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류열풍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이웃사람
[펌]플라스틱머니
이분이 돌아셨더군요......
고 김영옥 대령
몇일전 신문에서 이분의 부음을 접했습니다.
부음을 접하고 안타까움과 분노가 교차해 감정 정리에 잠시 애를 먹었습니다.
2차대전에서 용맹을 떨치고 제대후 사업을 하다 한국동란이 발발하자 모든걸 치우고 다시 입대해 부모님의 조국을 위해 목숨바쳐 싸워 혁혁한 무공을 세운 전설적인 인물이죠.
제가 이분의 존재에 대해 알게된건 5년전 일입니다.
해병대 출신인 미국인 동료가 이런 사람이 있다고 알려주어 호기심에 이곳저곳을 뒤져본후, 이제껏 이런 사람이 미국의 한국인들 사이에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의 존재 조차도 모르고 있던 제 자신에게도 화가 났었죠.
처음 이분의 존재와 예전 전투시절의 무공담을 인터넷에서 찾아 다닐때, 이런 분에 대한 글이 한국의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찾을수 없고 영문 인터넷 사이트에서만 발견 할수 있다는 사실에도 놀랐습니다.
한동안 이분에 대한 글을 찾아 다니며 읽고 복사 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호기심도 시들해지고 급기야 한동안은 잊어 버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얼마전 부터 한국의 뉴스 매체에 이분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또 재평가가 이루어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후, 다시금 이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이런분이 한국정부에서 정당한 무공훈장 하나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씁스레 하더군요.
급기야 많은 분들의 뜻이 모여 정부에서 그에게 태극무공 훈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던중 그분의 부음을 접했습니다.
살아생전 당연히 받았어야 할 훈장을 죽어서 받게되는 그분의 심정이 어떨지 궁금합니다.
최근에 출간된 그의 전기를 읽어 보지는 못했습니다.
어느 소개글을 보니가 전쟁영웅 김영옥이 아닌 인간 김영옥에 촛점을 맞춘 책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만, 전 그의 인간적인 면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2차대전중 용맹을 떨친 사실과 한국동란중 부모잃은 고아들을 돌봐준 사실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허나 제가 처음 그에 대해 알아가고 있었을 즈음에 저를 남자로서 감동시키고 눈가에 눈물이 맺히게 한건, 한국계 군인으로서 일본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이루어 나갔는지 느끼게 되기 시작 하면서 부터 였습니다.
그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 이곳 저곳을 뒤지고 있던 5년전 어느날, 당시 참전했던 어느 일본인 병사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그에 관한 글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죠.
짧은 글이었지만 읽고 무척 많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가 어떤 남자였으며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어떠한 존재로 비추어졌는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글이었기 때문입니다.
5년전에 복사해둔 글이라 출처인 홈페이지가 어디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 안타깝습니다만, 원문과 제 번역을 같이 올려 봅니다.
김영옥 소위는 미시시피에 위치해 고도의 전투준비 상태에 있던 제 100 보병대대로 왔댜.
24살의 군인은 모든 징집병들이 너무도 많이 보아왔던 그리고 피하고 싶어하던 그런 종류의 장교였다.
죠지아의 포트 베닝에 있는 OCS ( 사관후보학교 )를 갓 나온 그는 '용맹한' 자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었다.
그는 100대대에서 다른 장교들(처음 100대대 장교의 대부분은 백인들이었다.)의 혐오와 징집된 (일본계)병사들의 경멸을 참으며 병사들을 몰아 붙였지만, 점차적으로 그들의 존경을 얻었다.
부대와 함께 이태리에 도착하자, 전투에서의 그의 멋진 통솔력과 병사들의 복지를 위한 그의 배려로인해 곧 칭송을 받는 장교가 된다.
전쟁터에서의 그의 강인함과 용기 또한 칭찬을 받게되었다.
1943년 11월 3일, 이른 아침에 제 100대대는 치오르라노 근방의 볼레르노 강에서 세번째 도하를 명령을 받았다. 한밤중에 무지막지하게 쏟아진 포탄세례에 그 지역이 흔들리고 난후, 제 100대대와 제133 보병연대의 제2대대는 함께 출발했다.
새벽 4시가 되었을 즈음, 100대대의 B중대가 물살이 빠르고 차거운 볼테르노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니세이(Nisei·二世- 미국의 일본인 2세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부르던 호칭 )이 거친 숨을 내쉬며 차겁고 젖은 건너편 강둑을 기어 올라가 발견한 것은 지뢰밭에 한가운데에 있는 자신들 이었다.
즉시 반응한 독일군의 포대와 아군포대의 오인사격으로 인해 병사들은 한가운데 갇혀 버리고 말았다.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비 ( 포탄 )로 인해 30명 이상의 니세이들이 전사해 버렸다. 강둑으로부터 비틀 거리며 올라간 병사들은 4마일 떨어진 그들의 목적지인 85번 국도를 향해 급히 대오를 정돈했다.
