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하지마, 난 더 이상 당신의 더러운 꼭두각시인형이 아니야, 처음엔 그게 나에 대한 사랑인 줄 알았어. 근데 그게 집착이었다니... 후 후 후'
윤진은 울음을 울먹이며 광기 섞은 웃음을 퍼트렸다. 그는 잠시 회상에 잠기는 듯 두눈을 살포시 감았다. 처음엔 느린 클래식곡조에 맞춘 듯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빠른 템포의 재즈댄스로 바뀐 듯 윤진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대며, 테이블의 붉은 색 와인을 자신의 머리위로 세차게 뿌렸다. 그의 손엔 때 절은 종이 쪽지만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다시는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듯 둥그렇게 주먹을 꼭 말아 쥐며 윤진은 그렇게 과거의 행복했던 시간 속으로 잠이 들어 버렸다.
- "죽여봐, 죽여봐 이 나쁜 놈아, 니가 지금 까지 니 새끼하고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어.
무슨 호강을 그렇게 시켜줬길래 이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아무리 그래도 애는 먹여 살려야 할 꺼 아냐. 내가 언제 비싼 다이아반지라도 사 달래. 내 자식이나 굶기지나 말라고 이 나쁜 놈아, 너는 이 집 저당 잡혀서 니 삼시새끼 해결하고 배따시면 다냐, 우리 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어머니께서 울먹이다 못해 통곡을 하며 분유통을 아버지 얼굴에 집어던졌다.화장기 없는 엄마의 볼이 분칠을 해놓은 것처럼 붉게 상기되었다.
"에이, 내가 이래서 집에 들어오기 싫다니까, 내가 지금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이러는 줄 알아? 다 내 자식새끼하고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뭘 알기나 알고 떠들어대라고 이 여편네야."
"이제 그만해, 나도 더 이상은 이렇게 못살아. 우리 이럴 바엔 차라리 이혼하자, 이혼해"
"뭐? 이혼. 후후... 이혼이랄게 뭐 있어, 니가 여기 짐싸서 울고불고 매달려서 들어왔던거니까 짐하고 몸뚱이만 가지고 나가면 되겠네. 애는 놔두고 나가 이애는 내가 키울 거니까"
이게 마지막이었다. 내가 엄마를 본 것도, 그리고 내가 아버지라는 인간을 본 것도.......
나는 그 날 밤 내가 살던 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삼척 어느 마을 고아원에 버려졌다.
아버지는 그래도 마지막 양심이라는 것이 털끝만큼은 있었는지 나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웃는 얼굴로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아직 너를 책임 질 능력은 없는 것 같아. 나 사실은 아주 나쁜 병에 걸렸거든...... 근데 아마 다시 나을 수 없을 거 같아. 후후... 웃기지, 그동안 너희엄마도 그리고 너도 정말 많이 괴롭혔는데...... 너를 니 엄마에게 맡길 까 생각 해 봤어, 근데 그러기엔 너의 엄마 나이가 너무 젊더라구. 사실 니 엄마는 정말 네 엄마가 아니거든. 그러니까 니엄마 인생까진 망치고 싶지 않았어. 부디 좋은 엄마 아빠 만나서 나와 함께 했던 나쁜 기억은 모두 지워 줘. 그래야 내가 조금 더 가볍게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을 거 같아. 후...... 내가 너무 욕심쟁이지. 너한텐 그렇게 힘들게 해 놓고 이제 와서 그런 염치없는 부탁을 하다니. 마지막으로 윤진아 아빠가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너한테 이렇게 이름 불러 봤어. 아빠가, 아빠가 정말 미안해. 윤진아 미안해. 그리고 그리고...
아빠는 그렇게 고아원 마당에 나를 내려놓고 그 앞마당에 아빠도 철퍼덕 누워버렸다. 정말 하늘나라에 나를 혼자 두고는 가기 싫은 것처럼......
