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5호
하나님으로부터의 찾음을 당하고 있는지
신앙생활을 하는 기준은 어떤 열심을 가졌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한 열심은 행동이기 전에 뜨거운 마음인 내적인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열심에 의한 행동을 보고 믿음이 좋다고 한다. 하지만 열심이 없는 행동으로 얼마든지 신앙을 표출하고 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열심이 포함되지 않은 ‘맹종’에 불과하다.
믿음에 의한 순종과 믿음과 상관없는 맹종의 의미는 서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것을 믿음으로 착각하지 말라. 신앙의 척도가 될 수 없으며 기준도 될 수 없다. 순수한 목적과 내용을 가진 열심은 사람을 살리지만 목적과 내용이 상실된 열심은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스데반 집사처럼 돌로 쳐 죽이거나 십자가에 달려 죽일 수 있다.
열심이란 단어는 한자어로 뜨거운 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열심은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신약에 ‘열심’이란 단어는 에크테네스 evktenh,j로 에크테이노오 evktei,nw ‘내어밀다’ (to stretch)라는 단어와 동의어로서 “주님에게 전적인 도움을 청하는 자세인 손을 내밀어진 상태”를 열심이라고 의미하고 있다. 에크테네이아 evkte,neia 간절함, 에크테네스테론ktene,steron 더욱 간절히, 에크테노오스 evktenw/j 뜨겁게, 같은 동의어로 나타나고 있다.
또 다른 단어인 제오오 ze,w 열심이다, 동의어인 제엘로스 zh/loj 열심인, 제엘로오 zhlo,w 사모하다, 제엘로오테에스 zhlwth,j 열심 있는 자란 의미의 단어가 있는데
“주님을 향하여 사모하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스푸데에 spoudh, 간절함, 스퓨도오 speu,dw 서두르다, 스푸다조오 spouda,zw 힘쓰다, 스푸다이오스 spoudai/oj 더욱 간절한, 스푸다이오테론 spoudaio,teron부지런히, 스푸다이오오스 spoudai,wj, 스푸다이오테로오스 spoudai,oterwj 급히,라는 단어는 “주님의 뜻을 간절히 이루기 위해 급히 서두르며 부지런히 힘쓰는 상태”가 열심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구약에는 왕하 10:16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기네아티 ytia'n>qi)을 보라.”는 단어와 사 63:15 “주의 열성(기네아테파 ^t.a'n>qi)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란 구절에서 사용된 단어들이 있는데 이사 59:17 “열심(기네아흐 ha'n>q)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라는 구절에서 사용된 단어가 어원으로 “실존의 진리를 배우며 균형을 잡고자 주님과 함께 호흡하며 정신이 가장 예민해져 있는 상태”가 바로 열심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단어를 분석해 봐도 외적인 상태와 결과를 의미하지 않고 내면적인 상태를 의미하고 있는데 대다수가 외적인 행동과 내적인 상태의 결과에 치중하고 있다. 사람들은 열심을 표출하는 내적인 상태는 생각하지 않고 외적인 행동만을 보고 열심의 척도를 평가하려고 한다.
따라서 맹종은 내적인 상태인 열심이 없는 행동뿐이며, 인격적인 차원의 순종이 아니라 권위적인 굴종에 불과한 것이다. 맹종적인 신앙이 신앙적인 순종으로 착각과 고정관념으로 뿌리박혀 바른 신앙이 오히려 잘못된 신앙으로 여기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태의 신앙은 강력한 독재자의 지도아래 있기를 원하고 있다.
신앙은 내적인 마음의 상태요, 또한 행위에 앞서 선결되어져야할 조건이다. 신앙이 맹종으로 오해되어서도 안 되며, 맹종의 열도가 신앙의 척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맹종의 근성을 가진 충성스런 심복과 같은 교인들이 자랑하지 마라. 어느 목회자는 설교시간에 자신의 한 마디만 하면 여자 집사가 팬티를 내릴 수 있다고 자랑삼아 한 얘기로 인해 교계에 화두가 된 적이 있다.
마치 애급에서 노예처럼 430년간 머물렀던 이스라엘 민족과 흡사한 교인의 맹종이 열심이 있는 신앙으로 착각하지 마라. 이런 신앙을 하나님께서도 원하지 않을뿐더러 그러한 신앙을 신앙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교인이 자신의 편으로 생각하지도 마라.