어둠속이라 어느 방향으로 중대가 나가야 할지 모르게 되는 혼란이 찾아왔다.
선두소대가 지뢰밭으로 걸어 들어가 7명의 병사를 사상자 명단에 올리고 말았다.
김의 소대는 김이 인솔하는대로 마침내 길이 보일때가지 나아갔다 되돌아 오곤했다.
겁없는 소위는 정찰을 위해 어둠속으로 홀로 나아갔다. 철모대신 니트로 만들어진 모자를 항상 착용했던 용감한 소위를 따라가는건 어둠속에서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김소위는 항상 무언가 무거운것이 그의 머리에 있으면 생각을 바로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
돌담의 꼭대기에 다다라, 김소위는 그위에 서서 그의 대원들에게 전진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갑자기 독일군의 총알이 공기를 갈랐고 김소위는 땅위로 떨어졌다.
분노가 교차되던중, 로버트 오자키 병장은 용감한 소위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거나 포로가 된다는것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거의 반사적으로 그는 전투의 시끄러운 소음 너머로 고함을 질렀다.
" 착검 ! "
'반자이 (만세)!" 라는 고함과 함께 전방의 모든 니세이들이 일어서서 독일군의 총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이차대전중 이태리에서는 최초의 착검공격인 데다가, 우렁찬 '만세' 공격이 배가되어, 독일군들은 대경실색해 버렸다. 담 너머에 도착한 그들이 발견한건 아직 살아서 수류탄을 적의 기관총좌에 던지고 있는 그들의 소대장이었다.
Lieutenant Young Oak Kim came to the 100th Infantry Battalion during the advanced combat readiness phase at Camp Shelby, Mississippi. The 24 year old soldier was the kind of officer every enlisted man has seen far too many of, and wished to avoid. Fresh out of OCS (Officer Candidate School) at Fort Benning, Georgia, he was "gung-ho". To make matters worse, he was not Japanese but Korean. Kim pushed the men of the 100th, endured disdain from the enlisted men and the dislike of his fellow officers (initially most of the officers of the 100th were Caucasian), but gradually earned their respect. Upon landing with the unit in Italy, his cool leadership in combat and concern for the welfare of his troops quickly earned praised. His tenacity and courage on the battlefields won their admiration as well.
On November 3, 1943 the 100th was ordered to make an early morning third crossing of the Volturno River near Ciorlano. After the area had been pounded by a heavy midnight artillery barrage, the 100th and the second battalion of the 133d Infantry set out. At about 4 in the morning B Company of the 100th began crossing the cold, swift waters of the Volturno. The Nisei scrambled up the far bank cold and wet and breathing with exertion, only to find themselves in a minefield. A sudden barrage of mis-placed friendly artillery, followed by an immediate response by German artillery, caught the soldiers in mid crossing. More than 30 Nisei fell to the death that rained down from the skies. Stumbling up from the river banks, the soldiers quickly assembled to move towards their destination on Route 85, four miles away. In the darkness, confusion arose as to which direction the company should travel. The lead platoon walked into a minefield, adding seven more men to the casualty list.
Lieutenant Kim's platoon moved to the point, backtracking and then setting out in the direction Kim led until a road came into view. The fearless lieutenant moved ahead alone in the darkness to scout it. Even in the darkness it was not hard to follow the brave lieutenant who always wore a knit cap in lieu of a steel helmet. (Lieutenant Kim always said he couldn't think straight with something heavy on his head.)
Reaching the top of a stone wall, Kim stood and waved the men forward. Suddenly German bullets tore through the air and Kim fell to the ground. In the midst of the furious exchange, Staff Sergeant Robert Ozaki was enraged at the sudden death or capture of the brave lieutenant. Almost reflexively he shouted over the din of battle, "Fix Bayonets". With yells of "Banzai" the entire front line of Nisei rose and advanced on the German guns. The first bayonet charge in Italy of World War II, coupled with the tenacious "Banzai" attack, stunned the Germans. As the line broke over the wall, they found their lieutenant...alive and throwing grenades at the enemy machinegun nests.
저는 지금도 이 글을 읽으면 가슴이 뜨거워 집니다.
당시는 한반도가 일제의 압제에 신음하던 시기였고, 한국인들은 이등민족으로 취급을 받으며 멸시를 받던 시대였습니다.
사는 곳은 다르다 할지라도, 같은 일본인들의 후손인 미국의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에 대한 경멸감이 없었다고 하는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의 재미교포들이 한국과 일본의 마찰을 접할때면 일본인들에게 분노를 느끼듯이, 당시의 일본인 부모밑에서 자라난 2세 일본인들의 마음속에도 한국인에 우월의식이 있었을 겁니다.
