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합창단 <명작시리즈>는 예술적 가치와 작품성이 높은 합창들로 구성하여 정통 클래식합창 진수를 선사하는 서울시합창단의 대표 프로그램입니다. 그 세 번째 무대에 앞서, <명작시리즈>를 위한 ‘명작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서울시합창단 ‘명작이야기’
1. 19세기 오페라계의 두 거장 : 로시니와 푸치니의 탄생과 성장
2. 그들의 작품처럼 살다간 작곡가들 : 로시니와 푸치니의 작품과 삶
3. Messa di Gloria : 로시니와 푸치니의 같은 제목 다른 작품
로시니와 푸치니가 활동했던 19세기 이탈리아 반도는,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인한 프랑스령이 확대되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는 등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에도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고, 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독립 운동의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그 결과, 그 당시 이탈리아 반도를 구성하던 작은 왕국 및 도시국가 체제로는 제국 사이에서 버텨낼 수 없다는 생각이 이탈리아인에게서 퍼져나갔습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시작되었고, 많은 전쟁과 저항 끝에 1870년 경 현재 이탈리아 영토와 비슷한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수립되었습니다.
19세기 초, 이탈리아 반도의 상황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한국판]
이러한 격변의 시대에 속했던 로시니와 푸치니, 이 두 작곡가의 탄생과 성장에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태생적 환경은, 그들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어린 시절에 형성되기 마련인 음에 대한 직관적 감수성의 발달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로시니에게는 트럼펫 연주자인 아버지와 아마추어 가수인 어머니가 있었고, 푸치니에게는 고향 ‘루카’의 교회음악 책임자라는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이 있었습니다. 이에 따른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 덕에 로시니는 볼로냐 음악원, 푸치니는 밀라노 음악원에서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으며 그 재능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젊은 시절의 로시니(왼쪽)와 푸치니(오른쪽) [이미지 출처 - ⓒ Google Images.]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다른 작곡가와의 경쟁이었습니다.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다른 선배 및 동료 작곡가 역시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현대에 비해 볼거리가 현저히 적었던 19세기 유럽에서, 성공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오페라 작곡가를 지망하는 음악인 역시 많았습니다.
이러한 면이 잘 나타난 사건이 바로,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관련된 에피소드 입니다. 로시니가 이 작품을 초연했던 1816년에는 선배 작곡가인 ‘파이시엘로’가 작곡한,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이미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던 것이죠. 로시니는 제목을 ‘알바비마 혹은 무익한 조심’으로 바꾸고 파이시엘로에게 미리 편지를 보내 양해를 구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파이시엘로의 제자 및 팬들의 야유와 방해 공작에 대실패로 초연을 마치게 됩니다. 하지만 재공연을 거치며 관객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이전의 작품들이 절반 정도의 성공을 거둔 것과는 다르게 이 작품을 시작으로 유럽 최고의 인기 작곡가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과 경쟁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부족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까요.”
‘세빌리아의 이발사’ 초연 전, 파이시엘로에게 로시니가 보낸 편지 중
“공포의 밑바닥에서 환희의 절정을 순식간에 맛보았다.”
로시니가 ‘세빌리아의 이발사’ 초연 당시를 회상하며 남긴 말
이러한 어려움은 푸치니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밀라노 음악원을 갓 졸업하고 돈이 없어 시계를 전당포에 맡기며 버텨나가던 이 신인 작곡가에게, 유일한 꿈과 희망은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오페라 악보 출판사 ‘손쵸노’가 1883년에 공모하는 단막 오페라 작곡 콩쿠르였습니다. 그러나 혼신의 힘을 다해 완성하고 간신히 마감직전에 제출한 오페라 ‘빌리’는 그 공모에서 떨어졌을 뿐 아니라 어떤 호의적인 평도 듣지 못하고 맙니다. 절망에 빠진 푸치니였지만, 어머니의 격려에 힘입어 아르바이트를 하며 버텼고 은사 폰키엘리를 비롯한 지인들의 도움으로 밀라노의 작은 극장 ‘달베르메’에서 ‘빌리’를 초연할 수 있게 됩니다. 그 결과, 총 18번의 커튼콜과 앙코르 요청 그리고 많은 호평을 받게 되었습니다.
