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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교육 특강 자료]
행복한 부모 되기
우동식
(진로독서지도사, 청소년문학평론가)
1. 빗나간 자식 사랑에 대한 경계와 절제
평론문 함께 읽기
청소년문학 작품에 드러난 진로‧진학 의사 결정의 양상
청소년 소설들의 주요 제재 중의 하나가 진로 문제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들에는 청소년의 진로‧진학 의사 결정이 어떻게 반영되어 있을까? 제한된 작품만을 두고 살펴보아도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러 작품들 중에서 먼저 최근에 출간된 이선주의 『맹탐정 고민 상담소』(문학동네, 2019)의 두 번째 이야기를 통하여 그 양상의 실마리를 풀어보기로 한다.
이 작품에서 상담 주제의 하나는 ‘산이중학교’에서 공부 일등을 하는 ‘왕영은’ 학생의 진학 문제이다. 곧, 영은과 엄마의 진학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 대립하게 된다. 영은의 꿈은 도시(정주시)로 나가 고등학교에 다니며 많은 경험을 쌓아 기자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엄마는 집에서 시골 고등학교에 다니며, 일등 성적으로 안정적인 직업이 보장되는 교대 진학을 희망한다.
영은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홀로 도시에서 고등학교 다닌 경험으로 보아 외로움을 느꼈고, 우수 학생들 속에서 경쟁에 밀려 평범한 학생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에 시내로 진학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면적 이유로는 자신이 이혼해서 영은과 단둘이 사는 처지여서 딸과 떨어지는 데서 오는 외로움과 분리 불안이 작용하는 측면이 없지 않음을 차츰 인정하면서 내적 고민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진정으로 영은을 위한 일이라면 그 꿈을 들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반쯤은 승낙하기로 한다. 이로써 모녀의 진학에 대한 갈등은 어느 정도 풀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 셈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대개 자녀의 진로에 대한 부모의 생각은 표면적으로는 자녀를 위한다고 하지만, 이면적으로는 자신의 바람이나 한(恨)이 얽혀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것이 대개 양측의 대립 요인이 된다.
그런데 진로‧진학에 대한 대립은 먼저 부모의 일방적 강요로 심각해지는 경우가 많다. 일찍이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박완서의 「꼭두각시의 꿈」에서부터 이런 상황이 전개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 ‘혁이’는 대입 재수에 실패한 삼수생이다. 그의 부모는 1970년대 많은 부모들이 그러했듯이 간판과 위신을 중시하는 의식을 지녔다. 그에게 서울대학교는 아니더라도 ‘세일대학까지는 가야한다.’고 삼수를 강요한다. 이런 부모의 강압에 혁이는 큰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부모님의 애정, 관심, 기대, 집념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동아줄’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면서 부모들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서지는 못하고 삼수가 아니라 그 이상도 낙방으로 응수하겠다고 간접적인 저항을 한다. 한편, 헤르만 해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에 등장하는 ‘한스’ 소년이 교사, 교장, 목사, 아버지 등 어른들의 강압으로 개성에 적합하지 않은 신학교에 진학했다가 비극을 맞게 된 것도 유사한 사정이다.
위와 같은 소극적 저항을 넘어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등장인물도 있다. 팀 보울러의 『스쿼시』(놀, 2008)라는 작품에서도 주인공 ‘제이미’는 자신을 세계 제일의 스쿼시 선수로 만들려고 하는 아버지의 기대가 버겁고, 경쟁만을 강조하는 환경이 무섭기만 하다. 그는 제이미가 시합에 지면 용돈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리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을 견디다 못해 제이미는 가출을 하고 만다. 아들이 가출한 후 아내의 죽음을 맞이한 제이미의 아버지는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게 된다. 가출에서 돌아온 제이미는 스쿼시를 잠시 쉬겠으며, 계속할 것인지의 여부는 자신이 결정하겠다고 주체성 회복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주체성 회복 선언은 김은재, 『누가 뭐래도 내 갈 길을 갈래』 (사계절, 2018)라는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각기 다른 이유로 4명의 가출 학생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부모로부터 강압적 권유를 받는 학생이 ‘전긍이’이다. 그는 고교 1학년 하위권 학생으로서 기숙학교에 다니는데, 어머니가 방학을 이용하여 기숙학원을 가라고 하는데 불만을 가지고 가출 학생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의 엄마의 삶의 목표는 그와 동생을 성공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가 로스쿨에 가기를 권한다. 그는 중3 때도 기숙학원에 보내져서 무척 힘이 들었던 기억이 있으나 엄마의 강압 앞에 무기력해진 상태이다.
