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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014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www.itkc.or.kr
계획을 잘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혼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월간계획, 주간계획을 세우고 매일 무엇을 공부했는지 체크하시기 바랍니다.
공부의 차례
글쓴이 : 김성애
어린이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아이가 말을 할 정도가 되면 반드시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친다. 그러다 글자를 붙여 읽을 정도가 되면 바로 《사략》 1권이나 《통감》 1권을 가르치는데, 많이 읽히는 경우가 서한기(西漢紀)까지, 더 많이 읽히는 경우는 동한기(東漢紀)나 촉한기(蜀漢紀)까지이다. 그리고 《맹자》와 《시경》 국풍(國風)을 가르치다가 여름이 되면 《당음(唐音)》 중의 절구(絶句)를 가르치고, 다음에 《당음》 중 장편시(長篇詩)를 가르친다. 그러면서 글을 짓게 하여 오언시(五言詩), 칠언시(七言詩)와 장문을 몇 줄 써보게 한다. 15세가 넘어 관례(冠禮)를 하고 장가를 들면 우둔해서 더 이상 깨닫지 못하는 자는 여기에서 글공부를 그만두고, 조금 재주가 있는 자는 《사문유취》를 섭렵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과거 급제한 글을 본다. 그래서 시에 운자(韻字)나 달 줄 알고 글줄이나 지을 줄 알게 되면 바로 과장(科場)에 들어가 과거 볼 계책을 하니, 과거에 급제하면 부형들은 기뻐 자랑하고, 그 자신도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긴다.
이 때문에 비록 글 잘한다는 이름이 나서 어린 나이에 등과한 자라 할지라도 옛사람의 문자를 인용하면서 그것이 어떤 책에서 나왔는지 본래 무슨 뜻이었는지도 모르고, 한편의 시나 문장을 엮어 이루면서도 그것이 결국 무슨 도리를 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글을 썼다 하면 글자를 잘못 써서 가소롭지 않은 것이 없고, 뜻풀이는 어느 곳 할 것 없이 다 구두를 잘못 붙여 엉터리가 되고 만다. 더구나 심성설(心性說)이나 이기설(理氣說)처럼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워 위로 천리(天理)에 도달하는 일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도무지 깜깜하고 엉성하기 짝이 없으니 한탄스러울 뿐이다. 이제 가르치고 배우는 차례를 정함으로써 높고 원대한 경지까지 학문을 하는 바탕으로 삼고자 하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지극히 우둔한 자야 참으로 말할 것도 없겠지만, 학문에 뜻을 둔 자는 이 글을 통해서 선후와 본말의 차례를 알게 되기를 바란다.
어린이가 글을 입에 익히려면 《사략》 첫 권을 배우는 것이 실로 필수적인 과정이지만 그 가르치는 순서는 다음과 같이 하여야 한다. 먼저 《소학》을 읽어 입교, 명륜, 경신 공부가 학문을 하는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알고, 다음으로 《대학》을 읽어 삼강령, 팔조목의 순서와 구조를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논어》를 읽어 성인이 말씀하신 내용과 제자들이 문답하고 변론한 것이 모두 지극한 이치임을 알아야 하고, 다음으로 《맹자》를 읽어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는 것, 성인의 도를 지키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 및 사단설(四端說)과 양기설(養氣說) 등에 대해 알며, 다음으로 《중용》을 읽어 성(性), 도(道), 교(敎)의 개념과 중화(中和)를 이루는 것이 성인의 지극한 공이라는 것, 그리고 처음에 하나의 이치로 시작하여 중도에 천만 가지 일로 나뉘고 결국 하나의 이치로 총괄되는 묘리를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시경》을 읽어서 삼대시대 선왕의 교화와 국풍, 대아, 소아, 시의 정체(正體)와 변체(變體) 및 사람들에게 선심을 감발시키고 악을 징계하게 만드는 기미를 알아야 하고, 다음으로 《서경》을 읽어서 요순 때부터 전해져 내려온 심법(心法)과 이윤(伊尹), 부열(傅說), 주공(周公), 소공(召公)이 치세를 보필한 훌륭한 계책을 알아야 하며, 다음으로 《역경》을 읽어서 길흉(吉凶), 회린(悔吝), 진퇴(進退), 존망(存亡)의 도 및 역(易)을 만든 복희, 문왕, 주공, 공자 등 네 분의 성인과 주석을 단 주자, 정자 두 현인이 오묘한 이치를 궁구하여 깊은 뜻을 밝게 천명한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춘추》를 읽어 성인이 역사에서 쓸 것은 쓰고 삭제할 것은 삭제해 포폄을 가하여 천하의 사(邪)와 정(正)을 정한 것이 후대 백왕이 법으로 삼아야 할 의리라는 것을 알고, 다음으로 《예기》를 읽어 삼백 가지의 경례(經禮)와 삼천 가지의 곡례(曲禮)를 비롯해 선왕과 성인이 남기신 제도와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경서를 읽는 차례이다.
