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거나 혹은 마르는 중인 오래된 것들
한 수 재
최윤경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텅 비거나 혹은 가득 차거나’를 그녀의 외동딸
결혼식장에서 하객 선물로 받던 날은 한껏 부푼 잎들이 고요히 한 잎 한 잎
숨어 물들어 가던 수줍은 신부 같은 가을 어느 날이었다.
우리시 동인으로 꽤 함께 있었음에도 그녀와의 친분을 두텁게 나누지 못한 데는
딱히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던 차에 최근 그녀 주변에 닥친 몇몇 일들을
마주하면서 그처럼 스스럼없는 뜨거운 눈물로 서로에게 안부와 위로가 스며들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마음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도 하는 것이다.
그녀의 이번 시집은 오래된 것들이 만들어 낸 흔적들을 다루고 있다.
시간도, 사랑도, 아픔도, 풍경도, 기억도, 인내와 함께 마음 안에 꿈틀대는
잔잔한 욕망까지도 오래되고 오래 되어 외롭다는 말도 멀게 느껴지는,
말라버린 눈물 자욱이 환하게 보이는 글들이다.
아무리 작아도 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제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살아있음의 또 다른 의미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
따스한 햇살 가만히 내려놓아요
(-‘키 작은 나무’- 中에서)
스스로 주문을 걸듯, 아니 어쩌면 종종 저가 저에게 가혹하게 몰아치며
지키던 목소리, 지키던 자리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햇살조차도 배경으로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거센 바람이 가슴으로 불어오면
그 바람을 안고 잠들고 싶다
쉽게 다가서지 않을 거면서
잔뜩 바람만 불어 놓은
너는 유죄다
하루를 건너뛰고
다시 상견례를 나누고 나면
심장이 두근거린다
(-‘다시 너에게로 돌아가‘- 中에서)
그러나, 살아있어 품게 되는 작은 욕망과 기대가 어찌 죄일 수 있으랴
서성이다가 마냥 걷다가
혼자 중얼거리는 말들이 노래가 되었다
그 노래가 영원불변의 음악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오늘 또 나를 슬프게 한다
(-‘내게 음악은’- 中에서)
뛰는 심장 밖으로 중얼거리는 말들이 노래가 되려면 얼마나 젖어 있어야하는 것일까
또 얼마나 젖어야 오래되어가는 것일까. 그녀의 슬픔은 격정적이 않다. 아마도 그래서
노래가 될 수 있었으리라. 노래가 되고 싶은 슬픔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한 반항이었음을...
살다보면 이렇게
아무 일도 아닌 것에
목숨 거는 날도 있는 것이다
하루하루
아무것도 아닌 것에
공연한 화는 병을 부르고
가슴은 활활 불이 났다
(중략)
훅 하고 바람에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가슴을 헤집고 사라져 버렸다
상처가 되던 말도
아무것도 아닌 일도
바람처럼 날아가 버렸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中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과 마음의
흔들다리를 서성여보지 않고서야, 작고 작은 것에 목숨을 걸어보지 않고서야
구별 해낼 수 없는 별자리 같은 것이 아닐까.
떠나고, 날아가 버린 후에 그깟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향했던 집중과 에너지조차
그리워지는 날이야말로 정말 쓸쓸한 날이 될 것이다.
네가 아픈 만큼
내게 정체되는 고통
보여주는 만큼만 아는 것이라고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
내가 너 일수 없고
너 또한 나 일수 없는 지독한 배역
한낮의 먼지처럼 가볍고 희미한
고요 속으로 걸어가는 길
너무 멀어 가기 싫다
(-‘병실에서’- 中에서)
너무 멀어 가기 싫다는 그녀의 독백은 벙어리의 눈물처럼 소리가 없다.
터져 나오지 못하는, 그렇다고 삼켜지지도 않는 오래된 울음의 성장기는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하겠지만
툭 툭 부러지던 때 있었다
(중략)
꺾이지 않기 위하여
발버둥 쳐 온 나날들
부질없다 느꼈을 땐 너무 늦었다
더 이상 부러질 것 없는
꼿꼿한 자존심이 고개를 쳐든다
억지로 멀어 넣으며
힘을 주고 나면
뚝 뚝 눈물 떨어지는 소리
심장박동이 더 크게 들리는 날
작은 키가 오그라들던 때 있었다
( -‘오래된 이야기’ 中에서)
아마도, 툭 툭 부러지고 작은 키가 오그라들던 그 때가 아니었을까.
마른 눈물 자욱 위에 다시 눈물은 젖어 눈물인지도 모를 물기를
무심코 닦던 그런 때는 아니었을까.
위에서 아래로
끝에서 위로 읽어도
같은 내용이 되는 시가 있다
(중략)
아무도 들여다 봐 주지 않는 빼곡한 글씨들
근본을 묻고 따져 보아도 묵묵부답이다
끝에서 위로 처음부터 끝까지
길은 재개발 중이다
어설픈 천막에
찢어진 창문
시시하다
시詩
(-‘시詩’ 中에서)
그녀의 글처럼 사는 것은 어설프고 시시한 일들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것은 빼꼭한 글씨만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도 내내 시시한 詩와 시시한 사람들과 시시한 내가 여전히
시시한 것들과 공존하면서 말리면서 말린 것 위에 다시 젖은 것들을 말리는 일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나는 호흡하고
그렇게 너는 숨이 멎을 때
젖은 기억을 바삭하게 말려
한 구의 시신을 가슴에 묻어둔다
무덤으로 남은 너를 위해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잡초를 뽑아내는 일과
물을 뿌려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것
오래도록 잡풀 무성한
사라져버린 길을 찾아 헤매는 것
그러다 마주서면
아~
외마디 비명 한 번
불러 주는 일
가슴 뜨거운 일이다
(-‘가을을 읽다’- 中에서)
일생이 떠나보내고 남겨져야하는 하루하루일 때,
또 어느 것은 버리고 취하여야하는 길이 마음의 엮임일 때,
고작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은 우리 서로,
간간히 마주서는 순간, 외마디 비명이거나 젖은 물기거나,
욕이거나 침묵이거나 그 어떤 소리로 불러 주는 일은
가슴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시한 것이 절대 시시하지 않은 이유쯤으로 하자.
텅 빈 충만함이 고요한 그녀의 시편들이 마르고 있는 중이라 여기고 싶은,
마른 후엔 오래된 향기에 다시 마음을 잡히는 어느 길목 초입쯤으로
여기고 싶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