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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추념식의 밤
‘천년에 한 번만 밤이 온다면, ‘전설의 밤’이었을 것이다’. 로크랜드인들이 그들의 별 빛나는 밤의 아름다움을 두고 흔히 말하고 했다. 어째서 그런 관용구가 나왔는지는 이제는 아무도 아는 이 없지만, 아무튼 로크랜드의 밤은, 하늘 가득 채운 별들로 밝고 빛난다. 점점이 흩어진 작은 등불들 가운데를 거대하고 빛나는 등뼈가 웅장한 빛을 내뿜으며 지나갔다. 옛 지구의 ‘달’도 그렇게까지 밝지는 않았을 것이다. 별의 강. 로크랜드인들은 자신들의 밤 하늘 한가운데에서 빛나는 은하수를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모든 인간들은 죽으면 그 별의 강을 건너 안식처로 간다고 믿었다.
“후…”
설 후인은 등에 업은 아이를 고쳐 메면서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앞에는 작은 짐을 메고, 등에는 아이를 둘러 업은 채 주둔지에서 전쟁터까지 이어진 몇 킬로미터의 길을 걷는 것은 아무리 밝은 로크랜드의 밤이라고 해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피로가 누적된 탓도 있었다. 육체적인 피로에 정신적인 피로까지 겹쳐서 체력은 더더욱 바닥을 드러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정수리 위를 가로지르는 빛나는 별의 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한켠에 별빛을 받아 은색으로 반짝이는 긴 동아줄처럼 생긴 탑이 같이 보였다.
- 어서 내게로 와서 지친 네 몸을 쉬거라.
은색의 탑은 그녀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며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에 호응이라도 하듯 그녀 몸에 새겨진 수많은 죽음들이 들썩거렸다.
“참아라.”
아이를 업은 두 손에 바싹 힘을 주었다. 아이는 수면제에 취해 깊이 잠들어 있었다. 설 후인은 자신 내부에서 부글거리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들을 향해 중얼거렸다.
“이 아이가 진짜 ‘스스로 일어선 자’라면, 내 안에 새겨진 마지막 영혼들이 될 영광은 바로 너희들 차지가 될 테니까…...”
혼자말을 끝으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생명을 위한 추념식의 노래였다. 전장까지는 아직 별빛이 부서지는 길이 좀 더 남아있었다.
“이게 추념식의 노래에요?”
아이는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여자에게 말했다.
“이건 처음 배우는 거에요.”
“순례자들이 만든 노래가 아니거든. 이건 말이지.”
오후의 햇살이 풀밭 위에서 뛰놀았다. 파란 하늘에 드문드문 퍼진 구름들이 천천히 그림자를 그렸다 지우는 가운데, 나뭇잎 사이를 지나온 햇빛이 풀밭 사이사이에서 반짝였다. 최고재판소가 위치한 궤도 엘리베이터 ‘아크로폴리스’는 인공 테라포밍도 힘을 다해 점점 메말라가는 로크랜드의 험한 대지 가운데서도 드물게 원래부터 푸르름을 간직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순례자’들의 수도이자 성지인 이곳은 그래서 항상 사람들로 붐볐고, 그들은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이곳에 대한 애정을 담아 아크로폴리스를 ‘희망의 탑’이라고도 불렀다.
설 후인과 그녀의 지도 ‘영창자’인 ‘한 후해’는 멀리 ‘희망의 탑’이 보이는 조그마한 공원에서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한 후해’는 최고재판소의 위원이자, ‘원로원’의 주요 인사로서 아크로폴리스는 물론, 탑을 중심으로 해서 세워진 도시에서도 유명 인사였다. 하지만 평범한 치마와 헤어진 윗옷을 입은 시골 아낙네같은 여자와, 역시 군데군데 터져나간 염색기라곤 없는 누런 색 옷에 두꺼운 목도리를 한 열살 남짓 소녀의 정체를 알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시락 가방 중 하나는 알 수 없는 기계들로 가득 채워 있었지만 순례자들은 기계를 숨기고 다니는 데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기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무튼 그들은 드문드문 다른 이들이 있는 공원에서도 한 나무그늘 밑에 담요를 깔고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으며 오후의 여유를 자신들만의 것으로 할 수 있었다.
“아무도 이 노래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른단다. 그리고 이 노래를 아는 이도 거의 없지. 아마 아크로폴리스에서는 나 혼자만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렇지, 이제 ‘설’이 네가 배웠으니 두 명이 되었네. 아무튼 추념식의 노래인 것은 맞단다.”
한 후해의 설명에 설 후인은 방금 자신이 배운 노래를 작은 목소리로 불러 보았다. 아이가 배운 여느 추념식의 노래 와는 전혀 다른 가락인 것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다른 노래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약간은 어색하기도 하고…...이건 어느 추념식에서 부르는 것인가요?”
“아무 데서도 아니야.”
“네?”
“아무 데서도 아니란다. 이건 추념식의 노래이지만,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추념식은 이제 없단다.”
설 후인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한 후해는 몸을 약간 곧추세우고는 공원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나뭇잎. 지저귀는 새소리, 풀밭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 그리고 그 안에서 한가로이 앉아 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짚었다. 마치 그들에게 이야기하듯 한 후해가 입을 열었다.