《소학》을 읽을 때에는 《효경》을 같이 읽고, 사서(四書)를 읽을 때에는 《혹문》을 같이 읽고 《주역》을 읽을 때는 《역학계몽》을 같이 읽고, 《춘추》를 읽을 때는 《공양전》, 《곡량전》, 《좌전》 등의 춘추 삼전과 《국어》를 같이 읽고, 《예기》를 읽을 때는 《주례》, 《의례》, 《가례》를 같이 읽어야 한다. 그리고 《공자가어》와 《근사록》, 《심경》, 《이정전서》, 《주자대전》, 《주자어류》, 《성리대전》 등의 책을 읽어서 그 이치가 통하는 것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완전히 꿰뚫으며 또한 반드시 예전에 배운 것을 되새겨보고 연역해보아 참고하여 바로잡아야 한다. 역사도 반드시 알아야 할 부분이므로 주자의 《강목》,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 등과 이후 역대의 중국 사서(史書)로부터 우리나라 역사까지 보아야 한다. 문장가에 대해서도 알아두어야 하므로 《초사》와 《전국책》, 《문선》, 이백과 두보의 시, 《당송팔가문》을 보고 제자백가의 책들까지 섭렵하여 그 학문의 범주를 넓혀야 한다. 이단(異端)의 책들은 보지 않는 것이 좋지만 그 학문을 제쳐두고 그 문장만 보아서 문장의 한 도움으로 삼는 것 정도는 괜찮다.
공부의 근본을 확립하여 의리를 바로잡고 견문을 넓힌 뒤에는 마음으로 구상하여 손으로 글을 써내려 가는 데 장강대하와 같이 조금도 막힘이 없을 것이니, 한유(韓愈)가 말한 인의(仁義)로운 사람은 그 말이 성대하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저 과거급제에 필요한 글공부는 부수적인 일일 뿐이니 어찌 굳이 심력을 허비해가며 다른 사람들을 따라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 정도 글은 잘하려고 애쓰지 않더라도 저절로 잘하게 될 것이다. 공부하는 과정을 정하는 데 대해서는 옛날 구양수(歐陽脩)는 글자를 계산해서 하루에 반드시 몇 글자를 공부하는 방법을 만들었고 정단례(程端禮)는 날짜를 정해 과정을 마치는 방법을 썼지만 후학들이 그 말대로 따랐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다만 차례를 정해서 공부하는 선후의 순서만 잘못되지 않으면 될 것이니, 그 성취하는 시기와 수준의 차이로 말하자면 공부하는 당사자의 뜻과 재주에 달려 있을 뿐이다. 아아, 우리의 스승이신 주자께서 독서법에 대해 말씀하기를, “몸을 바르게 하고 서책을 대하여 한자 한자 상세하게 천천히 보면서 자세하고 분명하게 읽어야 한다. 한자 한자 맑은 소리로 읽되 한 글자도 잘못 읽어서는 안 되며 한 글자도 빠Em려서는 안 되며 한 글자도 더 읽어서는 안 되며, 한 글자도 순서를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되며, 억지로 암기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다만 여러 번 많이 읽어서 자연히 입에 오르게 되면 오래되어도 잊지 않게 된다.” 라고 하면서 옛사람이 말한 “책을 읽을 때 천 번을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는 말을 인용하셨다. 또 말씀하기를, “독서에는 세 가지 집중해야 할 것이 있으니 마음을 집중하고 눈을 집중하고 입을 집중하여야 한다.”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단정하고 엄숙하게 똑바로 앉아서 성현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한다면 마음이 안정되어 의리를 연구하기 쉬울 것이다. 많이 볼 욕심을 내고 널리 보기를 힘써서 대충대충 섭렵하여 겨우 눈만 스쳐보고 지나가면서 곧 이미 통달하였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즉시 재차 생각해보고 생각해보아도 통하지 않거든 곧 작은 책자를 준비해 두었다가 날마다 뽑아내어 기록하여 시간이 날 때마다 살펴보고 자문해야 한다. 별 연고 없이 출입하지 말며, 한가한 이야기를 적게 해야 하니 이는 시간만 낭비할 뿐이며, 잡서를 보지 말아야 하니 이는 정력만 분산시킬 뿐이다.”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독서는 반드시 마음을 비우고 안목을 높게 가지고 뜻을 크게 먹고 해야 한다.” 하였다.
가령 주자가 독서를 모른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말씀들이 어찌 독서의 법령이 아니겠는가.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세상에 많고 많은 책들을 어떻게 다 볼 수 있겠는가. 또 사람이 질병이나 사정이 없을 수 없고 집안일을 처리하느라 골몰하기도 하니 아무리 독서하는 데 온 뜻을 쏟고자 하더라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대중들이 하는 대로 따라 요행히 과거에 합격하여 가문을 보존하고 먹고살 계책이나 이루는 게 낫다.” 한다. 이는 참으로 자신을 해치고 포기하는 방탕하고 게으른 자이니 요순의 도에 함께 들어갈 수 없는 자이다. 노동을 하며 독서를 병행한 것은 예전부터 그러했으니 옛사람들 중에는 낮에는 밭갈고 밤에 공부한 자도 있었으며 경서를 보며 김매는 자도 있었으며, 땔감을 지고 다니며 글을 외운 자도 있었으며 병중에 독서한 자도 있었으며, 옥중에서 글을 읽은 자도 있었는데, 어찌 평생 사정에 구애되어 읽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경우만 있겠는가. 단지 공부에 뜻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뜻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재주는 그 다음이라고.
