 골똘한 연구와 여유 있고 침착한 손질로, 조바심 내거나 신경질 부리지 않고, 선후를 잘 알아 처리하여 간단하게 정돈해 내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날마다 부지런히 일하면서도 힘들어하지 않고 언제나 완전함을 유지하여 망가지지 않도록 하는 그런 인물을 얻을 수가 있을까? 아!.....
<원문>
補網說(寒圃齋集 卷九 / 雜著 )
鄭君元鴻與余處,能手綴網之弊者。日用於淵而常完不缺,不知其爲弊也,使余無彈鋏之愁,而朝夕資焉者,網有賴焉。鄭君日事而不告倦,余欲使僕隷替之,鮮能學者。
余曰:“爲此有道而抑有能有不能者歟?” 曰:“然。此非庸奴所可爲也。夫網有綱焉有目焉。綱不可無目而自立,目不可無綱而自張。形勢相維持,條理不紊亂,然後可用。
玆網之創也,有綱而立,有目而張,井井鑿鑿,無訛無舛。生久而弊,物之理也。其魚蠏之所噬,蠧鼠之所剝,目始以毁,綱亦隨之。欲擧而用之,如漏甕捧水,瘡疣雜出,不可着手,人皆謂之棄。吾獨不然曰,‘此豈不可爲耶?’
歸而鋪之衽席之上,凡所破毁者,閱之細究之深,專一其思,徐緩其手,不發聲色,孜孜勤勤。先其綱而後其目,絶者續而缺者補,不數日,作一完了底物。
前之謂棄者,皆知其革舊爲新之爲可美,而亦不知其用意之至勤也。向使主人聽棄者之言,不知補綴,則此物不幾於永爲篋笥棄乎?雖欲補綴而付之庸奴,則又豈不綱倒目顚,欲治而棼之,欲有益而反有害者乎?繼自今,善用而善藏之,隨毁而隨綴之,又不爲庸奴所誤,則可久而不弊,夫何傷之有焉。”
余諦聞之,喟然而歎曰:“子之言,眞可謂謀國者喩矣。嗟乎!叔季之世,有不綱頹目紊,百度俱弛如網之弊者乎?見其綱頹目紊,而有不望望然不顧,以爲莫可爲者,無幾矣。又不爲庸奴所誤,欲益而反有害者,又無幾矣。嗟乎!安得如鄭君專其思緩其手,不發聲色,知所先後,一朝而整頓者乎?又安得日事而不倦,常完而不缺如是者乎?噫!
호인대를 비판함
글쓴이 : 권경열
당(唐) 나라 때 호 지방에 어머니의 병이 깊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병을 낫게 한 사람이 있었다. 고을 영윤(令尹)이 조정에 아뢰어 그 집안에 정려(旌閭)하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었는데, 한유(韓愈)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어미가 병이 깊으면 약이나 침으로 치료하는데 그쳐야 할 것이니, 자신의 지체(支體)를 손상시키면서까지 봉양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것은 불효 중에서도 심한 경우가 아니겠는가? 설사 효도에 부합된다고 하더라도 정문(旌門)을 해서는 안될 것이니, 산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가지고 어찌 특이하다고 할 것이 있겠는가?”
나는 그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릇 남의 자식이 된 자는 부모가 병이 깊으면 온갖 수단과 약을 다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한번 효과를 보려고 할 것이니, 심지어는 무당을 불러 귀신에게 축원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비록 그 요망함은 알고 있지만 효험이 있다면 못하는 짓이 없어서이다.
설령 훌륭한 의원이 의서(醫書)를 인용하여 인육(人肉)을 약에 섞어 쓰지 않으면 나을 수가 없다고 한다면, 장차 그 말을 허탄(虛誕)하다고 여겨 따르지 않고 그 어머니의 죽음을 앉아서 지켜보기만 할 것인가? 아니면 만에 하나라도 어머니가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면서 그 지체를 아끼지 않을 것인가?
