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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간으로 가는 길
모든 로크랜드인들은 엄밀히 말하면 원래 그대로의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개척한 우주의 각 행성들을 연결하던 고리가 끊어진 ‘대단절’ 시기 중간의 어느 시점에서인가, 로크랜드인들은 황당한 생각을 하고 실제로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대단절의 와중에서 가까스로 건진 문명의 기록들을 유전자 수준에서 인간의 몸에 각인시키고 그 기록이 끝없이 세대를 통해 이어지도록 하는 원대하고도 미친 계획이었다. 인간이 스스로의 몸을 제물로 해서 지킬 수 있었던 정보의 양은 막대했다. 따로 데이터 저장 시설을 만든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록들까지 궂이 어렵게 저장해야하겠냐는 편의성의 발로에 불과했다.
유전자 속에 새겨진 정보의 양에 따라 사람들의 신체능력, 수명, 생식 기능 등이 차이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고, 서로를 구분하고,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쪽을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시켜버렸다. ‘인간’과 ‘아인’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는 모두 같았다. ‘인간’이든 ‘아인’이든 분량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양쪽 다 DNA 속에 문명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두 집단 모두 아무리 해도 궤도 엘리베이터에 탈 수 없다는 점이 공통점이었다. ‘대 단절’ 이전 정립된 ‘인간만을 위한 우주’에서 오직 ‘인간’이라고 판명된 자들만이 탈 수 있었던 궤도 엘리베이터는, 로크랜드를 뒤덮은 유전자개조 광풍이 지나간 이후 다시는 인간을 대기권 위쪽으로 올려보내지 못했다. 로크랜드에 살고 있는 어떤 ‘인간’이나 어떤 ‘아인’도 궤도 엘리베이터로부터 인간이라고 인정받지 못했다.
***
“설 후인”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친근하고 그리운 목소리였다. 설 후인은 눈을 떴다. 여전히 별빛이 내리비치는 밤이었다. 몸을 일으켜 ‘숨’과 ‘파-두난’, 그리고 ‘코-호’를 찾았으나 어디에도 없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주변이 너무 조용했다. 돌을 스치는 바람 소리도, 밤을 지키는 새 소리도, 전장을 휘도는 죽은 이들의 영혼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시린 별빛을 받아 차갑게 반짝이는 아르키메데스만이 침묵의 밤을 지키고 있었다.
“......누구?”
“오랫동안 기다렸다.”
“기다렸다니, 무슨 말을……”
“날 잊은 거니, 얘야?”
“한 후해!”
설 후인은 벌떡 일어나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옅은 별빛 아래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색색의 술을 허리춤에 늘어뜨린 화려한 ‘영창자’의 복장, 하얀게 센 머리카락, 그리고 맞잡은 두 손을 한 그녀가 거기 있었다.
“당신은……아니, 당신은 죽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말을 잊지 못하는 설 후인에게 한 후해가 가볍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발끝에 작은 돌들이 채였다. 텅 빈 공간을 울리는 것처럼 메아리가 울렁였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설 후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구나, 이건 내 환상인거지요? 난 정신을 잃었거나 아니면 죽은 것이고.”
“죽은 것은 아니야.”
한 후해는 가볍게 웃으며 설 후인이 서 있는 근처 바위에 앉았다. 무척이나 편안한 모습이었다.
“다만, 시간이 얼마 없으니 조금 서둘러야겠다. 우물쭈물 하다간 정말로 죽을 지도 모르니까. 어디서부터 이야기할까? 네가 발견한 ‘숨’이라는 아이? 네가 연 추념식? 아니면 지구? 옳지, 내가 왜 여기에서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지부터 이야기해야겠구나.”
“내 자신의 환상 속에서도 당신이 내게 설명을 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게 신기하네요.”
“환상이기도 하고, 환상이 아니기도 하니까. 아이야. 넌 지금 궤도 엘리베이터, 그리고 이 로크랜드의 정보 순환 시스템하고 연결된 상태야. 그러니 이 세계는 네 머릿속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완전히 네 것만 있는 것은 아니란다. 그 동안 시스템을 거쳐 간 모든 이들하고도 연결되었다고 봐도 되지.”
설 후인이 깜짝 놀라 일어서며 물었다.
“그럼, 당신 정말로 한 후해인가요?”
한 후해의 모습을 한 여자는 설 후인의 허둥대는 모습에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손을 가볍게 저었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 난 한 후해야. 그녀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생전의 그녀는 아니란다. 난 시스템에 남은 그녀의 기억과 말과 행동으로 너의 환상 속에 구현된 가상 인격이야. 최고재판소가 로크랜드의 정보 순환 시스템을 활용하여 만든 대리체이지. 나는 한 후해이기도 하고, 최고재판소이기도, 원로원이기도 하고, 시스템이기도 해. 난 ‘나’라는 존재라기 보다는 그들 모두의 의지가 합쳐진 것이란다. 한 후해의 것도 포함해서 말이야.”
그녀는 손을 내리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우리’라고 해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어.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지. 우린 그녀의 모든 것을 봐왔어. 우린 그녀의 배냇 웃음과 처음 발걸음을 기억해. 그녀의 수줍은 첫사랑도, 첫 추념식 날의 떨림도, 너를 만난 날의 기쁨도 모두 기억하고 있지. 우린 그녀는 아니야. 하지만 만약 이 시간, 이 장소에 그녀가 있을 수 있다면 바로 지금 우리처럼 말하고 행동할 거야. 그러니 지금 이 모습은 한 후해가 아니기도 하지만 한 후해 자신이기도 하단다. 그건 그렇고, 이제 내가 널 찾아온 이유를 들려줘도 되겠니?”
설 후인은 약간 실망한 얼굴로 다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많은 일이생겼던 추념식의 피로는 환상 속에서도 그녀를 서 있기조차 힘들게했다. 그리고 피로를 잊게 해 줄 놀라움과 반가움은 방금 전에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흠, 최소한 아주 비슷하다는 것은 인정해야겠네요. 그래. 말씀해 보시죠. 한 후해. 지난 이십 년 넘게 어디서 쏘다니고 계셨다가 하필이면 이런 시점에 저를 찾아오신 거죠? 전 당신에게 할 말이 많아요. 특히 오늘 일에 대해서요. 하지만 일단 들어는 볼게요.”
