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경 시집 『텅 비거나 혹은 가득차거나』출간
최윤경 시집 『텅 비거나 혹은 가득차거나』-다시올시선, 2012
시인의 말
어디에서 걸음을 떼어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가 없다.
뒤돌아보니
어지러운 발자국만 널브러져 먼지 날리는 골목길
마주서기 힘든 일상의 시간들이
뒤따라오면
또렷하게 각인되어 지는 상처들
아프게 가슴으로 쌓인다.
그 흔적들이 음표가 되고 노래가 되어 그에게 닿았으면 ……
하늘에서 환한 미소 짓고 있을
나의 사랑하는 남편에게 전하는
두 번째 시집이 모든 슬픔을
잠재울 수 있기를……
2012년 가을 그림자를 밟으며
다향 최윤경
텅 비거나 혹은 가득차거나
최윤경
지나간 시간을 껴안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 둘
갈등과 걸음이 맞부딪혀
허공에 떠도는 것
구름 위를 걸어가는
위태로움 같은 하루가
허황된 꿈들이 기어 다닌다
잡아서 밟아 버리면 될
벌레도 아닌 것이
머릿속에 들어와 버티고 앉았다
빈 호두껍데기 같은 삶은
씻어내고 털어내고 몸부림쳐도
혼자이기를 허락하지 않았고
몸 부대끼며 부서지고 망가지다가
부메랑처럼 돌아와 앉은
쓸모없이 구겨진 종이 한 장
위로처럼 손에 쥐어준 이름
꿈.
시詩
최윤경
끝에서 위로 읽어도
같은 내용이 되는 시가 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도 있다
아무리 읽어도 가슴으로 끌려오는 글 이 없는
내 마음의 언어는 오늘도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
밑바닥까지 긁어 백지위에 억지로 모아 붙인다
아무도 들여다 봐 주지 않는 빼곡한 글씨들
근본을 묻고 따져 보아도 묵묵부답 이다
끝에서 위로 처음부터 끝까지
길은 재개발 중이다
어설픈 천막에
찢어진 창문
시시하다
시詩
아주 오래된 슬픔
최윤경
꽁꽁 언 가슴은
아주 오래전 마당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따스한 물과 온기로
녹여주려 하던 마음은
더 멀리 달아나 버리고
그렇게 한참을 냉동인간으로 살아가던
바람조차 스치고 지나갈 수 없는 순간들
꼬깃꼬깃 접고 접어 감추어 두었다
악다구니를 쓰며 몸부림 쳐봐도
목구멍을 넘나들지 못했던 슬픔은
늘 배고픈 입맛을 다시기에
너무나 쓰고 짭짤한 눈물이었음을
중년을 넘어서며 알게 되었다
낡은 외투에 바람이 구멍난 집을 짓들이
가슴엔 송송 자국이 남았다
오선지에 그리는 독백
최윤경
가사도 없이
아주 간단한 허밍으로 부르는
떨리는 노래 있다
혼자만 알아들을 수 있고
부를 수 있는 노래
음의 높고 낮음을 몰라
좌충우돌 뒤죽박죽 엉키었다
낮은 목소리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다가가
건반을 두드린다
어스름 달빛 같은 열정 흐르다가
마구 꿈틀거리다가
광시곡이 되었다
우울의 꽃이 되었다
영원히 지지 않을 빛을 가진
소리 없는 웃음을 닮은
빨랫줄에 걸린 발바닥
최윤경
세상의 때 비틀어 씻겨나간 양말
걸을 때도 힘겹게 지탱하더니
쉴 때도 꼿꼿하게 긴장을 하고 있다
날마다 같은 주인을 만나
신발 속에서 땀과 씨름하다가
급기야 축축해진 몸 내동댕이친다
무엇이든 주인을 잘 만나야
고생하지 않는 법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어쩔 수 없어 숨죽인 시간
파김치가 된 양말의 고단함을
탁탁 털어내어 빨아 널면
맨발의 숨소리가 편안하다
서서도 쉬어갈수 있는 법을 배우려
오늘도 직립의 자세
늘어진 햇살을 마주보면
건조한 얼굴 환한 웃음으로 서 있겠다
나무와 손잡다
최윤경
도심의 아파트에
뿌리내린 나무는
출생지가 어디였을까
낯선 곳에서 제 몸을 부풀려
양손을 모두 펼치며
오가는 사람들 불러 모은다
파고라의 등을 덮은 나무 그늘아래
졸다 고개를 든 노인의 손바닥에
소인도 없는
한 장의 편지가 떨어진다
고향은 어디이고
언제 떠날 것인지 보채듯 몸을 흔들어 보이며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이기 시작한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시치미를 뚝 떼고는
오후의 햇살이 아른한 과거 속으로
걸어 들어갈 무렵
이마 위에 얹은 손이 세상을 가리고
바람은 알 수 없는 미소로 스쳐지나갈 뿐
나무가 전하는 말을 읽을 수가 없다
허공에 내밀어진 손이
유난히도 거칠다
이 세상에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살아감에 있어서 ‘사랑’은 인격의 완성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나 ‘사랑’은 단독자로서의 외로움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꿈은 권태로부터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꿈이 도식화 될 때 욕망의 노예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사랑과 꿈의 양 날개를 지닌 몸채로서의 외로움은 우리가 평생 지니고 함께 걸어가야 할 친구와도 같다. 아마도 시인으로서 최윤경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쓸쓸한 고백을 자기 자신에게 던질지 모른다. ‘툭 툭 부러지던 때 (시 「오래된 이야기」)’를 지나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윤회의 서울이 서운하게 다가와도(시 「서울로 가는 길」)’사랑이라는 불쏘시개를 마음의 난로에 지펴 넣을 공력을 지닌 시인은 따뜻한 위로를 가난하고 추운 이웃들에게 무량하게 꿈이라는 선물로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이다. - 나호열
최윤경 시인
전북 익산 출생
월간문학세계 등단
시원문학회 동인
한국문인협회 회원
시집으로 『햇살을 부르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