이 글은 한국문집총간 256집 윤기(尹愭)의 《무명자집(無名子集)》 10책에 나오는 글로, 조선시대에 학자들이 공부한 순서에 대해 쓴 것이다. 오늘날 예전처럼 쇄소응대(灑掃應對)부터 시작하여 성현의 도를 배우는 공부를 바라기는 어렵지만, 선인들이 읽었던 책들을 그대로 밟아보는 것이 그 사상과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전통시대의 교육과정은 나름대로 몇 백 년 동안 검증과정을 거쳤으며 사실상 본회 연수부의 커리큘럼도 일정 부분은 이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든 한문 공부를 시작해보기로 다짐한 분들은 나름대로 과정을 정해 공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연히 동양학이나 한문에 대한 관심만 가지고서 대뜸 《주역》이나 《장자》의 번역서부터 들고 시작하다 그만두는 분들을 보면 조금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학문은 어떤 분야이든지 기초와 입문의 단계가 있는 법이다. 위에서 제시한 독서의 순서가, 이제 한문을 배워 우리 고전을 익히고자 하는 분들에게 한 방향을 시사해줄 수 있으리라 여겨 소개해 본다.
<원문>
讀書次第(無名子集文稿册十/[文])
世之敎兒者,兒能言,則必敎以周興嗣《千字文》;能屬字讀,則乃敎以《史略》初卷、《通鑑》初卷;多者及於《西漢紀》;又多者及於東漢、蜀漢。而又敎以《孟子》、《詩ㆍ國風》,當夏則初敎以《唐音》絶句,次敎以《唐音》長篇,又使之屬文爲五言、七言及行文。
及其冠而娶,則愚不能悟者止於斯,其稍有才者乃涉獵類聚書,看東人科作. 詩能押韻,文能成行,則便入塲爲決科計,其父兄喜而誇之,渠亦自以爲能事畢矣. 是故雖號爲能文,早登科甲者,引用古人文字,而不知其出於何書、本是何義;綴就一篇詩文,而不知其成甚道理、有底歸趣. 出言則麞獵杖銀,無非可笑;見解則鴻鴈麋鹿,到處皆是,而況心性理氣之說、下學上達之事,都是黑窣窣地,可歎已!今定敎學次第,以爲行遠升高之資,其下愚不移者,固無足道,而有志者尙庶幾因此而知先後本末之序矣.
若欲習小兒之口,則《史略》初卷固所不可廢者,而敎之之序則先讀《小學》,以知立敎、明倫、敬身之爲爲學之本.
次讀《大學》,以知三綱、八條之次序間架.
次讀《論語》,以知聖人所言與弟子問辨之無非至理.
次讀《孟子》,以知遏人欲、存天理、閑聖道、闢異端及四端、養氣等說.
次讀《中庸》,以知性、道、敎、致中和之爲聖人極功,而始一理、中萬事、終一理之妙.
次讀《詩》,以知先王敎化、風雅正變及感發懲創之機.
次讀《書》,以知堯、舜以來相傳之心法與夫伊、傅、周、召輔治之嘉謨.
次讀《易》,以知吉凶ㆍ悔吝ㆍ進退ㆍ存亡之道、四聖二賢微顯闡幽之訓.
次讀《春秋》,以知聖人所以筆削褒貶,定天下邪正,爲百王大法之義.
次讀《禮記》,以知三百ㆍ三千之有經有曲、先王ㆍ先聖之遺制遺訓.
此其讀經次序,而其讀《小學》也,又讀《孝經》;其讀四書也,又讀《或問》;其讀《易》也,又兼《啓蒙》;其讀《春秋》也,又兼三傳、《國語》;其讀《禮記》也,又兼《周禮》、《儀禮》、《家禮》. 而又讀《家語》、《近思錄》、《心經》、《二程全書》、《朱子大全》、《語類》、《性理大全》等書,以會其通,以極其趣,而亦必溫故而繹前,參互而考訂.
又不可以不知史也. 於是兼看《綱目》及馬、班以下歷代諸史,以至於東史.
又不可以不知文章家也. 於是兼看《楚辭》、《戰國策》、《文選》、李ㆍ杜詩、唐ㆍ宋八大家,以及諸子百家書以極其博,而若異端之書不觀可也. 置其學,只觀其文,以爲文章之一助亦可也.
夫旣立其本,正其義,博其見,然後取於心而注於手,則浩乎其沛然,退之所謂“仁義之人,其言藹如”者也.
彼科文,乃餘事耳,顧何必費心力,效他顰?而終亦不期工而自工矣.
昔歐陽永叔作計字法,程端禮作分年法,而未聞後學之依其言,則未若只定次第,使不失先後之序,而若其成就之早晩、高下,則在乎其志與其才耳.