이러한 전긍이의 상황은 ‘사랑하는 엄마 아빠에게 ’라는 청소년 시를 연상케 한다.
(전략)
이런 말 하면 속상하시겠지만요
너무 힘들어서……
오늘은 마음 독하게 먹고 이 얘길 할게요
아빠 엄마 제발, 저 때문에 살지 마세요
엄마는 엄마의 꿈 아빠는 아빠의 꿈을 위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너무 숨을 못 쉬겠어서……
자꾸 나쁜 생각이 들어서……
저 좀 살려 주세요 제발
-- 김선우, 『댄스, 푸른푸른』. 창비교육, 2018. 94~95쪽
심리적 상황은 다를지라도 아마 전긍이가 엄마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 절규하는 심정은 위의 시와 닮은 점이 있어 보인다.
(중략)
한편, 자녀의 진로에 대한 부모 조정의 비애는 청소년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2019년 초에 방영되었던 방송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는 ‘예서’의 아버지 강준상 교수의 철 늦은 반성적 회고담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50대 교수의 입으로 노모 윤여사(정애리 분)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저를 나이 쉰이 되도록 어떻게 살아야 33333할지도 모르는 놈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강준상의 삶은 없고 어머님의 뜻대로 분칠하여 무대에 세우기만 했습니다. 그 결과 저의 삶은 남들의 시선을 위해 포장된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10대 마마보이 입에서나 나올 법한 이 대사는 그야말로 어른인 자신의 인생도 어머니에게 조정된 ‘꼭두각시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는 통렬한 회한을 담고 있다.
부모의 강요에 자녀가 대응하는 방식으로 절충형의 경우도 있다. 일단 부모의 의견을 수용하되 자신이 약간 조정하는 방식이다. 김중미, 소설 『모두 깜언』(창비, 2015)에 등장하는 농촌 청소년들 중 ‘이우주’의 선택이 그러한 경우이다. 자신은 자연을 좋아하고 ‘대체에너지나 환경에 관한 공부를 해보고’ 싶지만, 의사가 되라는 엄마의 강권으로 과학고에 진학하게 된다. 그는 일단 그 뜻을 수용하여 과학고에는 진학하지만 나중에 엄마를 잘 설득해서 대체 에너지나 환경에 관한 연구원 같은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내비치고 있다.
또 다른 양상으로는 부모 한쪽이 자녀의 진로를 지지해주는 경우가 있다. 김려령의 『완득이』(창비, 2008)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신체적 조건으로 보아도 무난하고 본인이 좋아하는 진로로 주인공 ‘완득이’는 킥복싱을 선택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로 대립하게 된다. 이런 그에게 강력한 우군이 되어준 사람이 그의 어머니이다.
“여태 세상 뒤에 숨어 있던 완득이가, 운동하면서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잖아요. 자기가 하고 싶은 거, 제일 잘할 수 있는 거, 하게 놔두세요.”
‘완득이’의 진로에 대하여 매우 사려 깊게 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잘할 수 있는 것을 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부모나 교사가 학생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진로지도요, 행복한 성장의 조건을 최대로 충족시켜주는 일이다. 이는 다중지능이론의 관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우동식, 「청소년문학 작품에 드러난 진로‧진학 의사 결정의 양상, 《아동문학세상》(2022년 여름, 통권 제117호), 46~52쪽.
◇ ◇ ◇
대개 은퇴기에 이르면 가정에도 변화의 바람이 닥칩니다. 우선 자녀가 성장해 부모의 품을 떠납니다. 독립해 나가거나 결혼해 분가하기도 하고, 직접 집을 떠나지 않더라도 독립된 인격체로서 자신만의 삶을 꾸리며 부모의 간섭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 자녀와의 관계는 취업, 결혼 및 분가 등이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되겠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제 경험상의 부족으로 주로 그 앞 단계인 진로‧진학 문제를 중심으로 행복한 부모 되기의 원리를 말씀드리게 됨을 양해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위의 평론문도 청소년문학에 드러난 진로‧진학 의사 결정의 양상을 중심으로 부모와 자녀 관계의 일단을 살펴본 글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잘 드러나는 고리의 하나가 진로‧진학의 의사 결정이라고 여겨집니다. 마땅히 협조 관계여야 할 사안임에도 그렇지만은 않고, 대립과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대개 부모의 자녀에 대한 너무 높은 기대에 기인하곤 합니다. 이러한 원리는 자녀의 결혼 및 분가에 따른 여러 상황에서의 적용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부모가 자식에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기대치를 강요하는 풍토가 만연해 있습니다. 자식에게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의 꽃다운 인생에 눈멀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이 땅의 부모들에게 빗나간 자식 사랑에 대하여 경계 및 절제할 것을 암시하는 한 편의 시가 있습니다.
