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형태와 태양형 인간
인간의 몸은 일원상의 공간 속에 사지와 모든 장기가 중심점을
향하는 형태로 구성되어있다. 또한 신체구조는 오른쪽과 왼쪽이
대칭으로 이루어져있다. 양팔은 신체의 바깥쪽으로 뻗어 나가도록 되어 있고, 양팔이 만드는 선의 일원상속에서 양극적 방향을
설립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수평선을 능가하는 것이다. 만다라는
수평선상에 신체의 중심으로 모이고 있는 십자가는 수평선과 수직선의 만남으로 만들어진 형태로서 양팔을 옆으로 펴고 두발을
모으고 서있는 인간의 몸을 연상시킨다. 십자가는 원래 특별한 장소나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쓰여졌다. 원래 나무, 산,
사다리의 의미와 연관된다. 이러한 상징들은 신들의 세계인 하늘과 땅을 연결한다는 의미가 있다. 초월적 세계와 세속적 세계가
함께 존재하는 대지 위의 장소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수평과
수직의 연결성을 "세계의 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십자형태는 기독교의 십자가, 불교 사찰표시인 만(卍)자 이외에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 인간정신 속에 있는 자기를 나타내는 상징들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이다. 또 나치의 표시로 사용되기도하며 라이에리안 무브멘트의 기호에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만다라는 심리적인 치유와 종교적인 구원 사이를 오가며 중심적이고 우주적인 상징이라고 하겠다.
점성학에서의 상반구와 하반구 그리고 좌반구와 우반구 네 개의 영역을 나누는 십자형태로 구분한다. 이들은
각각 객관적 자기인식(사고)와 객관적 외부인식(감각),
주관적 자기인식(직관)과 주관적 외부인식(감정)으로 구분된다. 이들 십자가에 의하여 나누어진 공간은 우리인격의 네가지 요소와 상응한다. 또한 점성학은 물, 불, 바람, 흙의 네가지 원소의 상징에 의하여 우주의 원리를 구성한다.
한자의 십(十)자는 원래 모든 것이 완벽한 상태를 나타내는 숫자이다. 수평선과 수직선이 교차하고있는 이 십자의 형태는 하늘과 땅으로
상징되는 우주적 질서를 나타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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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모음이 땅을 나타내는'ㅡ'와 하늘을 나타내는 'ㅣ"와 인간을 나타내는 '.'으로 구성되어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이와 같은 수직선과 수평선의 두 개의 힘으로 우주의 전체상을
표현한 사람이 '몬드리앙'이다. 수직선은 인간이 의연하게 일어서려는 인간의 의지의 표현이라면, 동시에 엄청난 권위의 힘을 자랑하는 하늘과 운명적인 힘의 상징이다.
수평선은 죽은 인간의 형태가 암시하듯 운명에 순응하고 유순한
땅의 느낌을 그대로 전한다. 그래서 몬드리앙은 이 두개의 힘을
통하여 우주의 모습을 그리려고 하였다. 이 두개의 힘이 교차된
모습이 바로 십자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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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레는 이두개의 힘에 대각선 또는 사선이라고 부르는 대단히 인간적인 선을 하나 더
첨가했다. 이러한 사선은 운명적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 운명을 거칠게 해쳐나가려는 인간의 노력을 표현한 것이다.
끌레의 별은 그가 바라보는 우주상에 대하여 그나름의 표현이다. 수직선과 수평선 대각선이 교차하고 있는 장 그곳이 바로 우주라는
생각이다.
이것을 우리는 끌레의 별이라고 부르며 역사상 다비드의 별과 전통적인 5개뿔을 가진
별이외에 다른 어떤 형태도 공식적으로 별이라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 |
음양오행설은 우주의 진리를 5가지 우주의 기를 통하여 설명하려고 하는데 음과 양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중앙의 기를 토(土)라고 부른다. 사실 이 土는 +와 -가 합하여진 글자이다. 만약 수직선을 + , 수평선을 -로 생각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土라는 글자는
원래 十의 형태를 가져야만 옳다. 따라서 토의 원래의 형태는 十이 맞을 것이다.
음양오행에서 토(土)는 숫자로는 5를 상징하며 동시에 5가 한 옥타브 높아진 10을 상징한다.
따라서 숫자 10의 한자표현인 十은 土의 표현과 동일한 것이다.
이러한 십자형태는 우주의 완성과 완전함을 상징하게 된다.
점성기호에서는 십자형태는 물질을 상징한다. 따라서 위그림에서 보듯 지구는 영을 상징하는 원안에 십자형태로 표시된다. 바로
이 지구를 표시하는 기호가 만다라의 기본도상과 일치한다.
그런데 세계의 모든 어린이들이 처음에 이러한 만다라의 도상을
그린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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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형
인간
점성학에서는 원을
태양을 상징하며 영을
상징하고 달은 반호이며
영을 담는
그릇인 혼을
상징한다.
또한 십자가는 신성과
지상이 조합된 물질을
상징한다.
그래서 지구는 원 속에
십자가 들어있는 모양으로 그려진다. 태양은
브라마이며
이 세상의
가르침이다.
원은 태양을
상징하고 가장 강력한
신으로서 태양은 상징되었다. 태양은 우주의
원천이며 생명의 원천이기도하다.
태양은 한민족의 언어로는 '하'에 해당된다. 한
민족은 천민사상(天民思想)을 가지고 있으며, 태양의
상징인 밝음을 추구하는
민족이다.