嗚呼!朱子,我師也. 其言讀書曰:“正身體,對書冊,詳緩看字,子細分明讀之. 須要讀得字字響亮,不可誤一字,不可少一字,不可多一字,不可倒一字,不可牽强暗記. 只要多誦遍數,自然上口,久遠不忘. ” 遂引古人“讀書千遍,其義自見”之語. 又曰:“讀書有三到,謂心到、眼到、口到. ” 又曰:“端莊正坐如對聖賢,則心定而義理易究. 不可貪多務廣,涉獵鹵莾,纔看過了,便謂已通. 小有疑處,卽更思索,思索不通,卽置小冊子,逐日抄記,以時省閱資問. 無故不須出入,少說、閑話,恐廢光陰;勿觀雜書,恐分精力. ” 又曰:“讀書,須虛着心,高着眼,大着肚. ” 使朱子而不知讀書則已,不然則是豈非讀書之三尺乎?
或曰:“世間許多書,何以讀得盡?且人不能無疾病、事故,或汩於家務,雖欲專意讀書,有不可得,不若隨衆人之爲幸得決科,保門戶,成家計耳. ” 此眞暴棄放惰,不可與入堯、舜之道者也. 版築讀書尙矣,古人有朝耕夜讀者,有帶經而鋤者,有擔薪行誦者,有病中讀書者,有獄中受書者,豈有長時拘掣於事故欲讀不能者耶?直患無志耳. 吾故曰:“志至焉,才次焉. ”
사실과 해석-『동래박의(東萊博議)』의 경우
글쓴이 : 조경구
1. 들어가는 말
『동래박의』는 송(宋)나라 학자인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1137-1181) 선생이 『춘추좌씨전』에 기록된 사건들에 대해서, 자신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평론을 가한 일종의 ‘역사 칼럼집’이라고 할 수 있다. 『동래박의』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사건들의 이면을 파헤치고 내용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논리적으로 서술해 주는 책으로 정평이 나 있다.아래에 인용하는 글은 『동래박의』 앞부분에 있는, 「정장공과 공숙단[鄭莊公共叔段]」, 「영고숙이 무강을 만나게 하다[潁考叔還武姜]」, 「영고숙이 수레를 다투다[潁考叔爭車]」 이렇게 세 편이다. 논의의 배경 이야기가 되는 『춘추좌씨전』의 기사를 소개하고, 그 기사에 대한 동래 선생의 분석 및 평론을 요약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2. 세상을 속이려 했지만-정장공과 공숙단[鄭莊公共叔段]
【배경 이야기】
정나라 무공(武公)이 부인 강씨[武姜]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강씨는 큰아들-뒷날 장공(莊公)으로 즉위함 - 은 미워하고 둘째인 공숙단(共叔段)만을 사랑하여, 그를 태자로 세우자고 남편 무공에게 여러 번 청하였지만, 무공은 끝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무공이 죽은 후 장공이 즉위하자 어머니 강씨는 공숙단에게 땅을 봉해줄 것을 장공에게 요청하였다. 장공이 공숙단을 경(京)땅에 봉해주자 공숙단은 그곳에 가서 살면서 성벽을 높이 쌓았다. 이를 알게 된 장공의 신하 채중(祭仲)이 말하였다. “지방 도읍인데 성벽 높이를 백 치(雉)가 넘게 쌓는다면 나라에 위협이 될 것입니다.” 장공이 말하였다. “강씨가 그렇게 하고자 하는데 어쩔 수 있겠소?” 채중이 말하였다. “강씨의 욕심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장공이 말하였다. “불의를 많이 행하면 반드시 자멸할 것이니 그대는 잠시 기다려 보게.”이윽고 공숙단은 서비(西鄙)와 북비(北鄙) 두 곳에 명령을 내려 장공을 배반하고 자기를 따르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자인 거(?)가 장공에게 말하였다. “나라에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장차 어찌하시렵니까?” 장공이 말하였다. “내버려두어라. 재앙이 저절로 이를 것이다.” 공숙단이 마침내 두 고을을 자기 것으로 만들자 공자 거가 또 말하였다. “이제 칠 때가 되었습니다. 저렇게 세력이 두터워졌으니 장차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아질 것입니다.” 장공이 말하였다. “의롭지도 않고 친하지도 않은 집단이 무리가 많아진다면 장차 무너질 것이다.”공숙단이 본격적으로 정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장공은 공자 거에게 수레 이백 승을 이끌고 경 땅을 치도록 하였다. 그러자 경 땅 사람들이 공숙단에게 반기를 들었다. 공숙단이 언(?)이라는 곳으로 도망가자 장공은 또 그를 언에 가서 쳤다. 그러자 공숙단은 다시 공(共) 땅으로 도망쳤다. (<좌전> 은공 원년의 기사.)
