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fiba.basketball/news/asian-legends-series-hur-jae
이제까지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파디 엘 카디브, 야오밍이라는 두명의 2000년대 레전드들을 얘기했다. 이제는 시계바늘을 좀 더 예전으로 돌린다. 한국의 레전드-선수로도, 감독으로- 허재에 대해 얘기해보자.
한국에서 그는 '농구대통령'으로 통한다. 그는 한국 농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자 기둥이다.
1965년 9월 28일 춘천에서 태어난 허재는 3학년때 농구를 시작했다. 이미 그때부터 왼손잡이 볼핸들러, 슈터로써 싹수를 보였다.
키가 6'2/188cm가 된 시점에서 그는 코트위 가장 피지컬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였지만, 그의 부드러운 기술들과 게임에 임하는 격렬한 태도들을 보여주었다.
선수로써 허재는 독보적이며 인내심이 강한 선수중 한 명이다. 기아와 원주에서 1988~2004년까지 뛰었으며, 국가대표로 수차례 참가했다.
그의 첫 국가대표는 1984년 FIBA 유스 아시아 컵이였고, 서울에서 열렸던 대회에서 한국은 금메달을 차지했다.
이후, 허재는 성인 국가대표팀에 소속되었다. 85년 말레이시아-쿠알라룸프르 FIBA 아시아컵에서 필리핀에 이은 2위를 차지했고 1986년 FIBA 월드컵에 참가자격을 얻었다.
월드컵에서 허재는 놀라운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20살 가장 젊은 선수가 팀에서 3번째 득점을 해냈다. 토너먼트 최고의 활약은 파나마를 상대로 111-103으로 패배한 경기, 22득점을 넣은 경기였다.
당연하게도, 같은해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선정되었고 중국에 이은 2위를 차지했다.
중앙대학교에서의 마지막해, 허재는 태국 방콕에서 87년 열린 아시아컵에 대표팀으로 참가했다. 7번을 이겼고, 결승 연장 접전끝에 중국에 86-79로 패배했다. 하지만 허재에게 있어서는 상징적인 경기였는데, 33득점을 퍼부었고 토너먼트 올스타에 뽑혔다. (Philippines' Alvin Patrimonio, China's Zhang Bin and Sun Fengwu and compatriot Lee ChungHee)
그 다음 무대는 88년 서울올림픽. 그에게는 첫 올림픽 무대였다. 한국은 잘 싸우지 못했다. 그룹 스테이지에서 전패에 그쳤다. 순위 결정전에서 중국과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을 꺾고 아쉬움을 달랬다. 허재는 여전히 팀의 주 득점원이였다. 평균 17.1득점을 넣었으며, 경기당 거의 세개의 3점을 기록했다.
올림픽 이후 허재는 기아에 입단했다. 7회 챔피언에 올랐고 3회 MVP에 선정되었다. (2회인듯...? 91-92 94-95)
1997년 KBL 출범이후 허재는 가장 거물이였다. 기아는 첫해 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에는 대전 현대와 7차전 접전끝에 준우승에 그쳤지만, 허재는 활약을 인정받아 파이널 MVP에 선정되었다.
프로 선수로써 허재는 90년대후반 2000년대 초반 빛나는 이름 가운데 하나였고 두번의 KBL우승, 2000년 베스트5, 1998년 파이널 MVP를 차지했다.
2004년 허재는 많은 업적을 남긴채 은퇴했다. 그는 이듬해 전주 KCC의 감독으로 복귀했다. 10시즌을 재직했으며 09년 11년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허재의 국가대표 경력으로 돌아와서, 1998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도 뛰었다. 그는 당시 31살이였고, 팀의 고참급에 해당했다. 하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한방을 가지고 있었고, 8.8득점에 5.2어시스트에 37.5%의 3점을 기록했다.
1990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24살의 허재는 뛰어난 득점원이였다. 이집트를 상대로 54득점을 올렸는데 오늘날까지도 이 기록은 피바 월드컵 역사상 최다득점으로 기록되어있다.
