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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qs4Wd4ZpBHg
-몰락. 네번째 이야기 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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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q를 떠나보낸지 5년만에 Kobe Bryant는 우승을 차지하며 의심하던 사람들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2009년 Kobe는 선수 생활 사상 첫 Finals MVP를 받았다. 5경기만에 Dwight Howard와 Orlando Magic을 물리친 보상이었다.
그 우승은 Phil Jackson 감독의 10번째 우승이기도 했다. 이 우승으로 Red Auerbach의 기록을 앞질렀다.
이 우승으로 Kobe는 LA의 확고한 슈퍼스타가 됐다. 하지만 Bryant의 옆에는 강력한 선수들이 있었다.
Mitch Kupchak 단장이 만든 이 팀에는 영리한 스페인 출신의 빅맨 Pau Gasol, 건장한 포인트가드 Derek Fisher 그리고 다재다능했던 Lamar Odom이 있었다.
이들은 2009년 우승을 차지한 이후, 더 성장했다.
젊은 센터 Andrew Bynum은 여전히 무릎 문제가 있었지만, 그래도 잘 뛰었다.
새로 영입된 Ron Artest는 2010년 Finals 진출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들의 목표는 하나였다. 2008년 Finals에서 패배의 아픔을 안긴 Boston Celtics에게 복수하는 것.
Shaq 없이 2번의 Finals MVP를 따낸 Kobe의 입지는 확고했지만, 꼭 그런것만은 아니었다.
Bryant는 LA Lakers와 연장계약을 체결했고, 이 계약과 함께 30대를 Lakers 소속으로 보낼 수 있게 됐다.
Bryant의 영광스러운 선수생활의 마지막 모습은 어떨까?
Lakers와 함께 계속 성공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Bryant가 새로운 슈퍼팀을 구성하기 위해 슈퍼스타들에게 연락을 할까?
Bryant가 은퇴를 선언하기 전에 LA에 더 많은 우승 트로피를 가져올 수 있을까?
글쎄...
2연속 우승을 달성한 후, Lakers의 첫 번째 과제는 Phil Jackson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당시 65세였던 Jackson은 은퇴를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Lakers에서 1년 더 감독직을 맡기로 결정했다. Lakers에서 1년 더 머무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과제는 Bryant의 건강 문제였다.
Bryant는 시즌 내내 오른손에 통증이 있었고, 수술 받은 오른쪽 무릎의 통증도 계속 됐다.
7월에는 무릎에 또 다른 시술을 받았다.
우승 후유증은 진짜였다.
Bryant는 무릎에 무리를 안 주기 위해, 팀 연습에도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Gasol도 많은 경기에 출장했던 것에 부담을 느꼈고, Odom 역시 국가대표팀에 차출되면서 피로를 해소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크리스마스에 Lakers는 Heat에 패배하고 말았다. 이 패배로 Lakers 선수단에는 당혹스러움과 좌절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akers는 57승을 거뒀다.
직전 시즌과 마찬가지로, 서부 컨퍼런스 2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라운드에서 New Orleans를 물리치면서 순조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이 시리즈는 Chris Paul이 New Orleans 소속으로 뛴 마지막이기도 했다.
하지만 2라운드는 달랐다.
Dallas Mavericks와의 2라운드에서 Laker는 1차전과 3차전에서 리드를 날려버렸고, 4차전에서는 패배했다.
Jackson의 감독 경력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스윕패배를 당했지만, Jackson은 본인의 약속을 지켰다. 감독 생활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하면서 Jackson은 Lakers의 특별한 프런트에 대해 이야기했다.
Jackson은 Lakers의 프런트와 최소한의 관계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미래에 대해 Lakers 프런트와 상의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Jackson은 Mitch Kupchak 단장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Buss 가족들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오랜 시간동안 구단을 소유하고 있었던 Jerry Buss와 자녀들에 대한 것이었다. Jerry의 자녀들은 구단 프런트 요직에 앉아 있었다.
Jim Buss는 운영팀을 총괄하고 있었다.
Jeanie Buss는 마케팅을 비롯한 외부 활동을 총괄했다. 그리고 Phil Jackson의 여자친구이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Jackson의 은퇴에 대해서 각자 다르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제 Jackson의 자리에 앉힐 새로운 감독을 구해야 했다.
Bryant는 오랜 기간동안 Jackson 사단의 일원이었던 Brian Shaw가 새로운 감독으로 괜찮을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Kupchak과 Buss 가족들은 선수들의 의견은 감독 선정에 고려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모든 후보들을 물리치고 새로운 감독을 내정했다. 바로 Mike Brown이었다.
Cleveland Cavs에서 LeBron James와 함께 했던 그 사람이었다.
