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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월 21일 함녕전에서 통곡이 일다.
1월 21일 함녕전에서는 통곡이 일었다. 종묘사직을 빼앗긴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자 제국의 첫 황제가 붕어했다. 그의 초휘(初諱) 재황(載晃), 아명(兒名)은 명복(命福), 재위 후 휘는 희(㷩)였다. 그는 1852년 안국동 흥선군의 사저에서 부인 여흥민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흥선군은 기존에 우리가 드라마나 각종 소설들을 통해 알고 있는 파락호가 아니었고 크게 몰락하여 극한 빈곤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비록 세도정치가 만연한 시대였으나 왕성인 이씨 역시 명분상 무시할 수 없는 위치였으며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권력투쟁에서 철종 사후에 서로 자기 편으로 삼아야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여건 속에서 차남을 왕위에 올린 흥선대원군은 섭정아닌 섭정으로써 영건도감을 중심으로 권력을 잡았고 세도정치가 나은 관행을 통해서 경복궁을 중건하고 삼군부를 통해 군부를 강화하였으며 내정개혁을 단행한다. 그 와중에 서원철폐를 강하게 추진하는데 사대부가 등을 돌리게 된 주요한 원인중에 하나이다.
서무친재 – 친정의 시작
고종이 성인이 된 이후 최익현을 중심으로 고종의 친정 언급하기 시작하였고 왕의 친정선언으로 인해 대원군은 실각한다. 대원군이 실각을 하면서 그의 기반이 되는 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중전 민씨를 중심으로 한 여흥민씨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운요호 사건’이 발발하고 조선 정부는 신속히 개항을 한다. 함포외교로 인한 결과도 있으나 일본의 도발적인 변화와 중국을 통해 정세를 파악한 조선 정부가 개항의 필요성을 느낀바 이기도 했다.
고종은 개항 이후 즉각적으로 수신사, 영선사 등을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특히 전신과 같은 통신장비와 각종 기기들에 주목한다. 1870년대 중후반부터 1880년대 다양한 국가들과 조약을 체결하면서도 청의 간섭이 심화됨에 따라 김옥균, 박영효 등과 같은 개화파와 함께 갑신정변을 도모하나 근신들을 직접 살해하는 과격성과 일본에 지나치게 의지 했던 부분으로 인해 실패하고 만다. 1880년대는 그러한 까닭으로 결국 청의 간섭이 심화되고 고종의 재위 역시 위태로웠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해 청군이 개입되고 이를 계기로 일본군이 들어오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한다.
갑신정변에 이은 최대 모험 아관파천
갑오왜변이라 불리는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태 이후 조선정부는 일본의 개입 전 이미 조선 자체적으로 내정개혁을 준비중이고 그를 위해 교정청에서 주도할 것이니 개입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은 결국 경복궁을 침범하고 대원군을 위시하여 고종과 명성황후의 근왕세력을 배제시킨다. 이후 대원군 세력 역시 의도 대로 움직이지 않아 박영효를 끌어들이고 2차 급진개화파를 내세운 내각을 수립하지만 자체적 군사력 증강을 강력히 주장한 박영효 역시 실각시키고 온건개화파를 내세운 내각을 수립하지만 삼국간섭과 함께 명성황후를 위시한 민씨 척족과 근왕 세력이 다시 정권을 탈환하게 된다. 이에 일본은 미우라 공사를 내세워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제거하고 대원군을 내세운다.
범궐 뿐만 아니라 일병이 들이닥쳐 일국의 왕비를 시해한 것을 경험한 고종은 외국공사들을 통해 본인을 시위케 하였고 언더우드를 비롯한 이들이 권총을 소지한채 교대로 숙직했다. 그때 이범진, 이재순을 비롯한 근왕세력이 춘생문 사건을 일으켜 일본군에 둘러싸인 고종을 탈출시키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정동파의 노력으로 1896년 2월 11일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에 성공한다.
제국 선언과 광무정권의 근대화 운동
혹자는 아관파천 자체를 비겁한 행위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상당히 기울어진 정치판도를 뒤바꿀 묘수이기도 했다. 상황을 반전시킨 고종은 친일 내각을 먼저 붕괴시키고 정권을 다시 장악한다. 1897년 조선정부는 제국을 선포하고 국호를 ‘대한’이라 하고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이는 청나라는 물론 어떤 외세 앞에서도 자주권을 지키려는 선언이었다.
고종은 구심점이 사라져 약화된 민씨 척족과 일부 종친세력 등과 궁내부 근왕세력을 중심으로 식산흥업정책을 실시하여 잠업과 광업의 진흥을 꾀하고자 하였고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여 궁궐을 비추는데만 사용되었던 전등을 한성시내에 설치하고 동대문화력발전소를 설치, 전차를 운행하여 철도와 함께 새로운 유통구조를 만들고자 하였다. 또한 상인들을 근대적 기업형태로 정비하게끔 하였고 이에 따라 기업설립의 수도 급증한다.