한 후해는 설 후인의 도발적인 말투와 시선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풀고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찾은 ‘숨’이라는 아이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당신이 죽을 때까지 찾아 헤맸고, 그 다음엔 제가 찾아 헤맬 차례가 된 아이잖아요. 궤도 엘리베이터를 자신의 힘으로 완전히 가동시킬 수 있는 자. 먼 옛날 ‘인간들만을 위한 우주’ 시절,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존재. 그리고 이제 로크랜드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낸 인간. ‘스스로 일어선 자’. 너무 정의가 많아서 다 이야기하려면 이 환상에서 깨지 않기를 먼저 기도해야겠어요.”
설 후인은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들어 사나운 시선으로 한 후해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불처럼 빛났다.
“빌어먹을, 다 때려치우고 한 가지만 확실히 하죠. 저 아이는 ‘인간’이든 ‘아인’이든 모두를 이 지옥 구덩이에서 꺼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에요. ‘숨’의 다른 모습들은 다 거짓이라고 해도 난 그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라고 믿고 있고, 실제로 증명해 보일 거에요. 한 후해의 모습으로 찾아온 당신이 뭐라 해도요.”
한 후해는 침까지 튀기며 흥분하는 설 후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타까움이 깃든 표정이었다.
“나에게 항상 웃어주고, 말 잘듣던 착한 아이는 어디로 가고 이렇게 고집스런 여자만 남았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걸 예상했기에 널 지금 찾아온 것이긴 하다만……”
그리고는 한 후해는 표정을 굳혔다. 과거 지도 ‘영창자’로서 엄격한 훈육이 필요할 때나 지었던 굳은 턱선과 고집스런 입매가 도드라졌다. 수십년 만에 보는 표정이었지만 설 후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그만큼 한 후해는 필요할 때는 사정을 두지 않는 이였다. 굳은 얼굴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설 후인, 넌 정말로 저 ‘숨’이라는 아이가 가진 ‘진짜 인간’의 권한으로 이 로크랜드의 정보 순환 시스템을 정지시키겠다는 거냐? 그게 무슨 의미인지 네가 모르지는 않을 텐데?”
감정을 담지 않은 조용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는 궤도 엘리베이터 아르키메데스 끝에 빛나는 별빛보다도 더한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들은 단호히 쳐버리고 가겠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설 후인도 여기서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답을 찾은 것이다.
“잘 알고 있어요. 정말, 정말 잘 알고 있죠. 당신이나 나나 이제 실업자란 것을요. 이 로크랜드의 빌어먹을 정보 순환 시스템이 멈추면 이제 더 이상 ‘순례자’가 이 행성에서 할 일은 없어지는 거 아닌가요? 우린 더이상 문명의 정보를 시체들로부터 뽑아내지 못할 거고, 그러면 인간과 ‘아인’들을 동원해서 웃기지도 않은 데이터 저장소를 차지하기 위해 골몰하는 영주들과 똑같은 짓거리를 할 수밖에 없겠죠. 그리고 제가 알기론 영주들은 우리보다 저 짓을 최소 삼백 년은 더 해왔어요. 그러니 우리가 이제 할 일은 얌전히 로크랜드의 땅에 인사를 하고 땅 속에 있는 집으로 시체들과 나란히 손잡고 들어갈 일만 남았죠. 네. 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설 후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은빛으로 번쩍이는 아르키메데스를 가리켰다.
“더 말해도 되나요? 전 저 궤도 엘리베이터가 문명을 전해주는 ‘희망의 탑’이 아니라, 악랄한 사기꾼들의 탑이란 걸 잘 알죠. 별의 강이니, 영혼을 안내하기 위한 노래이니... 지금까진 문명의 조각들이라는 미끼로 잘도 사람들을 속여왔지만 정말, 정말로 아무것도 없이 단지 그런 것으로만 사람들이 우리들이 하는 가짜 추념식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시체들이 펄펄 날뛰는 죄악의 밤을 영원히 숨길 수 있을 거라고 믿나요? 네! 전 잘 알고 있어요. 제가 하려는건 죽어버린 과거 문명의 망령에 묶여 짐승처럼 살아가는 이들을 놓아주는 것이죠. 그들이 인간이 될지 짐승으로 남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누가 정해주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들이 정하게 하는 것이죠. 이게 제가 하려는 것이에요. 이 정도로 알아도 제가 잘 모르는 것인가요?”
마지막 말은 거의 고함에 가까웠다. 흥분한 탓인지 상상 속일지언정 속이 울렁거렸다. 뱃속에서 그동안 삼킨 죽음들이 다시 꿈틀거리는 느낌. 갑자기 올라온 역한 구토감에 그녀는 살짝 비틀거렸다. 한 후해가 그 모습을 보고는 일어나 그녀를 부축하려 팔을 잡았다. 하지만 설 후인은 사납게 손을 밀쳐내며 울먹였다.
“이제와서, 어쩌라고! 당신이 구하라 했던 답이 저 아이인가요, 아니면 ‘지구’인가요? 그래요, 지구로 가는 길의 조각이 나왔어요. 어쩌면, 아니 틀림없이 또 나오겠죠. 그럼 우린 그 나머지들을 다 찾을 때까지. 아니, 이 땅 생명들의 몸속에 새겨진 망할놈의 정보들을 다 끌어모을때까지 계속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게 하고 그시체들을 파헤쳐야 하나요? 한 후해 당신이 말했던 답을 지켜나가는 게 그런 거였어요? 시체들을 파헤치는 이 현실을 지켜나가라는 게 당신이 한 말의 의미였나요? 그러라고 나에게 노래를 들려준 거에요?”
설 후인은 한 후해의 무릎 앞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진짜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전의 그녀의 얼굴로, 그녀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대상을 앞고 두고, 무너져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 후해는 설 후인의 어린 시절이자 성인 시절의 모든 것이었다. 어려서는 함께 있음으로써 그녀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인도했고, 설 후인이 성년이 되어서는 한 후해가 남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설 후인을 앞에서 이끌었다. 애정 어린 손의 따스했던 기억을 밑불로 해서, 설 후인은 시체들이 널린 들판을 넘고, 죽음이 요동치는 자신의 몸을 어루만질 수 있었다. 그런 한 후해가 이제 설 후인 앞에 앉아, 울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난 너보고 답을 찾으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니 네가 답을 지켜나갈 필요는 더더욱 없지. 넌 그저 맡기면 되는 거란다. 시간이,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야.”