그의 마지막 피바 월드컵은 94년 캐나다 월드컵이였는데, 또 한번 득점원으로써 빛났다. 대회 19.4점을 기록했고 8경기중 세번을 승리했다. 대회 탑 5의 득점원이였고 빅네임- 호주의 Andrew Gaze, 크로아티아의 Dino Radja와 이름을 나란히 했다.
세계무대에서 뿐만 아니라 아시아무대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여줬다. 6번의 피바 아시아컵, (앞서 언급한 85년, 87년을 포함) 3번의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89년 91년 아시아컵에서 두번 모두 중국에 이은 2위를 차지했다. 93년 대회는 건너뛰었지만 95년 복귀했다. 이 대회에서 뛰어난 활약으로 중국을 거의 무너뜨릴뻔했었고, 토너먼트 득점왕과 MVP를 차지하며 기억에 남을만한 대회를 치뤘다.
97년 사우디에서 아시아컵에서는 빠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은 28년 무관끝에 우승을 해냈다. 그리고 99년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컵에 복귀하여 중국에 이은 2위를 차지했다.
중국은 아시아컵, 아시안게임 모두 허재에게 있어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보였다. 중국은 90년 한국을 4강에서 만나 탈락시켰고 94년 결승에서 또다시 한국을 꺾었다.
반면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써 허재는 조금 더 성공해냈다. 08-09년 처음으로 사령탑을 맡아 09년 동아시아 게임과 09년 동아시아 챔피언십에서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11년 우한 피바 아시아컵에 다시 사령탑으로 복귀한 허재는 중국, 요르단에 이은 3위를 차지했다. 그 이후 공백기를 가진후 16년 복귀했다. 16년 아시아챌린지에서 이란에 이은 준우승을 거뒀고, 17년 레바논 아시아컵에서는 뉴질랜드와의 대결에서 80-71로 승리하며 3위를 거머쥐었다. 허재에게 있어서는 그의 장남, 허웅이 20득점을 올리며 톨 블랙스를 처음으로 무너트린 의미가 남다른 대회였다.
이듬해 허재는 18년 아시안게임에서 다시 사령탑을 맡았다. 한국은 첫 4경기를 이겼지만 이란에게 4강에서 80-68로 발목을 잡혔다. 이후 대만과의 동메달 결정전 89-81로 승리하며 3위를 차지했다.
이는 허재가 국가대표 감독으로써 마지막 경기였다. 두 아들 허웅과 허훈이 모두 국가대표팀으로 참가한 특별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허재는 선수와 감독으로써 큰 성공을 거두었고 두 아들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유소년 대회와 성인 국가대표로써 각기 성취를 이뤄내고있다.
많은 아시아팀, 심지어 세계 레벨의 팀에게도 허재는 불을 뿜을 수 있는 무서운 상대로 기억되고있다. 그는 현재 TV해설자로써 한국 농구의 저명인사로 계속해서 활동 중이며(예능 얘기인듯...?)
허재의 '농구대통령'으로의 유산은 아직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느껴지고있다.
첫댓글 얼마 전 올라왔던 글을 번역했습니다. 부정확한 정보도 많고 깊은 수준의 기사는 아니지만, 외국에서 한국 선수를 이렇게 언급하는 걸 번역해보는 건 처음이네요. 제 번역은 퀄이 낮은 건 항상 감안해서 봐주시길~
두번 째 사진은 양동근 선수인 줄 알았어요 ㅎㅎ닮았네요.
좋은 글, 추천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래도 직전 게시물보단 낫네요 ㅎㅎ 추천 감사합니다
제가 간단하게 소개했던 칼럼인데 이렇게 정식으로 번역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제 생각에도 내용은 보통 아는 내용이고 크게 신선한 건 없지만, 이렇게 허재를 다룬다는 사실 자체가 꽤 흥미로운 거 같습니다. 아시아 내에서 허재의 위상을 알 수 있기도 하구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