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도 팔영(國都八詠) - 정조대왕
운대의 곳곳마다 번화함을 과시하여라 / 雲臺著處矜繁華
만 그루 수양버들에 만 그루의 꽃이로다 / 萬樹柔楊萬樹花
가벼이 덮인 아지랑이는 좋은 비를 맞이하고 / 輕罨游絲迎好雨
막 재단한 빤 비단은 밝은 놀을 엮어 놓은 듯 / 新裁浣錦綴明霞
백겹으로 단장한 사람은 모두 시의 벗이고 / 糚成白袷皆詩伴
푸른 깃대 비껴 나온 곳은 바로 술집이로다 / 橫出靑帘是酒家
혼자 주렴 내리고 글 읽는 이는 뉘 아들인고 / 獨閉書帷何氏子
동궁에서 내일 아침엔 또 조서를 내려야겠네 / 春坊朝日又宣麻
이상은 필운 화류(弼雲花柳)를 읊은 것이다.
더딘 돛대 그림자 따라 높은 누각에 오르니 / 遲遲帆影上高樓
저물녘 마름 뜯는 노래는 어느 배에서 나는고 / 薄暮菱歌何處舟
멀리 바라보니 춘풍은 먼 포구에 희미하여라 / 極望春風迷遠浦
우리의 도는 창주에 있음을 반드시 알아야 하리 / 須知吾道在滄洲
낚싯줄 걷는 어부들은 온통 백로인 양 보이고 / 邨漁捲釣渾疑鷺
맹약 찾는 은자들은 갈매기를 짝할 만하네 / 峒隱尋盟可伴鷗
수도 없는 물가의 꽃을 다 보지 못했는데 / 無數汀花看不盡
강 가득한 석양이 주렴 갈고리에 비치누나 / 滿江斜日照簾鉤
이상은 압구 범주(押鷗泛舟)를 읊은 것이다.
왕성의 북쪽 방면은 선잠에 막혀 있는데 / 王城北面隔仙岑
방초는 깔자리 같고 나무는 그늘지려 하누나 / 芳草如茵樹欲陰
삼청동 깊은 경계엔 여름 햇살이 더디 오고 / 境僻三淸遲白日
천 겹을 돌아가는 시내는 푸른 숲을 뚫고 흐르네 / 溪回千疊透靑林
시문의 먼지들은 날아서 어디로 갔는고 / 市門埃壒飛何到
곡구의 거문고와 술자리는 다시 더 깊구려 / 谷口琴樽坐更深
녹야와 평천이 의당 백중의 사이이리니 / 綠野平泉宜伯仲
노는 이들은 무릉도원을 다시 찾지 말게나 / 遊人且莫武陵尋
이상은 삼청 녹음(三淸綠陰)을 읊은 것이다.
사월의 번화하기론 한경이 제일인데 / 四月繁華最漢京
금오위서 방야한 것이 맑은 때를 잘 가렸네 / 金吾放夜好占晴
붉은 간대에 여러 날을 연등이 장을 이루고 / 紅竿歷日燈爲市
서울 거리엔 밤새도록 불로 성을 이루니 / 紫陌通宵火作城
땅에 가득한 연화들은 서로 비춰 반짝이는데 / 撲地烟花相照耀
하늘 가득한 별과 달은 흐릿하기만 하여라 / 滿天星月不分明
종남산에 오른 구경꾼들은 안개처럼 부연데 / 終南高眺人如霧
몇 군데서나 생가 울려 태평에 보답하는고 / 幾處笙歌答泰平
이상은 자각 관등(紫閣觀燈)을 읊은 것이다.
대은암의 서쪽이요 태고사의 동쪽으로는 / 大隱巖西太古東
시냇가의 한 길이 온통 고운 단풍뿐인데 / 緣溪一路盡明楓
짐짓 삼추의 야박한 서리 이슬을 혐오하여 / 故嫌霜露三秋薄
능히 이월의 번화한 붉은 꽃을 이루었도다 / 能作繁華二月紅
건복 차림은 수놓은 비단 밖에 눈이 부시고 / 巾服炫看絺繡外
누대는 그림 가운데 높다랗게 비추이누나 / 樓臺飛映畫圖中
세한에는 특별히 고상한 만남의 기약 있으니 / 歲寒別有幽期在
승상의 사당 앞에 늘어선 늙은 잣나무 숲이로세 / 丞相祠前老柏叢
이상은 청계 간풍(淸溪看楓)을 읊은 것이다.