설 후인은 한 후해의 말에 약간 당황한 것처럼 울던 얼굴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후해는 설 후인의 눈물을 살짝 닦아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앉았다. 설 후인과 나란히 앉아 그녀는 말을 이었다. 부드럽고도 가라앉은,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어조였다.
“진정해라 얘야. 난 너와 싸우기 위해 여기 있는게 아니야. 우린 바보도, 어린아이도 아니지. 저 하늘 위가 꽃내음으로 가득 찬 에덴 동산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사냥터였던 것도 잘 알아. ‘인간들만을 위한 우주’에는 인간도 없었고, 인간이 아닌 것들도 없었어. 그저 스스로 서로서로를 나눴고, 일방적으로 다른 쪽을 억압하는 아픔만 있었지. 그리고 결국, 그 모든 것들이 파멸하면서 다 사라졌다는 것도 잘 알아. 설 후인 네가 인간의 가능성을 아는 현자이고, 최고재판소가, 원로원이, 시스템이, 아니 내가, 과거의 문명이라는 영혼 없는 껍질 따위로 인간 스스로의 가능성을 죽이는 바보일 수도 있어. 그래 알고 있어. 하지만 우린 인간이야. 그래서 그 모든 모순과 선악을 다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지. 때론 피를 흘리기도, 때론 비열해지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는 사랑하고 눈물지으며 슬퍼하고 애도하고 서로를 보살펴. 우린 그래서 인간인 것 아니니?”
한 후해는 궤도 엘리베이터 쪽으로 손을 내밀어 허공에서 그것을 어루만지듯 손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설 후인의 손을 포개 잡으며 말을 이었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알고 있는 우리가, 저 하늘 위에 있던 문명의 유산을 가지고 다시 한번 새롭게 시작하자는 거지…... 그리고 끊어져버린 우주의 필라멘트들을 하나씩 이어붙여 불을 켜는 데에는 아직 이 땅의 희생이 필요하단다. 물론…...그건 대를 위한 작은 희생 따위가 아니야. 그냥 희생이지. 죽는 건 죽는 것이고, 그거 하나로 전부이지. 결코 대를 위한 소의 희생 따위란 없어.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의 전부고 대를 위한다고 해서 죽음이 삶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말이야…...누군가는 그 수많은 전부를 다 봐야 한단다. 그리고 그 전부 중 얼마는 불을 켜고, 나머지 얼마는 불을 꺼야만 하는 것을 감내해야만 해. 그건 마치, 2진법과 같아. 개개인은 항상 0이나 1이지. 0은 한 개인에겐 죽음을, 1은 삶을 의미해. 하지만 개인이 모든 것을 잃더라도 하나의 숫자는 그 얻음과 상실을 모두 거쳐야 만들어진단다. 01, 10,100. 어때 좋은 비유지? 얘야, 난 아직까진, 적어도 아직까지는, 로크랜드라는 땅에 0이라는 숫자값을 주자는 것이야. 영주들은 싸우고, 인간들을 죽고, 아인들은 죽어서도 추념식이라는 이름으로 한번 더 죽게 되겠지. 하지만 그들은 정말 중요한 0이 되어 가장 아름다운 숫자를 만드는 모퉁이돌이 될 거다. 이미 그들로부터 지구로 가는 길의 첫걸음까지도 만들어냈어. 이제 얼마 안 남았단다. 이제 우린 조금만 더 희생하면 정말 아름답고 거대한 숫자를 완성해서 그 숫자 안에 이 우주를, 한때는 인간이 발 붙였던 모든 곳들을 다시 우리들의 발걸음으로 채울 수 있게 될 거야. 폐허가 살아나고, 절망이 희망으로 바뀔 거란다. 얘야…...우리들의 탑은 그 여정을 위한 ‘희망의 탑’이 되어야 한다. 결코 이대로 멈춰서는 안돼. 이해할 수 있겠지?”
설 후인은 자신을 잡고 있는 한 후해의 늙고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발로 샌 머리카락과 축 쳐진 볼살이 그녀가 걸어왔던 길, 그리고 앞으로 그녀의 유지를 이은 이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모두 지고 있는 듯 힘겨워 보였다. 입가에 미소만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이라고 설 후인은 생각했다.
“‘숨’은요? 제가 찾은 아이는 어떻게 되나요?”
설 후인의 물음에 한 후해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살짝 넓어졌다.
“아이는 우리가 데려가마. 아직은 궤도 엘리베이터를 가동하거나 시스템을 멈출 때가 아니야. 불쌍하지만 우리가 적절하게 돌볼 수밖에 없단다.”
“아이는 그 노래를 부를 줄 알아요. 아이는 추념식을 할 때 그 노래를 불러요. 어쩌면 ‘진짜 인간’들이 하는 추념식이란 것은 그 노래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몰라요. 아이를 잃는 건 정말 큰 실수가 될 거에요.”
설 후인의 뜬금 없는 말에 한 후해는 잠깐 생각하는 듯 대답을 늦췄다. 그리고 잠시 후 진지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무슨 노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한번 조사해 보마. 아직 우리는 예전 진짜 인간들이 추념식을 했었는지조차 잘 모르니까.”
“......”
갑자기 설 후인이 깔깔대며 웃었다. 한 후애의 대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볍게 날아갈 것 같은 웃음에는 경망스러움마저 뭍어났다.
“아...미안해요. 놀릴 생각은 없었는데…...그저, 한번 혹시나 해 본 거에요.”
“혹시나...라니?”
“당신 정체”
설 후인은 손가락으로 한 후해의 가슴켠을 살짝 가리키고는 나란히 앚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마치 생경한 것을 보는 것처럼 눈매를 살짝 가늘게 좁혔다. 이미 웃음기는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설 후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은 한 후해가 아니야. 그건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 하지만 당신은 그녀의 기억을 빌려 이 자리에 나타난 존재도 아니야. 자, 한번 불러봐! 당신이 가르쳐 준 노래 말이야.”
“무슨 소리냐?”
한 후해의 반문에 설 후인은 고소했다.