나의 지체는 곧 부모의 유체(遺體)이다. 옛사람들은 몸을 온전히 한 채로 죽는 것을 효라고 하였으니, 그 지체를 상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효에 해가 된다. 그러나 내가 나의 지체를 아낀다면 타인들 또한 자신의 지체를 아낄 것이니, 누가 자신의 지체를 훼손시켜가면서 타인의 어머니를 위하려고 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약은 끝내 구할 수 없을 것이고 병도 끝내 나을 수가 없을 것이다. 가령 한퇴지(韓退之)가 불행하게도 이런 상황에 처했더라면 의당 어떻게 했을 것인가?
군자는 언제고 그 몸을 아끼지 않는 적이 없다. 그러나 때로 이 몸을 아낄 수 없는 경우는 항상 부득이한 변고에서 나온다. 이러한 경우에 자식은 효에 죽고 신하는 충에 죽으니, 바로 퇴지가 말한 ‘역란(逆亂)에 죽는다.’라는 것이다. 역란에 임하여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면, 위급한 병세를 앞에 두고 내가 죽음에 이르지 않는데도 한 덩어리의 살을 아까워하겠는가? 위급한 병세를 앞에 두고 한 덩어리의 살을 아끼는 자는 역란에 임하여서도 구차하게 생존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퇴지가 또 말하였다.
“위난(危難)에 빠졌을 때 그 충효의 마음을 확고히 하여 구차히 살아나려고 하지 않는 경우라야 그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고 자손에게 작록(爵祿)을 내리는 것이 권면(勸勉)하는 하나의 방도가 될 것이다.”
만일 그 말대로라면 자식이나 신하는 의당 평시에 생활할 때는 효를 다하고 충을 다할 기회가 없을 것이며, 조정에는 위난이 아니면 충신이나 효자를 얻어 쓸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본성과 관련된 일은 살아 있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바가 아닌 것이 없다. 범인은 그 본성을 채우지 못하고 오직 성인이라야 그 본성을 다할 수 있다.허벅지 살을 베어 바치는 한 가지 일은 애초에 본성을 다하는 성인이 할 바가 아니니, 그 말의 폐단을 미루어 단정해 본다면 장차 그 본성을 다하는 것을 살아 있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바라고 하여 성인을 범인들과 차이가 없는 수준으로 폄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고금 천하에 누군들 부모가 없겠으며 누군들 사람의 자식이 아니겠는가마는, 자식의 도리를 다하여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는 대체로 드물며, 재화를 좋아하고 처자만을 아끼면서 부모의 봉양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많고도 많다. 대개 재화는 외물(外物)이고, 처자는 비록 일체이기는 하나 내 몸에 비해서는 구분이 있는데도 오히려 사사로이 이들에게 빠져 있는데, 하물며 그 자신의 몸에 대해서이겠는가?
세상에서 그 자신만을 알고 부모가 계시는 줄을 모르는 자가 어찌 한이 있으랴마는, ‘내게도 그 국 한 그릇을 달라.’고 한 한(漢) 나라 고조(高祖)와 어머니가 만류하는데도 옷소매를 자르고 떠나간 온교(溫嶠) 같은 이는 비록 성제(盛帝)와 명신(名臣)인데도 결심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모가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으니, 호인(鄠人)같은 자는 비록 ‘부모가 있는 줄은 알고 그 자신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고 말하더라도 좋을 것이다.
