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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寫經의 유래는,
사경의 유래는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말을 제자들이 산스크리트로 기록했던 것을
불법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다라(多羅)나무 껍질에 베껴 쓴
패엽경(貝葉經)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이러한 관습은 중국· 한국· 일본에도 전해져 사경이 성행했습니다.
이렇게 필사된 경전은 서(書)의 연구에서도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사경의 목적으로는
첫째, 불법의 광선유포(廣宣流布)를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경의 일차적 목적으로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붓으로 일일이 필사했으나
당(唐)나라 말기인 9세기경에 목판인쇄에 의한 판본경(版本經),
즉 인경(印經)이 제작된 이후에는
인경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사경은 장식경(裝飾經)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서사(書寫)의 공덕(功德)을 들 수 있습니다.
즉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 중
법보에 속하는 경전을 정성을 다하여 베껴쓰는 일은
불교도들에게는
곧 미래에 좋은 과보(果報)를 얻을 수 있는
선업(善業)으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법화경〉 같은 대승경전에서는
서사의 공덕을 설하고 사경을 권장했으므로
인경이 출현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사경이 제작되었으며,
인경 출현 이후 사경은 많은 재정과 공을 들여
화려하게 꾸민 장식경으로 발전했습니다.
장식경의 사경지(寫經紙)는
이전의 소박한 백지(白紙)나
황갈색지에서 감지·자지(紫紙)와 같은 염지(染紙)
또는 금은절박(金銀切箔)· 사자(砂子)· 양모(羊毛) 등을 놓아
염색한 장식지로 바뀌었고,
글씨 또한 단순한 묵서(墨書)에서
값이 비싸고 쓰기에도 힘이 드는
금자(金字)· 은자(銀字)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금자· 은자 사경에는
책머리나 경문 중에 섬세하고
화려한 변상도(變相圖)가 그려지며,
표지도 금이나 은으로
당초무늬· 보상화무늬를 그려 장식했습니다.
따라서 장식경은 지난날의 서체(書體) 연구뿐만 아니라
염직·문양·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금자· 은자 사경과 같은 의미로 제작된 것들로는
금경(金經: 금판경)과 석경(石經: 석판경)·
동경(銅經)· 돌경(乭經)· 와경(瓦經) 등이 있습니다.
이밖에 사경은 부모· 조상의 추복(追福)이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며,
올바른 경전의 유포· 송독· 기록 등을 위해서 행해졌으며
탑 안에 봉안되거나 불상 복장(腹藏)에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중국에서 사경이 시작된 것은
한역(漢譯) 불전이 유포되었던 3세기 무렵으로 추측되는데
진한(秦漢)시대 종이의 발명과
이후의 마지(麻紙)· 수피지(樹皮紙)의 발전,
특히 저지(楮紙)의 기술개발은
사경의 발전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또 남북조시대 이래
왕실· 귀족· 대사원에서는 일체경一切經,
즉 수천 권에 달하는
대장경 전체를 서사하는 불사가 행해졌고,
사경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사경생도 양성되었습니다.
사경의 문자는 육
조(六朝)시대에는 예서隸書 등으로,
수(隋)·당(唐) 이후에는 주로 해서楷書로 썼으며
글자 배치는 수대부터 1행에 17자로 통일되었습니다.
현존하는 유물로는
근대 이후 둔황 석굴[敦煌石窟]에서 발견된
다수의 고사경古寫經들이 귀중한 예로 꼽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사경의 풍습이 전해진 것은
불교가 전래된 무렵으로 생각되나
삼국시대 사경의 예는 한 점도 전하지 않고,
기록상으로도 고려시대 이후 처음 나타나므로
고대 사경의 양상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충렬왕대의 대표적 유물로는
〈감지 은니 불공견색신변진언경紺紙銀泥不空羂索神變眞言經〉
(국보 제210호)·
〈감지 금니 문수사리문 보리경紺紙金泥文殊師利問菩提經〉(1276)·
〈감지 은니 불설보살 본행경紺紙銀泥佛說菩薩本行經〉(1278)·
〈감지 은니 보살 선계경紺紙銀泥菩薩善戒經〉(보물 제740호)·〈감지 금니 불설 잡장경紺紙金泥佛說雜藏經〉(1284)·
〈감지 금니 묘법 성념처경紺紙金泥妙法聖念處經〉(1285) 등이
전하고 있습니다.