이러한 일련에 사업들은 이용익을 비롯한 궁내부 등의 근왕세력이 주도를 하였고 철도국이나 전환국 역시 궁중과 부중이 분리 된 이후 부중 즉 정부 소속이었던 것을 궁중 소속으로 전환하여 추진한다. 이는 정부 차원에서 추진할 때보다 황실에서 직접 관여하였을 때에 이권보호가 보다 용이할 것이란 판단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러일전쟁과 광무정권의 몰락
러일전쟁이 고조되면서 광무정권은 급격하게 국제 정세 파악을 하면서 러일전쟁 발발 가능성과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고민한다. 여기에는 군부 이근택, 이용익 등의 의견이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광무정권은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으로 선언하는데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중립국 선언을 함에도 불구 일본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서울을 점령하고 근왕세력을 제거한다. 이용익은 일본으로 납치되고 현상건 등 그 외의 궁내부세력은 신속히 탈출하였다. 1904년 한일의정서·제1차 한일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고 러일전쟁 후 이토히로부미를 위시한 일본은 을사늑약 체결을 강행한다. 사실 체결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발표라 볼수 있다. 오늘날 을사오적에 대한 변호를 하는 입장에서 고종만의 책임론을 강조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재가를 내린 적이 없었다. 전권대사도 없었다. 고종은 이토에게 대신들과 논의 후에 의정부에 안건을 올리고 본인이 확인하겠다는 발언을 한다. 결국 어떠한 절차도 없이 진행되었으며 1904년 한일의정서라는 명칭과 같이 조약 명칭 자체도 없이 발표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에는 통감부가 설치되고 일본에 의한 내각이 성립이 된다.
광무정권과 황제의 저항
통감부는 대한제국 내에 주둔한 헌병대장을 지휘하고 한국 정부내에 용빙된 일본의 관리들을 감독할 권한을 조항에 넣었다. 이는 이토의 외교권만 대행하겠다는 당초발언과도 다른 것이었다. 통감부는 신속히 대한제국의 기구를 대폭 축소시켰고 철도부설권과 관리권 모두 통감부에 귀속시켰다. 하지만 단시간 내에 광무정권에서 구축된 구조를 무너트리긴 어려웠다. 이미 정부보다는 궁내부를 통해 근대화 사업들을 추진하고 지휘계통을 가졌던 광무정권은 통감부의 간섭에도 광산채굴권, 영업 특권 등을 황실의 이름으로 허가했다. 외국인들 역시 각종 특허 신청 등을 통감부 지휘에 따른 정부가 아닌 궁내부로 직접 하기도 하였다.
황제는 통감 이토가 귀국하여 부재시 이토가 구축한 친일 내각을 경질하여 와해시키기도 하여 이토는 부재중 대신을 경질하지 않고 국정은 대소를 불문하고 통감에게 일임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종이 지방 유생들에게 내린 밀지와 밀사동향을 파악한 항의하며 궁중출입을 통제하여 황제의 측근과의 소통을 차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가 부재중일시에 내각에서는 심상훈을 비롯한 원로대신들이 황제의 명에 따라 내각을 개조할 것이란 풍문에 불안에 떨었다. 헌병대장 長谷川은 통감대리로 황제를 알현하면서 통감이 지금까지 시정개선에 주력하였음에도 효력이 없는 상태에서 귀국하였으니 그가 반드시 특단의 조치를 단행할 것이라 협박한다. 그러면서 정무에 간여하지 말라 강요했다. 이시점에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에 따르면 이완용이 長谷川에게 자신을 포함한 이들이 고종의 폐위를 단행할 테니 이면 동의를 해달라 요구하기도 한다.
이토가 복귀한 뒤에 다시 내각을 개편한다. 헐버르를 밀사로 파견한 것을 비롯한 을사조약을 부정하는 행위들에 대한 추궁과 함께 이완용을 참정으로 추천한다. 이는 을사늑약 체결에 대한 공로와 고종 폐위 방안을 일본에 제시한 것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완용은 농상공부대신으로 송병준을 기용한다. 이렇게 성립된 이완용 내각은 이토의 심복으로써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다.
이에 고종은 이완용 등의 알현을 거부하였다. 다만 통감은 황제의 정무 간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참정대신과 동반하는 것이 아닌 개별 황제 알현을 금지했다. 이후 대대적으로 궁내부와 황제권 축소에 돌입하였고, 그와중에 고종은 이완용 내각을 견제하고자 급진개화파였던 박영효를 귀국시켜 접촉한다.
헤이그 밀사와 강제 퇴위
광무정권의 핵심인사인 이용익은 먼저 일본에 의해 강제된 늑약을 무산시키고자 황제의 예치금을 찾은 뒤 프랑스로 향했으나 목적한바를 달성치 못하고 베를린을 거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러시아와 접촉한다. 하지만 이미 러일조약으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했고, 더군다나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여력이 없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 고종의 밀사들과 접촉했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급작스럽게 사망한다. 이로 인해 고종은 이상설과 이준을 급하게 파견을 하고 러시아에 도착한 그들은 주러시아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과 합류하여 헤이그에 당도한다. 하지만 그들은 회의참석과 발언을 거부당하고 그들을 도우기 위해 급파된 헐버트를 통해 서구 언론과 접촉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서구의 관심을 끄는데는 성공하였으나 구체적 성과는 없었다.
