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1일 연중15주간 월요일 (마태10,34-11,1)
“사회적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외면하는 것”
어제 강론 때 ‘착한 사마리아 사람’ 얘기와 ‘일베’ 얘기를 하면서
우리 사회에 이미 만연된
외면과 무관심, 혐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복음 뒷부분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목말라 하는 사람, 소수자와 같은 작은 이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관심”에 대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위 믿는 사람, 신자라고 하는 우리 신자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부가 강론 때 어쩌다 사회문제나 정치적 얘기를 건드리면,
즉각적이고 노골적으로 못마땅해 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리를 내세웁니다.
“어찌 되었든 그런 세상적인 문제들은
우리가 뽑은 정치하는 사람들, 즉 세상이 알아서 할 일인 것이고...
종교인 특히 성직자는 그런 세상일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
신자로서 우리는 하느님만을 생각하고, 꼬박꼬박 성당에 다니면서
세상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착하게 살면 돼!”
이는 본당신부들이 늘 부대껴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번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을 통해
이런 태도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외면하는 것”(영적 세속화)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의 기쁨183항)
사실 이렇게 자꾸 우리 신앙을 죽은 다음의 세계,
‘내세 지향’ 쪽으로 몰아가는 것은 나 개인 탓만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우리를 그렇게 길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견뎌내는 요령 중 하나는
매사에 일일이 반응하지 말라는 것...
아파도 징징대며 남에게 위로를 구할 필요도 없고,
또 그만큼 남의 고통도 ‘그가 알아서 해결할 일’이라고
모른 척 해버리라고 가르칩니다.
내가 당하는 모욕과 상처, 타인의 호소나 분노,
절망의 세상사에 일일이 반응하다가는,
내가 먼저 열사(熱死), 열 받아 죽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가상하긴 하지만,
거기엔 또 그에 따른 책임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그것이 두렵기도 하고 귀찮다는 것입니다.
또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이
“빨리 잊어라”, “신경 쓰지 마라”, “채널을 돌려 버려라”,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지, 뭔 불만이 그렇게 많으냐?”
하는 말들을 내뱉으며 외면하라고 합니다.
지금 세상이 암암리에 우리를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점점 남의 일엔 관여하지 않는 냉랭한 인간이 되어 버립니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건 오지랖 넓은 ‘선을 넘는 짓’으로 여기고
모든 관심을 그저 나 개인의 심리적인 문제에나 몰두하게 만들며
신앙 역시 ‘지상의 것-사회적인 문제’가 아닌,
먼 훗날 저 ‘천상의 것’에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우리 사회에는
여기저기서 ‘괴물'들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점점 이런 냉혈한, 괴물이 되어가는 건 아닌지 들여다 볼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