“무슨 소리냐구? 당연히 모르겠지. 지금 ‘당신’은 나에게 가르쳐 준 적이 없을 테니까. 그래, 이제 알겠어. 왜 그날 그녀가 나를 데리고 변장까지 한 채 밖으로 나왔는지. 왜 그날 이후로 그녀를 한번도 볼 수 없었는지. 왜 용기를 가지고 답을 구하고, 그 답을 지켜나가라고 했는지…...나는 수십년 동안 그날의 기억을 안고 살아왔는데 이제야 알겠어.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였어. 당신의 꿀같은 말에 넘어가지 말라고 말이야. 내가 혹시라도 답을 찾으면, 온 몸의 용기를 갖고 그것을 지키라고 그녀는 나에게 말했던 거지. 그게 최고재판소와 원로원, 그리고 궤도 엘리베이터, ‘너희들’의 감시 속에서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을 거야.”
“얘야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갑자기 왜 그러니?”
“나한테 어머니의 말투로 이야기하지마!”
설 후인은 한 걸음 더 물러서며 다시 말했다.
“로크랜드의 희생으로 텅 빈 우주의 빛을 밝힌다구? 누군가는 그걸 감내해야 한다구? 웃기지 마!”
설 후인의 입가가 일그러지면서 이빨이 드러났다. 그 이빨이 사나운 맹수처럼 그르렁댔다.
“난 그런 희생 따윈 믿지 않아. 사람들의 절망과 시체들의 통곡으로 쌓은 희생이 불을 밝힐 수 있을 것 같아? 시체들을 밟고 저 밖으로 나가서 뭐할 건데? 또다시 마음에 안드는 인간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하면서 지상으로 추방하려고? 너희들이 만들려는 건 또 다른 ‘인간들만을 위한 우주’일 뿐이야. 너희 같은 방식으로 저 밖에 나간들 우리는 멸망의 구렁텅이로 또다시 떨어지겠지. 네 질문과 네 답을 들려주지. 누가 인간인가? 네, 저 하늘로 올라가 망령들의 유산을 차지할 개자식들이 바로 인간입니다. 천만에! 웃기지 마! 너흰 질문부터 틀렸어. 답은 말할 나위 없고…... 우린 모두 인간이야.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우린 모두 인간이야. 한번도 인간이 아닌적 없었어. 아이는 다른 질문에 대한 답이라구!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인간인 우리가 다시 한번 스스로 인간이라고 증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저 아이가 답이지. ‘숨’은 우리가 쌓은 죄악을 이기고 이 땅이 만들어낸 존재야. 이 땅을 애정과 보살핌으로 채울 진짜 주인이야. 이제 그 답을 가지고 미친 죽음의 행진을 멈춰야 할 때라구!”
그녀는 거친 숨을 한 후해의 모습으로 서 있는 이에게 다가가 그 멱살을 움켜잡았다. 환상 속에서도 힘은 여전했다. 물론 힘이 여전한 만큼, 몸 안을 죄여오는 죽음들의 절규도 매한가지였지만. 고통을 짖누르며 억눌린 목소리로 설 후인이 말했다.
“이해가 안가? 네 방식으로 이야기해 줄까? 그래. 언젠가 아름다운 숫자를 만들어야겠지, 하지만 말이야. 로크랜드에서 인간을 없애 전부 0으로 두면, 1은 어디서 찾으려고 그러냐? 인간은 어디서 찾냐구? 저 위엔 어딜 돌아봐도 온통 썩은 망령들만 득시글거린단 말이다. 이 병신아!”
설 후인은 상대가 대답할 사이도 없이 잡았던 멱살을 사납게 패대기쳤다. 그 기세에 한후해의 모습을 한 여자가 땅바닥에 나자빠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설 후인이 이를 갈았다.
“너는 저 하늘밖 망령들한테 네가 알고 싶은 질문부터 먼저 물어봐라. 난 내가 이 땅에서 찾은 답을 가지고 저 위로 올라갈테니.”
쓰러진 이는 답이 없었다. 그렇다고 벌떡 일어나 자신을 패대기 친 설 후인에게 덤벼들지도 않았다. 그저 쓰러진 채로 고개만 약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
몸 안에 있던 분노를 쏟아낸 뒤 숨을 들썩이던 설 후인이 약간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분노에도 상대는 별 반응이 없었다. 게다가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함께 몸 안에 새긴 죽음의 그림자들도 점점 거칠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원래 정상이 아닌 몸이 그보다 더 깊은 심연으로 추락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이제 환상에서 나와야 할 때였다. 그녀의 몸이 위험했다. 그리고 그건 다른 목숨들도 마찬가지였다.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쉽네. 마지막 기회였는데.”
“......?”
쓰러졌던 이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한 후해에서 다른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왜? 네가……”
설 후인이 중얼거린 말에 부백인장 코-호의 얼굴을 한 남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잠시 이 남자의 얼굴을 빌어왔어. 사정이 있어서 말이지.”
그는 태연하게 말하며 손뼉을 쳤다.
“네 화끈한 연설은 잘 들었어. 특히 마지막 동작이 무척이나 인상깊었지. 뭐, 아주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네가 아니라 우리가 좋은 패를 쥐고 있거든.”
“무슨 소리냐?”
설 후인이 사납게 말했지만 남자는 상관하지 않는 듯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네 몸 상태를 느껴봐. 이상하지 않아?”
설 후인은 자신의 몸 안으로 온 정신을 곤두세웠다. 마치 곧 폭발할 것 같은 솥이 끓고 있는 듯이, 마음의 가장자리로부터 무엇인가가 뚜껑을 열고 나오려는 것처럼 부글댔다. 그제서야 아차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남자가 비웃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넌 오늘밤 추념식에서 지구와 관련된 정보를 네게 덧씌웠지. 그것만으로도 이미 넌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던 셈이야. 발걸음을 조금 더 조심했어야지. 그런데 너는 한 후해의 기억을 우리와 공유하면서 우리에게 틈을 줬어. 우린 그 사이로 좀 더 많은 정보를 네 안에 구겨넣을 수 있었고...이제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아. 오해하지 마! 지금까지 대화는 너에게 네 몸에 새겨진 정보를 털어버리고 얌전히 예전으로 돌아올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었어. 정말이라구. 너는 그걸 거부한 거야…...내가 보여준 한 후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억으로 만든 것이라 그 기억의 범위 안에선 정말로 진짜야. 하지만 설마 그녀가 우리 감시로부터 자신을 숨길 수 있으리라곤 생각 못했어. 게다가 죽기 전날에는 너에게 이상한 기억까지 심어주고 말이야. 정말 골치아픈 할망구는 죽어서도 우릴 골치아프게 하는구먼.”