“이 노래는 살아있었던 모든 생명을 위한 추념식의 노래지. 풀, 바람, 나비, 새들, 인간들, 그리고 너와 같은 ‘아인’들까지도…... 이 땅에서 생명이라는 것을 가졌던 모두를 위해 부르는 추념식의 노래야. 그리고 지금 로크랜드에서는 오직 ‘인간’들만을 위해 추념식을 열지. 그러니 이 노래를 이 땅의 평범한 추념식에서 부를 일은 없단다.”
“그럼 제게 왜 이 노래를 가르쳐주신 건가요?”
설 후인의 물음에 한 후해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설 후인은 그 미소가 조금은 서글프다고 생각했다.
“넌 내일부터 친구들과 떨어져 또 다른 곳으로 갈 거야.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언젠가는 순례자가 되겠지. 너는 네 친구들과는 다른 순례자가 될 거다. 너는 사람들이 하늘의 강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해줄 뿐 아니라, 그들에게서 답을 구해야 하는 순례자가 될 거란다.”
“답을 구하는 순례자요?”
한 후해는 몸을 기울여 설 후인을 살며시 감싸안았다. 그녀의 몸에선 편안한 향기가 났다. 설 후인의 머리에 입을 맞추며 그녀가 작게 말했다.
“너는 내 딸이다. 내 노래를 전해 준 딸. 네가 답을 구하는 길이 아무리 무섭고 힘들더라도 이 노래를 기억하렴. 네가 연 추념식에서 이 노래를 들을 수 있다면 너는 진정한 답을 구한 것이란다. 우리를, 아니 이 땅의 모든 생명들을 이 로크랜드라는 감옥에서 구해줄 답. 이 노래는 네가 그것을 얻었음을 알려주는 증명이 될 거야. 그러니 기억하렴. 답을 구할 때가 오면 아무리 두려워도 용기를 가지고 구해라. 그리고…... 반드시 그것을 지켜내라.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말이야.”
부드럽고 또 한편으로는 단단한 말이었지만 아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한 후해가 가르쳐 준 노래가 그녀 몸에서 나는 향기와 꼭 맞잡은 것처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향기가 숨결을 타고 들어와 자신의 몸 안을 물들여가는 것을 느끼면서, 노래 역시 함께 스며들어 자리잡았다는 것을 살짝 깨달았을 뿐이었다.
“누구야!”
갑자기 들려온 날카로운 목소리에 퍼뜩 생각에서 깨어났다. 저 만치 앞에 별빛을 받은 사람의 형상들이 보였다. 전장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이곳에서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설 후인은 조금 놀라서 우뚝 멈춰섰다.
“누구야?”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에서는 잔뜩 긴장한 듯 팽팽함이 묻어났다.
“순례자입니다. 내일 열 추념식을 준비하고자 왔습니다.”
설 후인은 발걸음을 멈춘 채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쪽이야말로 ‘파-두난’ 백인장님과 ‘코-호’부백인장 아닙니까? 당신들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전장분해탄 사용이 예정된 지역에는 순례자 말고는 적이든 아군이든 모두 출입이 금지되어 있을 텐데요.”
별빛을 다소 가리던 구름이 움직이면서 당혹스런 얼굴을 한 남자 두 명이 밤 하늘 아래 드러났다. 그들 앞에는 돌로 만든 제단이 쌓여 있었다. 추념식을 위한 제단이었다.
“정말 괜찮습니까?”
작은 기계들을 만지고 있는 설 후인 옆에서 돌무더기를 쌓던 남자들 중 하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오히려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순례자가, 그것도 제2궤도위 순례자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겁니다. 좀 믿으세요.”
“그래도 인간이 아닌 ‘아인’인 ‘병사’들을 위한 정식 추념식을 열었다가 발각되기라도 하면……”
백인장인 ‘파-두난’은 못내 불안한지 주변을 흘끗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 옆에서는 그의 부관인 ‘코-호’가 굳은 얼굴로 묵묵히 돌을 쌓고 있었다. 유난히 걱정이 많은 상관과는 달리 부관인 ‘코-호’는 말 수 드물게 시종일관 침착했다. ‘판-두림’ 영주는 그런대로 군 운영에 조합을 잘 맞추는 인간이라고 설 후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몰래 ‘아인’인 병사들을 위한 추념식을 열려고 한 사람의 말로는 들리지 않는군요. 그것도 부관까지 동참시켜서... 게다가, 여긴 전장분해탄 사용 예정으로 출입이 엄격한 금지된 곳인데 말입니다.”
“......그, 그건…...어차피 저는 순례자가 아닙니다.그저 죽어간 이들이 그들의 시체가 전장분해탄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전에 그나마 남은 상태로 애도와 마지막 작별을 받을 자격은 있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잠시 묵념을...”
파 두난의 어설픈 변명에 설 후인이 코웃음치며 중간을 가로잘랐다.
“설마, 당신들이 쌓은 저 제단을 보고 영주들이나 최고재판소가 그렇게 생각해 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요? 심지어 당신은 낮에 저에게 말하길 ‘규칙’에 기대지 않으면 병사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여기기 어렵다고까지 했어요. 내가 영주였다면 그 말만으로도 군율을 문란케한다는 죄목을 들어 벌써 당신 목에 타르를 듬뿍 발라 주둔지 앞에 내걸었을 겁니다. 다행이 오늘 나는 당신하고 공범이 되었으니 당신 목은 아직 냄새나는 타르를 먹지 않아도 되고, 나를 믿는다면, 적어도 그만큼은 타르 대신 음식을 더 오래 먹을 수 있겠지요.”
