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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싱어의
다윈주의적 좌파론과 혁명적 공산주의
- 『다윈의 대답 1 -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 비판
『다윈의 대답 1 –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 피터 싱어 지음,
『A Darwinian Left: Politics, Evolution and Cooperation』, Peter Singer, 1999, Darwinism Today Series.
이 글에서는 싱어와 내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만 쓸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싱어의 이 책의 내용에 대체로 반대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나는 다윈주의적 좌파에 대한 싱어의 생각 중 많은 부분에 상당히 공감한다. 내가 이 글에서 제기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싱어의 책도 꼭 같이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싱어의 이 책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특히 르원틴(Richard Lewontin)과 굴드(Stephen Jay Gould)의 헛소리(예컨대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좌파들은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한국어판의 번역의 질이 상당히 떨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나의 글 「『다윈의 대답 1 -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
나는 다윈주의적 좌파라는 피터 싱어의 기획과 비슷한 취지로 『나는 왜 극좌파인가(나는 왜 다윈주의적 공산주의자인가)』라는 글을 쓰고 있다. 나의 기획이 피터 싱어와 핵심적으로 다른 점은 피터 싱어가 개혁주의자인 반면 나는 혁명적 공산주의자라는 점이다.
피터 싱어는 소련과 동구권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에 지배자들이 지겹게 떠들어대던 소리를 되풀이하고 있다.
20세기에 인간의 완전화라는 꿈은 스탈린주의 러시아에서, 문화혁명기의 중국에서, 폴 포트(Pol Pot) 치하의
캄보디아에서 악몽으로 변했다. 이 악몽으로부터 좌파는 동요하며 깨어났다. 덜 끔찍한 결과로 이어진, 새롭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는 시도
– 카스트로(Castro)의 쿠바, 이스라엘의 키부츠 – 가 있었지만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다. 완전화의 꿈은 뒤로 제쳐져야 했으며 이와 함께 다윈주의적 좌파를 막는 장애물 하나가 제거되었다. (57쪽, page 31)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했으며 따라서 공산주의에
대한 희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싱어가 보기에 공산주의는
너무나 이상적이며 인간 본성을 고려해 보았을 때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 높은 지위를 탐하는 것은 인간 본성이다. 따라서 어떤 사회에서도 완전한 평등은 불가능하다. 둘째, 공산주의 사회는 무임승차 때문에 붕괴할 것이다.
피터 싱어는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했던” ‘공산주의’ 정권들이 붕괴했다는 사실에서 마르크스주의가
틀렸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것과 마르크스주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소련에 대해서는: 『소련 국가자본주의』, 토니 클리프
동유럽에 대해서는: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 크리스 하먼
중국에 대해서는: 『천안문으로 가는 길』, 찰리 호어
북조선에 대해서는: 『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
또한 “이미 여러 번 실패했으니 포기하자”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민주주의를 위한 시도들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공포 정치를 거쳐 나폴레옹의 독재로 이어졌다. 현재의 미국의 민주정치는 우민 정치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거의 모든 미국인들이 민주당(매우 사악한 정당)과 공화당(그보다 더 사악한 정당)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의 사례는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는 이상에 불과하니까 그냥 군주 정치로 만족하자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현재의 민주주의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개선할 방법을 찾아보자고들 말한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문제일 때에는 거의 모두가 ‘실패했으니까 포기하자’는 식으로 말한다.
바쿠닌(Bakunin): 전체 인민이 국가의 대표들과 통치자들을 보통 선거로 뽑는 것 – 이것이 민주주의 진영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최종 발언이다. 이것은 통치하는 소수의 독재가 그 뒤에 숨어 있는 거짓말이다. 이 거짓말은 이 소수가 소위 인민의 의지의 표현으로 보이도록 하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하다. (11쪽, page 3)
바쿠닌: 그리고 국가의 높은 곳에서 그들은 노동자들의 천한 세상 전체를 경멸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때부터 그들은 인민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을, 그리고 인민을 통치할 자기들의 권리들을 대표할 것이다. 이것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인간 본성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 (12쪽, page 4)
지난 세기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아이러니는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했던 정부들의 기록이 마르크스(Marx)가 잘못 생각했음을 보여주었으며 바쿠닌의 ‘권위에 대한 악몽’이 가차 없이 예언적이었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권위의 문제에 대한 바쿠닌 자신의 해결책도 [나중에 추종자들에 의해] 의심의 여지 없이 잘못된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가 마르크스와 그 추종자들의 견해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 본성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다. (13쪽, page 4)
독재와 민주주의의 문제에 있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단지 인간의 선함에만 의존했던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지위에 대한 인간의 집착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장치들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에 대해서는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참조하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소위
자유 민주주의) 옹호자들이 내세우는 제도적 장치들을 옹호한다. 나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그람시, 룩셈부르크 등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보지만, 스탈린, 마오쩌뚱,
첫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다. 관료들이 부패할 때 그것을 까발릴 수 있는 언론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직자 선거를 옹호한다. 관료들이 부패할 때 그들을 뽑지 않을 권리가 국민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아래로부터의 통제가 여기에서 그치는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더 나아간다.
