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한번 토론의 장을 열고자 글을 올려봅니다. 무거운 마음보다 이렇게 토론이 오고간다면 보다 다음 카페의 게시들도
더욱 풍부해지지 않을까 하여 한번 시도합니다.
움.. 아래 글은 한 사학과 학생이 간단히 정리한 흥선대원군에 대한 글인데 비판적 입장에서 서술한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말씀드리지만 절대 황사회 입장이 반영된 것이 아니며 토론을 위해 글을 가져와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흥선대원군의 집권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 여쭙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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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친아버지이다.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후손이지만 부친 남연군이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왕실과 촌수가 가까워졌다. 흥선대원군에겐 정치에 참여해 정국을 주도할 법적, 제도적 근거가 전혀 없다. 다만 생존한 상태로 대원군에 오른 최초의 인물인지라 고종의 행보에 어느 정도 간여가 가능한 것인지 사례나 범위가 명확하지 않았다.덕분에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내정개혁자?
내치에서 대원군 정책의 핵심 주요 부분은 호포제와 서원철폐, 사창제실시, 경복궁 중건이다.
호포제란 조선 시대 후기 군대에 가는 대신 軍布라는 베를 납부하는 것을 말한다. 군포는 병역 의무가 면제되었던 양반은 군포를 납부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 양반의 수가 증가하고 유랑민이 늘어나면서 자연히 군포의 납부는 줄어들었고, 그 부족분을 일반 양민이 지게 되면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班常을 구별하지 않고 家戶 단위로 세금을 내자는 주장이 있었는데 이를 호포제라 한다. 그러나 호포제는 양반들의 꾸준한 반대로 번번히 무산되다가, 결국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도입된다.
세도정치기를 거쳐 대원군집권기에 이르러서 유림 및 양반들의 텃세가 날로 심해지고 폐단이 더욱 심해져 서원은 학문 목적의 기능을 일부 상실하고 민중의 고혈을 짜내는 악덕 집단으로 변화되었다. 양반들의 텃세가 심할수록 민중들의 고통도 더해졌으며 일부 서원은 이를 빌미로 민중으로부터 鄕稅를 과다하게 징수하기도 하는 등 병폐가 심해지기도 하였다. 이에 숙종, 영조 때에 서원의 철폐가 이뤄졌고 대원군 때에는 600여 개 院을 47개 만을 남겨 두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은 명분이 워낙 확고했던 터라 유림의 반응은 표면상으론 오히려 조용했다. 유림들은 흥선 대원군의 조상인 인평대군을 모시는 서원을 만들고 순간을 모면하려는 방법을 썼는데 대원군은 인평대군의 서원도 가차없이 철거하고 불량한 서원을 조사를 통해 완전 철폐하고 철폐된 서원의 예산은 모두 국고로 환수하였다.
그 외에 눈에 띄는 제도가 바로 사창제인데 이는 환곡 제도의 하나다. 환곡이란 봄에 농민들에게 곡식을 대여해 주고, 가을에 추수해서 갚게 하는 농민 보호책 중의 하나다. 조선 후기 지방의 각 관청들은 운영 경비 마련을 목적으로 환곡을 악용했고 이에 흥선대원군은 기존의 환곡제를 개선해 마을 단위로 공동 운영하는 사창제를 실시해 농민 부담을 줄여 주었다. 사창제는 조선 전기에도 몇 차례 실시 되었으나,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점차 그 운영이 붕괴하였다. 그것을 흥선대원군이 다시 재정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왕실의 권위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 중건을 계획한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의도와는 다르게 엄청난 돈이 들어가자, 대원군은 ‘원납전’이라는 반강제적 기부금을 걷기 시작했고 부족한 경비마련을 위해 당백전을 발행하였는데 이는 금융 질서를 완전히 망가뜨리고 사회적으로 대폭 인플레이션 현상을 유발하고 말았다. 경복궁 중건의 예산은 ‘원납전만’ 760만 냥인데 당시 조선의 1년 총 유통 자금이 60만 냥이었다. 즉, 약 12년 치 재정을 쏟아 부어가며 궁궐 만드는데 치중한 것이다. 더불어 당백전이 발행되기 전 조선에 유통되던 모든 상평통보의 총액이 1000만 냥 수준이다.
비판점
흥선대원군의 내정은 사실 그동안 논의되었고 잠시 실행되었다가 멈춘 정책들을 다시 진행시킨데 불과하며 온연히 ‘개혁적’인 사고방식으로 진행된 정책은 全無 하다는 비판점이 있다. 다만 강력한 서원철폐, 호포제의 실시 등 카리스마로 정책을 밀어붙여 실행시킨 점은 평가 할만 하나, 이렇게 호포제와 서원의 재산을 환수시켜 마련한 국고를 경복궁 중건에 쏟아부었고 그래도 감당하지 못해 원납전을 걷고 당백전을 발생해 국가재정을 파탄시켰다. 즉. 위에 진행된 정책들을 실행해 얻은 모든 것을 잃고, 도리어 이전 상황보다도 더욱 재정을 악화시켜 조선이 재정적으로 세계 최빈국에 가깝게 되어버렸다.