사랑법 첫째
고정희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 시집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어느 부모이든 자식이 꽃다운 인생을 살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자식의 꽃다운 인생을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바칠 태세인데, 바로 여기에 세상의 자연스러운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는 함정이 자라 잡을 수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말했습니다. 아들이 다 자라서 아버지 어깨 너머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면 이제 역전의 드라마가 펼쳐진다고, 품 안에 자식 없다고, 자식이 자라면 부모가 보여주던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을 보고 충격에 빠집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부모들 마음대로 써오던 드라마를 역전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에 사로잡힙니다. 이제 부모에게 남은 것은 박탈과 치욕 사이를 왕복하는 일뿐입니다. 그러니 자식을 향한 기대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아야 합니다. 기대가 가는 곳에는 실망이 먼저 가서 기다리는 법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제시한 첫 번째의 사랑법은 바로 '포기의 돌멩이'입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한 기대를 끊기란 자기 목숨을 끊기보다 힘든 일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녀에 대한 높은 기대 수준을 설정했다가 그것을 낮추려는 노력보다는 애초에 자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끌어안아 주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먼저 부모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이'의 모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어야겠지요. 자녀가 무엇을 하든, ’나는 가장 든든한 네 편이다.'라고 애정을 듬뿍 쏟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활과 화살의 관계
목숨은 끊어도 자식은 못 끊겠다는 것, 모든 부모의 심중에는 '그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역전의 드라마에 피눈물을 흘리지 않으려면 크고 무거운 돌멩이 하나 준비하여 매다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마음으로 끊는다는 것,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다는 것은 죽음에 비견되는 일입니다. 얼마나 힘겨우면 칼리 지브란이 부모와 자식을 활과 화살의 관계에 비유했겠습니까. 화살은 활의 품에 머물러 있으면 장식품에 지나지 않지요. 화살을 멀리 쏘아버리려는 본능이 없으면 활이 아닙니다. 그 본능이 강렬할수록 활은 활다워집니다. 활은 화살을 더 멀리 더 높이 쏘아 올릴수록 빛나고, 화살도 활시위를 떠나 더 멀리 더 높이 나가야 빛납니다. 활과 화살이 서로를 빛나게 하는 짝이듯, 부모와 자식도 서로를 빛나게 하는 짝입니다. 활을 팽팽하게 당겨 자식이 원하는 곳을 향해 화살을 멀리 쏘아 올릴 때, 부모는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활이 됩니다.
부모보다 정신적으로 더 건강한 자녀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불편한 진실이지요. 어느 부모라도 자식 하나 잘 키웠다고 당당하게 큰소리를 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섣불리 자책할 필요 또한 없습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없는데 완전한 부모 또한 어디 있겠습니까. 좋은 부모란 자식을 통해 자신의 허기를 채우지 않는 사람, 가슴에 돌멩이 하나 단단히 매달아 놓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또한 현명한 부모란 화살을 멀리 쏘아 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원리는 나무의 씨앗 이동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나무는 땅에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씨앗을 멀리 보내 번식하려고 애씁니다. 특히 같은 지역에 나무가 많으면 경쟁으로 인해 피해를 보기 때문에 생존 전략의 하나로서 가급적 씨앗을 멀리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예컨대 큰 부모 나무 아래 씨앗이 떨어지면 부모의 그늘에 가려 햇볕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그런 상황을 피하려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로 잘 당겨진 활에서 화살이 힘차게 하늘을 날아올라 먼 과녁을 꿰뚫듯, 좋은 부모 아래서 좋은 자녀가 납니다. 마음이 부풀어 오를수록 무거운 돌멩이를 단단히 매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법입니다.
