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와 고려왕조의 군사력을 비교해서 조선이 고려보다 군사력이 후퇴했다라고 평가하는 견해가 더러 존재합니다.
유튜브등에서도 그런 내용들이 나와있는데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여러가지 시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획일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결론내릴 문제가 아니죠.
우선 그리 생각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 고거전쟁과 조선시대의 임진 병자양난과의 결과비교입니다.
특히 병자호란과 고거전쟁을 비교하여 근거로 내세우는 견해가 대다수인데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결국 방어해냈지만 조선은 그렇지 못하고 왕이 무릅꿇은 망신을 당한것을 가지고 근거로 내세우죠.
그런데 좀더 면밀히 분석을 해볼 사안들이 있습니다.
단순히 승패를 떠나서 구체적인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선 고거전쟁에 고려가 승리했다라고 평가하지만 이 승리라는 것도 방어하는 입장에서 공격자를 물리친것이지 먼저 나서서 거란을 정벌한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공격자를 물리친것도 전쟁 초반에 상대의 전력을 확 꺽어놓은것이 아닌 초반에 적에게 상당히 당하고 털린과정을 겪었다라는 것도 간과하면 안됩니다. 일단 2차전쟁에서 개성을 점령당하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난을 갔다는 것을 감안하면 일단을 거란에게 엄청나게 털리고 군사적으로도 크게 패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병자호란과 비교하면 인조정권이 무능했던 것이 전쟁을 좀더 장기로 끌고가서 적이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 힘들게 몰아가지를 못했다라는 것이죠.
만일 2차전쟁에서 현종이 인조처럼 붙잡혔다면 그 결과는 어찌되었슬까요? 아마도 인조보다 더 혹독하게 치욕을 맛보았슬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고려군대가 30만으로 방어했다라고 하지만 그정도 병력을 가지고 왜 결과가 그 모양수준에 불과할까요?
거란이 40만대군이고 고려도 30만 대군의 군사강국이라면 그렇게 개성이 함락당하고 왕이 나주까지 피난가는 참사는 없어야 합니다. 강조의 고려군 본군이 대패를 한후 30만 대군중에 3만이 몰살당하고 남은 병력은 어찌 되었슬까요? 일단 여러 정황상으로 보는 추측으로는 남은 병력들이 주변 성들로 들어가 집결해서 나중에 거란군이 물러갈적에 요격을 가했다라고들 생각하는데 문제는 그래도 30만 대군이고 3만이 몰살되었다라고 해도 나머지 90퍼센트병력이 수습되었다면 거란군이 아무리 개성으로 빨리 우회해서 남하하더라도 고려군역시도 추격해서 남하할 병력에 여력은 있서야 합니다. 그리고 거란군이 개성을 함락하고 그보다 더 남쪽까지 현종을 추격해서 내려오는 것이 가능했다면 평양이남지역에서는 방어할 병력이 제대로 없었다라는 의미가 확실합니다.
그리고 2차전쟁의 결과로 고려국토의 백성들 피해상황을 감안하면 결코 승리라고 볼수가 없는 내용이죠.
3차에서는 확실히 승리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거란쪽 전력을 살펴보면 2차때보다는 상당히 부실한 수준의 전력임이 확실합니다.
2차때보다 병력수도 적은데다가 드라마에서 나온 내용대로 2차침략전 이후 요나라 내부 반란등의 수습으로 전쟁을 일으킬만한 사정이 악화되었다면 당연히 3차때의 전력은 전보다 상당히 낮은 수준일수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에 고려입장에서 크게 다행스러운점이라면 금나라 건국후 강성해지면서 금과 고려간 전쟁은 없시 넘어갔다라는 것입니다.
만일 금이 고려를 침공했다면 요나라의 침공시보다 더 혹독한 피해를 입을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금이 고려를 침공했다면 그 후 고려 역사도 다소 달라질 소지가 큰데 금의 침공으로 피폐해진 고려에서 조금 있다가 무신정변으로 더더욱 내부 기강이 혼란해졌다면 원의 침략시 조기에 항복할수밖에 없는 결과로 이어졌슬 것입니다.
