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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인 혐오 – 진화론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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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enophobia’는 번역하기 까다로운 단어다. ‘phobia’는 원래 ‘공포증’을 뜻하지만 ‘xenophobia’나 ‘homophobia’ 같은 단어의 경우에는 ‘혐오’ 또는 ‘혐오증’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어떤 사람은 ‘기피증’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xeno’를 보통 ‘외국인’으로 번역하는데 나는 ‘외부인’으로 번역하고 싶다. 그 이유는 국가가 없는 사냥-채집 사회에는 ‘외국인’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xenophobia’라는 단어를 동물에게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외부동물 혐오’라고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인간에 대해 다룰 때에는 ‘외부인 혐오’라고 번역할 것이다.
외부인 혐오 현상의 원인을 정확히 밝히는 것은 학문적 호기심의 문제만은 아니다. 인류는 여전히 심각한 인종, 민족, 종교 갈등을 겪고 있다. 만약 이런 갈등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밝힐 수 있다면 갈등을 줄이는 방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직 진화 심리학자들이 외부인 혐오 현상에 대해 밝혀낸 것은 거의 없는 듯하다. 또한 내가 진화 심리학자들의 이런 연구를 충분히 읽어본 것도 아니다. 여기서는 내가 본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수준에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가설의 검증은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앞으로 여러 학자들의 글을 더 읽는 대로 이 글을 고쳐 쓸 생각이다.
빈 서판(blank slate, tabula rasa)론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그리고 여전히 어느 정도는 인기가 있는 가설에 따르면 낭만적 사랑(보통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열정적 사랑)은 중세 말기의 기사들의 사랑에서 시작했으며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는 근대 국가가 출현하면서 생겼다. 둘 모두 황당하기 짝이 없다.
다른 집단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깔보거나, 혐오하거나, 적대감을 품는 일은 인류 역사에서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최근 몇 백 년 동안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구약 성경에는 다른 집단 사람들을 몰살하라는 끔직한 구절들이 있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에서는 다른 집단 사람들을 노예로 부렸다. 야노마뫼(Yanomamö)족은 부족 간에 끝없이 ‘전쟁’(현대적 의미의 전쟁과는 다르기 때문에 따옴표로 묶었다)을 벌이기로 유명하다. 상대적으로 훨씬 더 평화적인 쿵산족(부시맨)의 경우에도 다른 부족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에는 극도로 조심한다. 중국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주변에 사는 민족들을 오랑캐라고 부르며 경멸해왔다.
그 단위가 부족이냐, 민족이냐, 인종이냐, 국가냐, 종교 집단이냐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내집단(in-group)과 외집단(out-group)으로 인류를 나누고 외집단을 혐오해왔다는 것이다.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상당히 좁게 정의해서 지난 수백 년 동안에만 적용되도록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집단 간 충돌의 원인을 해명하고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짧게는 지난 1만년 동안의 인류 역사를 전체적으로 고찰해야 하며, 더 길게는 지난 수백만 년 동안의 인류의 진화 역사를 고찰해야 하며, 더 길게는 지난 수천만 년 더 나아가 수억 년 동안의 동물의 진화 역사를 고찰해야 한다.
한편으로 집단 선택론은 인간의 이타성과 도덕성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런 식의 설명의 시조는 다윈이었다. 집단 선택론에 거의 의존하지 않고 거의 모든 것을 개체 선택의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했던 다윈도 도덕성의 진화의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집단 선택론을 끌어들였다.
부족 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같은 부족 사람들에게 이타적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필연적으로 다른 부족 사람들을 해치도록 인간이 진화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집단 선택론은 이런 식으로 내부인에 대한 이타성과 외부인에 대한 혐오에 대한 손쉬운 설명을 제공한다. 내집단을 위한 자기 희생과 외집단을 해치기 위한 자기 희생 모두를 설명하는 것이다.
