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믿음을 악용하기 때문이다.
엡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라고 하였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행위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가 구원의 전제조건은 아니라도 구원받은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구속의 은총(恩寵)을 받아들이고 응답함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 믿음이란 말은 믿는 마음을 말하는 것인데 무엇이나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 죄악으로 말미암아 돌아가심을 믿는 그 믿음이 곧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물론 믿음으로 행치 아니하면 모든 것이 죄다. (롬 14:23). 그렇다고 행위는 무시해도 되느냐? 그렇지 않다. 행위는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받은 사람답게 합당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저자는 기록하기를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라고 하였다. (엡 4:1).
그러므로 본 절의 행위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행하는 인간의 윤리적인 노력을 의미한다.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인간은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자랑할 수 없다. (롬 3:27, 4:2).
그리고 본 절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신앙인의 고백과 실천 사이에는 항상 평형(平衡)이 유지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나 사람은 잘못 이해하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강조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편 저자는 기록하기를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라고 하였다. (116:12-14). 여기 은혜라고 한 것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라고 하였다. (엡 2:5). 즉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구원함을 받은 성도는 주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만분의 일이라도 은혜를 보답하겠다는 의지에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여호와께 돌려 드려야 할까? 하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성도답게 살아서 하나님께는 직접적으로 보답하고 사람에게는 덕(德)이 되게 살아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율법주의자와 같이 행위를 말하는 것은 은혜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로마서는 율법보다 믿음을 강조하고 야고보는 믿음만 강조하는 것은 원론적으로는 맞지만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기록하기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약 2:26).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영혼 없는 몸 즉 시체에 비유하고 있다.
이 비유는 산 믿음이라면 반드시 행함이 뒤따라야 하며 행함은 반드시 믿음에 기초해야 함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혹이 가로 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라고 하였다. (약 2:18-19).
본문은 반대자의 주장에 대한 야고보의 답변으로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여 설명하는 자에게 그 증거를 나타내 보이라는 호된 질책이다. 그러나 행함은 믿음으로부터 온 열매이기 때문에 결코 믿음과 행함은 서로 분리하여 나타날 수 없으며 믿음이 없이는 결코 행함이라는 결과가 입증될 수 없다.
단순히 입술로써 고백만 한다고 해서 그 실체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속 사람의 마음가짐인 믿음을 통하여 행함의 열매를 입증할 수 있다. 그래서 야고보는 반대자에게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담대하게 선포한다. 이것은 단순히 입술로써만 고백하는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의 실체를 증거 하겠다는 것으로서 행함이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믿음의 증거임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만 강조하여 구원받은 사람의 행위를 반대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였다. (눅 6:43-44).
여기서 나무는 사람들의 인격 혹은 마음을 묘사하며 열매는 사람이 자신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방법, 즉 태도, 말, 행동을 의미한다. 열매는 그 나무의 본질을 나타낸다. 이는 나무의 가치나 중요성이 그 열매에 달렸기 때문이다. 저자는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라고 기록한다. 각(마 7:16) 나무들에 열리는 열매들이 서로 바뀌어 열릴 수 없듯이 사람도 그 심령의 상태대로 외적 행실이 드러나게 마련임을 거듭 강조하는 말씀이다.
골로 새서 저자는 기록하기를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라고 하였다. (골 1:6). 이는 열매를 맺어 자란다고 하는 것은 복음은 열매를 맺게 하고 자라게 하는 능력을 지닌다. 열매를 맺는 것과 자라는 것은 각각 복음의 내적 활동과 외적 팽창을 나타낸다. 그리고 열매를 맺어 자란다는 것은 신앙이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복음의 역동적 활동을 암시한다.
그런데 믿음만 있으면 어떤 죄를 지어도 주께서 용서해주니 상관이 없다는 것은 히브리서 저자의 말을 빌려서 한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였다.”라고 하였다. (히 12:4). 죄를 짓지 아니하려고 순교를 각오하고 싸우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것은 믿음의 행위이다. 그런데 믿음을 악용하여 적당히 넘어가니 하나님은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