설 후인의 빈정대는 듯한 말에 파-두난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돌을 쌓으며 침묵하던 그는 걱정 대신 의문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지금 여기엔 천막 안에서 잠들어 깨어날 줄 모르는 저 아이 외에는 순례자님과 저희 밖에 없지요. 그리고 저흰 지금 당신을 돕고 있습니다. 조약에서 엄격히 금지하는 ‘아인’들을 위한 추념식. 그것도 저희가 하려던 어설픈 흉내가 아니라 제2궤도위에 올라 있는 고위 순례자가 행하는 진짜배기 추념식 말입니다. 목의 절반은 주둔지에 걸어 놓고, 나머지 절반은 당신이 손에 거머쥔 목줄에 꿰어 있는 우리라면, 나중에 괜찮을지 안괜찮을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최소한 지금 일어나는 일이 뭔지는 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파-두난의 질문에 그녀는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긴 눈초리였다. 파-두난이 침묵의 어색함을 돌리기 위해 뭔가 말해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 설 후인은 남자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뜬금없이 물었다.
“당신들이 ‘인간’이라고 누가 증명해주지요?”
“네?”
갑작스런 질문에 그들이 어리둥절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설 후인은 기계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놓고 비릿하게 웃으며 별빛 아래에서 일어섰다. 푸른 빛이 이마에 받혀 흩어지면서, 얼굴색마저 푸르스레하게 물들였다. 칼날과 같은 예리함. 존재의 증명을 재단하는 예리함이 살같을 타고 흘렀다.
“당신들이 ‘인간’이라고 누가 확실히 이야기해 준 적 있나요?”
파-두난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는 이제 그 물음에 대한 답이 없었다. 의문만이 끝없이 맴돌 뿐이었다. 상관의 침묵을 대신해 부관인 코-호가 떱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희 스스로 그냥 ‘인간’이라고 느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잠시 설 후인의 눈치를 보더니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인간이 아닌 ‘아인’들도 있지 않습니까. 죄송하지만, 순례자님 같이 말입니다.”
“그래요? 하지만 대부분은 나같은 ‘인간이 아닌 이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이 인간이라고 느낄 때가 더 많지 않을까요?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오로지 ‘인간’만을 위해 있다는 추념식을 인간이 아닌 이들을 위해, 그것도 조약이고 뭐고 무시한 채 순례자인 제가 진짜 추념식을 공식적으로 열어준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남자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그녀가 말한 의미를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탁- 잠시 후 파-두난이 쌓던 돌을 내려놓고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전장을 진 그의 등이 이상하리만치 무겁에 보였다. 파-두난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추념식이란 게 대상이 인간이든, 인간이 아닌 ‘아인’이든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었습니까? 아니, 인간이든 아인이든 구별 없이 모두 다 저 별의 강에 들어갈 자격이 있었던 겁니까? 우린, 지금까지 수백 수천만의 생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것도 모자라 제대로 추념식조차 없이 단지 우리가 보기에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시체를 흔적도 없이 들판에 흩어버린 겁니까?”
파-두난의 부릅뜬 눈에 의문과 분노의 기색이 스몄다. 자신과, 주변과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것들이었다. 아울러 거기에는, 진실을 냉혹하게 말해 준 설 후인에 대한 원망도 같이 있었다. -어째서 이제와서 이런 진실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주는 것이냐-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심상치않은 상관의 모습을 눈치챈 부관 코-호가 고개를 저으며 가볍게 파-두난의 팔을 잡았다. 참으라는 신호였다. 그리고 그 때,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설 후인이 웃었다. 아니, 웃음이긴 했지만 어깨가 떨리는 가운데서도 소리는 죽인 채 입만 크게 벌려 웃는 괴상한 웃음이었다. 급기야 소리없는 웃음은 점점 더 커져서 이제는 못 참겠다는 듯, 눈앞의 모습을 도저히 웃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다는 듯 꺽꺽이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내장이라도 게워낼 것처럼 격하게 들썩거렸다.
“......파-두난, 파-두난...당신은 정말 군대와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이상주의자로군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당신처럼 의협심이 넘치는 바보들 뿐이었다면, 이 로크랜드라는 지옥구덩이가 생기지도 않았을 거에요. 아니 이건, 정말 칭찬이에요.”
설 후인은 조롱하듯 말하면서 똑바로 섰다. 그리고는 웃고 있던 그녀를 미친사람 쳐다보듯 바라보고 있는 두 남자에게 사납게 으르렁댔다. 악다문 어금니에서 쇳소리가 새어나왔다.
“내가 뭘 하려는 지 알려주지. 나는 당신들이 얼마나 순진한지 보여주고 싶을 뿐이야. ‘아인’들을 위한 추념식을 열 정도로 순진한 이상주의자들에게 쓴맛을 좀 보여주고 싶을 뿐이고……
‘진짜 순례자’가 하는 ‘진짜 추념식’은 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모르는 영혼같은 것이나, 저 하늘에 걸린 별의 강 따위와는 전혀 상관 없어. 그건 이 땅의 심장까지 박혀 온갖 죄악을 뿜어내고 있는 저 빌어먹을 ‘탑’하고 관계 있는 것이지.”