퇴지는 ‘세상의 궤이(詭異)한 자들은 잔인하고 과감하여 도리에 맞지 않는 행위를 하여 한때의 상을 바라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고 우려하였는데 그런 자들은 참으로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을 효자라고 한다면 이는 그 고을 사람들이 모두 효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고 한 것은 ‘옛날의 성현들은 처한 상황에 따라 행한 바가 달랐으므로 당시 사람이나 후대 사람들이 그 자취에 따라 그 성대한 점만을 들었다.’는 경우가 전혀 아니다. 성현이 학문을 함에 효제(孝悌)로써 근본을 삼지 않는 이가 없지만 인류가 생긴 이래로 오직 순(舜) 임금만을 대효(大孝)라고 칭하고 증삼(曾參)만이 부모의 뜻을 잘 봉양하였다고 하면서 그 나머지는 언급한 바가 없으니, 그렇다면 그 나머지 성현들은 모두 효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한유의 설이 만약 널리 전해진다면 시샘하는 무리들이 뜻을 얻어서 남이 인륜을 닦는 것을 시기하여 그 행실을 덮어버려 천하의 효를 막고 뭇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할 것이니, 해로움이 너무 크지 않겠는가?
혹자는 말하였다.
“퇴지의 의론이 옳다. 평생 고도(古道)를 좋아하여 문사(文詞)의 화려함보다는 이치가 훌륭한 글만을 지었으니, 어찌 호인이 겉과 속이 달라서 효에 돈독하지 못하다는 것 때문에 공박한 것이겠는가? 퇴지가 호인을 공박한 것이 참으로 박절하기는 하거니와 그대가 퇴지를 공박하는 것은 또 어찌 그리도 박절한가?
대개 태고(太古) 때의 크게 질박함이 사라지면서 교묘함과 투박함이 드러났고 크게 흰 바탕을 꾸미게 되면서부터 흑과 백이 구분이 되었다. 한 사람의 효를 온 고을에 표장(表?)하지 말자고 한 것은 바로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효성스럽게 되기를 기다려서이니, 그 뜻이 혼후(渾厚)한 것이다.
일찍이《신당서(新唐書)》를 보니, ‘본초습유(本草拾遺)에서 인육(人肉)으로 고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한 뒤로 부모의 병이 심해지면 허벅지 살을 베는 일이 많아졌는데, 이에 대해 비단을 내리기도 하고 정려를 하기도 하였다.’고 하였으니, 당시에 이미 이러한 풍조가 범람했던 것이다. 이런 것을 가지고 권면한다면 장차 천하 사람들의 허벅지 살을 모두 베어내게 될 것이니, 신체를 바쳐 효를 하도록 가르침으로써 자식의 일반적인 도리를 다하는 것이 장차 효의 축에도 끼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퇴지가 어찌 소견이 없어서 그르다고 했겠는가?”
내가 대답하였다.
“선왕이 백성들을 위하여 교화를 수립한 것이 혼후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곧 ‘선을 표창하고 악을 구별한다.’고 하였고, ‘한 사람을 선하다고 하면 이는 온 고을에 선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고 한 적은 없었다. 음양이 나뉘어짐에 선악이 구분되었으며 선악이 나뉘어지자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용(中庸)으로써 조율하는 것이니, 중용의 도를 잘 하는 백성들이 드물게 된 지가 오래되었다. 그래서 말하기를, ‘사람을 평가할 때는 그 유별로 하는 것이니, 잘못을 보면 그 인(仁)을 알 수 있다.’ 하였던 것이다. 허벅지 살을 베어내는 것이 지나치기는 하지만 이 또한 효자의 부류이다. 불효라고 단정하는 것은 또한 너무 지나치지 않겠는가?
생전에는 봉양하고 병들면 근심하고 여의면 슬퍼하며, 심지어 자신의 신체발부(身體髮膚)도 감히 훼상(毁傷)하지 못하고 종신토록 공경하였으니, 발을 다치자 두문불출했던 일이나 손을 펴보고 불효를 면함을 알았다고 한 것은 바로 효자의 떳떳한 도리이다. 그러나 혹 부득이해서 일신을 군부에게 바쳐야 한다면 가볍기가 기러기의 깃털보다도 심한 점이 있을 것인데, 하물며 허벅지의 살 정도이겠는가? 허벅지를 베어내지 않고도 별다른 약이 있어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나는 굳이 허벅지 살을 베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별다른 약이 없어서 허벅지 살을 베어내지 않을 수 없다면 비록 중용을 지키는 군자에게 죄를 얻게 되더라도 나는 또한 호인처럼 할 것이다.