그리하여 육아의 최종 목적은 자신이 해고당하게 하는 것이라 하지요. 다시 말하면 아이를 믿고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가부장제와 연관된 온정주의의 폐해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요.
2. 부모가 먼저 행복해야
부모들은 누구나 자녀들이 행복하고 자존감 높은 아이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자존감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모 및 주변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길러집니다. 다시 말하면 자녀의 자존감은 부모로부터 되물림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자녀가 자존감 높은 아이로 자라기를 바란다면 먼저 자존감 높은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행복감은 자존감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자녀의 자존감이 부모의 그것에 달려 있다면, 결국 부모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만큼 부모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높은 자존감을 심어주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의 높은 자존감을 길러 주는 중요한 요소는 아이의 결정권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생활 속에서 구체적인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예컨대, 청소를 함께하는 경우 “너는 분리수거, 신발 닦기, 창문 닦기, 중 어느 것을 할래?”하고 구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 결정에 어려움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유대인 부모들의 “마다호세프?”라는 질문입니다.
마따호세프?
유대인들이 아이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마따호세프?”라고 합니다,. “네 생각은 뭐니?”, “너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라는 말과 유사합니다, 이것은 유대인 부모가 일방적으로 자녀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아이의 생각이나 의견을 물을 때 쓰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아이를 존중한다는 뜻이지요. 유대인 부모의 이러한 태도는 아이들에게 자존감과 행복감을 줍니다.
부모가 일방적으로 묻고 아이들이 수동적으로 대답하는 우리 가정의 대화와는 사뭇 다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이의 높은 자존감을 길러 주는 중요한 요소는 아이의 결정권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주도적 ‧강압적 성향이 있는 한국의 부모들이 배워야 할 것은 바로 ‘마따호세프?’ 질문이 아닐까 합니다.
‘부모 오류’
한편, ‘부모 오류’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이 세상에 들어올 때 함께 갖고 왔던 소명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 이런 소명에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해지는 과잉행동은 결국 그들이 살아있는 이유를 배반합니다. 즉 자녀가 삶의 이유가 되면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이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녀도 원하는 바가 아닐 겁니다.
위의 평론문에서 인용한 김선우 시인의 ‘사랑하는 엄마, 아빠에게’ 라는 시에서 아이는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아빠 엄마 제발, 저 때문에 살지 마세요 / 엄마는 엄마의 꿈 아빠는 아빠의 꿈을 위해서 /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렇지요. 부모는 자녀 때문에 사는 것만은 아니어야 합니다. 그런 만큼 어머니는 자신이 행복해지는 방향으로의 노력이 먼저입니다. 행복은 전염된다고 합니다.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 바로 옆에 살면 내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약 34% 증가한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행복해야 자녀도 행복합니다. 가정에서는 어머니가 태양이 되어 아이를 비추는 것이 아름다운 지혜가 아닐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 자신의 욕구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대한민국의 학부모님께』라는 저서에서 서울대 국제대학원 이수형 교수는 “학부모가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고, 노후 준비를 하는 등 자기 인생을 살아야 자녀들이 부모 걱정을 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다른 사람들에 앞서 자기 자신을 먼저 돌보야 한다는 점은 항공사에서 증명해 주고, 소방 안전 전반에서도 강조하는 사항입니다. 비행기에서 항공사 직원이 부모들에게, 비상시에는 산소마스크를 부모가 먼저 쓴 다음 아이에게 씌워주라고 안내합니다. 이로부터, 부모가 숨을 쉴 수 없으면 아이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어 줄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요.
비행기 밖에서 부모의 역할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 눈에 덜 띌 뿐이지요. 두 경우 모두 부모로서 자기 욕구를 충족하는 일은 협상의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부모로서 여러분이 자기 욕구를 돌보지 않아서 스스로 튼튼하지 못하다면, 자녀가 생존할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겠지만, 그들이 뻗어나가도록 돕는 데 필요한 생기와 현존은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의 본보기가 되어주지도 못하겠지요, 그런데 자녀가 혼자의 힘으로 출발할 때 그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그런 본보기인 것입니다.