첫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관료(공산주의 사회에서는 회사의 사장도 관료다)들의 월급을 노동자의 평균 임금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부자가 되기 위해 고위 관료가 되려는 사람들을 줄일 수 있다.
둘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선거권의 대폭 확대를 주장한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뿐 아니라 회사의 사장과 군대의 장성도 투표로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세상을 움직이는 두 가지 힘(총과 돈)을 통제하는 자들이 선거 즉 아래로부터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
셋째, 공산주의 제도 자체가 지위의 남용을 줄인다. 갑부가 없다면 거액의 뇌물을 바칠 수 없다. 이윤 창출을 통해 거금을 벌 수 없다면 뇌물을 바칠 이유도 줄어든다.
싱어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무임승차로 이어진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는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윤리적 원칙은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마지막 언급 중 하나이며 여전히 유토피아적인 전통에 굳건히 서 있다. (47쪽, page 25)
인간 사회에 쉽게 먹고 사는 방식들이 있다면 그런 방식들을 찾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용어법을 쓰자면 만약 ‘봉(suckers)’이 있다면 그를 이용해서 번성할 ‘갈취자(cheats)’ 또한 있을 것이다. ‘봉’이 반드시 개인일 필요는 없다. 제도일 수도 있고 심지어 국가일 수도 있다. 갈취자들이 먹고 살기가 더 쉬울수록 그런 이들은 더 많을 것이다. 다윈 이전의 좌파(pre-Darwinian left)는 갈취자들의 존재가 가난, 교육의 부족 또는 반동적 자본주의적 사고 방식의 잔재 탓이라고 할 것이다. 다윈주의적 좌파는 이 모든 요인들이 갈취의 정도에 차이를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갈취자들이 번성하지 못하도록 보상 체계를 바꾸는 것이 영구적 해결책임을 이해할 것이다. 이것은 다른 쪽 뺨도 내미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88쪽, page 51)
싱어는 이분법적으로 사고한다. 그가 보기에는 현대와 미래 사회에는 두 가지 체제밖에 있을 수 없다. 하나는 자본주의고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다. 그가 보기에 공산주의는 너무나 이상적인 원칙인 ‘각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는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원칙에 의해서만 운영된다. 그리고 다음 구절에서 보여지듯이 이런 원칙은 무한하게 선한 인간을 가정한다.
좀 더 이상주의적인 좌파는 앙갚음(Tit for Tat) 전략을 취하는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협조하지는 않는다고 아쉬워할 것이다. (87쪽, page 51)
인간 본성은 그렇게 선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무임승차가 판을 칠 것이라는 것이 싱어의 생각이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썼듯이 싱어가 생각하는 이상주의적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중간(?)이 존재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적 원칙(‘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과 레닌의 부르주아적 권리(‘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대로 받는다’)가 공존할 수 있다. 레닌은
혁명이 성공한 후 세월이 많이 지나면 공산주의적 원칙만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혁명 직후의
원칙에 대해서는 그리 몽상적이지 않았다. 나는 먼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생략해도 된다고 보며 두 원칙이
공존하는 레닌의 그림에 동의한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극단적인 협조 전략(다른 쪽 뺨도 내미는 전략)을 취하지 않음을 싱어는 무시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가 계급을 기생 계급이라고 불러왔으며 이것은 게임이론가들이 말하는 무임승차자와 같은 말이다. 마르크스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인간의 협조 본능뿐 아니라 공격 본능(자본가에 대한 복수심이나 시기심)에도 의존했다는 점이다.
피터 싱어는 무임승차자가 복지제도나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만 존재한다고 보는 듯하다.