그녀는 잠깐 말을 쉬고는 표정을 풀어 바짝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별빛에 빛나는 미소가 서글프고도 썼다.
“추념식은 로크랜드에 사는 인간과 아인들을 죽인 다음, 그 시체에서 싸그리 멸망해 버린 우주에 대한 정보를 뽑아내는 의식이야. 거기엔 당신들을 ‘인간’으로 변호해주는 이도, 아인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선고하는 이도 없어. 추념식은 당신들과 나를 같은 잣대로 판정해. ‘너희들은 ‘진짜 인간’이 아니다. 너희들은 저 ‘탑’이라는 궤도엘리베터를 너머 우주로 영원히 나갈 수 없다. 이 시궁창 속에서 영원히 싸우고, 죽고, 썩어가라’라고…...”
설 후인은 만지작거리던 기계를 남자들이 쌓던 돌 무더기 중간에 넣고 판돌로 덮었다. 그리고는 아직도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게 서 있는 남자들에게 말했다.
“이리 와라…..추악한 진실을 보여주지…...내 목숨을 걸고.”
그리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오늘이 그 추악함의 마지막이길 진심으로 빌어봐.”
설 후인은 그녀 앞에 펼쳐진 전장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여느 추념식이었다면 간단했을 것이다. 인간들을 위한 형식적인 추념식이었다면 제단 위에 불을 피우고 불길의 뜨거움을 견디면서 노래를 몇 곡 읇조리면 되었다. 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추념식이었다면 전장분해탄 사용이 예정된 전장으로 들어가 고독을 씹으며 죽은 시체들로부터 정보를 회수하면 되었다. 그녀가 살아온 수십 년의 삶은 그렇게 간단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한때는 영창자 ‘한 후해’가 이야기해줬던 ‘답’이라는 것을 구해보려고 노력도 해 봤다. 미친듯이 자신의 몸을 ‘순례행’에 내몰고, 비밀정보국 내 다른 순례자들조차 꺼리는 전장을 속속들이 헤집었다. 그 결과 ‘아인’ 출신의 순례자라는 특별함을 넘어 제2궤도위라는 고위직에 올랐다. 그녀도 알 수 있었다. 머지 않아 자신에게 노래를 가르쳐주었던 ‘한 후해’와 같은 영창자가 될 수도, 최고재판소 원로원의 일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걸어온 길에 ‘답’은 없었다. 설 후인은 아마도 한 후해처럼 평생 답을 바라보다가 언제 죽었는지 흔적조차 찾을 길 없이 숨을 거둬야 하는 운명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운명은 이제 그녀의 생명과 ‘답’일지도 모르는 아이를 두고 설 후인 앞에 내어밀었다.
‘숨’이라는 아이가 진짜로 그녀가 찾던 답이라면 아이가 산 채로 추념식에 접속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터였다. 로크랜드 정보순환시스템은 자신의 본래 관리자와 동일하게 궤도 엘리베이터를 오를 수 있을 진짜 ‘인간’의 자격을 가진 아이의 접속은 제한 없이 받아들일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답이 아니라 그저 일반적인 로크랜드의 ‘인간’일 뿐이고 그녀가 잘못 본 것이라면, 로크랜드 정보순환시스템은 결코 살아있는 상태의 가짜 인간이 접속한 것을 용납하지 않고 접속의 매개체이자 저장체가 된 설 후인을 폭주시킬 것이다. 그러면 이번 순례행을 거치면서 설 후인이 전장이서 죽은 ‘아인’들로부터 긁어 모아 몸 속에 구겨넣은 정보들이 정말로 죽음의 그림자가 되어 그녀의 몸 안을 뒤죽박죽으로 만들면서 거대한 폭죽 놀이를 시작할 게 분명했다. 아마도 ‘판-두림’과 ‘추-오롬’의 영주가 다음 싸움을 시작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죽은 영주들의 후계자를 결정하고 몰살당한 수만의 군세를 다시 모으는 일은 아이들 몇을 풀면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설 후인은 아이의 정체에 대해서는 사실 별로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낮에 본 아이의 추념식같은 행동에서 알 수 있었다. 로크랜드 정보순환 시스템이 인간과 아인의 몸에 강제로 새긴 우주에 대한 정보들이, 아이의 손길에 의해 스르르 빠져 흩어진다는 느낌이었다. ‘아인’인 병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추념식처럼 형편 없는 효율로 극히 일부의 정보만을 빼내고 난 후 나머지는 다시 데이터 순환 시스템으로 돌려보내는 악마의 선순환이 아니라, 정말로 인간에게 덧씌워진 ‘정보’라는 이름의 주박을 일거에 완전히 해방시킨다는 느낌이었다. 이떻게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 죽은 영혼을 로크랜드에서 떼어내 자유롭게 별의 강으로 밀어주는 추념식이었다. 오로지 최고재판소의 세례 속에 이름지워진 진짜 순례자만이, 그것도 엄격한 규제와 한계 속에서만 할 수 있는 추념식이었다. 단 부류의 사람만 제외하고는. 아이는 분명 ‘스스로 일어선 자’ 였다.
걱정스러운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내가, 아니 우리가, 최고재판소가, 로크랜드가, 답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을까?’