대원군의 외정
대외인식과 외교
흥선대원군은 그 실패를 통해 기술 격차를 극복할 마땅한 대안을 내놓기는커녕 서양과 조선의 학문적, 기술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외인식에 대한 개념도 모자라 1차 2차 청일전쟁 때 청나라가 수도인 북경까지 함락당하고 홍콩 할양에 황제가 도망간 사실 정도는 다 알고 있었음에도 왕권 강화라는 수단에 불과 한 것을 목적으로 착각하였기에 경복궁 중건 같은 왕실권위 향상에만 골몰하였다. 또 흥선대원군의 조세 개혁에서는 대외무역에 의한 관세가 빠져있다. 이는 대외무역을 외세가 조선의 경제를 침탈하려는 수단으로만 파악하고 청나라 외에 일절 교류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국방 및 군사
흥선대원군은 기술과 산업 발전시키고, 군사력 강화할 돈으로 경복궁을 재건했다. 덕분에 구식군인에 대한 재정의 대폭 축소와 지원감축이 일어났다. 5군영은 2군영으로 축소되었고, 강화도 병력의 자금원이었던 京江收稅도 중앙재정으로 돌리면서 강화도 병력은 실질적으로 무력화되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이 이 지역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흥선대원군은 이 책임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비판점
흥선대원군은 통상 수교를 전면 거부하고 척화비를 세우며, 집권 내내 내정에만 집중했고 천주교 박해 및 조선 후기에 세력을 키운 세도가와 권력 쟁탈에 몰두하는게 전부였다. 서양의 개항 요구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결국, 근대화 시기를 놓쳐 일본에 완전히 합병되게 한 여러 원인을 제공하였다. 조선의 외교 행정 체계는 서양과 통교 기간이 꽤 된 청나라에 크게 뒤쳐졌고, 이것이 고종 집권기 열강들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서 조선에 크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원인이 되었다.
세도정치와 흥선대원군
순조 재위부터 조정은 붕당 정치의 폐해만 심각해져 제 기능을 상실하였고, 섭정 형태에 가까운 세도정치로 정국이 진행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신안동김씨와의 정치적 거래를 통해 고종을 보위에 올리고 풍양조씨를 견제하며 단일 가문의 환국적 세도정치를 종결시켰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주도할 어떠한 법적, 제도적 근거가 없는 상황이므로 흥선대원군의 집권 역시 세도정치와 다를 바 없다. 때문에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만의 측근 세력을 만들어야 했고 이는 명성황후 민씨와 그 친족들이 성장해 흥선대원군과 대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실권한 뒤에 흥선대원군은 꾸준히 재집권하려는 행동을 보였고 척화를 부르짓던 사람이라기엔 무색하게 일본과 연계하고, 천주교 신부에게 인삼을 보내는 등 권력을 잡기 위해 한없이 비굴해지고 기회주의적이었다. 결국 권력 회복 시도는 조선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내분과 대립만 극렬히 심화시켰을 뿐 열강과 일본이 호시탐탐 엿보는 상황에서 무의미한 갈등과 재원 소모에 기여했다고 하겠다.
첫댓글 다같이 토론 고고싱이요~!
나는 대원왕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입장이므로 별다른 이의가 없음
대원왕의 부족한 점도 있겠지만 그 시대에 그 상황에서는 최선이었다는 생각이
현시대에
개혁과 진보라는 것도 각기 자기 입장에서 그게 최선이라고 말하는
보수와 수구라는 것도 자기들 입장이기 때문에
현재 글은 사실 유통되는 화폐량과 경복궁을 영건하면서 징수된 원납전 징수 내역을 참고하여 글을 쓴 것이라 좀 색다른 접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외정책 면이라던지 군비증강 부분에 대해서는 실상이 반영되지 못한 글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입장이라기 보다는 어떤팩트를 참고 했고 그 팩트로 어떻게 해석했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도 반박이 가능할듯 싶군요.
위 글에서 대원군의 비판점을 적은 것 중에서 '온연히 개혁적'인 사고로 진행된 것이 없다는 부분 역시 저는 이렇게 비판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려조에서 전민변정도감이 충선왕때에도 있었으나 공민왕 때에 다시 추진되었던 것을 우리는 개혁이라고 한다. 개혁의 사전적 의미는 제도나 기구따위를 새롭게 고치는 것이라고도 하나, 기존의 사회적으로 누적된 문제를 해소하는 것 역시 개혁이라고 한다 따라서 온연히 개혁적 사고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부분은 비판할 부분이다.'
좋은내용빌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