외부인 혐오를 이타적 희생이라고 부르면 뭔가 상당히 이상해 보인다. 하지만 남을 해치는 것도 이타적이라고 볼 수 있다. 남을 해치기 위해서는 비용이 필요하다.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하며 반격을 당할 수 있다. 자기 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서 다른 부족을 해치는 사람은 개체 선택의 측면에서는 손해를 보지만 자기 부족이 다른 부족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면에서 남을 해치는 것도 부족을 위한 일종의 자기 희생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집단 선택론이 거의 가망이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타성과 도덕성을 개체 선택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또한 외부인 혐오 역시 개체 선택으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두 경우 모두 개체 선택을 적용한 설명은 가설을 만드는 것조차도 훨씬 더 힘들다.
여러 심리학 실험을 통해 인간이 자동적으로 남녀와 인종(여기서는 일상적 의미의 인종을 뜻한다)을 구분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어떤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은 여자다” 또는 “저 사람은 남자다”라는 인식이 자동적으로 빠르게 일어나며 이것은 잘 기억된다. “저 사람은 백인이다” 또는 “저 사람은 흑인이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남녀를 재빨리 구분하는 이유는 적응론적 관점에서 볼 때 당연해 보인다. 이성과 짝짓기를 해야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점, 대체로 남자가 더 힘이 세고 공격적이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누가 남자고 누가 여자인지를 빠르고 정확히 구분하여 기억하는 것은 번식 경쟁에 매우 유용할 것이다.
반면 흑인과 백인을 재빨리 구분해서 얻는 적응적 이득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런 현상을 적응론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을 생각해내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과거 사냥-채집 사회에서는 다른 인종을 볼 기회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아예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통 수단이라고는 두 다리가 거의 전부였던 당시에는 이웃 부족민을 보는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물론 이웃 부족은 인종적으로 자신과 다를 것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남녀 구분 메커니즘의 경우와는 달리 인종 구분 메커니즘이 진화했을 리가 없다.
사람들이 흑인과 백인을 자동적으로 구분하고 잘 기억하는 것은 인종 구분 메커니즘이라는 적응(adaptation)의 작동 결과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다른 메커니즘의 부산물(by-product)일 것이다. 도대체 어떤 메커니즘 때문에 사람들은 흑인과 백인을 자동적으로 구분하는 것일까? 한 가설에 따르면 그것은 종 구분 메커니즘의 부산물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흑인과 백인을 다른 종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종 구분은 적응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침팬지와 짝짓기해서는 번식 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침팬지와 우정을 나누는 것도 번식의 측면에서는 좋은 생각이 아니다. 이 가설은 인간이 흑인과 백인을 자동적으로 구분하는 현상과 부합하기는 한다.
어쩌면 “흑인과 백인을 왜 자동적으로 구분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전에 과연 실제로 모든 인간이 인종을 자동적으로 구분하는지를 가려야 할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종주의에 찌든 사회에서 사람들이 교육을 그렇게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종적 차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냥-채집민이나 문명과는 동떨어진 후미진 곳에 사는 농경민이나 목축민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 보아야 좀 더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실험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침팬지에는 두 종이 있다. 하나는 일반 침팬지(common chimpanzee)이며 다른 하나는 보노보 침팬지(bonobo chimpanzee, pygmy chimpanzee, bonobo)다. 이 두 종은 현생 생물 중에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친족 종이다. 일반 침팬지가 보노보 침팬지보다 상대적으로 더 공격적이다. 집단 내 싸움도 더 격렬하며 집단 간 싸움도 훨씬 더 살벌하다.
일반 침팬지는 다른 부족 남자들을 몰살하고 여자들을 취하라는 구약 성경 구절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듯하다. 같은 무리에서 수컷끼리 싸움을 하는 경우에는 보통 한쪽이 항복하는 것으로 싸움이 끝나며 화해를 한다. 하지만 다른 무리의 수컷의 경우에는 쉽게 죽일 수 있는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죽인다. 아예 다른 무리를 몰살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 암컷의 기존 새끼들도 죽이며 암컷들은 침략자의 무리에 병합된다.