'민족 수'는
태양으로부터 유래된
'밝달나무'이며
'하'로부터
파생된 단어들인 '밝다'
'희다" "흰색' 등을 상서로운 것으로 여기며
'백의 민족'이라는
칭호도 받고
있다. |
'수메르'라는 이름은 '흰 머리"라는 단어는 '백두'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즉 한민족은 태양을 숭배해 왔으며 어린이들이 그리는
태양형의 인물은 그 표현이 아닌가 한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는 태양신을 숭배하고 있었으며 점성술에서 말하는 양자리의 시대였다. 양좌시대(BC 2400---250년경)
춘분점이 황소좌에서 양좌로 옮겨가면서부터 태양신의 승리는 이
새로운 별자리의 영향력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양은 메시아의 상징이 되었다.
성경에서 봄 축제가 유월절(Passover)이라 불리는 것은 글자가
말해 주듯이 태양이 3월 21일경에 적도이남에서 이북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양을 제물로 바친다. 모세가 새로운 율법을 들고 산에서 내려 왔을 때 금송아지를 예배하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보고
의분 한다. 모세가 충격을 받았던 것은 동물을 예배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스라엘자손들이 양을 제물로 바치도록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저 애굽탈출 이후 버린 줄 알았던 이집트 문화---Apis 아피스 숭배-- 로 퇴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집트에서조차 아피스는 숨은 태양의 양두신(羊頭神) 아멘라 Amen-Ra
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던 시기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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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그림에서 만다라, 원상,
태양형의 인간이
모두 나타나고 있으며 세계의 모든
어린이들이 공통적으로 이러한 형태들을 그린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을 시사하고
있다.
어린이들은 아마도 자아라는 것이
형성이 안되어있기 때문에 가장순수한 형태로 우주의 순수정신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든다.
어린이들은 분명
진아로서 우주를
보고있다.
진아는 무한하고
형태가 없고, 변함없고, 어디에나 있으며,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이
진아 속에는 만물이 깃 들어 있는
'하나' ,'모든 것' ,
'신성' 이 있는데 ,
이는 창조주와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이 힘은 인간의 영역에서 거대화 끌개 장으로 나타나고, 모든 사람들의 자유의 선택을 포용하며, 결국' 모든 길은 나에게로 통한다' 고
표현 될 수 있다.
이러한 가르침이나 노력은 에너지수준 700 정도로
측정된다. |
600의 에너지 장에서는, 평범한 생각들이 멈추게 된다. 직선적이고 시간적인 관점을 초월하여 , 존재가 앎이고, 전능이고 비 이원적인 것이 된다. 존재는 지역성을 띠지 않기 때문에 '나와 너' 라는
이원적인 생각이나 거기서 나오는 분리의 착각도 사라진다. 이 경지야말로 모든 이해를 초월하여 무한하고 조건 없는 사랑이 나타나는 평화의 상태로 , 모든 것을 포용하고, 모든 것을 알고, 어디에나 있으며, 전능하고, 진아와 일치하며, 보이는 것이 안 보이는 것과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알고 있다.2)
우리는 의식 수준을 논의하면서 자존심이 갖고 있는 약점의 하나는 부정성에 있다는 것에 주목한 바 있다. 각자의 마음은 자신의'옳음을 ' 보호하기 위해서 '부정'의 과정을 밟는다. 이러한 부정성이야말로 인간이 평생동안 의식 수준을 5점 정도밖에 진전시키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인 것이다. 의식의 커다란 진전은 '내가 안다' 는 착각을 버릴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기꺼이 변화하려는
태도는 흔히 개인들의 믿음이 다 허물어지고 더 나아갈 수 없는
아주 ' 밑바닥'에 처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닫힌 상자 속으로는 빛이 들어 갈 수 없다. 위기의 좋은 점은 그것이 높은 의식수준으로
가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데 있다. 인생이란 배움의 터전이란 생각을 받아 들이 기만 한다면 , 삶은 진정한 스승이 되어 줄 수 있다. 그럼으로 써 우리가 우리자신을 다루는 삶의 고통스러운 교훈들을 겸허하게 받아 들여 성장과 발전의 디딤돌로 삼지 않는 다면, 삶은 헛되이 낭비 될 뿐이다.
우리가 곧 마음 자체라고 생각하게 되면서부터 우리는 우리가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생각, 믿음, 느낌,
견해들의 주인은 바로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생각들은 거대한 의식의 데이터에서 빌려온 것에
불과 하다는 것, 우리의 것이 결코 아니다 하는 통찰력에 도달한다. 지금 우리들이 믿는 생각의 체계는 우리에게 주어지고, 흡수되고, 우리와 동일시된 것에 불과하며, 새 개념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이러한 지나가는 개념들에 가치를 덜 부여할수록
우리는 이 개념들이 우리를 지배하는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며, 마음의 마음으로부터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기쁨의 새로운 원천이 익어 가는 것이다. 우리가 높은 의식 수준으로 올라감에 따라 존재 자체의 기쁨도 성숙한다3)
우리는 자아를 그만큼 한정된 것으로 경험하는 것이 된다. 반면,
의식 자체를 본다면 그것은 자아를 한정되지 않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이처럼 한정된 자신에 대한 관념을 극복하고 자아를 의식
자체와 동일시 할 때에야 우리는 ' 깨달은' 사람이 된다
1) 유기천 편저《점성학》p386, 고려원 미디어. 1992. 서울.
2) 데이비드 호킨스 저, 이종수 역 <<의식혁명>> Power VS
Force, .P244 , 한문화, 1997, 서울
3) 上同
출처:www.5artnet.com
첫댓글 cyidYByWlsX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