이를 감지한 이토는 군을 대동하고 고종을 힐난한다. 곧 이은 어전회의에서는 송병준이 황제게에 일본천황에게 사죄하라 핍박하였다. 이완용은 내각회의에서 고종의 폐위를 결정하고 고종에게 통보했다. 고종은 버텼고 송병준은 일진회를 동원해 궁궐을 애워쌌다. 대신들은 권총을 소지한채 알현하였고, 황제와 협의하여 대리청정을 하는 것으로 결정, 조칙을 발표했다. 하지만 일제는 7월 20일 양위식을 거행하고 고종과 순종의 접촉을 차단해버린다.
강제 퇴위의 반발과 군대해산
황제의 퇴위가 발표된 이후 이완용의 집은 불타고 정부대신들은 통감관저를 임시 내각회의장소로 사용하였다. 대한자강회, 동우회 등이 주도하는 군중시위가 열렸고 일제는 경찰과 주차군을 이용해 진압했다.
또한 박영효 등과 연계된 시위 제 2연대 제 3대대가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첩보로 일본군을 동원 궁궐을 점령하고 서울시내를 감시하면서 병력을 증강했다. 7월 31일 일제와 친일 내각은 군대해산을 발표하고 즉각적으로 돌입한다. 해산 직전 지휘관들을 소집, 부대병력과 차단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시위 1연대 1대대, 2연대 2대대는 이를 미리 감지하고 해산당일 봉기하고 남대문 전투가 벌어진다. 약 4시간 가량 교전하면서 초반에 우세하였던 시위대는 탄약 부족 등으로 한성 탈출을 개시하여 의병에 합류한다. 이후 지방 진위대 역시 의병세력에 합류하는데 이 때의 의병들을 정미의병이라고 한다.
덕수궁에 유폐되어 이태왕이 되어버린 황제
고종의 퇴위 직후에도 전국적인 창의가 일어나고 일제에 항거하였다. 퇴위 후에도 암암리에 밀사들이 활약한 것으로 보이나 일제를 물리치지는 못하였다. 보급의 문제와 훈련도, 그리고 장비의 한계 등이 있었다. 그럼에도 1910년대 초기 독립운동에서도 군주제의 대한독립을 하는 세력이 하나의 축이었다. 일반적인 복벽도 있으나 당시에는 오히려 열강 내에서도 공화정보다는 대체로 군주제 국가였기에 협력을 얻기 위함도 있었다. 이후 고종의 움직임에 대해 공식적인 기록에서는 드러난 것은 덕혜옹주와 영친왕 관련 기록, 그리고 붕어할 당시 정황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붕어 직전 행적과 관련한 여러 가지 기록과 설들
유폐되어 이태왕으로 격하된 황제에 대한 기록은 찬시 일지 외에 또다른 기록들을 통해 나타난다. 고종은 하란사를 통해 독립운동세력과 접촉을 했다는 설과 기록이 종종 나타난다. 1918년 세계1차대전의 종식 후 파리강화회의가 열릴 시점을 기화로 하여 우당 이회영과 관련된 설에는 오세창, 한용군, 이상재 등과 밀의하여 고종의 북경 망명을 제의하였고 김가진 등과 함께 추진 중이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외에도 고종의 밀명으로 최초 미국 유학 여학생이었던 하란사를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여 을사늑약과 강제병합의 부당성을 알리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 하란사는 의친왕과 미국 유학 시절 친분이 있었던 상태이기도 하고 고종 사후 의친왕의 부탁으로 다시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준비하다가 북경에서 급사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망명설과 함께 그의 죽음엔 독살설이 항상 동반하며 3.1운동 당시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황제의 독살설에 대해서는 농상공부대신이었던 김가진과 윤치호의 일기에서 언급하고 있다. 김가진은 상해 망명 이후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하는데 독시가 확실함을 주장하면서 황제의 흉복부와 얼굴에 푸른 반점과 붉은 반점이 있었고 구강과 콧구멍 등 부위에 썩은 피가 흘렀다는 점을 들었다.
또하나 주된 근거는 처음에는 고종의 독살설에 인정하지 않은 그도 고종의 근시 민영달에게 황제의 시신에 대해 의문을 품은 내용을 들은 한진창을 통해 전해듣고 기록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2.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 30센티 미터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5.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
그렇게 1919년 1월 21일 새벽 함녕전에서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의 초대 황제는 많은 의혹 속에서 결국 세상을 등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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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히 보고 갑니다..
슬픈 역사의 길 '마음 아픕니다...
더러운 민족 일본 이 패망 하기를
하늘에 비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