로크랜드의 인간들에게 덧씌워진 우주의 정보를 뽑아내기 위해, 끝없는 전쟁을 시작한 ‘순례자’와 영주들이었지만, 이제 그것은 데이터 저장소같은 예전 문명의 허접스런 잔재를 두고도 수십만이 죽고 죽일 정도로 변질되었다. 정보를 수집해 문명을 회복하는 것이 목표인지, 아니면 이 로크랜드의 지금의 모습을 지속하는 것이 목표인지, 언제부터인가 로크랜드에서는 그 구별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아이가 정말로 ‘답’이라면, 도대체 무슨 질문에 대한 답일까?’
어느 새인가 우리는 질문을 잊은 것은 아닐까? 질문을 잃은 답을 찾아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설 후인은 그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질문을 잃은 답이 가지고 올 지 모르는 침묵이 두려운 듯 몸을 떨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설 후인은 파-두난과 코-호가 옆에서 조심스레 묻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떨림과 상념에서 벗어났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위험해지고 몸도 더 힘들어질 뿐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시작하는 게 나았다.
“잘 들어요. 의식이 시작되면 아마도 정신이 사나워질 테니 지금 잘 기억해 두세요.”
그녀는 품에서 검정색의 작은 막대를 두개 꺼내 파-두난과 코-호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이건 데이터 수집 막대라는 거에요. 자세한 건 지금 묻지 마세요. 나중에 알려줄게요, 아무튼 내가 ‘추념식’을 시작하고 조금 지난 후, 신호를 하면 천막에서 자는 아이를 데리고 저기 전장으로 가요. 전장이 어느 지점부터 파란 색으로 빛나고 있을 텐데, 그 5~6미터 전부터 당신들 귀 한쪽에 이 막대를 꽂아요. 어느 쪽 귀라도 상관은 없어요. 그리고 그 상태로 아이를 데리고 파랗게 물든 땅 안으로 5~6미터 들어가세요. 가서 1분을 거기에 있어요. 결코 더 있으면 안돼요. 1분보다 일찍 나오는 건 가능하나 내가 신호를 하면 나와야 해요. 한 손을 들어 흔들 테니 나한테 시선을 꼭 고정하세요. 그리고는 파란 땅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귀에서 막대를 뽑아요. 안 그러면 내 생명이 위험해요. 물론 난 죽을 때 혼자 가는 게 아니라 당신들 두 명과, 당신들이 모시는 영주를 포함한 영주 두 명,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십만여명의 군인, 병사들을 다 같이 데려갈 예정이니까, 별의 강인지 도랑인지에서 사이좋게 함께 빠져죽고 싶지 않으면 내 말 잘 기억해야 합니다. 알아들었어요?”
설 후인은 빠르게 말을 뱉어내고는 멍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만 끄덕이는 두 남자의 어깨를 각각 한 손으로 꽉 잡았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얼굴을 바짝 가져다대며 말했다.
“난 저 제단에 묶여 있느라 아무 도움이 안될 겁니다! 당신들이 잘 해야 합니다…... 알았어?”
남자들은 그녀의 힘과 험한 눈빛에 질린 표정으로 눈만 크게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설 후인은 주머니를 뒤져 작은 시계를 남자에게 건냈다.
“가지고 있어요. 이걸로 시간을 재면 되요. 망가뜨릴 생각은 마세요! 어머니의 유일한 유품이니까.”
그녀의 선물아닌 선물에 조금은 여유를 얻은 듯 파-두난이 말했다.
“그…...저희가 없었다면 어찌 하려고 했었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설 후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찌하긴요. 혼자 다 했겠죠. 파-두난 백인장, 일할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 그걸 그냥 놀리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에겐 백인장 자리도 과해요. 그리고 난 순례자의 기준으로 보면 백인장보단 훨씬 높지요.”
아이는 수면제의 효과 때문인지 그녀와 남자 두 명의 부산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설 후인은 제단 위에 올려 놓은 손바닥만한 판 두 개 위에 손을 얹었다. -탁- 스위치가 켜지는 느낌이 그녀의 머리 속을 울렸다.
“시작됐어요. 이제 내가 신호하면 당신들도 시작해요!”
설 후인이 외침과 동시에 판에서 빛이 쏟아져나와 제단과 제단 곁에 선 그녀의 몸을 밝게 비췄다. 흔히 여는 추념식은 제단 위에 불을 놓고, 순례자가 제단 앞에 서서 불 쪽으로 손을 내미는 것으로 시작한다. 최대한 불에 가깝게 접근하면서도 얼굴이나 손이 화상을 입지 않을 거리를 바람과 불길의 흔들림 속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에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능숙해지기 전에는 머리카락을 태워먹는 건 예사고, 손이나 얼굴에 화상을 입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설 후인이라고 해서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녀도 순례자의 서약을 한 이후, 일상적으로 열던 추념식에서 무척이나 고생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젠장, 그래도 이것보단 낫지.’
머리 속에 벌레 수백마리가 기어다니면서 뇌를 간지럽히고 있는 듯한 느낌 속에서 그녀가 투덜거렸다. 뇌는 간지럼을 타지 않지만 만약 탄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제단에 설치한 이동식 수신 장치가 행성 로크랜드의 데이터 순환 시스템에 연결되는 느낌이 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몸 전체의 신경망을 연산장치 겸 저장소로 사용하게 된 시스템이 제단에서 뛰쳐나와 전장에 널부러진 병사들. 정확히 말하면 전투 후 물건처럼 버려져 썩어가고 있는 병사들의 시체를 향해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들었다. ‘수확의 밤’, 아니, ‘시체들의 밤’이 눈을 뜬 것이다.
