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無窮花) 無없을무-窮다할궁,
원산지: 대한민국, 중국, 인도, 꽃말: 섬세한 아름다움,
개설: 아욱과의 내한성(耐寒性) 낙엽관목. 꽃은 홑·반겹 등으로 아주 여러 가지이고, 꽃색깔도 흰색·분홍·빨강·보라 등 다양하며 무늬도 여러 가지로 화려한 꽃을 피운다. 꽃이 7월부터 10월까지 100여 일간 계속 피므로 무궁화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학명은 Hibiscus syriacus L.이다.
♠한반도에서 무궁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의 <산해경(山海經)>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책은 상고시대의 지리·풍속을 널리 조사해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책의 제9권 해외동경(海外東經)에 "군자의 나라가 북방에 있는데…… 무궁화가 아침에 피고 저녁에는 시든다"(君子之國在其北……有薰花草 朝生募死)라는 구절이 있다. 군자국은 한반도라는 것이 밝혀졌고, 훈화초는 무궁화를 일컫는 중국의 옛 이름이다. 또한 중국의 <고금주(古今注)>에는 "군자의 나라는 지방이 천리나 되는데 무궁화가 많더라"(君子之國 地方千里 多木槿花)라는 구절이 있다.
이상의 문헌만으로도 한반도에는 수천 년에 걸쳐 무궁화가 널리 자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신라의 효공왕이 897년 7월 당나라의 광종(光宗)에게 국서를 보낸 일이 있었는데 그 국서 가운데 신라를 자칭하여 근화향(槿花鄕)이라고 한 구절이 있다. 이 국서를 초한 사람은 중국에까지 문장가로 이름이 나 있던 최치원으로, 그의 문집인 <최문창후문집(崔文昌候文集)> 제1권에 그 초안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이미 신라시대부터 한국을 '무궁화 나라'(槿城)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궁화가 어떻게 한국의 나라꽃이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조선의 윤치호 등의 발의로 애국가를 만들면서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을 넣음으로써 조선의 나라꽃이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한민국이 수립된 직후인 1949년 10월 대통령 휘장과 행정·입법·사법 3부의 휘장을 모두 무궁화로 도안하여 문교부가 제정·사용했고, 1950년에는 태극기의 깃봉을 무궁화의 꽃봉오리로 제정했다.
♠명칭과 유래: 무궁화는 우리 겨레가 옛날부터 불러오던 꽃 이름이 아니고 한자음을 따서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의 명문장가 이규보(1168~1241)의 문집에 무궁화를 한자로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논란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無宮'으로 쓸 것인가 '無窮'으로 쓸 것인가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으나 결론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학자 홍만선이 지은 <산림경제(山林經濟)> 양화편(養花篇)에는 무관화(舞官花)로 기록되어 있다. '無宮·無窮·舞官'은 뜻이 모두 다르나 발음은 서로 비슷한데, 한문의 뜻이 좋은 무궁화(無窮花)로 자연스럽게 통일되어 씌어져 온 것으로 짐작된다.
무궁화라는 말도 원래의 이름이 아니고 무궁화와 비슷한 음의 단어였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전라남도 완도군 일부에서는 무궁화를 무우게라고 부르며, '槿'자도 '무우게 근'이라고 읽는다. 또한 수필가 이양하(1904~1962)의 저서에는 그의 친구가 무궁화나무를 '무강나무'라고 불렀다는 대목이 나온다. 따라서 오래 전부터 있던 고유의 이름이 무궁화로 기록된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무쿠게(牟久計)라고 쓰고 있는데, 삼국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우고 살기 시작했을 때 무궁화를 가지고 건너가서 이름을 그대로 부르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무쿠게는 목근(モクキン)의 한자 발음이 변한 것으로 추정하는 일본 학자들도 있다.
♠무궁화 연구: 1910년부터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통치하면서 역사와 전통문화를 차례로 말살해나갔다. 민족의 표상인 무궁화도 전국적으로 뽑아 없애버렸으며, 무궁화가 좋은 약용식물이라는 사실은 동서양에서 옛날부터 널리 알려져 온 사실인데도 유독 사람이 가까이하면 안질을 비롯한 각종 질병이 발생한다고 퍼뜨렸다.
일본 통치 아래서 온 민족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애국지사 남궁억은 강원도의 보리울에 은거하면서 많은 무궁화 묘목을 생산하여 전국적으로 배부해오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70노구에 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지금의 한국 보이 스카우트 연맹의 전신인 조선소년단·조선소년척후대는 스카프의 무궁화 도안이 문제가 되어 해체당하기도 했다. 또한 <동아일보> 제호의 무궁화 도안이 삭제되었고 중앙고등보통학교의 무궁화 교표가 사용 금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하고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화훼학 연구실에서 무궁화 연구가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1947년부터 유달영이 국내 벽촌에 드물게 남아 있는 무궁화를 전국적으로 수집하고, 세계 각국으로부터 여러 품종을 도입하는 한편, 신품종 육종과 생리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후에 같은 연구실에서 학위를 취득한 염도의·김일중 등이 유달영과 한 팀이 되어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연구에 박차를 가해 큰 성과를 올렸으며, 뒤이어 원예시험장과 임목육종연구소에서도 무궁화 육종에 착수했다. 현재 한국에 널리 보급되고 있는 무궁화 품종의 대부분은 서울대학교 화훼학 연구실에서 육종·도입한 것이며, 품종의 이름도 배달·화랑·아사달·사임당·한서·소월·진미 등 민족적 정서가 깃든 이름을 많이 붙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 전국의 화훼학계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무궁화연구회를 발족해 무궁화 연구와 보급을 시작했다. 출처: 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