만약 공동체가 기업을 소유하면 그 기업의 관리자는 그 기업의 성공으로부터 이득을 챙길 수 없다. 관리자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기업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기껏해야 비효율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광범위한 부패와 도둑질일 것이다. 기업을 사유화하면 그 기업의 소유자가 기업의 성공에 대응하는 보상을 반드시 받는다. 따라서 관리자는 그 기업이 되도록 효율적으로 운영되도록 조치를 취할 것이다. (71쪽, page 41)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무임승차 문제를 해결한다.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경향에 부합하게 [사회를] 운영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시장 경제는 인간이 열심히 일하고 이니셔티브를 발휘함으로써 자신의 경제적 이해 관계를 추구할 수 있을 때에만 그런 행동을 보일 것이라는 생각에 바탕하고 있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말했듯이 ‘우리가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주간 주인의 관대함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이해관계 추구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이해 관계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경쟁자보다 더 나은 상품을 생산하거나 비슷한 상품을 더 싸게 생산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70쪽, page 40)
자본가들은 스미스의 말대로 품질 개선이나 가격 인하를 통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길도 있다. 뇌물을 주거나, 사기를 치거나(연예인을 동원한 이미지 광고나 과장 광고), 협박을 하거나(제국주의 전쟁), 착취율을 높임으로써(노동자를 더 쥐어짬으로써)도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며 실제로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일상사다. 이것이 무임승차가 아니고 무엇인가?
“갈취자들이 번성하지 못하도록 보상 체계를 바꾸는 것이 영구적 해결책임”을 공산주의자들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으며 공산주의가 바로 그런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공산주의는 갈취자인 자본가들이 번성하지 못하는 보상 체계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세 가지 분배 원칙이 작동한다. 자본에 따른 분배, 노동에 따른 분배, 필요에 따른 분배. 자본에 따른 분배는 엄청난 무임승차로 이어지며, 필요에 따른 분배는 가난한 사람들의 무임승차로 이어진다. 공산주의는 자본에 따른 분배를 없앰으로써 엄청난 무임승차를 없앤다. 반면 필요에 따른 분배는 강화된다.
자본주의에 대한 싱어의 묘사를 보면 그가 좌파를 자처한다는 점과 너무나 모순된다.
전체적으로 경쟁적인 요소에 초점을 맞추는 현대 시장 경제는 획득 욕망과 경쟁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다. 이 경제는 우리의 획득 욕망과 경쟁 욕망이 전체의 복지를 위해 작동하도록 하는 구조를 설계해왔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이것은 그런 욕망이 소수의 복지를 위해 작동하는 상황보다는 낫다. (72쪽, page 42)
자본주의가 소수의 복지를 위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물론 싱어가 모를 리 없다.
내가 여기서 포괄적으로 윤곽을 그린 좌파의 상과 양립할 수 있는 서로 다른 평등의 개념들이 많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의 윤리적 입장은 공리주의이다. 그리고 괴로움을 줄이라는 명령은 이 입장에서 직접적으로 도출된다. 공리주의자로서 나는 평등 자체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일정한 돈 예컨대 100 파운드가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거의 효용을 줄 수 없는 반면 매우 적게 가진 사람에게는 커다란 효용을 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한계 효용의 법칙에 매우 민감하다. (20쪽, page 9)
싱어의 지식이 해리되어 있을 뿐이다. 위의 구절처럼 노동자에 대한 자선을 호소할 때에는 엄청난 빈부격차에 대해 말하지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를 비교할 때에는 그런 것을 무시한다. 아니면 자본가들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피터 싱어는 자본주의 하에서 합법적으로 버는 돈(은행에 거금을 넣어놓고 놀면서 거금의 이자를 챙기는 것을 포함하여)이 모두 정당하다고 믿는 듯하다. 물론 싱어에게 직접 물어보면 싱어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 같다. 문제는 싱어의 지식이 해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100파운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싱어는 결국 자선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 구절도 마찬가지다.
과시 소비로부터 좀 더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지위에 대한 생각을 바꿈으로써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강화할 수 있을까? (102쪽, page 59)
하지만 이것은 무임승차를 걱정하는 싱어의 생각과 모순된다. 100파운드는 게으른 가난뱅이에게도 “커다란 효용을” 줄 수 있다.
전통적으로 좌파의 핵심은 공산주의였다. 하지만 현실 ‘공산주의’의 몰락을 목격한 싱어는 공산주의를 실현할 수 없는 이상주의라고 보는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나름대로 좌파를 정의한다.
스피라(Spira)에게는 단순하게 말할 줄 아는 재주가 있다. 왜 반 세기가 넘도록 위에서 언급한 대의들을 위해 애썼느냐고 내가 묻자 그는 강자가 아니라 약자의 편에, 억압자가 아니라 억압 당하는 자의 편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군림 당하는 자의 편에 섰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 우주에 존재하는 엄청난 양의 고통과 괴로움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겠다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이것이 좌파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19쪽, page 8)
개념은 정의하기 나름이다. 하지만 싱어의 좌파 개념에는 알맹이가 전혀 없다. 그냥 “착하게 살자” 라는 말을 좀 더 멋있게 포장했을 뿐이다.