이렇게 나는 처음 태어나자마자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3월 14일 내가 다른 인간으로 태어난 날이었다. 이것이 끝일지, 시작일 지는 아무도 모른 채 나는 다시 6년 후 이 고아원 앞마당에 나쁜 향수를 묻어버리고 다시 나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날개를 달았다.
'강윤진이라, 강윤진.'
중후한 몸집에 예리해 보이는 눈매. 그는 무엇을 찾기 위해 이렇게 헤매 이는 것일까? 벌써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 데도 몸가짐이나 빠른 보폭이 그대로이다. 눈은 아래로 내리 깔은 채, 계속 땅바닥을 응시하며 차가운 겨울의 거리를 걷고 있다. 벌써 고아원을 들른 곳도 53번 째였다. 그의 손엔 전국 고아원리스트가 들려 있었다.
×,×,×,×.........................×
"젠장, 여기도 아니군. 도대체 어딘 거야, 그래도 이제 한 200여 개쯤 남았군. 하긴 내 희생양을 그렇게 빨리 찾는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 천천히 찾아서 오래오래 골려주지."
드디어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다 삼척 등지까지 들어오게 됐다. 이건 아주 전국일주가 다름 없었다. 그는 1달 전보단 좀 지친 듯 했다. 하지만 그의 두 눈만은 지금 갓 태어난 하늘의 별 마냥 초롱초롱 했다. 아니, 초롱초롱하다 못해 광선이 나왔다.
"휴, 이런 곳에 버릴 리가 없지. 서울과는 너무 떨어졌잖아. 그래도 이제 삼척, 강릉 등지 밖에 남지 않았어. 내 장난감 찾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그는 드디어 삼척 한 고아원을 찾았다. 새 소망 고아원. 많이 허름해 보였다. 기껏해야 아이들 30명 정도를 데리고 있는 것 같았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안녕하십니까?"
그는 아까까지의 신경질 적이던 모습을 지우고 최소한 그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것 같았다.
"저기, 사람을 좀 찾으려고 하는데요. 강윤진 이라고, 한 6년전에 버려진 걸로 알고 있거든요."
"강윤진이요? 그런 앤 없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아! 맞다. 윤진이라는 애가 있긴 한데. 6년전 쯤에 이 앞에 버려진 거 같기도 하네요. 근데 그 아인 안윤진인데......"
"안윤진이요?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제가 찾고 있는 아이가 맞는 거 같아서...... "
"네, 이리 따라오세요. 아 저기 있네요. 윤진아! 이리 좀 와 보거라!"
"네, 선생님."
"니가 윤진이니? 이런 초롱초롱하니 공부도 잘 하겠구나! 윤진아, 아저씨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혹시 니네 엄마 이름 아니?"
아이는 동그란 두 눈을 더욱 과시하며 치켜 떴다.
"엄마이름이요? 엄마이름은 잘 모르구요. 이거요."
"이게 뭐니?"
"아! 그거 윤진이가 이리로 버려질 때 기저귀속에서 발견된 거예요. 그 후로는 저렇게 보물처럼 가지고 다닌답니다."
고아원원장은 눈치 빠르게 얼른 설명해 주었다.
"그래? 윤진이 이거 아저씨가 좀 봐두 될까?"
"음... 그거 내 보물인데...... 지금까지 내가 젤루 좋아하는 원장선생님하고 내 여자친구 소영이 밖에 안 보여 준건데. 그래도 아저씨는 착한 사람 같으니까 보여줄게요. 그러니까 딱 한번만 봐야돼요."
아이는 정말 큰 인심이라도 쓰는 양 내게 말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박동소리가 점점 더 크게 내 두 귀를 자극시켜왔다. 나는 천천히 복권당첨확인을 하는 것처럼 조금씩 열었다. 안선녀. 김다은. 내 딸과 아내 이름이다. 그럼 역시 얘가 그 망나니 아들...... 지난 5년 세월동안 내 속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던 그 망나니 아들. 후! 드디어 찾게 됐구나.