게다가 그런 한국인이 자신들을 통솔하는 장교로 왔으니 그들이 당황했다 해도 이해 못할게 아닙니다.
아무리 상명하복의 군대일지라 하더라도 마음속에 자리잡은 앙금이나 머릿속에 도사리고 있는 의식을 지우기는 쉽지 않습니다.
군인도 인간이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그 일본인 2세 병사들은 적의 사격에 쓰러진 한국인 장교의 모습을 보고 분노에 사로잡혀 겁도 없이 착검을 하고 지금도 자타가 인정하는 막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던 독일군을 향해 모두가 '만세'를 부르며 마치 영화속의 한장면 처럼 돌격을 감행 했습니다 .
이건 아무때나 일어날수 있는 상황이 절대 아닙니다.
2차 세계대전중 일본군들이 '만세돌격'을 자살적으로 감행한건 그들의 천황을 위해서였습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런 일본인들의 이민 2세인 일본계 미군들은 김영옥이라는 그들과 같은 민족이 지배하고 있는 식민지 조선의 후손을 위해 만세돌격을 감행 합니다.
이등민족으로 내리 깔아 보고 있던 한국인이 자신들의 소대장으로 온것도 고까웠을지 모르는데, 그런 소대장이 쓰러지자 모두가 자신의 목숨을 개의치 않고 분노에 사로잡혀 적군을 향해 만세돌격을 감행한 동기가 무엇이었을까요 ?
그저 막연히 전우애라고 부르기에는 당시의 한국인과 일본인들 ( 지금도 그렇지만.....) 의 관계가 정상이었던건 아닙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적군을 향해 함성을 지르며 돌격한 일본인 미군병사들.
그렇게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한국인 소대장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한민족 역사상 한무리의 일본계 젊은이들이 한 사람의 한국인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도 아까워 하지 않고 적군을 향해 돌격을 감행한 일이 이때말고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들을 그렇게 만들수 있었던 고 김영옥 옹이 너무도 존경스럽습니다.
자신의 부모님이 태어난 땅을 지배하고 있는 일본인들에 대한 분노가 만만치 않았을테고, 자신을 홀대하고 경멸하기 까지 하는 병사들에 대한 불만도 많았을텐데, 그는 그 모든것을 견디고 극복한후, 오히려 그랬던 그들이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아까워 하지 않는 군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더더구나 제가 다녀본 이차대전에 종군했던 일본계 미군들의 웹사이트 곳곳에는 고 김영옥 옹에 대한 존경심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후에도 일본계 참전 용사들 사이에서 그분의 위상은 변하지 않고 오래도록 존경을 받아 왔다 합니다.
아무나 할수 없는 일이죠.
그래서 그분의 모습이 저에게는 더 크게 보입니다.
용맹함은 무대뽀에서 나오는게 아니고 자기수양과 절제력으로 부터 나오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별은 달지 못했지만, 그분은 참으로 뛰어난 분입니다.
그 어려운 시대에 어려운 여건에 굴복하지 않고 인생을 극복한 그분의 용기와 절제력, 그리고 적도 자기편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 포용력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런 분이 살아생전 부모님의 고향땅에서 받았어야 할 최고 무공 훈장을 죽어서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도 합니다.
( 그분이 살아생전 한국정부로 부터 받았던 훈장은 국민훈장중 2등급이었던 모란장 이었습니다......... 국민훈장은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분야에 공적을 세워 국민의 복지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훈장 입니다.......)
그리고 이제껏 그분의 존재를 잊고 지냈던 한국정부와 미국의 교포들에게도 섭섭함을 느낍니다.
그는 한국국민이 아니었습니다.
미국땅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이었죠.
게다가 그는 미국 군인의 신분이었습니다.
한국전쟁에 참가 하지 않았다 해도 아무도 탓하지 못할 사람이었지만 그는 주저없이 부모가 태어난 땅으로 건너와 군인으로서 최선을 다한 사람입니다.
부디,
편안함 잠을 주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그분의 이름이 남겨져 있었으면 하고 바래 봅니다.
맥아더가 그랬죠.
'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 ' 라고 말입니다.
첫댓글 대단하신 분이네요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한 소대장이 아군이 안보이자 적진까지 뛰어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독일군이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사격을 못했던 장면이 나오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스피어스 말씀하시군요. 저도 디비디로 보는데 그장면 몆번인가 돌려봤습니다. 마치 연병장을 뛰어가듯 달리는 모습에서 독일군이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또 태연히 돌아오자 모두들 넋을잃고 바라보는 장면에서 같이보던 친구랑 한참이나 웃은 기억이 나네요.
저번에 MBC에서 다큐로 한시간인가 이분에 대해서 방영해주더군요. 한마디로 대단한분입니다.솔선수범,통솔력,상식의선을 넘어선것같은 배짱등등, 전장에서 활약상등은 경이롭기 까지 하더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