대개 입언(立言)하는 사람은 중용에 맞는 말을 남겨 전하여 만세토록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내가 호인대(鄠人對)를 보건대 그 말에 폐단이 많으니, 그 글이 두찬(杜撰)으로서 퇴지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심도 든다. 만약 퇴지가 지은 것이 맞는다면 호인의 행위도 중용이 아니지만 퇴지의 대(對) 역시 중용이 아닐 것이다.
<주>
* 호인대 : 당(唐) 나라 때의 대문장가인 한유(韓愈)가 지은 글. 당시에 백성들 사이에서 인육(人肉)을 써서 부모의 병을 고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고 조정에서는 이들을 효자라고 하여 부역과 조세를 면제시켜 주는 등의 포상을 함으로써 이를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자 이 글을 지어 그 폐단을 경계하였다고 한다.
* 내게도 ...... 고조 : 초 나라 패왕 항우가 한 나라 고조 유방과 천하의 패권을 다투면서 유방의 군사를 항복시키기 위하여 인질로 잡고 있던 그 아버지를 삶아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유방이 “너와 나는 형제의 의를 맺었으니, 나의 아버지는 곧 너의 아버지이다. 꼭 삶아 죽이려거든 내게도 그 국 한그릇을 보내주면 좋겠다.”고 한 고사.《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
* 어머니가 ...... 온교 : 진(晋) 나라 때의 온교가 유곤(劉琨)의 명을 받고 사마예(司馬睿)에게 즉위하기를 권하기 위하여 떠나가려고 할 때, 그 어머니가 한사코 만류하였으나 온교는 어머니가 잡은 옷소매를 끊어 버리고 가버렸다는 고사.《진서(晋書)》온교전(溫嶠傳).
* 두문불출했던 일 : 춘추(春秋) 시대 노(魯) 나라의 악정자춘(樂正子春)이 당(堂)을 내려오다가 발을 다쳤는데 수개월이 지나도록 두문불출하며 근심하는 기색이 있자, 제자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부모에게 받은 몸을 온전히 하여 손상되지 않도록 늘 조심하는 것이 효인데, 나는 그 도리를 잊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는 고사.《예기(禮記)》제의(祭義)
* 손을 ...... 알았다 : 증자(曾子)가 병이 깊어지자 제자들을 불러 놓고 “이불을 걷고 나의 손과 발을 열어 보아라. 늘 전전긍긍하면서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근심하였는데, 이제서야 그 근심을 면한 것을 알겠구나.”라고 한 고사.《논어(論語)》 태백(泰伯)>
<원문>
非鄠人對(濯纓先生文集卷之一 / 雜著)