“......그럼…... 네놈들이 날 폭주시키려고 일부러 이런 환상을 만든 거냐! 시간을 끌려고?”
“또 한 편으로는 그런 셈이지. 이해가 빨라 좋네. 우수한 영창자 한 후해의 제자는…...”
설 후인은 상대의 대답을 다 기다리지 않고 벼락같이 달려가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뻑-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가 붕 떠서 날았다. 하지만 때린 설 후인도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고통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어우…...이 기능은 다 좋은데, 아픈 것도 그대로인게 문제야……”
남자는 투덜대며 일어나, 자신보다 더 괴롭게 땅바닥을 구르고 있는 설 후인을 향해 이죽거렸다.
“성질을 죽여. 여기서 몸을 함부로 쓰거나 정신을 혹사시킬수록 네 안에 네가 머금은 죽음들의 그림자가 너를 삼키는 게 빨라질 뿐이야. 뭐…...그래봤자 죽는 건 별 차이 없겠지만 말이야.”
“......으…...이 개자식들, 너희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알아?”
코-호의 얼굴을 한 남자는 아직도 턱이 얼얼한 듯 눈을 찡그리며 만졌다. 그리고는 쓰러져 있는 설 후인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 잘 알지. 네가 폭주하면 네 몸이 강제로 추념식을 열거 아니야? 제 2궤도위의 순례자가 자신의 목숨으로 여는 추념식이라…...대체 얼마만에 보는 걸까? 아마 한참 됐을 거야. 한 후해의 스승의 스승 때가 마지막이었으니까. 역시 그 학파는 분위기가 별로 안좋아. 응? 잠깐 말이 샜군. 네가 여는 추념식의 성대한 모습이 눈에 선하구만. 십만명이라…...여기 주변 전장에 있는 병력이 십만 명. 영주가 두 명. 이거, 이거, 아르키메데스 주변 지역에 한바탕 권력 변동이 생기겠네. 어차피 십만 명 분의 데이터는 수거하지 못하겠지만, 앞으로 영토 싸움으로 스무 배는 더 죽을 테니 우리야 아까울 것 없지 뭐. 고마워. 이렇게 죽는 순간까지 최고재판소와 궤도 엘리베이터를 위해 봉사해 줘서.”
“이…...개자식…...으……”
설 후인은 고통 속에서 한 후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가 지키라고 했던 답을 지키지 못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설 후인과 십만명의 죽음 뒤에 오롯이 혼자 남겨진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설 후인이 쥐어짜듯 말했다.
“…...지구…...지구로 가는 단서가 내 몸에 있어…...이대로면 그것도 사라져. 그래…...도, 괜, 괜찮은…...거냐?”
그림자의 압박이 할퀴어대는 아픔을 참으며 설 후인이 간신히 말했다. 그 옆에서 태연히 앉아 볼을 쓰다듬던 남자가 고개를 잠시 돌려 그녀를 쳐다보다가 별안간 크게 웃었다.
“......설 후인, 설 후인...너는 정말 최고재판소와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이상주의자야. 우리들 모두가 너처럼 책임감 넘치는 바보들 뿐이었다면, 이 로크랜드라는 지옥구덩이에서 옛날 옛적에 벌써 빠져나갔을 거야. 아니 이건, 정말 칭찬이야…... 이거, 어디서 들어본 말 같지 않아?”
그는 고통 속에 괴로워하는 설 후인에게 몸을 가까이 했다. 그리고 귓가에 입술을 대고 살짝 키스했다. 입술을 뗀 그는 숙인 자세 그대로 속삭였다.
“설마, 지금같은 일이 처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마. 네가 처음도 아니고, 네가 마지막도 아닐거야. 그리고 그때도 난 이렇게 너를 닮은 이의 귓가에 사랑스런 키스를 해주고는 쓸쓸한 얼굴을 한 채 일어서겠지.”
남자는 몸을 일으켜 몸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먼지 터는 소리가 설 후인의 신음과 섞여 아무 소리 없는 공간을 울렸다. 울음같은 메아리가 사방을 쳤다.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
“안녕. 사랑스런 우리 최고재판소의 아이야. 이건 다 우리를 위해서란다.”
그리곤 시선을 허공으로 돌려 어딘가를 향해 말했다.
“나에게 정신을 잠시 빌려 준 남자여, ‘코-호’라고 했나? 아쉽게도 네 목숨을 구해줄 순 없다. 이 여자가 죽으면서 만들 추념식은 온 사방 수십킬로미터의 생명을 집어삼키니까…...그걸 피해갈 수 있는 이는 ‘진짜 인간’인 아이 뿐이야. 미안하다. 언젠가 네 몸 속의 기억을 궤도 엘리베이터 안의 정보 순환 시스템속에서나마 만나길 빈다. 안녕히.”
남자가 흔적도 없이 공간에서 사라졌다. 그 뒤에 고통으로 절규하는 여자만이 남았다.
“이 개자식! 미쳤냐?”
“백인장님! 저 여자 죽여야 합니다! 안 그러면…”
“미친놈아! 애도 죽이고, 순례자도 죽이려고 하고, 너 돌았어?”
전장에서 들려온 작은 노래 소리가 발단이었다. 가까스로 공포가 도사린 추념식을 마치고 한숨을 돌리던 그들에게, 노래 소리가 들려온 후 모든 것이 미쳐버렸다.
설 후인이 갑자기 눈을 뒤집어뜨고 기절해버린 것이다. 그녀는 몸을 미친듯이 떨면서 숨만 헐떡일 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파-두난과 코-호가 그녀를 아이를 재웠던 작은 천막 아래에 뉘였다. 밤은 아직 깊었지만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설 후인이 행한 추념식은 별개로 치더라도 전장분해탄 사용이 예정된 전장에 들어온 것은 분명 중대한 군법 위반이었다. 혹시나 그녀를 데리고 의무실로 갔다가 오늘 밤 있었던 일이 발각된다면 사형을 면치 못할게 뻔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설 후인이 정신을 회복하여 그녀와 함께 막사로 돌아갈 수 있기를 원했다. 제정신이 아닌 그들의 변호인은 그들의 죄를 더 무겁게 할지도 몰랐다. 사형도 여러 종류가 있는 형벌이었다.