파-두난과 코-호는 설 후인 곁에서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제단이 빛나는 것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제단을 중심으로 파란 빛무리가 퍼져나가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별빛에만 의존하던 전장의 어둠이 천천히 파란 빛으로 잠겨가는 광경을 잠시 동안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야릇한 광경이었다. 파란 빛의 물결은 빛의 형태였지만 어딘지 기분나쁜 끈적거림이 배여 있었다. 게다가 전장을 애도하는 추모의 빛이 아니라 마치 전장의 죽음을 기뻐 탐식하는 허기진 짐승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기분이 조금 안좋았다. 하지만 한참을 뻗어가던 빛이 어느덧 지면을 덮어 사위가 어느 정도 드러나게 되자, 그들은 기분이 안 좋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소스라치는 놀라움에 비명까지 지르며 한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전장의 시체들이 푸른 빛을 배경으로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뭐…...뭐야! 저게…...세상에……”
파-두난은 자신도 모르게 턱을 덜덜 떨면서 더듬거렸다. 그 떨림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 전장에 널부러진 썩어가는 시체들이 같이 몸을 떨었다. 어떤 시체는 아예 팔뚝 밑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뼈와 힘줄이 너덜거리는 팔을 들어올리기도 했다. 깨어진 두개골을 좌우로 흔드는 시체. 목없는 상체를 부르르 떠는 시체. 벌떡 일어서서 그들에게 달려드는 시체가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끔찍한 악몽이었다.
“뭐…...뭐냐구!!!”
상관보다도 감정이 무딘 코-호조차도 혐오감을 담은 비명을 내뱉을 즈음, 그 때까지 그들 옆에서 눈을 감고 있던 설 후인이 눈을 번쩍 떴다. 아직 로크랜드 정보 순환 시스템과, 궤도 엘리베이터와, 그리고 전장의 시체들이 그녀의 몸을 매개로 연결되어 최종 안정화 단계에 들어가려면 시간이 약간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옆에서 입을 덜덜거리며 재잘대고 있는 두 남자를 제대로 써먹으려면, 그들에게도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설 후인의 몸은 입을 여는 것만으로도 뼛속 저 안을 찌르는 통증에 비명을 질러댔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두 명을 데리고 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좀 진정해요. 저건 죽은 시체가 살아난게 아니에요. 로크랜드의 정보 순환 시스템과 함께 연동되어 있는 나노봇들이, 죽은 병사들의 DNA에 반응하여 아직 살아있는 세포들의 활동성을 강제 증폭시킨 다음, 몸 전체의 신경망을 일시적으로 되살린 거에요. 그 과정에서 DNA 내에 암호화된 채 저장되어있던 정보들이 튀어나와요. 이건…...‘인간’이나 ‘아인’들이 죽었을 때나 가능해요.”
그녀는 한계까지 채운 그녀 몸의 정보들 위에 새로 시체들에게서 뽑아내는 문명의 기록들이 더해지면서 몸이 통제를 잃고 제멋대로 되어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몸에 새긴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을 먹어치우는 그 음습한 느낌에 발버둥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우리도 이런 짓...안하고 싶어요…...이유고 뭐고, 저건 시체들이 살아나 몸을 떠는 것으로밖에는 안 보이니까…...누가 봐도, 끔찍하기 짝이 없잖아요? 이게 내가 당신들에게 보여주는 진실입니다. 최고재판소의 추악한 진실. ‘순례자’들의 죄업. 로크랜드가 영원한 전쟁을, 영원한 죽음의 행진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구요…...”
두 명의 남자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군인이었다. 그리고 문명을 회복하기 위해 문명의 흔적이 담겨 있는 ‘데이터 저장소’를 둘러싼 전쟁에 참여했다. 로크랜드의 오랜 전쟁은 이 행성에 같혀 문명을 잃어버린 로크랜드인들이 다시 지식의 세계로, 진정한 인간들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걷는 십자가의 길이었다. 살아 숨쉬던 영혼들은 그 길에 자신들의 피를 뿌리는 것 만으로 모든 의무를 마쳐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추념식의 노래 속에서 안식을 찾는 게 맞았다. 결코 펄펄 살아 날뛰는 시체의 모습으로 또다시 짐을 져서는 안 되었다. 적어도 남자들이 아는 범위에선 그랬다.
“무...무슨...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저거…”
파-두난이 더듬거리며 무엇인가 말하려 했지만, 이미 대답할 여유조차 거의 없어진 설 후인의 응어리진 고함에 끊겼다.
“그래! 저 앞에 꿈틀거리는 시체들이 ‘추념식’의 진짜 모습이야! 당신들은 이 ‘진짜’ 추념식을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이고, 나도 순례자로 밥을 먹는 거야. 그러니까 그만 놀라고 좀 가만히 있어!”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내뱉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한 후해, 당신이 말한 ‘답’은 저 속에 있으면 안돼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죠? 아이가 ‘답’이에요. 저 아이, ‘숨’이 진정한 인간이에요. 그리고…... 이제, 아이 스스로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할 겁니다.”
설 후인은 되살아난 시체들을 노려보면서 중얼거렸다. 로크랜드는, 궤도 엘리베이터는, 이제는 멸망해버린 ‘인간들만을 위한 우주’와 그 문명의 기억을 파헤치기 위한 로크랜드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노력은...... 저 광경만으로도 이미 죄악이었다.