한나라당도 조선일보도 약한 자를 짓밟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좌파인가?
군주 정치를 옹호했던 사람들도 군주가 약한 자를 짓밟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이 염두에 두었던(또는 염두에 두었다고 말했던) 군주는 탐관오리를 혼내주고 약자의 편에 서는 군주였다. 그렇다고 군주 정치가 좌파 정치인가?
자본주의 옹호자들은 공산주의가 모두를 평등하게 가난해지도록 만든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적 경쟁이 고통과 괴로움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좌파인가?
좌파에게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공산주의의 몰락과 민주적 사회주의 정당들이 사회주의의 전통적 목표였던 생산 수단의 국유화를 포기한 것은 좌파에게서 두 세기가 넘도록 – 그 동안 좌파는 거대한 정치적 힘과 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이르렀다 – 아껴왔던 목표들을 빼앗았다. (14쪽, page 5)
어떤 면에서 이것은 좌익의 매우 축소된 전망이며, 유토피아적 이상을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에 대한 냉정하고 현실적인 견해로 대체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많은 좌파가 인간 본성에 대한 다윈주의적 이해가 암시한다고 가정하는 것들보다는 여전히 훨씬 더 긍정적인 견해이다. (109쪽, page 62)
이런 “매우 축소된 전망”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피터 싱어가 여러 가지 오류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싱어는 현실 ‘공산주의’가 공산주의를 위한 진정한 실험이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실패는 공산주의 자체의 실패가 된다. 싱어는 공산주의에서 독재와 무임승차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불가능하다. 싱어는 너무나 이상주의적인 공산주의(갈등이 전혀 없고, 필요에 따른 분배만 있는 사회)와 자본주의의 중간에 많은 사회 체제가 존재할 수 있음을 무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상주의적 공산주의를 포기하면 곧바로 ‘대안은 자본주의 밖에 없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 책에서 이런 축소된 전망에 대해 싱어는 구체적으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기껏 언급한 것은 위에서 인용한 자선을 통한 해결책이다.
공공 정책은 이런 좁은 경제적 의미의 이해 관계에 기반할 필요는 없다. 대신 필요한 사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또는 공동체에 속하고자 하는 널리 퍼진 욕구 –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보다는 협동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 에 기반할 수 있다. (72쪽, page 42)
서울대에 합격하는 것은 경쟁에서의 승리다. 이런 경쟁의 승리가 더 많은 수입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더 쓸모 있는 인간으로 대우 받는 데도 도움이 된다. 또한 도덕성 경쟁도 경쟁이다. 즉 누가 더 착하게 보이는가라는 경쟁도 있으며 이것은 협동하려는 성향으로 이어진다. 그래야 친구나 배우자로 선택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경쟁은 협동의 반대말이 아니다.
20세기 미국은 개인적 부에 대한 추구와 최고의 자리에 서는 것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의 목표로 널리 인식되고 있는, 경쟁적 사회의 전형이었다. (77쪽, page 44)
협동적 사회는 경쟁적 사회보다 좌파의 가치에 더 부합한다. (78쪽, page 45)
자본주의는 과연 공산주의보다 더 경쟁적인 사회인가? 봉건제에서는 신분이 상속되었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신분이 상속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지위를 둘러싼 경쟁이 도입되었다. 이런 면에서 자본주의는 봉건제보다 더 경쟁적인 사회다.
자본주의에서는 재산이 상속된다. 반면 공산주의에서는 재산의 상속이 금지된다. 비슷한 논리를 적용하면 공산주의에서 경쟁이 도입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상속될 재산이 자본주의에서는 자식에게 돌아가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그 재산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경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협동과 경쟁은 반대말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경쟁의 도입이었다. 세습 왕정에서 선거 제도의 변화, 사상 경쟁 등으로 경쟁은 더 많아졌다. 민주주의가 좌파의 가치에 더 부합한다는 것에 싱어도 동의할 것이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바뀌면서 경쟁의 양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봉건 영주 사이의 땅따먹기 경쟁에서 자본가들의 이윤 경쟁으로.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바뀌면서 경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양상이 바뀌는 것뿐이다. 어떤 분야에서는 경쟁이 늘어난다. 사장 자리가 세습에 의해 결정되는 자본주의와는 달리 공산주의에서는 투표로 결정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부모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자식이 경쟁에서 배제될 수 있다. 반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교육, 의료, 기본적인 의식주가 공짜이기 때문에 그런 아이들도 경쟁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경쟁 체제인 자본주의와 경쟁이 없는 공산주의라는 이미지는 잘못된 것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서는 경쟁의 양상이 다를 뿐이다. 자본주의의 경쟁의 핵심은 이윤 경쟁이다. 공산주의는 이윤 경쟁을 끝장낼 뿐이다. 그럼으로써 더 공정하고 부작용이 적은 경쟁의 길이 열린다. 신분제 폐지를 통해 더 정당한 경쟁의 길이 열렸듯이 말이다.