그런데 한동안 설 후인을 지켜보던 중 갑자기 코-호가 난데없이 옆으로 -픽- 쓰러졌다. 죽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의식을 잃고 쓰러진 부관의 모습은 파-두난을 더욱 더 공황 상태로 몰고 갔다. 그는 설 후인의 뺨을 흔들고, 부관의 어깨를 흔들고, 아이에게 어떻게 좀 해보라고 소리치는 일을 자동재생 하는 기계처럼 한동안 반복했다. 그리고 자신이 별로 의미도 없고, 상황을 타개할 가능성도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판단이 조금씩 돌아올 때 쯤, 이제는 그만 터져도 되지 않겠냐는 핀잔을 들을 정도의 밤에 ,또다시 하나의 일이 터졌다.
부백인장인 코-호가 깨어났다. 미동도 하지 않던 그가 갑자기 눈을 떳다. 마침 그때는 아이가 코-호의 이마를 짚고 있었던 때였는데, 코 호는 눈을 번쩍 뜨고는 정신 나간 눈동자로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이가 괜찮냐는 질문을 서너 번 할 때 까지 여전히 멍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그때서야 자신의 부관이 깨어난 것을 알아챈 파-두난이 반색을 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 이름이 불림과 동시에 코 호는 별안간 아이에게로 치달아 허리춤에 찼던 작은 단검을 꺼내들어 아이의 다리를 찔렀다.
-쿡- 갑작스런 공격에 아이는 피할 겨를조차 없이 칼을 몸에 안고 쓰러졌다. 바위 옆 그림자로 쓰러진 탓인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코-호의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설 후인 곁에 있던 파-두난의 품으로 뛰어들어 그를 밀어뜨린 후 파-두난의 단검으로 설 후인을 찌르려고 했다. 아이가 찔릴 때는 멍하게 바라만 보던 파-두난도 부관의 두 번째 공격에는 반응할 수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몸을 헐떡이는 설 후인을 뒤에 두고 파-두난과 코-호는 단검을 서로 빼앗기 위해 두 손을 마주잡고 힘싸움을 했다. 옥신각신이 계속되던 중 마침 코-호가 돌을 밟아 몸을 휘청인 빈 틈을 노려 파-두난이 코-호의 손목을 비틀었다. 그 여세에 단도가 손에서 떨어지면서바위에 부딪혀 불꽃을 튀겼다.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파-두난이 설 후인을 등에 지고 코-호를 막았다. 저 편 한구석에는 누런색 누더기를 걸친 아이가 옷 아래를 붉은 색으로 물들이며 누워 있었다. 파-두난이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너, 지금 뭐하는거야?”
“백인장님, 나중에 다 설명드릴테니 제발 비켜주십시오. 저 여자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이, 개자식아! 쓰러졌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아이한테 칼질하고, 순례자까지 죽이려는 놈 말을 어떻게 믿어? 너 돌았지?”
“정신 멀쩡하니 제발 좀 비켜주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저 여자 제가 안 죽여도 곧 죽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다 같이 죽어요. 아니, 우리 뿐만 아니라 이 전장에 있는 아군이든 적군이든 다 죽는단 말입니다. 십만명이 저 여자때문에 몰살당합니다. 제발 비켜주세요! 자세한 설명은 저 여자 죽이고 하겠습니다!”
“뭔! 개소리야!”
“쓰러져 있을 때 최고재판소가 알려줬단 말입니다! 이렇게 비니 제발 비켜주세요!”
“그럼 아이는 왜 찔렀어?”
파-두난이 다시 사납게 외쳤다.
“최고재판소인지 개뼈다귄지가 저 아이도 죽이라고 했냐?”
그 말에 코-호가 잠시 머뭇거렸다. 파-두난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웅크리며 코-호의 어깨로 달려들었다. -쿵- 파 두난에게 힘껃 받힌 코-호가 비틀거렸다. 그 기세를 몰아 파-두난은 상대의 뒷무릎을 발로 차 그를 쓰러뜨렸다. 일단 상대가 무릎을 꿇자 한결 싸움이 수월해졌다. 그는 발 뒤꿈치로 코 호의 뒷목 아래를 세게 내리찍었다. 코 호의 몸이 무너졌다. 쓰러진 그는 잠시 꿈틀거리더니 정신을 잃은 듯 일어서지 못했다. 파-두난은 황급히 그의 목덜미를 짚었다. 다행히 맥박은 있는 게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그제야 그는 아이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정신차려!”
“...아…...아파요.”
아이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리를 보니 피는 계속 흘러나오면서 낡은 옷을 적시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과다 출혈로 죽을 수도 있었다. 파-두난은 웃옷을 벗어 잡아찢은 뒤 아이의 다리를 꽉 동여맸다.
“흐윽.읍……”
“참아라. 죽는 것 보단 낫다.”
아이가 고통에 신음했지만 그는 아랑곳 없이 지혈을 계속했다. 애쓴 보람이 있는지 피가 배여나오는 속도가 조금씩 느려졌다. 아이는 이제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다시 저 한쪽에서 몸부림치는 순례자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한숨이 나왔다. 오늘 밤은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끔찍한 추념식. 그 추념식의 의미. 갑자기 쓰러진 순례자. 피를 흘리는 아이. 실성한 듯 칼을 들고 설치는 부관. 단 몇 시간 만에 익숙치 않은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진 터라 지독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피로감에 허탈해 할 겨를조차 없었다. 파-두난은 아이의 볼을 잠시 어루만져주고는 몸을 일으켜 설 후인이 몸부림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앞에서 벌어진 일에 우뚝 서 버렸다.
어느 새 정신을 차린 코-호가 설 후인에게 기어가 그녀의 배에 칼을 꽂아넣었다.
“야…...야, 이…...”
파-두난은 말도 잊은 채 미친사람처럼 달려가 기듯 엎드린 채로 설 후인에게 다시 칼을 내지르려는 코 호의 얼굴을 온 힘을 다해 발로 찼다.
