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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공대 대학원, 동문 SFC
 
 
 
카페 게시글
*^^) 신앙의 도리 스크랩 천로역정강해(2):각성되는 노은혜씨(행2:37)
(*^^)겨자씨 추천 0 조회 18 13.11.24 03: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천로역정 1부

(유성덕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2009)

 

(본문)

 

 

1. 저자의 수감과 꿈- 크리스챤이 죄를 깨닫고, 다가올 진노에서 피하고 복음의 인도로 그리스도께로 향한다.

 

 

세상의 황폐한 광야지대를 두루 다니다가 어떤 곳에 이르니 거기에는 굴이 있었다. 나는 그 굴 안으로 들어가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나는 한 남자를 보았는데, 그는 남루한 옷을 걸치고 집에서 떨어진 어떤 장소에 서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손에는 책 한 권을 들고 있던 그는 이윽고 책을 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읽어 내려가면서 그는 몸을 떨며 울고 있었다. 그러더니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슬픈 목소리로 “어찌할꼬?” 라고 울부짖었다(행2:37).

 

 

곤경에 빠진 채 집으로 돌아간 그는 아내와 자식들이 그의 고민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될 수 있는 대로 그의 감정을 억눌러 보았으나, 근심이 점점 심해져서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 참다 못한 그는 마침내 아내와 자식들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 사랑하는 아내여, 그리고 귀한 내 아들들아, 너희들을 돌보아야 할 이 아빠는 등에 지워진 무거운 짐으로 인하여 몹시 고통스럽구나. 더누가 내가 확실히 들은 바로는 머지않아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 하늘로부터 큰 불이 쏟아져 내려와 도시가 온통 잿더미가 된다고 하더구나.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어떤 길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나 자신은 물론 당신과 귀여운 너희들까지 모두 죽게 될거야. 하지만 난 아직 그 길을 찾지 못했어.”

 

 

이 말을 듣고 그의 가족들은 무척 놀랐다. 그가 한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의 머릿속에 어떤 광증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밤이 가까워지자 잠을 재우면 그의 머리가 안정될 것이라고 믿고 가족들은 서둘러 그를 잠자리로 보냈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밤이나 낮이나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웠으므로 그는 밤새 한 잠도 못자고 한숨과 눈물로 밤을 지샜다. 아침이 되자 가족들은 그가 어떻게 되었나 궁금하여 물었으나 그는 점점 더 심하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가 다시 한 번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시작하자 가족들의 표정은 더욱 굳어지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또한 거칠고 까다롭게 굴면 광증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때로 그를 비웃기도 하고 크게 야단을 치기도 했으며, 그를 아주 무시해 버리기도 했다. 그러자 그는 자기 방에 혼자 숨어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슬퍼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혼자 들로 나가 거닐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기도도 드리며 며칠을 보냈다.

 

 

어느 날 그는 여전히 들을 거닐며 책을 읽고 있었는데, 책을 읽다가 갑자기 크게 낙심하여 에전과 마찬가지로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행16:30,31)하고 울부짖는 것이었다.

 

                                  *       *      삼일교회설교/2011년6월22일    *         *

 

제목:각성되는 노은혜씨

본문:사도행전2장37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인생은 죽음 앞에 직면해 있는 존재들입니다. 런던에서 생활하다 보면 오고가는 곳마다 무덤이 많습니다. 일반 공동묘지도 그렇고, 그런 묘지들 중에 유명인사들의 묘지도 있습니다(사진1: 번힐필즈에 있는 존번연의 무덤).

 

(그림1:런던의 번힐필즈는 청교도묘지로 유명합니다. 바로 존웨슬리채플의 바로 앞에 있는데, 존 오웬같은 유명한 청교도들이 많이 묻혀 있습니다. 존 번연의 묘지의 한 면에 아래와 같은 순례자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림2: 죄짐을 지고 가는 순례자의 모습. 언제 이 죄짐을 벗어버리게 될까요?

당신은 죄짐을 벗어버렸는가요?)

 

 

그러다 보니, 자주 인생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존번연의 천로역정은, 어떤 사람이 황폐한 인생의 길을 가다가 굴을 하나 발견하고는 그 안에 들어가 잠을 자다가 꿈을 꾸는 내용입니다(사진3: 꿈꾸는 자가 책표지).

 

(그림3: 잠자고 있는 존번연, 그리고 위쪽에는 좁은 문을 향해서 나아가는 순례자, 아래쪽에는 잠을 자고 있는 굴을 보여주는데, 굴 속에 사자가 있는 것은, 존 번연이 영국국교회에 쫓겨나서 감옥생활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데, 사자굴에 던져졌던 다니엘을 연상시키고 있다. 그런 중에 쓰게 된 것이 바로 이 천로역정이다.)

 

그 꿈 속의 내용이 “천로역정”입니다. 그 꿈을 꾸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존 번연이지요. 그리고 또한 우리들도 또한 그 꿈에 참여하기를 존 번연이 바라는 것입니다. 이 꿈은, 단순히 꿈을 깨어보니, 도끼자루 썩었더라는 식의 그런 일장춘몽의 꿈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을 잘 반영하는 꿈입니다. 꿈을 통해서 현실이 어떠한 지를 깨닫고, 영원한 세계를 향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 꿈에 어떤 사람이 나옵니까? 한 남자가 나옵니다.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인데, 지금 고민하고 있는 이 단계에서의 이름은, ‘노은혜’(Graceless)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사자 두 마리를 지나서 ‘아름다운 집’에 도착했을 때에 자기 이름이 이랬다가 ‘크리스챤’으로 바뀌었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나옵니다.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요?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사실은 전반부 1단계에서의 일입니다.