이런 현상들은 수컷들이 ‘전쟁’을 벌이는 이유가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이것은 사자 수컷들 사이의 싸움과 비슷한 면이 있다. 어른 수컷 사자는 기존의 무리에 침입해서 그 무리를 이끄는 수컷 사자와 결투를 벌인다. 그 결투에서 이기면 기존 수컷 사자를 쫓아내고 암컷의 새끼들을 죽인 후 짝짓기를 한다. 침팬지 수컷의 입장에서는 더 많은 암컷을 임신시키는 것이 적응적이기 때문에 이런 가설은 그럴 듯해 보인다.
여러 원시 부족의 경우에도 구약 성경 구절처럼 ‘전쟁’의 전리품으로 침략 당한 부족의 여자를 취한다. 아예 여자를 납치하는 경우도 있고 강간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현상은 문명국에서도 많이 벌어진다. 그래서 많은 진화 심리학자들이 사자, 일반 침팬지, 인간의 ‘전쟁’ 사이에 비슷한 논리가 작동한다고 믿고 있다. 농경이 시작된 이후의 인간의 경우에는 저장하고 있는 곡식이나 다른 재물을 약탈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냥-채집 사회에서는 저장하는 음식도 재산이라고 할 만한 다른 것들도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이런 요인은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에 다른 부족으로부터 탈취할 수 있는 자원은 영역과 여자가 전부였을 것이다.
이런 설명은 집단 선택론적 설명과는 다르다. 집단 선택론적 설명에 따르면 외부인 혐오 메커니즘의 기능 중 하나는 다른 부족을 절멸하거나 약화하는 것이다. 반면 바로 위에서 제시한 개체 선택적 설명에 따르면 다른 부족 절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부족민 중 여자를 취하는 것이 목적이다.
여자를 얻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는 개체 선택적 설명은 왜 거의 배타적으로 남자들이 ‘전쟁’에 참여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일반 침팬지의 경우에도, 사냥-채집민의 경우에도, 문명국의 경우에도 외부인과의 싸움에는 거의 수컷 또는 남자만 참여한다. 전리품으로 암컷 또는 여자를 챙길 수 있다면 여자에게는 별로 이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침팬지와 인간 모두 수컷이나 남자가 암컷이나 여자에 비해 훨씬 더 힘이 세다는 점, 암컷이나 여자는 거의 항상 자식을 안고 살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암컷이나 여자가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다른 이유를 굳이 들이댈 필요는 없어 보인다.
사냥-채집 시절의 우리 조상들이 같은 부족민끼리만 결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웃 부족들은 혈연으로 얽혀 있었을 것이다. 친족 선택의 논리 때문에 혈연은 평화와 협동의 압력으로 작용한다. 다른 부족에 자신의 동생 또는 외삼촌이 있다면 ‘전쟁’을 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일반 침팬지의 경우에도 족외혼(?)을 한다. 많은 암컷들이 사춘기가 되면 자기 무리를 떠난다. 이것은 근친교배의 위험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침팬지의 경우에도 다른 무리의 수컷이 자신의 친족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팬지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하다. 자신이 죽이는 수컷이 외삼촌일 수도 외삼촌의 자식 즉 사촌일 수도 있지만 그들은 별로 개의치 않고 죽인다. 아마 암컷을 얻는 이득이 혹시 친족을 죽임으로써 생기는 손해보다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과 침팬지는 중요한 면에서 차이가 난다. 인간은 복잡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이웃 부족민 중 누가 자신의 외삼촌인지 안다. 반면 침팬지가 이웃 무리에 사는 자신의 외삼촌 소식을 알 리는 없어 보인다. 이런 차이가 어쩌면 인간이 일반 침팬지보다 외부인을 덜 혐오하는 방향으로 진화하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현존 사냥-채집 사회에서도 집단 간 충돌은 심각하다. 상호 침략이라는 악순환에 빠진 야노마뫼족의 경우에는 이것이 너무나 명백하다.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부족의 경우에도 집단 간 충돌은 만만치 않다. 따라서 외부인이 인류 진화 역사에서 매우 위협적이었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위험한 외부인”이 상당한 선택압(selection pressure)을 형성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인을 경계하도록 설계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잘 생존했을 것이다. 따라서 외부인을 되도록 빨리 구분해내고 외부인을 보았을 때 경계 태세에 돌입하도록 진화했을 것이다. 즉 외부인은 불안 또는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연결되었을 것이다.