“내 ‘작은’ 오페라를 달베르메 극장에서 공연하게 되었어요.
보이토나 살라 같은 영향력 있는 분들이 도움을 주고 있어요.
잘 지내요? 건강이 좋아지지 않는다면서요. 어떻게 해요.“
‘빌리’ 초연 전 어머니에게 보낸 푸치니의 편지 중,
얼마 지나지 않아 푸치니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 작품은 푸치니의 재능, 특히 선율에 대한 재능을 드러낸다.
기법은 매우 세련되었고 비제나 마스네를 느끼게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푸치니는 이탈리아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작곡가가 될 것 같다.”
‘빌리’의 초연 후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에 실린
음악 이론가 ‘필리포 필리피’의 평
이후 두 작곡가의 음악 경력은 나날이 발전하게 됩니다.
로시니의 인기는 이탈리아에 국한되지 않았고, 1824년경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생활하며 파리 ‘이탈리앙 극장’의 예술감독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37살까지 총 37개의 오페라 작품을 발표한 로시니는 ‘윌리엄 텔’의 작곡을 마지막으로 오페라 작곡을 그만두게 됩니다. 그러나 기존 작품들의 지속적인 흥행과 프랑스 정부로부터 받게 된 종신 연금 덕택에 그의 생활은 매우 풍족했고 여유로운 생활과 미식에 탐닉하게 되었기에, 말년에는 비만에서 오는 합병증으로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현대의 비평가들은 드디어 로시니의 단 하나뿐인 결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가 더 이상 오페라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시니를 그린 캐리커처의 하단 문구 (로시니의 오른팔에는 돈주머니, 왼팔에는 ‘손쉬운 음악’이라고 쓰인 악보가 있다. 뒤쪽은 무너지고 있는 오페라 극장)
[이미지 출처 - ⓒ Google Images.]
푸치니 역시 세 번째 오페라인 ‘마농 레스코’가 대성공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성공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작곡가 베르디의 후계자로 인정받은 푸치니는 금전적인 풍족함과 더불어 큰 명성을 얻었고, 그가 발표한 총 12편의 오페라는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성공을 바탕으로 당대의 멋쟁이로 유명했고, 자동차에 푹 빠져 수집과 운전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자동차 광이었던 푸치니는, 1910년 전복 사고를 겪어(아래) 1년간의 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미지 출처 - ⓒ Google Images.]
프랑스의 주간지(Le Rire, 1898)에 실린 푸치니의 캐리커처, 멋쟁이로 유명했던 그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 Google Images.]
이들의 이러한 명성과 그에 따르는 생활의 풍족함은 작품의 지속적인 성공으로 인한 것이었고, 그렇기에 그들의 삶은 작품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할 것입니다. 다음 편, ‘그들의 작품처럼 살았던 작곡가들 – 로시니와 푸치니의 작품과 삶’에서 이에 대해 다루고자 합니다.
공연개요
공 연 명 : 서울시합창단 <명작시리즈III>
일 시 : 2018.10.25(목) 19:30
장 소 :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프로그램 : 로시니, Messa di Gloria / 푸치니, Messa di Gloria
지 휘 : 강기성
출 연 : 소프라노 정혜민, 메조소프라노 방신제,
테너 박승주, 테너 김재화, 베이스 정록기
입 장 권 : R석 \50,000, S석 \30,000, A석 \20,000
예 매 : 세종문화티켓 02-399-1000
www.sejongpac.or.kr
※본문 참고자료 및 출처
금난새, 금난새의 오페라 여행, 아트북스
김성현, 봉주르 오페라 : 문학을 사랑한 오페라, 아트북스
나카노 교코, 사랑과 배신의 작곡가들 : 오페라처럼 살다, 큰벗
박종호, 불멸의 오페라 제2권, 시공사
박종호, 박종호에게 오페라를 묻다, 시공사
유윤종, 푸치니, 북이십일
위키피디아 한국판, 이탈리아의 통일
진회숙, 무대 위의 문학 오페라, 니케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