 

 

이 ‘노은혜’씨는, “남루한 옷을 걸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손에는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는데, 그 책을 펴서 읽어내려가면서 흐느끼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어찌할꼬?” 슬피 외칩니다. 이 책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책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든지 성경의 내용을 전해 들은 것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탄식하고 있는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때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는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이 탄식하고 있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이것은 구원에 이르게 되는 첫과정으로서 ‘각성단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없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에 자신의 죄에 대해서 각성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사진4).

 

 

  이 각성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구원의 서정이란 측면에서, 부르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소위 부르심이란 것은, ‘외적 부르심’과 ‘내적 부르심’이 있습니다. ‘외적 부르심’이란 말 그대로, 우리의 외적 행동에 있어서의 변화를 동반하는 부르심입니다. 가령, 친구의 청을 받아서 교회당을 가게 된다든지, 교양실력을 쌓기 위해서 성경책을 읽어보게 된다든지, 어떤 과정을 통해서든지 복음을 접하게 되지만, 그것이 생물학적 귓가만 울리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그렇게 해서 들리게 된 복음의 이야기가 영혼에까지 울림을 일으키고(물론 이렇게 되고서도 돌아서는 사람이 있을때에 이것은 외적인 부르심에 그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어이는 마음의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회심에까지 이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내적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이런 내, 외적 부르심이 있을 때에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각성’입니다. 부르심을 외적인 것, 내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현대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이 ‘각성’ 자체를 ‘부흥’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위 미국역사에 있어서 17,8세기에 있었던 소위 우리 나라에서 ‘대부흥운동’이라고 번역되는 영어는 ‘Great Awakening'입니다. 혹은 이것을 ‘대각성운동’이라고 번역하면서도, 그 의미하는 바는 엄청난 부흥운동이란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각성’과 ‘부흥’은 동반하는 경우가 많지만, 엄격히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각성이 일어나도 그 각성이 회심이나 부흥에까지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고, 중간에 식어져 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각성으로 시작해서, 참된 회심, 곧 중생을 통해서 ‘크리스챤’이 되는 과정을 ‘내적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된 크리스챤’이 되게 하는 각성단계를 보여주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존번연의 천로역정은, 이 첫부분에서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있는 죄의 발견입니다. 이 노은혜씨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이 이것을 의미합니다.

 

(그림4: "어찌할꼬?"-이런 각성단계를 거쳐야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된다)

 

이것은 죄의 짐을 말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죄의 짐을 등에 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죄의 짐을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각성의 첫단계입니다. 이런 사람은, 지금까지는 기고만장하고,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인생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삶이 허무한 것을 깨닫게 되고, 그 허무의 깊은 곳에, 자신의 추함과 연약함과 죄를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첫단계에서는 그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희미하게 느끼고는 그것을 눌러버리려고 합니다. 잊어버리고자 합니다. 여러 가지 놀이에 탐닉하거나 술이나 도박같은 것에 빠져서 자신의 허무와 죄를 잊어버리려고 하지요.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구원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 이런 각성이 일어나게 되면, 줄기차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양심에 호소하거나 섭리의 손길을 통해서, 계속 죄의 짐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양심을 통해서 하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양심은, “하늘의 사냥개”(Greyhound of the Heaven)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남자가 “남루한 옷을 걸쳤다”는 것이 반드시 그 집안의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이 겸비해진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런 상태에서 나오는 탄식이 바로 “어찌할꼬?”입니다. 이런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이지요. 다윗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우리 인생이 하는 근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게 하는 근심이 있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책망한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들로 하여금 생명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근심시키고자 함이었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중요한 점은, 이런 겸비와 탄식이 일어날 때에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갈등이 있습니다. 특별히 가족들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이런 생명에 이르게 하는 근심을 그들이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존번연은 ‘노은혜’씨의 가족들이 자기의 남편과 아빠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모습이 있을 것을 실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4~36). 이런 갈등과 불화를 지금도 우리들 가운데 겪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일 힘든 것은, 소위 ‘기독교가정’에서도 이런 갈등과 불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자족하고 있는 부모와 더불어서 참된 각성에 이르게 된 자녀들간에도 일어납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갈등과 불화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부르시는 자들은, 가까운 사람들의 압력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존 번연의 주인공 ‘노은혜’씨도 지금 이런 가족들의 조롱과 압력 속에서도, 계속 생명에 이르게 되는 근심을 하면서,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보게 되면,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하고 부르짖습니다. 빌립보의 간수가 부르짖는 이런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이 부르짖음에 무엇이라고 답변하였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0,31). 이 단계에서 존 번연이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천로역정의 1부에서는 이런 갈등 속에서 ‘노은혜’씨가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되고, 기어이 천성에 이르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이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에는 바로 이 가족들이 어떻게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일들을 겪게 되는 지를 그려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로역정은 1부와 2부를 함께 읽어야 기독교신앙의 전체적인 균형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여튼, 우리의 주인공 ‘노은혜’씨가 어떻게 이런 가족들의 조롱이나 압력을 이기고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되는 것일까요? 다음 주일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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