장공은 나면서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으니 매우 불행한 왕이다. 게다가 동생만 감싸고돌던 어머니는 방자해진 그 동생과 함께 마침내 반역을 일으키고 장공은 어쩔 수 없이 형제간에 정벌을 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당시 정나라 사람들도 장공을, ‘차마 어머니를 이기지 못하여 아우를 해치게 되었고’, ‘아우의 작은 잘못을 차마 처벌하지 못하여 마침내 큰 어지러움을 당하게 되었다’고 동정하기까지 한다. 위의 기사를 보고 나면 보통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동래 선생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정장공과 공숙단」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낚시꾼이 물고기를 속이지 물고기가 어떻게 낚시꾼을 속이며, 사냥꾼이 짐승을 속이지 짐승이 어떻게 사냥꾼을 속이겠는가? 이렇듯이 장공이 공숙단을 속이지 공숙단이 어떻게 장공을 속이겠는가? 또 낚시 바늘에 미끼를 달아서 물고기를 유인하는 것은 낚시꾼이고, 함정을 파서 짐승을 유인하는 것은 사냥꾼인데, 사람들은 낚시꾼을 탓하지 않고 물고기가 미끼를 탐낸 것을 탓하며, 사냥꾼을 탓하지 않고 짐승이 함정에 빠진 것을 탓한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동래 선생의 논리에 따르면 장공은 공숙단을 속이려는 교활한 낚시꾼이요 사냥꾼이며, 공숙단은 이에 속아 넘어간 어리석은 한 마리 물고기요 짐승일 뿐이다. 장공은 동생을 죽여 없애려고 우선 자기 속마음을 감추어 동생이 욕심대로 하도록 놓아두고 그의 악을 점점 키워서 마침내 반란까지 일으키게 만들었다. 이 대목에서 동래 선생은 심지어 장공의 속마음을 이렇게까지 유추해 낸다.
죄가 작을 때 서둘러 그를 다스리면 사람들이 나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내버려두었다가 그의 악행이 커져서 훤히 드러났을 때 다스리면 사람들이 나의 행위에 대해서 별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채중이나 공자 거는 이런 장공의 음흉한 속마음을 알지 못하고, 공숙단의 도성이 법도를 넘었다고 간언을 하고, 공숙단이 백성들을 많이 얻을까봐 간언을 하였으며, 또 정나라 사람들은 장공을 오히려 동정하기까지 하였으니, 동래 선생이 볼 때 이는 온 조정의 경, 대부들과 온 나라 사람들, 더 나아가 천하 후세 사람들까지 모두 장공의 계책에 빠진 것이다. 온 세상을 상대로 속임수를 썼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사기극을 벌인 셈이다.그렇다면 장공의 속임수는 성공을 거둔 것인가? 이미 동래 선생에게 그 마음을 간파당했으니 실패한 것이다. 게다가 동래 선생의 논리에 따르면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해치기까지 하였다. 남을 속이려면 반드시 먼저 자기 자신을 속여야 하는 법. 장공은 남을 속이기 위해 자신을 속인, 그래서 결과적으로 자신이 더 많은 해를 입었던 것이다. 이 글은 이렇게 끝난다.
속임을 당한 자가 잃은 것은 매우 가볍지만 속인 자가 잃은 것은 매우 무거우니, 이는 낚시꾼이 스스로 미끼를 먹은 꼴이요, 사냥꾼이 스스로 함정에 빠진 꼴이라. 천하의 가장 졸렬한 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럴 수 있으랴? 그러므로 내가 처음에는 장공을 천하의 가장 음험한 자로 규정하고 시작하였으나, 끝에서는 장공을 천하의 가장 졸렬한 자로 규정하고 마무리짓노라.
3. 잘못을 고치는 방법-영고숙이 무강을 만나게 하다[潁考叔還武姜]
【배경 이야기】
정장공은 마침내 어머니인 강씨를 영(潁) 땅에 있는 성에 가두고 나서 말하기를, “황천에 이르기 전에는 결코 어머니를 만나지 않겠다[不及黃泉 無相見也]”고 맹세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렇게 말한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영고숙(潁考叔)이 이것을 알고는 예를 갖추어 장공을 찾아뵈었다.
장공이 그와 함께 식사를 하는데 영고숙은 음식을 먹으면서 고기는 먹지 않고 옆에 따로 놓아두는 것이었다. 장공이 그 까닭을 묻자 영고숙이 대답하였다. “소인에게 어머니가 계신데 늘 제가 먹는 것을 맛보십니다. 그런데 아직 임금님의 국은 맛보지 못하셨으니 이걸 가져다 드리고 싶습니다.” 이를 보고 장공이 말하였다. “너는 가져다 드릴 어머니가 있지만 나는 없구나.” 그러자 영고숙이 말하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요?” 장공은 자신이 어머니를 두고 했던 맹세를 말해주고 또 이렇게 한 것을 후회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영고숙이 대답하였다. “임금께서는 무엇을 근심하십니까? 만약 땅을 파서 황토물이 나오는 곳[黃泉]에 이르러 굴을 파고 그 속에 들어가 서로 만난다면 그 누가 맹세를 어겼다고 하겠습니까?” 장공이 그 말대로 따라 행하니 마침내 모자 사이가 옛날과 같이 되었다.(<좌전> 은공 원년의 기사.)