唐之時 鄠人有母疾 剔股以奉之瘳 令尹以聞 旌其門 使勿輸賦 愈曰 母疾則止於烹粉藥石 未聞有毀傷支體以爲養 其爲不孝 得無甚乎 苟有合於孝道 不當旌門 生人之所宜爲 曷足爲異 愚竊非之 凡爲人子 父母有疾 千方萬藥 必獲一效 至於迎巫祝禱鬼神 雖揣其妖妄 亦將無所不爲矣 就令善醫者引方書 以爲非人肉合藥 無良云爾 將以彼爲誕 坐視其母之死而不從耶 萬一冀其復生 而不惜支體耶 吾之支體 卽親之遺體 古人以全歸爲孝 則傷其支體 固傷於孝 然吾惜吾之支體 則他人亦自惜其支體 誰肯毀其支體 爲他人母哉 然則藥終不可得 而疾終不可愈 就令退之 不幸而處此 當如何 君子未嘗不惜其身 然此身有時惜不得者 常出於不得已之變 於是而子死於孝 臣死於忠 卽退之所謂死於逆亂者也 臨逆亂 不惜身命 固也 當危疾 吾不至於死 而顧惜一塊肉乎 當危疾 顧惜塊肉者 其臨逆亂 不苟生乎 退之 又以陷危難 能固其忠孝而不苟生 然後旌表爵名 斯爲勸已 如是則爲子爲臣 當平居 無盡孝盡忠之地矣 如是則朝家非危難 亦不得忠臣孝子之用矣 況性分內事 莫非生人之所宜爲也 常人不能充其性 惟聖人能盡其性 剔股一事 初非盡性者之所爲 推其言之弊而斷之 則將以盡其性者 生人之所宜爲 而夷聖人於常人 不異之地耶 噫 古今天下 誰無父母 誰非人子 能盡子道而孝於父母者蓋寡 好貨財私妻子 不顧父母之養者比比 夫貨財外物 妻子雖一體 視吾身有分而尙私之 況於其身乎 世之知有其身 而不知有父母者何限 杯羹漢祖 截裾溫嶠 雖以盛帝名臣 到頭一念 猶不知有父母矣 若鄠人者 雖謂知有其母而不知有其身 可矣 所患世之詭異者 殘忍果敢 爲不經之行 要一時之賞者或有之 是誠可罪也 如曰以一人爲孝 是辨一邑皆無孝者 尤非古之聖賢 因所遇不同道 故時之人後之人 循其跡擧其盛 聖賢爲學 莫不於孝悌上立本 而自生民以來 獨稱舜爲大孝 曾參養志 其餘無憑 聖賢皆非孝者耶 愈說若行 媢嫉者得志 將忌人修而蔽其行 阻天下之孝 駭衆人之聽 其爲害不旣多乎 或曰 退之立言 是也 平生好古道 爲理勝之文 豈鄠人非誠於孝 內外殊觀而攻之迫耶 退之攻鄠人誠迫 而子攻退之又何迫耶 大樸散而巧拙形 大素文而黑白分 夫不表一人之孝於一邑者 待一邑之人咸孝也 其意渾矣 嘗見新唐史書 以人肉治羸疾 父母疾多 刲股肉以進 或給帛 或旌門 當時已不勝濫矣 以此爲勸 則將盡刖天下之人 不可以身敎 而方盡子職之常者 將不得爲孝矣 退之 豈無所見而言非耶 對曰 先王爲民立敎 非不渾且厚矣 乃曰旌別淑慝 未嘗曰以一人爲淑 是辨一邑無善也 陰陽判而善惡分 善惡旣分 不能無過不及之差 故律之以中庸 中庸之道 民鮮能久矣 故曰觀人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 剔股雖過 斯亦孝之黨也 斷以不孝 不亦過乎 生其養 病其憂 歿其哀 至於所屬之髮膚 不敢毀傷 敬以終身 傷足不出 啓手知免 乃孝子之常經也 或不得已而以一身致於君父 則輕甚鴻毛者有之 況於股肉哉 股不剔而藥有別種 可治母疾 則吾不必矯情以剔股也 藥無別種 而股不可不剔 則雖得罪於中庸之君子 吾亦爲鄠人矣 夫立言者 要於中庸 垂之不朽 通萬世而無弊 吾觀鄠人對 其言多弊 吾又疑其杜撰 而非出於退之也 不然 鄠人之行 旣非中庸 而退之之對 亦非中庸也
과욕은 금물
글쓴이 : 김기빈
제1화 너무 먹어도 탈
나는 농사를 짓고부터 한번도 소를 키운 적이 없다. 봄철에 동분서주하며 이웃들에게 소를 빌어 밭갈이 할 때마다 사람들은 모두 너무 심하다고 원망하였고, 나 자신도 먹고살기 위하여 남에게 폐끼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지난 을묘년(1615)에 흉년이 들어 쌀값이 폭등하자 소작료로 받은 쌀을 가지고 암소 한 마리를 구입하였다. 그 이듬해 여름은 먹을 것이 좀 넉넉지 못한 게 흠이었지 심사(心事)는 맑고 편안하였다.
