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감동을 준 시집 10
- 김겨리 시집 – 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
김겨리 시인으로부터 이 시집 『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가 스토리문학사 사무실로 배달되어 온 것은 지난 해 10월이다. 나는 이 책을 받아놓고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 하늘을 쳐다보아야 했다. 그가 써낸 문장은 오브제였고, 추상화였다. 그는 화방에서 구할 수 있는 기존의 재로들을 사다가 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재료를 선택하여 알료를 만들고 스스로 기법을 선택하여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김겨리 시인의 작업해낸 일련의 문장들을 대하며 너무나 신선해 이국에 온 듯 어리둥절했다. 그리하여 감히 무슨 말로 그의 문장에 대한 토를 달아볼까 스스로를 근신시키며, 오래도록 그의 문장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김겨리 시인의 문장들은 어느 문장 하나 죽은 문장이 없이 하나 같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존재가 나무든 그늘이든 모두 스스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시는 하물며 단어 하나 토시 하나까지도 생명력의 상관관계 선상에 놓인 또 하나의 단비였다.
그는 이토 게이찌가 주장한 ‘시의 발상차원의 8단계’ 이론을 꿰맞춘 듯 나무의 사상을 보고 있었다. 나는 처음 이토 게이찌의 주장을 접했을 때 ‘나는 나무에게 무슨 사상이 있을까?’ 의아해 했고, 그 난제를 풀기 위하여 거듭되는 장고를 거쳤지만, 숙제를 풀어내지 못했었다. 그리하여 나는 시인들께서 보내온 그동안 수많은 시집 중에 김겨리 시인의 『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를 내 시의 교과서로 삼기로 하고 수능시험을 보는 학생처럼 읽기로 했다. 그리고 1독 1독을 거듭하며 자주 그의 문장을 대할 때마다, 나무의 사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마침내 김겨리 시인의 시집 『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에 대한 다섯 번의 정독을 마쳤을 때, 나에게 새로운 눈이 뜨였다. 그것은 「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 생기는 2차 성징 같은 것이었다. 나무는 해마다 나뭇잎을 떨구고 새로운 나뭇잎을 가짐으로 해서 성장하는 이치였다. 그로 인해 나는 ‘왜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살려했을까’라는 반성에 이르렀다.
김겨리 시인은 사물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을 통한 생명력을 부여하면서, 이미지와 언어를 포함한 모든 사물에는 생명이 있음을 깨닫게 했다. 그의 문장들은 모두 하나 같이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그의 시들은 단 한 편도 흐트러짐이 없이 생의 낭떠러지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듯, 위태로운 상황에서의 매만짐으로 느껴졌다. 사랑은 마음으로 보는 것, 그는 마음으로 사물을 본다. 그의 시야는 이제 눈에서 손끝으로, 손끝에서 마음으로 이동 중이다.
현악기의 줄은 팽팽하게 조율되었을 때 맑은 음을 내며, 덜 당겨졌을 때 음악으로서의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김겨리 시인이 써내고 있는 시편들은 바이올린, 첼로, 기타 같은 현악기의 각기 다른 음색으로 매번 다른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덜 당겨진 현과 더 당겨져 끊어진 현은 음악으로 가치가 없듯, 시에 있어 퇴고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가 조율해온 흔적을 가늠해보면 깨닫게 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시집을 오래도록 가방에 넣어 메고 다니는 습관이 있다.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꺼내 읽고 싶은 시집이 가방에 없다는 것에 나는 불안증세를 보인다. 앞으로도 그의 시집 『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는 내 가방에서 오랫동안 나와 동행할 것이다.
- 김순진(문학평론가 • 고려대 평생교육원 시창작과정 강사)
- 시산맥/ 138페이지 /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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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
김겨리
바람이 통통해지는 무렵 나무가 그늘을 방생하는 것은
그늘의 이소離巢
그늘은 때가 되면 나무를 떠나지만 증표로 나이테를 남긴다
그늘이 성근 것은 계절이 빠져나간 흔적이다
적멸을 횡단하는 경로에서 나무가 비병을 지르지 않는 건
그늘이 나무의 공전을 멈출 때 울음도 자전을 멈추기 때문이다
나무는 상처 난 그늘을 다시 촘촘하게 여밀 터지만
나무가 그늘을 수숩하는 건
자신의 부고를 담담하게 진술하는 수행이다
일설에는 그늘은 나무의 다비라는데,
아무도 나무를 관통할 수는 없다
나무가 짊어진 그늘이 생애를 다 해독할 때까지
앙상한 그늘을 덮고 벌레들이 쉼표처럼 잠들어 있다
그늘 밖으로 빠져나온 맨발을 달빛이 슬쩍 밀어 넣는다
달빛의 인기척에 놀라 나무가 지느러미를 퍼덕거릴 때
그늘이 우수수 쏟아지고 나무의 쇄골이 드러난다
초록의 씨줄과 날줄로 한 땀 한 땀 공들여 지은 수의壽衣
생애가 오체투지인 나무의 텅 빈 폐허에서
새들이 아직 이소하지 못한 몇 조각의 그늘을 포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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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겨리 시인
경기도 안성 출생, 본명은 김학중
홍익대학교 졸업
2015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제8회 김만중문학상 당선(2017년)
제16회 웅진문학상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창작기금 수혜
시집
『분홍잠』
『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
E-mail : hangyueli@hanmail.net
첫댓글 잘배독합니다
*:(
낼 당장 서점에 가야겠네요
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
한편의 시 감동입니다
많이 배워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