아우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어머니에 대해 분노한 장공은 ‘황천에 이르기 전에는 결코 어머니를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분노의 폭발일 뿐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천리(天理)는 거스를 수 없는 법이라 장공은 곧 후회하지만, 임금이 한 번 했던 맹세를 되돌릴 수도 없고 하여 갈등과 번민에 빠진다. 이를 안 영고숙이 음식을 가지고 장공을 설득해서 어머니인 무강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준 것을 놓고 동래 선생은 천성을 회복시킨 것이라 하였다. 하루아침의 분노하는 마음이 가라앉자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솟아오르니 이는 바로 장공이 가지고 있던 천성이요, 영고숙은 단지 그 천성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마음의 실마리를 끌어내 드러나도록 해준 것뿐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영고숙은 그렇게 함으로써 장공의 커다란 악을 뒤집어 세상을 뒤덮을만한 큰 선으로 돌려놓았다. 그러나 영고숙에 대한 칭찬은 거기까지이다. 동래 선생은 이렇게 뒤를 잇는다.
아아, 애석하구나. 영고숙은 그 본질은 알았다지만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줄은 몰랐으니 이 점에 유감이 없을 수 없겠다. 장공이 영고숙에게 어머니를 두고 맹세한 일을 말했을 때 영고숙은 왜 이렇게 말하지 않았단 말인가? “취했을 때 한 말은 술이 깬 뒤에는 실행하지 않는 것이요, 미쳤을 때 했던 행동은 미친병이 나은 뒤에는 하지 않는 법입니다. 이미 술이 깼는데도 굳이 그것을 실행한다면 이는 술이 덜 깬 것이요, 미친병이 다 나았는데 아직도 그런 행동을 한다면 그 미친병은 틀림없이 아직 낫지 않은 것입니다. 임금께서 어머니에게 맹세했던 말을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말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요, 후회한다면 틀림없이 그것이 잘못된 일임을 안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된 일임을 알면서도 고치기를 꺼린다면 이는 아직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요, 이는 곧 아직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애초에 홧김에 했던 맹세는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니 이는 취소해도 무방하다. 그냥 어머니를 만나면 된다.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영고숙은 이렇게 말하지 않고 억지로 장공을 위해 말을 꾸며내서 ‘땅을 파고 황토물이 나오는 곳[黃泉]에 가서 만나라’고 ‘황천’의 뜻을 교묘하게 풀이해 주었으니, 이는 결국 장공으로 하여금 ‘잘못을 꾸며대고 그릇된 행동을 가리는[文過飾非]’ 지경에 떨어지게 만든 것이다. 장공의 천성이 이제 막 회복되려고 하는 순간에 영고숙은 느닷없이 인욕(人慾)으로 이를 가렸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라는 것이 동래 선생의 주장이다. 그래서 장공의 천리(天理)를 열어준 자도 영고숙이지만 장공의 천리를 막아버린 자도 영고숙이라고 하면서 동래 선생은 이 글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만약에 장공이 다행히 공자나 맹자를 만났더라면 한 가닥 후회하는 마음을 실마리로 삼아 그 천리(天理)를 넓히고 확대시켜 온 천하에 가득차게 하여 위로는 틀림없이 순임금 같은 효자가 되고, 아래로는 틀림없이 증삼 같은 효자가 되었을 텐데 어찌하여 그저 정나라 장공으로 그치고 말게 하였단 말인가? 아깝구나, 장공이 공자나 맹자를 만나지 못하고 영고숙을 만났음이여.
4. 이 마음을 미루어 저기에-영고숙이 수레를 다투다[潁考叔爭車]
【배경 이야기】
정백(鄭伯; 정장공)이 장차 허(許)를 정벌하고자 하여 태묘에서 무기를 나눠줄 때, 자도(子都)가 영고숙과 수레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 영고숙이 수레의 끌채를 끼고 도망을 치자 자도가 창을 뽑아 들고 그를 쫓았다. 큰길에 이르러 놓치게 되자 자도가 크게 성을 내었다. 그 후에 노나라 은공이 제후(齊侯)와 정백을 모아서 허 땅에 이르렀을 때, 영고숙이 정백의 깃발인 모호(?弧)를 들고 먼저 성에 오르는데, 자도가 그를 밑에서 쏘아 떨어뜨려 죽였다.(<좌전> 은공 12년의 기사)
여기 영고숙은 앞의 영고숙과 같은 사람이다. 영고숙은 자신의 효성으로 장공의 마음을 감동시켜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을 회복하게 했으니 진실로 훌륭한 사람이다. 그런데 허를 정벌할 때는 수레 하나를 놓고 다투다가 결국 몸이 죽고 불효자가 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 곳에서의 마음 씀씀이를 다른 곳에 미루어 적용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동래 선생은 이 사건을 놓고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만일 영고숙이 어버이를 섬기는 공경함을 미루어 종묘에서도 공경함을 지켰더라면 반드시 감히 태묘에서 수레를 다투지는 않았을 것이요, 어버이를 섬기는 엄숙함을 미루어 군사들 앞에서도 엄숙함을 지켰더라면 반드시 감히 큰길에서 끌채를 끼고 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직 그가 이 마음을 다른 곳에 미루어 적용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독실하고 순수한 효자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끝에서는 “사납게 싸우다가 부모까지 위태롭게 하였다”는 경계를 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보너스. 어떤 이가 이렇게 물었다. “영고숙이 허를 칠 때, 몸을 경솔히 다루어 먼저 올라갔으니, 어찌하여 그 효를 미루어 적용시키지 못하였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이건 좀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전쟁터에 나가 용감히 싸우는 것은 충(忠)이지만 그 몸이 죽고 나면 부모가 크게 상심하실 테니 이는 곧 불효(不孝)가 아닌가? 충과 효는 과연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우리의 역사 속에도 외적의 침입에 맞서 의병을 이끌던 선비가 부모상을 당하자 다 팽개치고 떠나는 바람에 그만 의병이 지리멸렬 와해되고 말았다는 기록이 있지 않던가? 동래 선생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가만히 들어보면 명쾌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수레를 다툰 것은 사사로운 일이고 불효이지만, 먼저 올라간 것은 공적인 일이고 효(孝)이다. 그 몸을 사랑하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효이고, 그 몸의 위험을 잊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충(忠)이지만, 충과 효가 어찌 두 가지의 도이겠는가? 증자께서도 ‘전쟁터에서 용기가 없는 것은 효가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영고숙의 용기는 바로 증자의 이른바 효인 것이다. 그러나 먼저 올라가다 적에게 입은 상처로 죽은 게 아니라, 뒤에서 자도가 쏜 화살에 맞아 죽은 것은, 사사로움 때문에 죽었지 공적인 일로 죽은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점이 그가 이 마음을 미루어 저기에 적용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 내가 가장 애석해 하는 것이다.
