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종단화보(甑山宗團畵報 1974.10.29 저자 : 박종설) 3호집에는 증산미륵세존(甑山彌勒世尊)의 화천후 옥체(玉體) 수난기에 관하여 기록을 한 것이 있는데 정산(鼎山) 조철제(趙哲濟)의 도굴로 부터 보천교(普天敎)로 옥체이전, 후일 증산법종교(당시 증산선불교)애서 옥체를 모신 것, 양자 강석환과 증산법종교간의 다툼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 말고 그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1, 증산미륵세존님께서 화천(化天) 하신후 1909년 8월 11일에 동곡약방 후원 죽림(竹林)에 가매장을 하였다고 합니다. 예전 전라도에서는 사람이 돌아가시면 바로 매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초빈(草殯)이라 하여 초빈에 모신후 후일 정식으로 매장을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참고로 용화전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종도(從徒)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선천(先天)에는 지존시대(地尊時代)인 고로 명당지운(明堂地運)이 있었으나 후천(後天)에는 인존시대(人尊時代)인 고로 명당(明堂)에 발응(發應)이 없느니라. 또 금후(今後)에는 시체를 묶지 말고 땅속에다 묻지도 말고 구토령으로 함이 옳으니라
PS : 구토령 : 망자(亡者)를 담은 관을 땅에 묻지 않고 땅에 돌을 깔아 관이 땅과 직접 접촉하지 않도록 한 후, 돌 위에 관을 놓고 이 위에다 짚을 덥고 용마루를 만든 것을 초분(草墳)이라 한다. 초분(草墳) 위에다 흙을 덮은 것을 구토령(구토롱)이라 한다. 초분(草墳)에 흙을 덮으면 짐승의 칩임을 맊기 쉬우며 화재의 위험도 없어서 관리가 용이하다
2. 그리고 1909년 9월 25일에 증산미륵세존님의 부친(강문회:姜文會)께서 동곡장터나루 산기슭에 안장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처음 보았습니다.
3. 그리고 1914년 고수부(高首婦)님게서 관(棺)을 떼어 봉안 확인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이 증산교사에 기록된 하기의 내용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증산교사(甑山敎史)에 의하면 경술(庚戌 1910)년 고수부님께서 원평(院坪)에 이르러 윤칠(輪七)에게 명하여 약간의 주과포(酒果脯)를 준비하여 들리고 길을 버리고 밭두둑과 논두둑으로 걸어서 솔개봉밑 장탯날에 올라 초빈앞에 당도하여 윤칠에게 ‘나래를 헤치라’고 명하니 경석(京石)이 말하기를 ‘남의 초빈을 헤치다가 초빈임자가 바라보고 달려와서 힐난하면 어찌하렵니까? 바라건대 속히 돌아가사이다’ 하며 굳이 간(諫)하되 고수부는 들은 체도 아니하고 몸소 헤치기 시작하거늘 경석(京石)이 할 수 없이 윤칠(輪七)을 명하여 초빈을 헤치고 널천개(天蓋)를 떼니 대성(大聖)의 용모는 아직 상하지 아니하였다. 고수부께서 가지고 왔던 진주를 입술 안에 넣고 한삼을 가슴에 덮고 그 위에 옥황상제(玉皇上帝)라 쓴 백로지 쪽을 덮고 천개(天蓋)를 다시 덮은 뒤에 준비하여 온 주과포(酒果脯)로 전(奠: 제사를 모신다는 의미)을 올리고 초빈을 다시 봉(封)하였다. (甑山敎史 231쪽). 시간차이가 4년이 납니다.
첫댓글 위 내용을 이번에 출간한 보천교의 도훈에 기록하여야 했는데, 제가 멍청해서 기록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