피터 싱어뿐 아니라 많은 학자들이 20세기 초에 지배자들 사이에서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 스펜서주의)가 대대적으로 유행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의 자본가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들이 모두 다윈으로부터 유래한 것은 아니다. 진화로부터 윤리적 함의를 이끌어내려고 안달이었던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는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에게 시장의 힘에 대한 국가의 개입에 반대하는 데 사용할 지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는 경쟁이 ‘때로는 개인에게 혹독할 수 있음’을 인정했지만 ‘경쟁이 모든 방면에서 가장 적합한 자가 생존한다는 것을 보장하기 때문에 인류를 위해서는 최선이’라는 근거로 경쟁을 정당화했다.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 Jr)는 다음과 같이 썼다:
대기업의 성장은 최적자의 생존일 뿐이다. … 어메리칸 뷰티 장미(American Beauty rose)는 그 주변에서 자라는 새싹들(early buds)의 희생을 통해서만 그 장미를 손에 쥔 사람의 원기를 북돋아 주는 화려함과 향기를 갖출 수 있다. 이것은 사업에 만연하는 사악한 경향이 아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과 신의 법칙의 작동일 뿐이다. (25쪽, page 11)
과연 20세기 초의 미국이 21세기 초의 미국보다 덜 종교적이었을까? 위의 인용문에서 록펠러는 신을 언급한다. 그는 창조론자인가? 아니면 진화론자인가? 다른 지배자들은 진화론을 떠올리게 하는 카네기와 록펠러의 말에 어떻게 반응했나? 나는 아직
Robert C. Bannister가 쓴 『Social Darwinism: Science and Myth in
Anglo-American Social Thought』와
Mike Hawkins가 쓴 『Social Darwinism in European and American Thought, 1860-1945: Nature
as Model and Nature as Threat』를
읽어보지 않았다. 특히 Bannister는 ‘사회적 다윈주의는 없었다’고 주장하는데 매우 흥미로운 주장이다. 물론 스펜서 같은 사람이 없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미국 지배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유별난 집착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이 기독교의 철천지원수인 진화론이나 진화론에 의존하는 설명에 호의적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우익이 진화론을 매우 좋아했다는 생각도 이상하지만 좌익이 진화론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도 이상하다.
좌파가 생존을 위한 다윈주의적 투쟁을 이런 무자비한 언어로 해석했다고 해서 좌파를 비난할 수는 없다. 1960년대까지 진화론자들 자신이 유기체의 생존과 번식의 성공 전망을 개선하는 데 있어 협동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무시했다. 존 메이너드 스미스(John Maynard Smith)는 그것이 1960년대까지 ‘광범위하게 무시되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19세기의 다윈주의가 좌파보다는 우파의 입맛에 더 맞았다는 사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 시대의 다윈주의적 사고의 한계 때문이었다. (38쪽, page 19)
피터 싱어가 잘 지적하듯이 진화론은 종교에 맞설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진화론의 대안은 신에 의한 창조라는 기독교의 설명이었기 때문에 다윈의 대담한 가설은 ‘인민의 아편’의 지배를 깰 수 있는 수단으로 움켜쥐어졌다. (40쪽, page 20)
또한 다윈 자신이 이타성과 도덕성이 진화한 인간 본성이라고 주장했다. 다윈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좌파는 ‘사악한 인간 본성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헉슬리(Thomas Huxley)의 입장을 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다르지만 연관된 견해 즉 신이 아담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창세기
싱어는 관념의 힘을 과대 평가하고 있다. 기독교라는 관념이 다른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결정했다고 보는 것이다. 오히려 상황은 반대다. 다른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기독교의 교리를 결정한 것이다. 다른 종을 막 대하는 것은 자연의 대세다. 신은 사후적 정당화에 이용되었을 뿐이다. 사자가 얼룩말을 막 대하는 것은 사자가 기독교를 믿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사자가 얼룩말을 열등하다고 믿기 때문도 아니다. 침팬지가 다른 무리의 침팬지를 죽이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종류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대하는 것이 적응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장애인을 천벌 받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장애인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장애인을 기피하는 것이 적응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렇게 설계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화권의 인간들이 ‘장애인은 천벌을 받은 것이다’ 라고 믿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