Bryant는 새로운 감독 선임에 대해서는 그다지 흥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2011년 리그 폐쇄 사태 이후에는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2명의 가장 뛰어난 동료를 잃어야 했지만, Lakers가 리그 역사에 남을만한 트레이드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그 트레이드로 Gasol은 Houston, Odom은 Hornets로 이적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트레이드로 Bryant는 최고의 어린 포인트가드였던, 어쩌면 Shaq 이후 Bryant 옆에 뛰게 될 선수 중에 가장 뛰어난 선수가 될 자질을 갖춘 Chris Paul을 동료로 맞이하게 되었다. 딱 한 가지 문제만 빼놓고 말이다.
당시 리그 사무국은 Hornets를 위탁 운영하고 있었다. 이 트레이드에 대한 다른 팀들의 불평과 불만이 커져가자, David Stern 커미셔너는 이 트레이드 승인을 거절했다. Stern이 농구라고 부르는 이유들 때문에 말이다.
Paul이 Lakers가 아닌 다른 LA 팀으로 가버리는 와중에, Lakers는 이제 두 명의 중요한 선수들을 달래줘야 했다. 이 두 선수들은 구단이 자기들을 버리려고 했다는 사실에 매우 실망했다.
Odom은 Lakers가 자신과 연결된 고리를 끊었다는 점에 엄청나게 배신감을 느꼈고, 새로운 팀을 찾는 것을 서둘러 달라고 했다.
그래서 Lakers는 올해의 식스맨상을 수상한 선수를 Dallas Mavericks로 트레이드 했다. 받은 것은 겨우 보호된 1라운드 지명권 1장이었다.
Mike Brown은 Odom을 잃은 채, 첫 번째 시즌을 맞이했지만 생각보다 무난한 첫 번째 시즌을 보냈다.
Bryant, Gasol, Bynum은 모두 잘 뛰었다. Lakers는 서부 컨퍼런스 3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1라운드에서 Denver Nuggets를 꺾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2라운드에서 패배했다.
이번에는 Oklahoma City Thunder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2012년 트레이드 마감시한을 앞두고 Lakers가 보여준 모습이었다.
Lakers는 Paul의 트레이드가 무산된 이후, 계속 포인트가드진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Fisher와 1라운드 지명권을 넘겨주고 Jordan Hill을 받아왔다. 그리고 나서 드래프트 지명권을 더 얹어서 유망했던 젊은 포인트가드 Ramon Sessions를 영입했다.
그런데 Sessions는 LA에서 실망스러웠고, 그 해 여름 자유계약 선수 신분을 얻어 팀을 떠났다.
그래서 1라운드 지명권 여러장을 포함해 많은 자산을 소모했음에도 Lakers에게 돌아온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이 시즌은 Bryant가 Lakers 프런트의 Gasol을 다루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던 시기였다.
Jim Buss는 Kupchak 단장 주변 직원들의 업무를 뒤섞기 시작했고, Jackson의 잔재를 완전히 지우려고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Jackson은 여동생의 남자친구였다.
CBS의 Ken Berger는 당시 Lakers를 가리켜 "족벌주의와 비겁함이 가득한 곳"이라고 했다.
뭐, 어쨌든 그 곳은 매우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그 해 7월, Lakers는 노장 포인트가드 Steve Nash를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그 과정에서 드래프트 지명권 몇 장을 더 잃었다.
8월에는 소문으로만 돌던 트레이드가 현실화 되었다.
4개 구단이 연루된 트레이드로 Bynum은 76ers로 이적했고, Lakers는 Dwight Howard를 얻었다. Howard는 만기 계약이긴 했지만, 슈퍼스타 센터였다.
Lakers는 미래 대신 38세의 포인트가드와 곧 FA가 되는 센터를 얻었다. 이제 Lakers는 무조건 우승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팀이 되었다.
전문가들은 Lakers를 보고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당시 Sports Illustrated紙는 시즌 프리뷰 특집호에서 표지로 Lakers를 선정했다. 팬들에게 재미를 약속하는 팀이 Lakers라고 했다.
음, Howard는 등 수술의 재활 과정에 참가하느라 트레이닝 캠프와 프리시즌의 대부분을 빠졌다. 이건 별로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다.
두 번째 경기에서 Nash가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이것도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다. 시즌이 개막되자 Lakers의 수비는 최악이었고, 프린스턴 오펜스를 이식하려던 Brown의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Jim Buss는 Brown의 전술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했다. 그래서 겨우 5경기만에 Brown을 해고했다. Jim Buss는 새로운 감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도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다.