-뻐억-
발길질에 코-호의 얼굴이 내려앉으며 피투성이가 되어 나자빠졌다. 파-두난은 그런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설 후인에게 달려가 배에 난 상처를 손으로 막았다. 하지만 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 나왔다. 파-두난은 미친 사람처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자신의 윗 속옷을 벗어 설 후인의 상처를 감았다. 그리고 피가 나오는 속도가 줄지 않자 바지까지 벗어서 상처를 세게 동여메었다. 피는 금새 옷을 적셨다.
“으…...그, 그여자…...죽여야 합니다. 제발.”
코-호가 한켠에서 피범벅으로 신음하면서도 중얼거렸다. 파-두난이 사납게 소리쳤다.
“닥쳐! 이 미친놈. 이 여자 피만 멎고 나면 네놈은 반드시 내가 죽여버린다!”
“절 죽이셔도 좋으니, 제발, 제발 그 여자를 죽이십시오. 백인장님. 십만명의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파-두난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 코-호에게 달려들려 하는 순간,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 후인이었다.
“그의 말의 맞아요. 날 당장 죽여요.”
“......에?”
갑자기 얼빠진 채 멍해져버린 파-두난의 반응에도 설 후인의 대답은 차분했다.
“내 몸은 지금 폭주상태에요. 빨리 날 죽이지 않으면 곧 이 주변 전체의 살아있는 인간과 아인들의 생명을 먹어치울 거에요. 당신까지 포함해서요. 그걸 막으려면 날 죽일 수밖에 없어요. 고마워요. 당신 부관 덕에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오히려 감사하죠. 아이는요? ‘숨’은?”
“무슨 소리를……”
“‘숨’은? 아이는? 아이 어디 있어요!”
설 후인은 칼에 찔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몸 안에서 날뛰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큰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그 기세에 파-두난조차 몸을 움찔했다. 그가 대답했다.
“저...저쪽에 있습니다. 약간 다치긴 했지만 무사합니다. 순례자님.”
“다쳐? 괜찮은가요? 정말 무사해요?”
“네, 허벅지를 조금 칼에 찔렸지만 깊진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설 후인은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쉬면서도 그녀는 고통으로 몸을 비틀었다. 배에 난 상처에서 오는 고통이 아니었다. 그녀는 몸 안의 그림자가 온 정신을 잡아뜯는 고통과 싸우면서 덜덜 떨었다.
“아이를…...’숨’을 이리로, 데려와 주세요.”
파-두난은 설 후인 곁에 마찬가지로 누워 피투성이가 된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부관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아이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아이를 두 팔에 안고 와서 설 후인 곁에 한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얼굴을…...제게…”
“아줌마 많이 아파요?”
숨의 말에 설 후인이 고통 속에서도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 미소에는 한 후해와 같이 했던 마지막 나들이에서 한 후해가 지었던 미소같은 흔적이 났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아니…...안 아프단다. 조금 아팠는데, 이젠 아니야. 넌 괜찮니?”
아이는 설 후인의 물음에 약간은 얼굴을 찌뿌리며 말했다.
“다리가 엄청 아프긴 해요. 불이 나는 것 같아요.”
“좀 있으면 괜찮아 질거다.”
설 후인은 아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위로했다. 그리곤 파-두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를 잘 치료해 주세요.”
파 두난이 고개를 끄덕이자 설 후인은 다시 말했다.
“부탁이 있어요. 이 아이, ‘숨’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 여기엔 당신하고, 날 죽이려한 당신 부관 두 명 밖엔 없지만 저 주둔지에 가서도 당신만한 사람을 찾을 순 없을 것 같아 이야기합니다. 들어줄 수 있겠어요?”
“말씀하십시오. 순례자님.”
파 두난이 조그맣게 이야기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이건 그녀의 유언이었다. 배의 피는 멈출 수 없었다. 설 후인이 말했다.
“‘숨’을 ‘코-후룸’에 있는 지성소에 데리고 가 주세요. 가서 이걸 보여주면 한 사람을 만나게 해 줄 겁니다. 그에게 가서 말하세요. ‘스스로 일어선 자’를 찾았다고.”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에 손을 넣어 자신의 순례자 징표인 메달을 꺼내 파-두난에게 건넸다. 겉을 싼 종이는 기름을 먹였음에도 한켠이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군인을 그만둬야 할수도 있습니다.어쩌면 탈영을 해야 할 수도…...”
“상관 없습니다. 어차피 오늘 밤 보고 들은 것으로 군대엔 더 이상 미련이 없어졌으니까요.”
설 후인은 자신의 징표를 받아 조심스레 품에 넣는 남자를 힘겨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곤 갑자기 -피식-하고 약한 웃음을 터뜨렸다.
“파-두난, 파-두난, 늦었지만 내가 오늘 밤 추념식 전에 당신을 비웃은 걸 용서해 줘요. 당신은 정말 바보지만, 이상주의자가 맞아요…...그리고 이상주의자들만이 이 세상에 놓인 길을 보죠. 당신같이 용감한 이상주의자라면 이 지옥구덩이를 메워서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거에요. 그래요. 이건 내 축복이에요. 내가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과 함께 할 이들에게 주는 내 마지막 축복.”
그녀는 힘겹게 손을 들어 파-두난의 팔에 안겨 있는 숨의 볼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얘야, 넌 순례자가 될 수 있을 거다. 아니, 넌 이미 순례자의 자격이 있어. 영혼들을 추수해 별의 강으로 안내해주는 정말 훌륭한 순례자. 비록 언제나 도망다녀야 하는, 평범한 순례자는 아니겠지만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들을 너는 하게 될 거다. 내가, 노래를 불러주마…... 자, 가라, 어서. 너는 내 딸이다. 한 후해가 내 어머니였던 것처럼 이제 너도 내 딸이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파-두난에게 손짓했다. 아이를 데리고 여길 떠나라는 소리였다. 파-두난이 그녀와, 그녀 옆에 쓰러져 있는 코-호를 보면서 멈칫멈칫했지만 설 후인은 고통 속에서도 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없었다. 상관 말고 떠나라는 소리였다.
파-두난은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아이도 이미 상황을 대충이나마 짐작하는지 다리의 고통으로 잠깐씩 신음하는 것 외엔 다른 말이 없었다. 발을 옮기는 그들 뒤로 작은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생명을 위한 추념식’의 노래. 설 후인이 죽음을 준비하며 조용히 부르는 추념식의 노래였다.
