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5일 김대건 안드레아 축일 (마태10,17-22)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죽음이었는지를 아는 것”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제가 참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열심한 신앙을 빙자한 ‘하느님 만능주의’(신 만능주의)입니다.
‘하느님께 의탁함, 전적인 수동성’을 얘기하면서
인용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사회복지 기관에서 식량 거리가 달랑달랑해서 걱정하고 있는데,
기적처럼 누군가 짠하고 나타나서 문 앞에 식량 거리를 놓고 갔다...
절박하게 바라면 전능하신 하느님은 절대 그냥 망하도록 놔두지 않으시고
또 다른 천사를 보내주신다. Amazing grace!>
저는 이런 이야기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하느님 만능주의, 은총 만능주의’에 못지않게
제가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이
‘죽음 만능주의’ 혹은 ‘박물관화 된 순교자 공경’입니다.
작년에 저를 방문했던 본당 신자분과 식사하면서
들은 이야기인데,
그분이 어느 성지에 갔다가
거기서 미사 강론 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성지의 신부님께서는 요즘 코로나 때문에
미사에 신자들이 모이지 않아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라고 하면서,
“미사 때 참석 인원 제한은 정부 방침일 뿐,
옛날 우리 선조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는데,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를 핑계로 신앙에 너무 등한시하고 있다.“
그 얘기를 전해 들으면서
‘아, 신부들이 신자들을 잘못 길들이고 있구나.
신부들도 그 틀에 박힌 뻔한 이야기 말고,
공부도 좀 하고 고민 좀 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조건, 그리고 아무 데나 ‘신앙 선조들의 죽음, 희생’을 들이대고 비교하며
‘무작정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그런 것이 ‘열심한 신앙’이라고 신자들을 길들이는 그런 얘기는
이제는 좀 그만 들을 수 없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럼 정부 지시를 거역하거나 무시하고
무조건 미사에 참석해서 헌금 많이 내는 것이
‘열심한 신앙’인가?‘
사실 순교자의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죽음을 자청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수난, 그리고 죽음은 그가 자청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복음 선포 활동에 대한 세상의 ‘응징’이었던 것입니다.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
로마와 유다 지배층의 폭정으로 신음하던 가난한 백성들에게
기쁨이 될 만한 ‘굿뉴스’ 복음을 전한 게 원인이었고,
그에 대한 응징으로 죽음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교회는
그분의 원래 의도는 애써 망각하고,
그저 그분이 겪은 고통과 죽음만 기억하고 싶어 합니다.
끝까지 침묵하며 죽임당한 예수님만 강조할 때
예수를 모범으로 삼는 그리스도인들은,
‘입을 열지 않고, 도살당한 순한 양처럼’ 죽어간 예수처럼
우리가 현실 속에서 부당하게 고통받는 현실을 무조건 감내하고
사후, 죽은 다음에 주어질 영원한 상급만을 바라면서
입을 열지 않고 참기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복음의 본래 뜻은 증발하고
‘박물관화 된 순교자 공경’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죽음이었는지 아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