자식에게만 ‘올인’하는 가족에게는 비극이 예고되어 있다
그런 만큼 부모의 욕구 충족은 정말 중요합니다. 또한 그러기에 부모가 먼저 행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거꾸로 말하면, 자식에게만 ‘올인’하는 가족에게는 비극이 예고되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부모의 과잉보호에 익숙한 자녀들이 매사에 의존적인 성향을 갖게 되어, 결국은 부모의 등골을 으스러지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얽매이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독일의 교육학자 알베르트 분슈는 “과잉보호는 사회를 병들게 하는 마약”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경제적인 환경이나 시간, 학력까지 다 갖추었으나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부모들이 한두 명의 자식에게 ‘올인’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자기 영향력 밑에 두고 그것을 즐기는 듯한 부모의 양육 태도는 결과적으로 자식의 생존 능력을 박탈하는 셈이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영원히 ‘애 어른’일 뿐, 결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홀로 서기 훈련이 필요하다
가정경영연구소 소장인 강학중 박사는 주례사에 양가 부모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의 말씀을 담는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소중한 내 아들이고 내 딸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누군가의 남편이자 사위이고 또 누군가의 아내이자 며느리이니 ‘이제는 남이다’라고 생각하며 사시라는 것이다.
강 박사가 양가 혼주들에게 이런 당부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결혼한 후에도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하는 자식과 결혼을 시키고도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부모들이 만들어 내는 불행을 너무나 많이 보아온 까닭이라고 합니다. 또한 ‘남’이라고 다짐해야 자식을 떠나보낼 수 있기에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시영의 ‘성장’이라는 시를 읽어 보겠습니다.
바다가 가까워지자 어린 강물은 엄마 손을 더욱 꼭 그러쥔 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거대한 파도의 뱃속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다 엄마 손을 아득히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 잘 가거라 내 아들아. 이제부터는 크고 다른 삶을 살아야 된단다. 엄마 강물은 새벽 강에 시린 몸을 한번 뒤채고는 오리처럼 곧 순한 머리를 돌려 반짝이는 언어들의 길을 따라 산골로 조용히 돌아왔습니다.
아이는 잘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소중히 맡았다가 보내줘야 하는 선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호자의 역할은 그 기간 동안 선물을 잘 지키고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요컨대 자식도 부모에게 걸림돌이 안 되고 부모 역시 자식에게 짐이 안 되는 건강한 관계가 먼저 정립되지 않으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부모 자식 관계를 갈라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 ‘각자 잘 살기’부터 배우고 실천하자는 의미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녀가 어릴 때부터 떠나보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와 병행하여 부모에게 거는 자식의 기대치를 어릴 적부터 낮추는 일도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반면, 부모의 자식에게 거는 기대치도 낮추어야 함은 앞서 고정희 시인의 ‘사랑법 첫째’를 통해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자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받아들이기
사람은 저마다 기질과 성격이 다르게 태어납니다. 따라서 아이의 타고난 성향과 기질에 따라 다르게 양육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없고 아이를 키우는 데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부모가 자신의 성향을 알고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화내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줄어들겠지요.
요컨대 행복한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자녀의 본 모습 을 인정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내용들을 정리하면서, 창가교육학의 대가인 이케다 다이사쿠 박사의 아래 인용문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내가 있을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자주 말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 까닭은, 가정마저도 '우수한가, 우수하지 않은가'라는 학교와 기업의 가치관으로 아이들을 평가하는 곳이 되고 말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해도,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부모의 기대는 '더욱더, 더욱더' 커진다. 게다가 '무엇을 위해?' 라고 물으면, '너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잔소리를 하는 거야."라고. 그래서 '애정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안 되는 사람'이라고 나무라며 절망에 빠지고 만다.
그렇게 안으로 곪은 병든 에너지가 출구를 찾으려고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공부해." 라는 말로밖에 애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어른의 빈곤한 인생관 - 그것이 아이들을 황폐하게 만드는 원흉일지도 모른다.
먼저 아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 인정하고, 끌어안아 주어야 하지 않을까. 부모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이’의 모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네가 착한 아이라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우수한 아이라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네가 너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다. 네가 무엇을 하든, 나는 가장 든든한 네 편이다.'라고 애정을 듬뿍 쏟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할 때 아이는 비로소 스스로 자신을 좋아하게 된다. 자신을 좋아하는 아이는 스스로 자신을 성장시킨다.
아이 자신이 '무엇을 위해?’를 생각하면서 '많은 사람을 위해서!’라고 스스로 동기부여를 할 수 있다면, 이만큼 강한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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