손을 흔들었다.
멀리 파란 물결이 울렁거리는 전장에서 파-두난과 코-호가 걸어나왔다. 파-두난의 등에는 아이가 업혀 있었다. 그들을 향해 설 후인이 흔드는 손은 반가운 친구을 맞는 양 명랑했다. 그녀의 몸을 짖누르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들도 그 명랑함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밝음과 명랑함. 한 후해와 함께 한 마지막 나들이가 그것들이 설 후인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했던 때였다. 이후, 답을 구하는 순례자의 길 위에서 잠깐씩 만난 적은 있어도 결코 예전같은 친근함으로 함께하진 못했다. 설 후인이 걷던 순례자의 길에선 어둠과 우울함, 그리고 냉소가 터줏대감이었고 그들은 다른 손님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 후인은 고통 속에서도 명랑하게 웃었다. 예상대로 ‘숨’ 이라는 아이는 궤도 엘리베이터 내에 설치된 로크랜드 정보 순환 시스템에 살아서 접촉하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한 후해는 말했었다. ‘답을 구할 때가 오면 아무리 두려워도 용기를 가지고 구해라.’ 그리고 오늘 밤 설 후인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삼아 답을 구한 것이다.
눈물이 흐를 법도 했지만 그저 미소만 나왔다.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녀는 남자들의 등에 업혀 다가오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잠에서 깨어났는지 고개를 약간씩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아이의 모습을 눈에 담은 채 밤하늘 한켠에 자리잡은 궤도 엘리베이터 아르키메데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이제 거지처럼 네 안의 정보에 빌붙는 게 아니라 네 주인이 되어 저주받은 로크랜드 정보 순환 시스템을 멈출 수 있어. 저 아이는 너와 내가 시체들로부터 끄집어올린 정보가 만든 게 아니야. 너의 그 빌어먹을 시스템 속에서도, 이 땅이 스스로 만든 인간이고 너조차도 무릎끓을 수밖에 없는 ‘진정한 인간’이야. 그 옛날 ‘인간들만을 위한 우주’를 오다녔던 진짜 인간이 이 땅에서 다시 부활했어.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말이야.”
오랜 시간 팽팽히 시위에 매겨 기다리던 통쾌함이 한꺼번에 밀려나왔다. 그리고 아르키메데스는 그 기세에 한대 맞은 것처럼 별빛을 등에 지고 침묵했다. 좀 더 의기양양해진 설 후인이 다시 말했다.
“우리가 이겼어. 이 빌어먹을 개자식아. 우리가 이겼다구.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인간임을 증명했다구. ‘스스로 일어선 자’가 이 땅에 다시 태어났어! 그러니, 이제 필요 없는 넌 유황불 타는 지옥으로 혼자 좀 꺼져줘야겠다…...”
그녀는 살짝은 미친 것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미소짓는 설 후인에게 남자들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졌다. 아이는 이미 잠에서 거의 깨 눈을 비비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가 눈곱을 떼어내며 불만을 터뜨렸다.
“왜 돌아보지 말라는 거에요?”
“아, 글쎄, 좀 말 좀 들어라. 안그래도 놀라서 정신 사나운데, 너까지 징징대지 말고……”
“그러니까, 뒤에 뭐가 있는데요……”
파- 두난과 입씨름을 하는 아이의 뒤통수를 옆에서 걷던 코-호가 찰싹 때렸다.
“또 돌아보려고 하면 이것보단 더 아플 거다. 그리고 그래도 또 보려한다면 좀 더 아플 거고.”
코 호는 아이에게 엄한 표정을 짓고는, 설 후인에게 가까이 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나 더 아이의 뒤통수를 때려야 합니까?”
그의 얼굴에는 혐오감이 짙게 배여 있었다. 설 후인, 아니 최고재판소를 정점으로 하는 ‘순례자’들과 그들이 행하는 추념식이 만드는 배신의 현장을 직접 본 이만이 지을 수 있는 경멸섞인 혐오감이었다. 하지만 설 후인은 행복하게 웃었다. 웃음에 몸이 있었다면 자신을 향하는 비난도 기꺼이 팔벌려 안아주었으리라. 그랬다. 그녀는 웃으려고 했다. 그 노래소리만 아니었다면…
아이는 칭얼대면서도 사이사이로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아이 치고는 낮고 저음의, 어딘가 어른의 목소리에 가까웠다. 조금 이상했다. 그제서야 설 후인과 남자들은 아이 말고도 다른 음역의 소리가 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한 여자는 기쁨에 겨워, 두 남자는 놀라 벌떡이는 가슴에 미쳐 신경쓰지 못하던 소리가 아이의 나즈막한 노래 속에서 비로소 따로 들렸다. 아이를 업고서 아이가 돌아보지 못하도록 하는 탓에 자신도 뒤를 돌아보지 못하게 된 코-호 대신, 파-두난이 고개를 돌아보았다. 아직 파란 나노봇의 물결이 완전히 다 가시지 않은 전장 쪽이었다.
