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극본은 필름화되기 이전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극의 설계도면으로서 문학적인 형식을 바탕으로 스토리가 있는 시간예술이다.
극본은 넓게는 문학의 한 형식으로 '영상문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하겠다. 요즘의 문학의 경향이 영상적인 표현기법을 많이 따르고 있는데, 이는 극본이나 시나리오가 순수문학에 끼친 영향이라 아니할 수 없다.
드라마는 근본적으로 '스토리를 가진 시간예술'이다. 그리하여 극본은 시간의 구성, 인물의 갈등을 시간 속에 잘 구성해 놓아야 한다. 그러한 구성에 이르는 작법은 어느 정도 형식을 갖추고 있다. 때문에 영화용 시나리오나 방송용 극본은 모두 일정한 형식에 의해서 쓰여지고 있는데, 그러한 극본을 읽는 요령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극본이 타 문학(소설)과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인물이 있고, 장소와 상황이 있다. 단지 쓰여진 형식만이다를 뿐이다. 즉 표현만을 달리할 뿐 문장으로 묘사하고, 사건을 풀어 나가고 구성하는 것은 비슷하다.
다음 예문을 통하여 소설의 문장과 극본의 문장을 비교해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문1) 소설의 경우
혼자 걷는 들길은 으슥함을 느끼게 했다. 더군다나 간간히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은 온 몸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 오싹함에 어둠이 한 몫 했다. 그녀는 반달만 뜬 하늘을 마음속으로는 원망하며,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묵묵히 걷기만 했다. 어디선가 개 짓는 소리가 들렸다.
예문2) 극본의 경우
S# 들길 (밤)
어두운 시골 들길이다.
걷는 그녀, 불안한 듯 사방을 둘러보다 하늘에 떠 있는 반달을 보며
그녀 (혼잣말로 작게) 하필 달도 반달이야.... 좀 큰 달이나 뜨지.
그녀, 그저 열심히 걷어가는 뒷모습으로
E 멍멍...(개 짓는 소리 효과음)
위의 예문1,2에서 살펴보았듯 극본은 내용에 있어서는 문학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살펴보면, 극본도 문학처럼 표현과 묘사를 위한 요소가 있다. 다음은 그 중에서 극본에 꼭 필요한 중요한 네 가지의 표현요소다.
①, 장면 (장소)
극본은 장면 지정부터 시작된다. 카메라에 담길 수 있는 장면(장소)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그래서 어느 번화가에서 또는 초라한 시골 길이든 아니면 누군가의 꿈의 한 장면이던지 영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장면이라면 된다.
②, 지문(동작)
희곡에서 배우의 움직임이나 무대장치등을 설명하는 것을 지문이라고 교과서에서 배웠다. 이런 지문에는 소설의 경우에는 심리묘사,추상묘사 과거의 묘사등이 가능하지만 극본에서는 제약을 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지문의 역할은 문학과 같아 보이나 극본에서는 대사라는 막강한 표현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문의 역할을 대사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극본은 영상으로 보여지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③,대사(언어)
등장인물의 말이 대사다.
독자들은 대사를 대할 때 작가가 시켜서 등장인물이 말하고 있다던가 또는 인형들의 지껄임으로 생각지 말고, 살아 있는 등장인물이 자신의 언어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읽어야 할 것이다. 대사를 누가시켜서 외워서 하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면, 극본을 읽는 재미는 사라질 것이다.
대사는 사실을 알리고, 인물의 심리나 감정을 나타내며 사건을 진전시키는 극본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 도구 임에 틀림없다. 또한 극본 읽는 재미는 대사에 있기 때문이다.
④,기호(영상제작용어,촬영기술)
영상제작을 위한 제작기법들의 기호다.
극본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이 제작자의 입장에 서서 먼저 영상으로 생각하고, 그림을 스스로 그려보아야 한다. 또한 등장인물이 되어 대사를 통하여 인물의 심리를 들여다보고, 행동을 자신이 직접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극본 읽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2) 드라마의 문학성 연구
드라마의 문학성에 대한 논란은 방송매체가 근본적으로 오락성을 크게 지니고 있기 때문에 피하기 어렵다.