돈독한 불교신자였던 충선왕은
사경 제작에 몰두하여
1312년(충선왕 4) 민천사旻天寺에서
금· 은 대장경 2부 및
묵본墨本 대장경 50부를 사성했다고 합니다.
이때 시작한 금자대장경은
충선왕이 재위 7년 만에 왕위를 물려주고
심양왕으로 간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충선왕 때는 원나라에 사경지를 보내기도 했으며
원나라 관리 방신우方臣祐가 민천사에 와서
승려와 속인 300명을 모아
금자대장경을 사성하여(1311) 가져가기도 했습니다.
충선왕 때 유물로는
〈감지 금니 섭대승론 석론紺紙金泥攝大乘論釋論〉(1319)·
〈감지 금니 불설 불명경紺紙金泥佛說佛明經〉(1319)
등이 전합니다.
또 개인발원사경은
그 종류가 다양하지만 〈법화경〉과 〈
화엄경〉이 주종을 이루어
신앙적으로는 전통성이 강하게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개인발원 사경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1055년(문종 9)에 당시 금오위대장군이었던
김융범金融範이 발원한
〈감지금니대반야바라밀다경紺紙金泥大般若波羅蜜多經〉
(보물 제887호)입니다.
조선시대의 사경은
조선초의 태조· 세조 등과 같은 왕들과
왕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억불숭유정책과 금· 은의 사용금지로 인해
성종대 부터는 급격히 감소하여
지방 사찰에서나 그 명맥이 유지되는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양적· 질적으로 고려시대에 미치지 못하며
유물수도 많지 않습니다.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감지 금니 범본성 관자재대비 총지공능의경록
〈紺紙金泥梵本聖觀自在大悲摠持功能依經綠〉(1397)과
내소사 소장의 〈법화경절본사본法華經折本寫本〉
(1415, 보물 제278호) 등이 있습니다.
사경의 맥이 끊어졌다면
오늘의 불교가 남아 있지 않았을 겁니다.
사경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맥을 이어 왔고
지금도 도반사이의 진각 승처럼
감지 금니 사경을 독려하고 있듯이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도 사경은 계속 이어 왔었습니다.
옛 부터 감지에 금니, 또는 은니로 사경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인쇄술로 인하여 전통의 맥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감지나 홍지(적지), 흑지에
금(금물)이나 은물로 써 내려 가는 것을 보고
감지금니사경이라고 하였습니다.
억불정책 속에서도 승가에서는
불자들과 스님들이 모여 암암리에 사경을 해 왔습니다.
감지 금니를 늘 권고하는 것은
금지에 한 자 한 자 써 내려 가면서
금물로 금강경을 사경한다거나,
초보자들은 반야심경을 금니 사경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도반사이에서는 점점 맥이 끊어지고 있는
감지금니사경을 계속 이어 가보자고
사경 수행을 독려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이든 금강경이든
한 질 한 질을 써 모으면 가문에 남는 기록이고,
개인이나 사찰에서도 전시도 갖을 수 있는
매우 뜻 깊은 사경이 되기에 추천 드립니다.
감지금니금강경은 더 추천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적으로도 감지금니사경을 해 왔었습니다.
이제 사경의 눈을 다시 크게 뜨시고
감지금니사경을 하시길 권유합니다.
병풍용으로 써 놓으시면 가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감지금니금강경은
승이 채본을 만들어 놓은 것이 있으니
귀한 시간을 빨리 잡아 묶어서
사경판 앞으로 모이시기 바랍니다.
감지 금니 범본성 관자재대비 총지공능의경록
〈紺紙 金泥 梵本聖 觀自在大悲 摠持功能依經綠〉(1397)의 것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해 주어도
우리나라의 사경은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맥이 끊어질 처지였지만
인쇄술이 없던 시절에는 큰 스님들이 나서서 사경을 독려하였고
그때의 사경의 맥이 도반사이의 진각에게 까지 흘러 왔습니다.
감지금니금강경은 승도 25년 전부터 하고 있으며
이제는 감지금니사경을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감지금니금강경
紺紙金泥金剛經
승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감지금니금강경紺紙金泥金剛經을 불자님들께서 알리고
여러 스님들께도 사경의 맥을 이어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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