이런 설명은 그럴 듯해 보인다. 하지만 온전한 설명은 아니다. 왜 집단 간 충돌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해야 온전한 설명이 될 수 있다. 어쨌든 이런 설명은 집단 간 충돌의 이유에 대한 설명과는 어느 정도 독립적이다. 집단 간 충돌이 집단 선택의 논리 때문이든 개체 선택의 논리 때문이든 일단 집단 간 충돌이 꾸준히 존재한다면 외부인을 경계하도록 하는 메커니즘은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
외부인을 경계하는 것은 적응적인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여러 백인들은 흑인을 경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백인들이 흑인을 깔본다. 즉 흑인이 여러 가지 면에서 열등하다고 생각한다.
외부인을 깔보는 것은 적응적인 것 같지 않다. 이것은 맹수를 경계하는 것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만 “호랑이 그까이거 한 주먹 감이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별로 적응적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조상들이 진화했던 사냥-채집 사회에서 자기 부족과 다른 부족은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전투 능력에서도 비슷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인을 깔보도록 설계된 인간은 방심하다가 당할 가능성이 더 컸을 것이다.
히틀러는 흑인을 바보 취급했지만 유태인은 악마화했다. 즉 유태인이 똑똑하지만 사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고 보았다. 반면 흑인은 바보라서 그리 해롭지 않다고 보았다. 만약 인간이 다른 부족의 위협이라는 선택압에 따라 진화했다면 외부인을 악마화하도록 진화했을 가망성은 크지만 외부인을 깔보도록 진화했을 가망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상당히 광범위한 현상인 외부인 깔보기는 다른 식으로 설명해야 한다.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외국에서 살다보니 더 수긍이 잘 가는군요 ^^
I am just a guest and think you already read these but just in case,,,, http://www.psych.ucsb.edu/research/cep/papers/eraserace.pdf, and Navarrete & Fessler (2006) Evolution and Human Behavior, 27: 270-282.
흠... 사냥-채집사회에서도 내집단과 외집단은 구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리고 인종구분은 그 강화판이구요. 제 생각입니다만.
제목만 읽고서 ..제 생각을 말하자면...음... 외부인 혐오는 교육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상치 못한 인간의 생각과 반응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우리는 자극이 있어야 반응한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전에도 답을 달긴 했네요. 추가로 기재합니다.
원시부족에서 집단간의 충돌이 있는 것을 보면, 사냥-채집사회에서도 집단원의 구분은 하였다고 보는게 옳을 것 같습니다.
외부 남성은 미성숙한 아이에게(특히 남자아이) 큰 위협이 됩니다(여자아이는 추후 강간의 대상이 되는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침팬지 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서도 자주 관찰됩니다.
어떤 유행성 질병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외부인은 면역을 가졌으나 그자가 아닌자는 면역이 없는 경우).
이 경우는 일반적인 혐오와 두려움과도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것 같습니다.
본능에 의해 어느정도 결정되며, 반복적으로 접함으로써 공포나 혐오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보통 공포는 뱀에 대한 공포나 아이의 성인남성에 대한 공포처럼 선천적인 것도 있습니다만.
극복이 가능한 경우도 많습니다.
설명은 쉽습니다. 여태까지 접해 왔으나, 아직 살아 있으면 그것은 그렇게 해롭지 않다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익숙하지 않은것은 일단 경계하고 보는 것이 현명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