Jeanie Buss는 구단이 자신의 남자친구였던 Jackson을 다시 데려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Jim Buss는 그럴 생각이 없었고, Jeannie는 또 다른 스타 감독이자 Lakers의 라이벌팀의 감독이었던 Mike D'Antoni가 Lakers의 새로운 감독이 되는 것을 지켜보며 배신감을 느꼈다.
트레이닝 캠프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D'Antoni는 자신의 전술을 Lakers에 주입시키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선수들은 부상으로 쉬는 시간이 많아졌고, 자존심 강한 선수들이 부딪히기 시작했다. 거기에 Howard와 Gasol의 조합은 두 선수의 자존심 싸움으로 예상만큼의 시너지를 내지 못했다.
2013년 2월 Jerry Buss가 8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자녀들 사이의 알력다툼은 생각보다 더 복잡해졌다.
지금까지 한 얘기들 중에 재미있는 얘기가 있었을까?
올스타전 이후, Lakers가 반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 때 Bryant의 아킬레스건이 파열됐다.
Lakers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할만큼의 승리를 기록했지만, San Antonio Spurs에 스윕당했다.
Lakers가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탈락한 것은 2007년 이후 처음이었다.
오프시즌이 시작되었지만, Lakers는 1라운드 지명권이 없었다. 샐러리캡의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Lakers는 다시 달려야 했다.
D'Antoni 감독은 트레이닝 캠프부터 팀을 지도할 수 있었고, Bryant가 건강히 돌아온다면 Lakers가 다시 발전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Howard는 FA였고 D'Antoni, Bryant와 다시 만날 생각이 없었다.
Lakers는 Howard에게 어떤 팀보다 많은 돈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Howard를 잔류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Howard는 Houston Rockets와 계약을 체결했다.
그 때 Lakers는 뼈만 남았음을 깨달았다.
Lakers의 레전드 Magic Johnson은 이미 2014년 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Lakers는 샐러리캡 여유가 조금 생길 전망이었다. 그리고 Lakers는 2010년 Finals의 영웅 Ron Artest를 방출했다. Artest는 그 때 Metta World Peace라고 불렸다.
그리고 Lakers는 소규모 계약을 몇 건 성사시켰는데 Swaggy P도 그 중 한 명이었다. Bryant가 아킬레스건 부상에서 돌아온 지 1주일만에 무릎 부상을 당하면서 Swaggy P는 중요한 선수가 됐다.
부상과 부진은 Lakers를 27승을 거두는 동안 55번의 패배를 경험하게 했다. 구단 역사상 최악의 기록이었다.
이 27승 중에는 Lakers가 너무 많은 부상 선수때문에 Chris Kaman이 벤치를 침대처럼 사용했던 경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55패 중에는 Clippers에게 당한 48점차 대패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팀에는 Chris Paul이 있었고, 이제 LA를 대표하는 농구팀은 Lakers가 아니라 Clippers인 것처럼 보였다.
시즌 내내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고, 더 문제는 D'Antoni와 Gasol의 사이가 여전히 좋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오프 시즌에 D'Antoni와 Gasol 모두 팀을 떠났다.
Lakers는 이제 로터리 추첨에 참가하는 팀이 되었다.
2013년, 2014년의 Lakers는 노장들이 팀에 늘어나고 있음에도, 영광의 시절을 함께 했던 Bryant가 팀의 미래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는 믿음이 구단 내부에 있었다.
무릎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기 몇 주 전에, Bryant는 Lakers와 2년 연장계약을 체결했다.
Buss 가문의 사람들은 나이 들어가는 레전드를 중심으로 빠르게 팀을 재건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Jeannie가 구단 경영에 더 큰 목소리를 냈고 오빠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면서 압박감은 더욱 심해졌다.
Jim은 자신과 Kupchak 단장이 상황을 반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Jim Buss는 3~4년 안에 Lakers를 다시 우승 후보로 만들지 못한다면, 팀을 떠나겠다고 했다.
그래서 2014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7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Lakers는 건장하고 다재다능했던 Kentucky 대학교 출신의 Julius Randle을 지명했다.
그리고 샐러리캡의 여유를 이용해서 슈퍼스타들을 쫓기 시작했다.
Jim과 Kupchak이 Lakers를 빠르게 우승후보로 만들 절호의 기회였다.
이들은 FA였던 LeBron James를 원했다. 하지만 James는 친정팀이었던 Cleveland를 선택했다.
이들은 Kevin Love를 트레이드 하고 싶었다. 하지만 Love는 결국 LeBron의 옆을 선택했다.
이들은 FA였던 Carmelo Anthony를 원했다. 하지만 Anthony는 New York Knicks로 돌아가기로 했다.