지나치게 시청자의 기호에 영합하고 시청률을 의식하여 재미를 추구하다보면 당연히 작가정신이 소홀해 지고 그에 따라 문학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으며 작가도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기가 어렵다
그러나 드라마의 질 향상이 언제나 미흡할 수 밖에 없는 데는 그밖에도 몇가지 이유를 지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시청자의 수준은 거론을 미루더라도 비평부재, 작품연구 부재 등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의 경우도 비슷하다. 영국의 죠지 브란트(George W. Brandt)는 (영국의 텔레비젼 드라마(British Television Drama))라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일주일에 80편 정도의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으며 인기 드라마는 1천5백만명 이상이 시청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여가시간을 채우고자 드라마를 시청한다는 단순한 이용 이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텔레비젼과 생활한다.
이제 우리는 거의 습관적으로 드라마를 시청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전에는 일생동안 경험했던 것 이상을 이제는 일주일안에 드라마를 통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일요일밤에 방송되는 (이달의 드라마)라는 프로그램만 하더라도 4백만명 이상의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는데 이것은 로얄 셰익스피어 극단이 4년동안 모든 주요극장에서 공연, 유치했던 관객수와 맞먹는 수치다
그러나 기성 지식사회는 이같은 사실을 계속 외면하고 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저널리스트들도 텔레비젼을 바보상자, 움직이는 벽보, 심심풀이 츄잉검 정도로 얕잡아 보는데 익숙해 있다는 것이다· . ."
사실 영국의 비평가 모리스 위긴(Maurice Wiggin) 같은 사람도 드라마 작가를 이렇게 경멸하고 있다.
"텔레비젼 극작가들은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드라마를 쓰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텔레비젼용 저작행위는 자신을 부인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좋은 글' 에 대한 그 어떤 것을 잊어야 하며 어떤 말의 스타일 같은 것까지도 잊지 않으면 안된다. 드라마가 문학의 한 부분임은 분명하지만 '문학적'이라는 표현이 텔레비젼 극작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같은 비평가들의 드라마에 대한 공연한 경멸은 드라마가 대중의 문화생활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질 향상을 위한 비평의 부재와 작품 연구의 부재를 가져오고 있으며 우리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우리의 경우 학자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드라마를 얕잡아 보는 것이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며, 언론의 드라마 비평은 제대로 비평능력을 갖추지 뜻한 신출내기 연예기자의 몫이 되고 있다
그나마 최근 각 대학의 (방송 문학론)강좌가 개설되고 있는 것은 무척 다행스런 일이며 이 소고도 아직 전무 하다시피한 국내외 드라마 작가들에 대한 작품연구를 시도해 보라는 뜻에서 의도되었다 필자가 외국의 방송작가중에서 굳이 패디 차예프스키(Paddy chayepsky)를 택한 것은 그가 미국의 작가지만 사랑과 삶에 대한 긍정을 기틀로 한 그의 작품들이 우리에게도 큰 공감을 주고 있으며 TV드라마의 한계처럼 여겨지는 리얼리즘에 처음으로 회의를 가졌다는 점이다. 즉 TV드라마의 리얼리즘 극복은 우리의 드라마 발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시도되어야 할 시점에 와있기 때문이다.
패디 차예프스키는 1923년 1월 TV일 러시아계 유태인의 아들로 브롱크스에서 출생해서 뉴욕시립대학과 포담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면서 미식축구선수로도 활약하였다. 43년 육군에 입대 독일전쟁에 참전했다가 지뢰를 밟고 큰 부상을 당했는데 이것이 그가 작가가 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하였다. 