동짓달 초사흘에 잠포(岑浦)에 사는 소작인이 콩을 가지고 왔다. 한밤중이 되니 소가 코에 꿴 고삐를 물어 끊고서 섬돌에 올라가 콩을 훔쳐 먹었는데, 너무 많이 먹은 나머지 사흘이 지나 배가 터져 죽었다.
나는 게으른 비복들이 여물을 제때 주지 못하여 소가 굶어죽지 않을까 염려한 적은 있지만, 배불러 죽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소는 무지한 짐승이니 나무랄 것이 없지만 만물의 영장인 사람 중에도 배불러 죽은 우환이 있다.
「시경」에는 '벼슬을 받아 사양할 줄 모르니 필경 몸을 망치리라.'라는 말이 보이고, 옛 글에도 '어린아이의 병은 너무 많이 먹는데서 생긴다.'라는 말이 보인다. 참으로 경계할 일이다.
<원문>
牛戒(睡隱集卷三 / [雜著] )
自余爲農夫 未嘗畜一牛 每春月耕稼 東西借於隣 隣人皆怨乞貸之已甚 而余以口腹累人爲恥 乙卯不稔 米價騰踊 乃以租爲米 買得一㹀牛 丙辰春夏 頗有食不足之歎 而心事則淸寧也 至月初三日 岑浦佃人運豆至家 牛夜半齧斷鼻索 上階偸食 極其欲乃止 越三日腸裂而死 余嘗恨婢僕惰窳 芻秣失時 恐牛之餓而死 孰知其飽而死也 牛無知 固不足責 而人爲萬物之靈 或有飽死之患 詩曰 受祿不讓 至于已斯亡 傳曰 嬰兒之病 在於過飽 吁其戒也已 遂書之以自戒
제2화 혹 떼려다 혹 붙이기
여송(呂宋)은 동해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이다. 지역이 치우쳐있는데다 물살 또한 빠르고 급한 관계로 백성 중에 혹이 난 사람이 많다.
어느 사람이 이마에 혹이 생겼다. 거의 항아리만한 크기의 혹이 머리를 눌러 일어날 수 없게 되자 처자는 부끄럽게 여겨 그를 쫓아내었다.
쫓겨나 산 속에서 지낸 지 며칠이 되었다. 한밤중이 되자 산도깨비들이 떼를 지어 북을 치고 시끄럽게 떠들면서 멀리서부터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두려운 마음을 떨쳐버리려고 북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도깨비들이 그를 보고는 서로 혀를 내두르며 말하기를,
"이상하구나. 사람이 살지 않는 산 속에 이처럼 같이 놀만한 좋은 벗이 있다니."
하고는 계속해서 북을 쳐대니 그도 따라서 계속 춤을 추었다.
먼동이 틀 무렵 도깨비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 도깨비들은 사람과 달리 해가 뜨고 나면 함께 있을 수 없다. 내일 밤 꼭 다시 오려고 하는데 그대도 다시 올 수 있겠는가?"
하니, 그도 그러마고 하였다.
도깨비들은 세 번씩이나 반복해 물었고, 그도 그때마다 승낙하였으나 도깨비들은 그래도 미심쩍은지,
"사람의 마음은 끝까지 믿기 어려우니, 그대의 혹을 떼어서 약속의 징표로 삼자."
하고, 즉시 혹을 떼어 가지고 갔다. 그는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겨 부리나케 달려서 집으로 돌아오니 본래의 모습으로 되어 있었다. 처자는 반갑게 맞이하였고 이 소문은 이웃마을에까지 자자하게 퍼졌다.