FA 시장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던 Lakers는 결국 Jeremy Lin과 Carlos Boozer를 영입했다.
새로운 감독으로는 Lakers 출신이었던 Byron Scott을 데려왔고, Bryant가 건재한 가운데 미래의 스타였던 Randle도 준비를 마쳤다. Nash가 남을지는 몰랐지만, 여튼 유망한 어린 선수들도 많았다.
그리고 Randle은 리그 데뷔전에서 다리가 부러졌다.
Bryant도 부진을 거듭한 끝에 어깨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시즌 내내 1경기도 출장하지 않았던 Nash가 은퇴를 선언했고, Scott의 Lakers는 패배에 익숙한 팀이 되었다.
이들은 직전 시즌의 기록을 경신하며 구단 역사상 최악인 21승 61패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래서 로터리 픽과 함께 하는 오프시즌이 또 돌아왔다. 이번에는 Ohio 주립대학교 출신의 포인트가드 D'Angelo Russel을 지명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Lakers는 슈퍼스타를 영입하길 열망했다.
Lakers는 LaMarcus Aldridge와 DeAndre Jordan으로 빅맨 라인업을 꾸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들 모두를 영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Lakers는 Aldridge를 영입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Adam Levine이 Aldridge의 이름이 새겨진 Lakers 유니폼을 입기도 했다.
하지만 Aldridge는 우승팀에서 뛰고 싶어했고, Lakers는 더 이상 우승후보가 아니었다.
Jordan의 경우는 좀 달랐지만, 어쨌든 Jordan도 Lakers로 오지 않았다.
그래서 또 다시 Lakers는 대안을 모색해야 했고, Lakers가 영입한 선수들은 Roy Hibbert, Lou Williams, Brandon Bass 였다.
다시 한 번 Byron Scott은 Lakers의 감독이 되어 늙은 Bryant와 나이 어린 신입생들을 지도해야 했다.
끔찍한 일은 계속 됐다. Lakers는 시즌 개막 첫 15경기에서 겨우 2번 이겼다. 그리고 Bryant는 이제 Lakers와 연장계약은 없다고 선언했다.
은퇴할 시간이었다.
Bryant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2015-16시즌은 다시 한 번 최악이었다. Bryant의 은퇴 시즌이 17승 65패로 마무리 되었기 때문이었다.
Bryant와의 작별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Lakers가 조급하게 단기간의 실적을 위해 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진짜 리빌딩을 할 수 있었다.
패배, 젊음, 샐러리캡의 여유는 더 많은 패배와 젊음, 그리고 더 많은 샐러리캡 여유를 만들어 냈다. Lakers는 몇 년간 새로운 선수를 영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몇 년 안에 Lakers를 다시 우승후보로 만들겠다던 Jim Buss의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Jim의 약속을 거의 잊어버린 것 같았다.
Jeanie는 그 약속을 잊지 않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2017년 Jeanis는 Kupchak 단장을 해고 했고, 오빠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리고 Magic Johnson과 Rob Pelinka를 프런트진의 전면에 내세웠다.
Lakers가 로터리 팀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사람들과 Lakers가 다시 우승후보가 되길 바라는 사람들 사이의 공통점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Lakers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거지?
음, 일단 서부 컨퍼런스에서는 거의 다 따라왔다.
Lakers는 우승을 노리기 위한 핵심 선수진을 차근차근 꾸려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 받는 선수들과 실망스러운 영입과 방출이 있었다.
Bryant가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불태우는 동안, 건강이 악화되었고 Bryant의 사이드킥을 위해 프런트진은 시끌벅적했다.
Bryant의 은퇴가 그 난장판을 한 번에 고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Bryant의 은퇴로 유기적인 리빌딩이 가능해졌다.
그 사이의 시간은 꽤 암울했다.
하지만 다시 찾아온 Lakers의 첫 번째 전성기는 그걸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었고, Lakers의 팬들은 좀 더 많은 전성기가 찾아오기를 희망하고 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슈퍼스타의 마지막 길이 빛났다고 생각했던건 결국 은퇴경기 때문에 제 기억이 미화된거였네요.
그 코비마저도 이런 어려움을 겪었으니… 남은 레전드들은 깔끔?한 마무리를 해나가면 좋겟어요
크리스 폴 트레이드 베토부터 꼬였죠
폴-코비-하워드(바이넘이랑 이미 트레이드 설이 있었던 때니까요)였다면 코비 말년까지 쭉 강팀으로 남았을거 같네요
다시 생각해도 폴 트레이드가 왜 안되었던건지...ㅡ.ㅜ
라몬 세션스 영입할때 기대했던 레이커스 팬들이 기억나네요 덕분에 과거여행 좀 했습니다 ㅎ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