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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왕국(시 2:1-12)
오늘 읽은 시편 2편은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해서 쓴 시입니다.
그리스도는 전 인류의 소망의 대상입니다.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로마서 15:12-13절에 더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는 개인 뿐 아니라 온 인류의 소망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요한복음 4:42절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이 “그 여자에게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빛이십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께사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이 그리스도는 우리의 짐을 대신 지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세례 요한도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를 세상이 모른척하고, 배척하고, 그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오늘 본문에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실제로 가능합니까?
시편 139편을 한 번 읽어보십시다(1-12).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피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날개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절대로 없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특히 오늘 본문 7-9절은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하나님은 미리 자기 원수들에게 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원수들이 그들의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이미 그 계획이 좌절되고 그들의 간교함이 방해가 된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 받은 사랑하는 아들이 권세를 입고 보좌에 올라 있습니다. 세상의 방백들이 그의 손에서 왕권을 빼앗지 못하며 그의 머리에서 왕관을 벗길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스리고 계시며 원수들이 그의 발 앞에 쓰러질 때까지 다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거룩한 산 시온에 견고하게 세우셨으며 분노하는 열방들이 그를 쓰러뜨릴 수가 없습니다. 쓰러뜨리겠다는 바로 그 생각은 여호와를 자극하여 비웃게 할 것이며 그들이 광분한다고 해서 그의 심령이 상할 것도 없습니다. 싸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연희처럼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왕으로서 그의 왕자, 다시 말해서 기름 부은 받은 아들에게 말씀을 하시며 그의 법의를 입고 예수님께 큰 명예를 수여하신 것입니다.
옛날 군주는 잔칫날이 되면 자기가 총애하는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바를 내게 말하라. 오늘은 거절치 않고 주리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위대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영광스러운 아들, 평화의 왕자에게 “네게 구하라 그러면 내가 너의 유업으로 이방 나라(열방)와 이 땅을 너의 소유로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들이 외치는 소리가 아무리 드높아도, 저희들의 흉계가 아무리 흉악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왕국은 너무나 대조적으로 장엄한 잔치와 화평의 즐거움이 넘치고 있습니다. 싸움터에서도 지휘관이 승리를 확신하고 있을 때 부하 사병들이 희망을 가지고 용감해지는 법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그는 전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전쟁의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고 그의 뜻에 따라 온 세상을 먼지로 뒤덮을 수도 있고, 또다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 믿기 전입니다. 사울이 그리스도를 대항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오려고 대제사장의 공문서를 가지고 의기양양하게 다메섹을 향하여 가다가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하늘에서 내려 비치는 것을 체험하고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습니다.
그때 일을 사도행전 26:14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만왕의 왕을 대항하고 대적하는 일은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어리석음 밖에는 없습니다. 가시채를 뒷발로 차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뒷발에 피밖에 흐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안식은 영원히 능력으로 계시는 분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 있을 때 모든 근심과 걱정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심령이 피곤하신 분이 계십니까? 굳게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십시다. 흔들리는 법궤를 멎게 하려고 우리의 연약한 손길을 내밀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속한 자를 지켜 주심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모든 염려를 물리쳐 버리고 주님의 발 아래앉아 그의 음성을 들읍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다스리시고 또 장차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을 자께서도 역시 통치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어느 면에서나 실패함이 없이 이루어집니다.
시편 2:8절의 말씀입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일상 생활에서 평범한 교훈을 이용하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에게 주리라”
여러분, 이보다 더 큰 보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의 영역을 넓히십시다. 나 자신이나 내 가정, 내 교회, 내 나라만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세계 모든 나라가 다 그리스도의 것이 되도록 간구하십시다. 이 둥근 지구가 주의 나라가 되도록 간구하십시다. 그래서 이 땅끝에서도 주를 찬양하는 노래가 들리도록 기도하십시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간구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것까지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회개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이 세상을 끌어올립니다. 이 세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이 죄를 범하고 공포의 밤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의 빛을 비쳐주며 인간을 암초와 난파선으로부터 구조하여 평화의 항구로 인도하는 등대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권능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기 위하여 역사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로 방해되는 일이 있지마는 앞으로는 이 모든 방해되는 세력을 파괴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9절 말씀에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워 보이고, 튼튼해 보이고, 굉장해 보인다고 해도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끝장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어떤 계획이나 음모에 대해서 조금도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말씀합니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절에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하였습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지혜를 얻고 교훈을 받는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보통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여론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정말 지혜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끝으로 12절 말씀에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하였습니다.
여기 "입맞추라"는 데는 여러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입맞춤은 화해를 의미합니다. 모든 적의가 사라지고 분쟁이 종식되고 평화가 이루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은혜의 첫 번 역사도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입맞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가 화해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났던 방탕한 아들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향해 돌아올 때 기다리고 계시던 아버지는 달려 나아가서 아들을 껴안고 거지처럼 되어 버린 아들과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이 입맞춤은 충성을 의미합니다.
신하가 왕의 발에 입맞추는 것은 그만을 따르고 섬기겠다는 마음의 표시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용서함 받아 살게 되었으면 바울처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만을 우리의 왕으로 삼아 전에는 다른 주인이 우리를 지배했으나 이제는 주님만이 나를 지배하고, 전에는 우리의 정욕과 쾌락과 자만심과 이기심에 굴종했으나 이제는 주님의 가벼운 멍에에 우리 자신을 맡기겠습니다. 나로 하여금 주의 종이 되게 하소서”라고 고백해야만 합니다.
이 입맞춤은 감격의 표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으며 머리털로 발을 닦고 그의 발에 입 맞추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고 더럽고 오래되었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내게 오는 자를 내가 결단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그에게 오면 그는 언제나 맞아 주십니다.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찬송가 528장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왜 입맞추어야 한다고요?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 이 진노가 임합니까? 끝내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의 자비를 거절하고 그의 희생을 경멸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고 결론을 짓습니다.
여러분, 과연 주님을 온전히 의지합니까? 그러면 복이 있습니다.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복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신앙 생활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도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여러분, 이 말씀을 꼭 그대로 믿습니까? 여러분, 축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세요. 의지하는 것만큼 복을 받습니다.
첫댓글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