5. 나오는 말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아니면 볼 수 있는 것만을 본다. 그래서 누구나 같은 자리에서 똑같이 보고 함께 겪은 사실조차도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진술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지금 겪고 있는 사건이나 사실도 그러할진대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과거의 역사는 남의 눈을 통하여 한 번 정리되고 걸러진 상태로 오늘에 전해진 것이라 그것이 과연 진실과 얼마나 가까울 것인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리라.『동래박의』는 동래 선생이 『춘추좌씨전』을 읽고 그 안에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사건들의 뒤에 숨어있는 진실을 파헤치고 내용을 재해석해 주고 있다. 물론 그 해석이 때로는 지나치게 분석적이고, 다소 억지로 말을 만들어낸 부분이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친 부분을 지적하고 파헤치는 동래 선생의 분석력과 논리력만큼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고전, 그 중에서도 특히 역사 자료를 읽고 그것을 번역 혹은 해석하면서 접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행동과 사건 속에는 분명, 오늘날 우리가 되새기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내용들이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것을 오늘의 교훈으로 오롯이 살려내기 위해서는 물론 사람의 심리와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보는 지혜와 냉철한 비판의식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동래박의』는 이런 점에서도 우리에게 하나의 전범을 제시해 주고 있다. 박지원이 그의 소설 「양반전」에서, “양반은 오경(五更)에 일어나서 등잔불을 켜고 눈은 코끝을 보면서 발꿈치를 모아 꽁무니를 괴고 『동래박의』를 얼음에 박밀듯이” 외워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결코 그냥 아무렇게나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사통(沙筒)을 빚고서
51842008-10-30 안대회
나는 우연히 이종사촌 동생 임도언(任道彦)을 데리고 도자기 굽는 일을 감독하는 이종사촌 동생 조예경(曹禮卿)을 찾아갔다. 막 자기를 굽는 일을 하던 중이라 모래흙을 골라내는 사람이 있었고, 진흙을 반죽하여 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고, 그릇을 가는 사람과 깎는 사람이 있었고, 그릇을 늘어놓고 햇볕에 말리는 사람이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과 주위에 보이는 것 모두가 그 일이었다.
조금 있자니 새로이 자기를 구워서 앞에 벌려놓았다. 생활에서 사용하는 갖가지 그릇들이 다 있었다. 그 가운데 붓을 담는 필통과 벼루에 쓰는 연적, 술 마시는 술병과 술잔은 하나같이 문방(文房)에서 요긴하게 쓰는 물건이다. 그 색깔을 살펴보니 옥인양 눈인양 희디희어서 눈이 부셨다. 진흙에서 이러한 빛깔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가 정말 어려웠다.
나는 옥과 같으면서도 옥처럼 사치스럽지 않은 자기가 정말 사랑스러웠다. 문방에 놓아두면 맑은 아취(雅趣)를 더하고, 초가집에 놓아두어도 주제넘은 꼴이 되지 않을 듯하여, 비록 내가 얻어간다 해도 곤궁한 내 처지에도 어울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한 가지 모양을 구상하여 조예경에게 그 모양대로 빚어 달라고 청을 넣었다. 그 자기의 이름을 사통(沙筒)이라 했다.
이 사통은 대개 원미지와 백낙천이 사용한 시통(詩筒)*을 본떠서 만들었다. 백낙천과 원미지는 시를 먼 곳에 전하기 위해 시통을 사용하였는데, 대나무로 통을 만들어 오고가는 길에 들고 다닐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에 그 크기가 클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만든 사통은 한 곳에 놓아두기만 할 뿐 들고 다니며 쓸 일이 없다. 시문(詩文)이나 간찰을 얻으면 모두 사통 속에 넣어 둬서 안 될 게 없다. 날마다 문장과 서화를 마주하는지라, 보고 난 것을 저 사통에 보관하자면 크기가 작아서는 안 될 일이다. 드디어 원미지와 백거이의 시통 모양을 취하되 몸집을 크게 만들었다.