그 마을사람 중에는 앞 사람과 비슷한 크기의 혹이 나있는 사람이 또 있었다. 그는 산에서 혹을 떼고 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망설이다 찾아가 물었고, 사연을 모두 듣고나자 매우 기뻐하였다.
곧장 혹을 떼고 온 이가 묵었다는 산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밤중이 되자 도깨비들이 과연 북을 치고 시끄럽게 떠들면서 다가왔다. 그는 미리 일어나서 들은 대로 정신 없이 춤을 추었다. 도깨비들이 매우 즐거워하며,
"신용이 있군."
하고 함께 실컷 놀다가 헤어졌다. 떠나면서 그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약속을 어길까해서 혹을 떼어가 징표를 삼았는데, 자네가 이미 왔으니 혹은 다시 돌려주겠네."
하고 즉시 앞서 가져갔던 혹을 그의 이마에 붙여놓고 가버렸다. 그 혹의 모양은 마치 두 채의 집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대성통곡하면서,
"한 개의 혹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둘이나 되다니!"
하고는 드디어 골짜기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이상은 일본스님 순수좌(舜首座)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나는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살아 돌아왔기에 이런 태평한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고, 나 스스로도 세상에 나갈 생각을 끊은 지가 오래되어 일찍이 벼슬했던 사실까지도 까마득히 잊어 버렸다. 가까운 이들이 더러,
"그대가 벼슬에 뜻을 끊은 것은 환관이 여자에 대한 마음을 끊은 것과 흡사하니, 차라리 장차 벼슬을 구하여 버림받은 치욕을 씻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고 권한다. 그때마다 나는 대답하기를,
"설사 구한다 하더라도 누가 곧바로 주겠는가. 전날의 치욕도 아직 씻지 못한 형편에서 도리어 다시 새로운 치욕을 더 얻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이것은 혹을 떼려다가 혹을 두 개를 붙인 그 사람의 꼴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니, 권하던 이가 크게 한 숨을 쉬고 가버렸다.
<원문>
瘤戒(睡隱集卷三/[雜著])
呂宋 東海中小國也 地偏而水又湍駛 故人多癭瘤 某甲額■生瘤 幾如甕盎 抑首不能起 其妻子羞而逐之 寢息山間者數日 夜半 山鬼擊鼓群譟 自遠而近 甲不勝其怖 應節起舞 示若無懼者然 山鬼吐舌相顧曰 異哉 不意空山中 有此良朋之可與娛者 因擊鼓不已 甲亦舞不已 天欲明 鬼謂甲曰 我鬼非人 日出不可留 來夜當復來 公亦能復來耶 甲曰諾 鬼三問甲三諾 鬼猶不信曰 人情難保 請取公瘤以爲質 遂枿取瘤去 甲喜幸走倒 至家則全人矣 妻子改觀 隣里聳傳 某乙額又有瘤 幾如某甲之大 聞甲之失瘤 盤跚往問之 甲悉告之故 喜甚 直造甲所寢息地而胥之 夜半 山鬼果擊鼓讙叫而至 乙豫起亂舞 一如某甲之爲 山鬼至 喜曰有信哉 相與盡懽而罷 遂謂乙曰 恐公失信 故取瘤爲信 公旣能來 可還公瘤 遂取甲瘤安之乙額而去 對峙如雙家 乙大慟曰 一瘤之不堪 而況兩瘤耶 遂自經於溝瀆死 日東僧舜首痤 爲余談是事 余以俘擄生還 見棄於昭世 余又與世相忘 久而不知身之曾忝一命也 所親或勸之曰 君之絶意於榮進 譬如黃門之絶意於房室 盍且求之 以洒廢棄之恥乎 余應之曰 籍令求之 誰卽與之 前恥之未洒 而竊恐更得後恥 此與某乙欲去一瘤而更得雙瘤何異 勸者太息而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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