육군병원에서 요양중 그의 처녀작인 노인을 위한 뮤지컬(No T 0. forLoy쏜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이 큰 호평을 얻었으며 퇴원 후 영화제작에도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뒤에는 숙부가 경영하는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방송을 위한 여러편의 추리물을 발표하여 라디오 드라마를 주로 썼으나 52년 유태인의 교회생활을 내용으로 한 TV드라마 (휴일의 노래)가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본격적인 TV드라마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1753년 인생에 실패한 극히 평범한 남녀의 사랑을 그린 그의 대표작 (마티)가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고, 그해 실바니아 텔리비젼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에는 이 작품이 영화화 되어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게 되자 새로운 미국적 현실주의 기수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마티)에서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랑이야기를 다루면서 미국 시민들의 감정속에 잠재하는 성숙회피욕구와 중산계층의 성도착증에 대해 관심을 보이려고 했으며 이러한 관심은그의 뒷작품들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마티)의 성공은 대도시의 구석에 처박혀 살고있는 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데 있다고 하겠지만 힘없는 사람들의 고독과 마음의 상처가 마침내 사랑으로 치유된다는 프로이드적인 테마는 모든 차예프스키 작품의 기틀이 되고 있다. TV56년 브로드웨이에서 대성공한 (한밤중에)에서는 중년사업가와 젊은 애인 사이에 깊이 내재하는 사랑의 리얼리티를 그렸고 1957년에 영화화된 (총각파티)에서도 주인공으로 하여금 불임적인 자유보다는 결혼의 시련을 택하게 했으며 (여신) 에서는 사랑의 결핍이 대여배우의 인생을 파멸시키는 과정을 묘사했다
이러한 그의 주요 작품들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은 평범한 사람들의 얘기와 사랑이라는 테마로 일관되어 있으며 이것은 치밀한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의 한시간짜리 TV드라마 (총각파티(The Bachelor Part7))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조그만 회계사무소의 평범한 샐러리맨들이 동료직원인 아놀드의 결혼을 축하해 주기 위하여 조그만 파티를 연다. 그러나 취기가 오르자 기혼자들은 한결 같이 자신의 군대시절 무용담 총각시절의 화려하고 즐거웠던 행각들을 떠들어댈뿐 결혼생활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도무지 말이 없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자 마누라가 기다린다는등 아이가 아프다는등, 제각기 핑계를 대며 허등지등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지 않아도 홀어머니의 재촉때문에 서른다섯살이나된 연상의 노처녀와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게된 아놀드는 결혼에 회의를 느끼며 아직 신혼생활인 찰리에게 결혼은 뭣 때문에 해야하느냐고 묻는다 오직 속박뿐인 결혼을 꼭 해야하느냐고 따지자 찰리는 '산다는게 다 그런거지 뭐 아내와 자식이 없다면 뭣 때문에 죽어라하고 일하겠어? 자네도 결혼을 하면 아내를 사랑하도록 해봐 또 자네도 아내로부터 사랑을 받게되면 생각이 달라질거야. 산다는게 다 그런거지 뭐 ·" 역시 그의 한시간짜리 드라마 (어머니(Mother))도 마찬가지다. 여러 자녀를 두었지만 무관심한 자식들을 원망하지 않으면서 혼자 힘들게 살아가는 노파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무척 애쓴다. 그러나 심한 불경기 시대에 예순여섯살의 노파에게 일자리를 줄 직장은 없었다. 겨우 바느질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었으나 작업이 너무 더디고 바느질을 잘못하는 바람에 쫓겨 나고 만다. 근처에 살고 있는 막내딸이 어머니의 고생이 너무 안타까워 자기집에 들어와 함께 살 것을 강력하게 권유한다. 어머니는 한사코 사양을 하지만 병때문에 쓰러지자 어쩔 수 없이 막내딸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혼자 살던 집의 가구를 처분한다
노파 : 아버지하고 나는 결혼하고 나서 집대신 가구를 샀다. 아버지 말씀이 생각나는 구나 식료품가게를 차립시다. 적어도 집안에 먹을것은 있을 테니까. 정말 대단한 불황의 시대였다. 한평생 먹고 살기에도 바빴다. 집세 걱정을 안했던 때가 한번도 없었던 것 같구나. 내나이 예순여섯. 뭣때문에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는지 모르겠구나‥‥
사위 : 장모님.
노파 :밑도 끝도 없었지. 밑도 끝도 없는 싸움, 뭣때문에? 뭣하러? (울음터트리며) 그렇게 산 나머지가 겨우 이거? 제집의 낡은 가구를 실어다 파는 노파? (흐느낌 사이로 말이 토막난다) 아니다‥‥ 괜찮다·나는 괜찮다·. ."
그러나 결국 노파는 어렵게 살고 있는 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그녀의 집을 떠난다.
노파 : 내 소지품과 가방은 여기 두고 간다 오늘 밤에 와서 가지고 가마. 얘야 제발 다른 소릴랑은 하지 마라. 네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을테니. 나도 물정을 아는 여자다 나는 혼자 힘으로 충분히 살 수 있다. 늘 그래 왔고‥‥ 비온다는 소리도 하지 마라. 벌써 한시간전에 그쳤으니까. 차로 내 집까지 태워다 준다는 소리도 하지마라. 조금만 가면 버스를 탈 수 있으니까. 일은 내 생활수단이다. 내가 할줄 아는건 일 뿐이다. 이 나이에 내 생각을 바꿀 수는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