굽은 못 깊게 고인 물 한결같이 맑은데 / 曲塘渟滀一泓然
만 본의 연꽃은 십 리 멀리 향기가 풍겨 나오네 / 十里香生萬本蓮
흩어진 이슬방울은 온통 붉은 구슬이요 / 拌露聯珠渾絳粉
실에 얽힌 꽃받침은 청전에 부딪치어라 / 抽絲結蔕抵靑錢
몹시 귀여운 여아는 물풀의 길을 터놓건만 / 偏憐兒女開萍道
그 누가 신선을 찾아 일엽편주를 띄울는지 / 誰訪仙人泛葉船
어슴푸레 염계가 맑은 바람 비 갠 달밤에 / 怳似濂溪光霽夜
조용히 무극 연구해 책을 이루려는 듯하구나 / 靜硏無極欲成編
이상은 반지 상련(盤池賞蓮)을 읊은 것이다.
세검정 앞에는 온갖 도로가 빙판이고 / 洗劒亭前百道冰
낭떠러지 깊은 구렁엔 눈서리 얼어붙으니 / 懸崖倒壑雪霜凝
유리는 삼천 세계에 어지러이 펼쳐졌고 / 琉璃錯布三千界
붕학은 구만 층의 창공으로 날아오르누나 / 鵬鶴飛冲九萬層
맨발로 걷노라면 여름 갈증이 사라지고 / 赤脚踏來消夏渴
얼음은 캐어다가 주릉으로 들인다오 / 玄陰鑿盡納周凌
성인이 임리에 밝은 경계를 남기었기에 / 聖人臨履存昭戒
여기 이르니 내 마음 갑절이나 두려워지네 / 到此吾心倍戰兢
이상은 세검 빙폭(洗劒冰瀑)을 읊은 것이다.
제 오교를 가고 또 가고 오고 또 오니 / 去去來來第五橋
십분 밝은 달 두둥실 상원의 밤이로세 / 十分明月上元宵
뉘 집의 주렴 안에 새로 빚은 술 펼치었으며 / 誰家簾幕開新酒
어느 곳 누대에선 푸른 퉁소를 불어 대는고 / 何處樓臺弄碧簫
기분 좋아라 비는 삼일 밤 만에 활짝 개었고 / 可意雨從三夜霽
즐거운 놀이는 때 좋은 한 봄이 넉넉하구려 / 耽遊時好一春饒
백 년의 태평성대를 그 누가 내리었던고 / 昇平百歲伊誰賜
아이들 춤추고 늙은이 노래하는 곧 우리 성조라오 / 童舞翁歌卽聖朝
이상은 통교 제월(通橋霽月)을 읊은 것이다.
[주-D001] 운대(雲臺) :
필운산(弼雲山)에 있었던 필운대(弼雲臺)를 가리키는데, 필운산은 바로 인왕산(仁王山)의 별칭이다.
[주-D002] 백겹(白袷) :
백단령(白團領)과 같은 뜻으로, 즉 사인(士人)의 복장(服裝)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D003] 창주(滄州) :
푸른 물가란 뜻으로 즉 은자(隱者)가 있는 곳을 이르는데, 주희(朱熹)가 일찍이 창주정사(滄洲精舍)를 짓고 여기에서 강학(講學)을 했었다.
[주-D004] 녹야(綠野)와 평천(平泉) :
녹야는 당(唐) 나라 때 배도(裴度)가 오교(午橋)에 세운 별장인 녹야당(綠野堂)의 준말이고, 평천은 역시 당 나라 때 이덕유(李德裕)가 낙양(洛陽) 근처에 세운 별장인 평천장(平泉莊)의 준말인데, 이 두 별장은 특히 기이한 화초(花草)와 진귀한 소나무와 괴석(怪石) 등 기관(奇觀)이 천하에 뛰어났다고 한다.
[주-D005] 방야(放夜) :
성문을 열어 놓고 통행금지를 풀어서 사람들이 마음대로 놀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6] 승상(丞相)의 …… 숲이로세 :
두보(杜甫)가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을 두고 지은 촉상(蜀相) 시에 “승상의 사당을 어느 곳에서 찾을꼬, 금관성 밖에 잣나무 숲이 무성하도다.[丞相祠堂何處尋 錦官城外柏森森]”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7] 청전(靑錢) :
연잎을 형용한 말이다.
[주-D008] 어슴푸레 …… 듯하구나 :
염계(濂溪)는 송(宋) 나라 주돈이(周敦頤)의 호인데, 그의 열전(列傳)에서 그의 기상을 ‘비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光風霽月]’이라 표현하였고, 그가 일찍이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으로 시작하는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연(蓮)을 사랑하는 뜻을 적은 애련설(愛蓮說)을 지었으므로 이른 말이다.
[주-D009] 주릉(周凌) :
왕실(王室)의 얼음 창고를 이른다. 능(凌)은 곧 빙실(氷室)의 뜻인데, 《주례(周禮)》 천관(天官) 능인(凌人)에 나타나 있다.
[주-D010] 임리(臨履) :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민(小旻)에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깊은 못에 임하듯, 얇은 얼음을 밟듯 해야 한다.” 한 데서 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