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무문大道無問이라는 말
수행은 산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가능 합니다.
만일에 산 속에서만 가능하다면
불교는 단지 몇몇 산중 스님들만을 위한 종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대도무문大道無問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도는 불도,
부처님의 가르침이요,
무문이라는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문이 없다.’는 뜻이지만,
속뜻은 ‘따로 정해진 문이 없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꼭 이 방법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특정의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없는 문’을 통과하는 데도 수행만은 필수적입니다.
이 수행을 통하지 않고는 비록 특정한 만이 없지만
결코 그 문을 통과해서
깨달음이라는 열매를 거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필수적 요소인 수행을 크기 세 가지로 나눈다면,
첫째는 심성수행이요,
둘째는 학문수행이요,
셋째는 실천수행일 겁니다.
심성수행心性修行이란
마음의 본체를 밝혀 우리네 성품의 근원을 찾아내는
소위 명심견성明心見性을 말합니다.
《화엄경華嚴經》에
“보관일체중생普觀一切衆生하니
구유여래지혜덕상具有如來智慧德相이라.”
곧 ‘모든 중생을 살펴보니
여래의 지혜 덕상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에 근거하면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 가운데 이미 부처의 성품 즉,
불성을 간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불한다든가 성도한다든가 하는 것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없는 수행을 통해서 새로 완성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미 간직되어 있는 자성을 찾는 것입니다.
또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종종환화種種幻化가
개생여래원각묘심皆生如來圓覺妙心이라.”
“모든 중생의 갖가지 허망한 생각들도
모두가 여래의 원만하게 깨달은 묘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 두 말씀을 종합하면,
우리네 중생들은 모두가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
즉 깨달음의 성품을 가지고 있을 뿐 이니라,
온갖 번뇌 망상이라는 것도
바로 불성에서 나온다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럼 왜 원각묘심圓覺妙心인 불성에서 번뇌 망상과 같은
온갖 잡된 생각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 까닭은 불성이 욕심에 가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저 높고 푸른 하늘의 찬란한 태양광을
먹구름이 차단함으로 인해
그 빛이 지상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마음의 구름인
욕심을 걷어내는 수행이 심성수행心性修行입니다.
탐진치, 삼독심을 걷어내는 작업,
이 작업을 통해 성도에 이르는 심성수행心性修行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둘째는 학문수행이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드리는 따끈따끈한 글입니다.
2024년 09월 01일 오전 05:41분에
남지읍 무상사 토굴에서 운월야인雲月野人 진각珍覺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