아이가 함께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처음에는 쉰 목소리처럼 나오는 약한 바람소리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멀어지는 설 후인의 노래소리에 힘을 보태려는 듯 아이의 소리는 점차 노래같은 꼴을 갖춰갔다. 파-두난은 등 뒤에서 일어날 일을 아이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해, 애써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문득 쳐다본 하늘을 보고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의 등뼈. 별의 강이 하얀 안개로 덮여가고 있었다. 짙거나, 옅거나, 이리저리 춤추거나, 조용히 머무르거나, 수많은 모양의 작은 안개조각들이 별의 강에 뛰어들기라도 하듯 하나씩 하나씩 자신의 몸을 맡겼다. 그리고 별의 강은 그 안개들을 품에 안은 채 유유히 밤하늘을 가로질러 출렁댔다. 한켠에 선 탑이 날카로운 별빛으로 별의 강 근처를 서성댔지만 그마저도 강의 웅장한 흐름에 밀려 침묵하는 듯 비켜났다. 파-두난은 아이가 부르는 노래가 단순한 노래가 아님을 깨달았다. 언젠가, 자신이 버려졌던 전장에서 들었던 노래, 그리고 그 전장에서 하늘로 오르던 인간과 아인들의 영혼. 그 때의 환상이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재연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비로소 그날 밤이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죽은 이들의 영혼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참된 의미의 추념식이 다시금 그가 선 들판에서 아이의 노래를 벗삼아 조용히 치뤄렸다.
“제겐 다행히도 아직 시간이 좀 있어요.”
“저는 불행히도 조금 있으면 죽습니다.”
코-호는 자신의 죽음보다 자기 주변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 듯, 두 손으로 주변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면소 설 후인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판-두림’의 영주는 백인장과 부백인장을 똑같은 인간들로만 채우는 실수를 범했다. 바보 같은 이상주의자들로 말이다. 생각 속에서 그녀는 작게 미소지었다. 아이가 부르는 추념식의 노래가 그녀의 몸을 지배해가던 죽음들의 그림자를 조금은 잠재워 준 탓인지 몸 상태는 아까보다는 조금 나았다. 사실은 잠재운 게 아니라 아예 그 중에 일부를 떼어내어 별의 강으로 돌려보냈다는 게 정확했다. 로크랜드의 정보 순환 시스템으로 먹혀들어가야 할 인간의 정보들이 아이의 힘으로 인해 안식을 얻음에 따라, 그녀의 몸도 아주 잠깐이나마 시간을 벌었다.
“그래봤자 서로 잠깐입니다. 저는 어차피 당신에게 죽지 않으면 안되니 걱정 말아요.”
그리고는 설 후인은 코 호의 손에 작은 단검을 쥐어주었다.
“......죄송합니다.”
코-호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대답을 하면서도 팔을 뻗어 그녀의 다리쪽을 더듬거렸다. 칼로 찌를 때 실수하지 않으려는 준비였다. 설 후인은 눈이 안 보이는지 더듬거리는 그에게 정말로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한 가지만, 하나만 물어보고 싶었다.
“왜 아이를 죽이려고 했나요?”
“저인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
“최고재판소가 당신 정신을 빌려 내게 들어왔으니까, 사정을 아는 이는 당신밖에 없죠. 정말로 최고재판소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서 아이를 죽이려 했나요? 로크랜드에서 저주받을 정보 순환 시스템이 계속 돌아가게 하려고 그걸 멈출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아이를 죽이려 했나요?”
“......”
코-호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약한 숨을 몇 번 헐떡이던 그는 약하게 말했다.
“저는 백인장님처럼 이상주의자가 못 됩니다. 하지만…... 제가 백인장님을 따라 ‘아인’들을 위해 저희만의 추념식을 연 것은, 저역시 이 미친 전쟁에서…...죽어가는 이들이…... 불쌍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힘이 드는지 잠시 쉬었다. 그리고는 말을 계속했다.
“인간을 보셨지요? 인간이든…... 아인이든 모두 같습니다. 끝없이 서로 죽이기만 합니다. 이유도 모른 채. 우리 스스로는…...어쩌면 영원히…...진정한 인간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너무 오랜 시간이…...걸리든지요. 아이들의 고통이 두려웠습니다. 아이들의…... 고통만 덜어줄 수 있다면…...저 하늘 위 망령들의 기술과 힘이라도, 빌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아직은, 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은…...우리가 고통 속에서 불타더라도…...우리의 아이들은 그렇지 않도록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하지만 정말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시간이 다 된 것이다.
설 후인은 손을 뻗어 코-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단도를 소중한 보물처럼 쥐고 있는 코-호의 손을 자신의 심장이 있는 곳으로 인도했다. 마지막으로 함께 찌르기 전, 설 후인이 별의 강을 멀리 응시하면서 속삭이듯 위로했다.
“난 아침에 사람을 처형하고, 밤에 울며 후회하고, 다음날 그들을 위해 추념식을 연 사람들도 겪었어요. 그리고 그들을 죽였죠. 미안해하지 말아요. 우린 이미 진정한 인간들이에요. 우리 스스로 수많은 모습들을 만들낼 수 있잖아요? 궤도 엘리베이터나 하늘 위 망령들의 기술이 주는 증명 따위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어요. 스스로의 확신만 있으면, 저 하늘로의 길은 언제라도 다시 걸을 수 있어요. 우리가 이미 한번 걸어봤던 길이잖아요? 두려워 할 필요 없어요. 자, 울지 말고 이제 나와 함께 걸어가요. ‘숨’의 노래가 별의 강에서 우리의 영혼을 올바른 길로 안내해 줄 겁니다.”
멀어지는 얕은 노래 소리가 별빛 아래에 놓인 두 사람을 마지막으로 감쌌다. 죽음의 색을 지닌 그림자들의 폭주도, 십만명의 죽음도 없었다. 그저 하늘이 강이 이제는 땅 위에 놓여 움직이지 않는 두 개의 검고 붉은 그림자 위를 비추면서 조용히 흘러갔다. 그리고 전장을 떠나 주둔지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작은 노래소리가 오늘밤 두 번, 혹은 한 번 죽어간 이들을 위해 흐느끼듯 조금씩 끊기며 점점이 흩어졌다.
추념식의 밤이 그렇게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