‘모든 생명을 위한 추념식의 노래’
얼마 전까지 설 후인만 알고 있었고, 그 얼마 후부터 지금까진 아이와 그녀만 알던 모든 생명을 위한 추념식의 노래가 전장을 가로돌았다. 그리고 멍하게 선 세 명의 어른과 노래를 얕게 읇조리는 작은 아이를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그 손길 속에서, 설 후인은 로크랜드 정보 순환 시스템이 오늘 밤, 어쩌면 그 죄많은 존재의 마지막 ‘수확의 밤’일지도 모르는 오늘 밤의 짧은 시간동안 낚아올린 그 무엇인가를 자신의 몸에 깊게 아로새기고 사라져감을 느꼈다.
‘TERA’
한 단어가 떠올랐다가 흐려졌다.
처음엔 머리 속에 떠오른 단어가 무엇인지 설뜻 깨닫지 못했다. 현실에서 절대로 일어날 리 없는 상황을 처음 마주하는 듯한 지독한 이질감 때문이었다. 그 이질감은 파-두난과 코-호가 ‘수확에 밤’을 처음 보고 받은 충격이나 섬뜩함과도 달랐다. 수확의 밤에는, 시체들의 밤에는, 익숙한 ‘공포’가 동반해 있었다. 그 공포가 비현실을 현실로 전환하는 중요한 매개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 속에 떠오른 단어는 달랐다. 그것의 이질감은 너무나 오랬 동안 인간과 격리되어 있던 것이어서, 이질감이 그녀 자신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그 한참의 시간이 지나간 후, 설 후인은 본격적으로 몸을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지구.
인간을 벼려낸 용광로이자, 인간을 멸망시킨 지옥의 심연. 모든 시작이자 모든 끝. 모든 원인이자 모든 결과. 인간의 모든 것. 그리고 인간 그 자체. 그 모든 것들의 원형이자 주인인 지구로 가는 정보가, 행성 로크랜드의 12번째 궤도 엘리베이터 아르키메데스 근처 시시한 전장에서 조용히 자신의 비밀스런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과, 인간이 진출한 우주의 모든 것들을 지구 자신과 더불어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 지 수 세기만의 일이었다.
인간이 발생한 것도, ‘인간만을 위한 우주’의 개념이 생겨난 것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을 안고 전 우주에 걸친 ‘대단절’을 만들어 낸 채 수수께끼처럼 모두와 함께 몰락해버린 것도 모두 지구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에 가면 이 모든 재앙의 이유를 알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 미친 세상들을 다시 정상으로 돌려놓는 방법도, 로크랜드의 모든 이들을 최초의 인간의 모습으로 돌이는 방법도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수확의 밤이 저물면서 설 후인에게 마지막으로 새겨진 것은 바로 그 지구에 대한 길의 일부분을 담은 조각이었다.
하지만 설 후인은 알 수 있었다. 이건 경고였다. 로크랜드가, 궤도 엘리베이터가, 최고재판소가, 아니 그녀를 포함한 모두가 수십세기 동안 쌓아올린 죄의 탑이 보내는 경고. 결코 인간이 스스로가 스스로임을 증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마지막 경고였다. ‘너희는 결코 내 안에서 불타오르길 멈춰서는 안된다. 아직은. 너희는 좀 더 싸우고, 죽고, 불타올라라. 그리함으로써 나에게 오는 길을 찾을 때 까지는...... 그리고, 너희가 아닌 내가, 내가 너희를 인간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저기에도 제 노래를 아는 사람이 있나보네요? 그렇죠?”
설 후인은 자신을 돌아보며 물어보는 ‘숨’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언어를 잃어버린 그녀의 사고에 한 후해의 말이 반복되는 장면처럼 계속되었다.
- 이 노래를 기억하렴. 네가 연 추념식에서 이 노래를 들을 수 있다면 너는 진정한 답을 구한 것이란다. 우리를, 아니 이 땅의 모든 생명들을 이 로크랜드라는 감옥에서 구해줄 답. 이 노래는 네가 그것을 얻었음을 알려주는 증명이 될 거야. -
몸에 새로이 새겨진 지구에 대한 정보가 이미 그녀 안에 자리잡았던 것들과 사납게 충돌했다. 이윽고 충돌은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사나운 싸움으로 변해 그녀의 몸 전체를 헤집었다. 그 싸움터에 필요한 피를 쏟아붇기 위해 심장은 자신이 담아 놓은 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밀어내면서 미친듯이 뛰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을 헤집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두터운 근육에서 스스로 피를 쥐어짜냈다. 그 맹렬한 싸움과 찢어질 것 같은 심장의 박동 속에서 설 후인의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본 것은 자신에게 등을 돌린 채 멀어지는 한 후해의 남루한 뒷모습이었다.
‘한 후해…...당신이, 당신이 내게 찾으라 한 답이란 게 이런 것인가요? 당신이 내게 바란 의무가 지구로 가는 마지막 조각을 찾을 때 까지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는 것이었나요? 네? 어머니…...”
뒷 모습은 답이 없었다. 침묵 속에서 추념식의 노래소리와 슬픈 별의 강, 세로놓인 은색 비웃음을 띈 궤도 엘리베이터, 그리고 그녀의 눈앞을 채우는 하얀색 빛무리가 하나로 버무려져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마치 인간을 모두 집어삼키고도 여전히 먹이를 집어삼키기 위해 깊은 심부를 드러내고 도는 은하수의 중심 같았다.
그 은하수 속 로크랜드라는 외딴 행성에서, 소용돌이치는 추념식의 밤이 깊어갔다.
첫댓글 지구가 문제인건가요.. 뒤의 내용이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