사통은 성질은 따사로우면서도 부드럽고, 색깔은 반짝이면서도 깨끗한 것이 장점이다. 무늬를 아로새기고 조탁한 기교를 쓰지도 않았고, 또 편안하고 묵직하게 자리를 잡고서는 물건을 많이도 받아들인다. 그 점이 군자의 덕과 너무도 비슷하다.
내가 그 물건을 아끼는 이유가 단적으로 여기에 있다. 두 아우도 모두 “이 물건은 형님만 아끼는 것이 아니라 아우들도 아낀답니다.”라고 하였다. 조예경이 장인(匠人)에게 분부하여 직접 사통 세 개를 만들게 하여 각자 하나씩 가지자고 하였다. 내게는 그 사연을 글로 쓰게 하고 도언에게는 사통의 표면에 글씨를 쓰게 하였다. 훗날 이 사통을 보는 자손들이 이 물건이 우리 세 사람으로부터 만들어진 유래를 잘 알기 바라는 심정이다.
- 홍태유(洪泰猷), 〈제사통(題沙筒)〉, 《내재집(耐齋集)》
* 시통은 시고를 넣어서 먼 곳에 편리하게 보내기 위해 만든 대나무 통이다. 백거이(白居易)가 항주(杭州)에 있을 때 친구인 원미지와 시를 주고받기 위해 이 시통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187집 《내재집(耐齋集)》4권 제후(題後)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원문>
余偶携任姨弟道彦, 過曹姨弟禮卿于監瓷. 瓷役方作, 有揀沙土者, 有泥而造者, 有磨者削者, 有列而曬乾者, 目前左右皆是也. 俄又燔出而陳于前, 日用器皿百種皆在. 又其中, 筒于筆, 滴于硯, 壺觴于酒, 皆文房所須, 而觀其色, 皜皜然玉雪照眼, 殊不覺泥土中陶出此光景也. 余誠愛其有似乎玉而無玉之侈, 陳于文房則助其淸, 置諸茅廬而不爲濫. 雖余得之, 亦稱其竆, 爲命一制而要禮卿陶成焉, 名之曰沙筒. 蓋取象元白之詩筒而然. 樂天微之之用在傳詩, 爲筒以竹, 遷移往來, 其體宜不能大也. 今余之爲筒, 將置諸一處而無遷移之用, 得詩文簡札, 皆投其中, 無不可者. 日對翰墨, 視爲藏笥, 則其體宜亦不能小也. 遂樣元白之詩筒而大其制焉. 夫沙筒之爲德, 性溫潤, 色光潔, 無刻鏤琱琢之巧, 又處安重而容受有量. 甚矣, 有似乎君子之德也! 吾愛之, 端在乎是. 兩弟皆曰: “此不獨兄愛之, 弟亦愛也.” 曹君乃命匠, 手成三筒, 將各藏一焉. 又俾余記其由, 而道彦書其表, 欲令異日子孫觀者, 知此筒之成, 自吾三人者始也.
<해설>
홍태유(洪泰猷, 1672~1715)가 쓴 글이다. 저자는 효종의 부마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당파 싸움에서 화를 입어 죽임을 당했고, 본인은 전 인생을 주로 경기도 여주에서 야인으로 살았다. 그런 그가 자기를 굽는 사옹원 분원에서 근무하던 사촌 조예경(曹禮卿, 이름 미상)을 임도언(任道彦, 任適)과 함께 찾아갔다. 거기에서 다양한 자기를 구워내는 현장을 구경하고 나서 글을 쓰는 문인에게 꼭 필요한 필통(筆筒)을 만들어 갖기로 하였다.
그에게는 모래흙을 구워 만드는 자기는 흙에서 나왔지만 흙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은 신비한 물건이었다. 그가 필통에 사통(沙筒)이란 이름을 부여한 것은 모래흙에서 나온 물건임을 밝히고 싶어서였다. 필통의 모습은 “문방에 놓아두면 맑은 아취를 더하고, 초가집에 놓아두어도 주제넘은 꼴이 되지 않을 만큼” 수수하다. 궁하게 사는 자기에게 어울릴 것만 같은 물건이므로 이 기회에 만들어 갖고 싶었다. 그래서 요청을 하여 만들어놓으면 묵직하고 편안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이것저것 많은 물건을 넉넉하게 많이 받아들일 것이 분명하다. 이 수수한 자기는 군자가 가져야 할 덕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좋은 사통을 셋이서 함께 만들기로 하고, 이러한 내용을 아예 자기에 새기기로 하였다. 저자는 글을 쓰고, 임도언은 글씨를 쓰며, 조예경은 그릇을 만들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사연을 적어 구운 세 개의 자기를 만들어 하나씩 가진다면, 사촌들끼리 만난 이 날의 만남을 기념하는 좋은 기념품이 될 것이고, 후손들이 이런 사연을 기억하는데도 안성맞춤이 될 것이다. 수수한 필통 자기를 만드는 것 하나에도 멋과 추억을 담으려는 옛 선비의 삶을 엿볼 수 있다.
http://cafe.daum.net/hanmuneducation
한문임용!내년에는 꼭 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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