목회자인 사람의 말을 잘 듣는 것보다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을 잘하는 성도가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회자가 할 일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한자의 의미에서 보듯이 마음에 열이 있는 상태, 즉 주님을 향하여 항상 뜨거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 열심이다.
누가24:32에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주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경험한 사건으로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처럼 주님과의 만남에서 생기는 뜨거운 마음과 함께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바로 열심을 의미하고 있다.
진정한 열심은 자의적이지 않고 성경적이며 말씀의 근거한 내적인 마음의 상태와 외적 행동의 표현이 일체가 될 때 바로 열심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열심의 주체가 내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얼마든지 열심을 낼 수 있지만 그런 열심을 의미하지 않으며 내 안에서 존재하시는 주님께서 열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한 성경구절이 많이 있지만 눅 12:49에 “내가 불을 땅(겐 gh/n)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는 말씀에서 지구라는 땅에 불을 던지러 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인 땅(하나님의 기업을 이어받을 존재)에 불을 붙이러 오신 것이다.
이것이 성령세례일 수 있으며 성령의 불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사모하거나 내가 간절히 원해서 받는 것이 아닌 내 안에 계신 주님 자체로 일으키시는 뜨거움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 이렇게 사람의 마음속에 뜨거움을 불러일으키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예수 믿는 흔적으로 아니면 신앙의 체험적인 사건으로 뜨겁게 하는 것일까? 현재 기독교 안에서 성령 충만이란 미명아래 성령세례와 성령의 불을 받으려고 기를 쓰고 있다. 이러한 증상에 의한 뜨거움을 열심과 열정이란 단어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고집하는 분들에게는 어쩔 수 없지만 뜨거움의 반대는 차가움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차가움이 아니라 미지근한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이것을 불신앙의 상태로 여기는데 무엇이 불신앙일까?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코 아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덴 사람처럼 모든 사람들은 종교성을 갖고 있어 이 세상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행 17:22)
심지어 귀신들과 마귀 사단도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앞에서 두려워하며 떨고 있는 존재들이다. (약 2:19) 그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불신앙이 아니라면 무엇이 불신앙이며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내 안과 밖에서 존재하시며 내 삶의 현장에서 항상 동행함에도 불구하고 찾지 않는 것이 바로 불신앙이다.
그런데 많은 종교적인 기독교인들은 주일날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리면 그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형식적으로 찾는 것이 아니며 필요에 의하여 찾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전혀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찾음”을 당해야 한다. 잃어버린 양처럼 말이다.
자신은 하나님을 찾아 교회를 나왔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찾음이 되지 않은 존재들이 너무나 많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긍휼하심을 받지 않고 과거에 긍휼함을 받은 적이 있다고 왕년에 받은 흔적 하나로 버티고 있는 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시 53편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찾는 지각 있는 자를 보시려고 인생을 굽어 살펴봤더니 각기 제 갈 길로 돌아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바로 선을 행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착한 일을 하는 행위로 착각하고 있다.
그 시편에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있는 것에도 악을 행하는 것으로, 또한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교회 가서 아니면 기도원이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다고 하지만 내 마음 속에서 뜨겁게 하며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을 찾지 않고 밖에 있는 주님(다른 주님)을 찾고 있다.
나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주님, 나의 수입에 관장해 주기를 원하는 주님, 나의 인생의 진로나 의식주를 책임져 주는 주님,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God)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에 여러 가지 관여하는 주님(god 지방신)을 찾고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 나타나시는 목적이 무엇일까? 그리고 존재하시는 목적이 무엇일까? 내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알리시며 나타나시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물음 속에서 말씀을 봐야 하며 그 분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그것이 전혀 배제된 상태에서 주님을 만나고 있다.
자신만 부패하여 주님을 믿지 않거나 찾지 않으면 되는데 그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주며 가로 막고 있다는 것이다.(시 56:4, 마 23:13) 자신도 못 들어가면서 남까지 못 들어가게 막아서고 있는 꼴이다. 이것이 확대된 불신앙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을 찾고 있으며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를 찾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며 의도하심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수많은 양을 다른 곳에 두고 찾아야만 하는지 다음 칼럼 후속편에서 전개될 얘기가 무엇인지 기대해 보면서 여기서 줄인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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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살롬!! 좋은글 감사합니다
아둔함이 깨진느낌이듬니다 주님의선물만바라고 주님의얼굴을 구하지안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멘! 우리는 잊고 있느것같아요 그리고 착각하나봐요 ! 임마누엘의 신앙을 찿아야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