병자호란에서 참담한 결과에 대해서는 인조정권의 무능과 전략적 미스가 원인인데 우선 이괄의 난으로 북방 방어선이 붕괴되었고 보다 전쟁을 장기로 이끌어서 적의 전쟁수행을 어렵게 만들상황을 조성치 못한것이 전략미스입니다.
우선 이괄의 난이 없었다면 병자호란의 양상이 많이 달라졌슬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청나라군대를 크게 대파할 수준은 못되더라도 좀더 오래 방어전을 펼치고 장기전을 힘들게 만들게 끌어갈 상황은 충분히 조성할수 있슬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군대를 양성하고 관리할 경제적 문제를 따진다면 당연히 고거전쟁당시 고려보다는 6백년후의 조선시대가 더 성숙한 상황이 분명한데 군사력을 후퇴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첫댓글 조선이 고려에 비해 군사력이 후퇴했다는 평가는 조선 실학의 선구자인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 유래한 것이어서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고려시대의 군사력이 오늘날 우리나라인 조선보다 괜찮다는 평가를 하였지요
그리고 2차 고거전쟁에서 거란군은 개경을 함락하고도 개경 이남으로 진격하지 못한 것을 보면
강동6주에 함락시키지 못한 흥화진의 양규 등 고려군과 서경의 고려군이 거란군의 후방 보급로를 위협하고 있었기에
그래서 개경 이남으로 진격하여 현종을 추격하지 못한 것에 크게 작용했지요 여기에 개경 이남의 지리에
100% 무지한 거란군 수뇌부의 지리 정보적 한계도 영향을 끼쳤고
거란군 같은 유목기마형 군대는 보급을 후방보다 현지 약탈로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이런 유형의 보급은
단기전에서 유용하겠지만 그러나 장기전에 치명적인 요소로 작용할수밖에 없기 때문에 거란이 개경을
함락할때 큰 수확인 현종등 고려 수뇌부를 체포하거나 항복을 받았다면 유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종 고려 수뇌부가 항복하지 않고 남쪽으로 피신하는 바람에 개경 함락으로 전쟁을 조기 종식시킨다는 거란의 전쟁 계획이 틀어져서 무산된 것이죠 그래서 전략적으로 보면 고려의 승리입니다
고려가 군사력이 조선보다 강력했다는 평가 논거는 단순히 승패 결과에서 기인하는게 아니지요 승리를 거두더라도 자력으로 거두었냐 그렇지 못했냐가 차이점인데 조선은 고려와 달리 임진왜란에서 종주국인 명나라의 지원 같은 외세의 도움에 의존해서 전쟁 치룬 것이고
고려는 조선과 달리 주변 타국인 송나라의 지원도 없이 자력으로 치루어서 몽골과의 전쟁을 뺴놓고는 승리를 거두었던 터라
이점이 고려와 조선 양쪽 군사력에 비교되는 평가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2차 고거전쟁의 전장이 서북쪽에 한정되어서 전국토가 전장이 된 것도 아니어서 피해가 절대적으로 크지 않았습니다
글쎄요. 고거2차전쟁당시 국토남부쪽은 과연 피해가 적었슬까요? 거란군이 현종을 잡으려고 어디까지 내려왔는지가의문인데 현종이 나주로 피난갔다고 하는데 만일 나주에서 그리멀지않은곳 까지 거란군이 들이 닥쳤다면 개성에서 호남지역으로 내려오는 지역들 죄다 적잖은 피해를 보았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영남지역은 피해에서 예외일 가능성도 클것입니다.
@선구자 거란군이 개경 이남으로 진격했다는 사료적 근거는 없습니다 무슨 근거로 거란군이 개경 이남으로 진격했다고 주장하시는 것인지요 그리고 하공진을 거란 진영에 보내어 협상할때 거란이 하공진에게 개경과 나주에서의 거리가 얼마나 되냐고 물어본 사실을 정황적으로 고려하면 당시 거란군은 고려 남부 지역에 대한 정보력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판단될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으로 하공진에게 남쪽 거리를 물어본 거란과 하공진의 면담 사실이 개경 이남 진격설에 반대되는 근거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