그는 안심하는 듯 했다. 그리고 짜릿한 분노를 즐기던 그가 본심이라도 들킬까봐 마지막으로 긴장을 하는 듯 했다.
'이제 드디어 시작이군. 강윤호. 니가 전반전은 이겼지만 후반전은 어떻게 될까? 또 연장전은...... 강윤호 아드님. 니가 알아? 내 딸과 내 고통을. 이제 밟아주지. 자근자근
처음엔 안마하듯 가볍게...... 그리곤 점점 속력을 내는 거지. 혼란스러워 미쳐버릴 정도로.... 어쨌든 재밌겠어. 강윤호. 하늘에서 잘 지켜봐, 니 하나뿐인 아들을 내가 더욱더 강하게 키워 줄 테니. 나에게 복종하고 내 앞에 무릎 꿇겠금...... 아참 또하나, 남의 여잘 가로채면 그 땐 또 어떻게 되는 지 알려주겠어. 후후후!!!!!'
6년만에 처음으로 불안에서 일어난 날.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고아라는 딱지를 지우던 날 나는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하늘이라는 따뜻한 품과 수많은 동무별들과 떼를 지어 잠을 자는 별들까지도...... 나는 왜 몰랐을까?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보면 항상 내 옆에 있어주는 것도 있다는 걸. 나는 그렇게 새 아버지를 만났다. 난 새 아버지에게 이끌려 언제나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고급 승용차에 몸을 싣고 두 호위 기사아저씨들 보호를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 그곳은 작은 별장이었다. 너무 아름다웠다. 그곳이 과연 집인지, 아님 선녀가 사는 궁전인지조차 헷갈릴만큼......
"이제부터 여기가 우리가 살 곳이다. 어때, 멋있지?"
"......."
"자식, 내 아들은 그렇게 주눅들어선 안 된다. 이 아빤 말이야, 해병대 출신이다. 귀신도 잡는다는 해병대출신 아들이 그렇게 주눅이 들어있어서야 쓰겠냐? 자 어깨피고 이제부터 네가 살집이니까 천천히 구경해 보렴. 아빤 네게 줄 스프나 준비해야겠다."
"아저씨....... 아저씨....... 이젠 정말 제 아빠가 되 주시는 거예요? 정말 제가 이 집에서 살 수 있는 거예요? 절 버리시지 않을 거지요? 그렇죠? 네? "
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동안 쌓아놓은 얼었던 마음 한 줄기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정에 굶주렸던 아이. 지금껏 너도 상처받고 있었구나. 아냐! 여기서 내가 약해질 순 없어.' 나는 다시 냉정을 되찾고 맘씨 좋은 털보아저씨 웃음을 흉내냈다.
"자식, 속고만 살았냐? 그럼....... 그러니까 이제 너도 이 아빠한테 잘 해야 한다. 이 아빤 너만 사랑해. 알지? 그리고 너도 나만 사랑해야 하구........ 그럼 천천히 집 구경하구 있거라"
난 꿈만 같았다. 내게 이젠 살집도 있다. 그리고 나에겐 무엇보다 가족이 생겼다는 그 큰 기쁨이 가슴 언저리를 막 짓이겨왔다.
"자, 구경 다했으면 들어 오거라. 아빠가 소개할 사람이 있다. 여긴 너보다 한 살 더 많은 누나야. 이름은 김다은."
"난 윤진이라고 해. 강윤진. 반가워."
"안녕, 나도 반가워."
김다은. 김다은 왠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저기 누나 혹시......"
"응? 왜?"
"아, 아니야......"
아니겠지, 아닐 거야. 김다은이라는 이름 흔하잖아.
내가 가지고 있는 종이쪽지를 나는 다시 한번 바라봤다. 거기엔 엄마가 남기고 간 편지가 있었다. 고아원에 버려질 때 내 기저귀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진과 함께. 그 종이엔 엄마이름 안선녀, 그리고 또 다른 이름하나가 적혀 있었다. 바로 김다은. 그리고 찢겨져 나간 부분엔 뭐라고 적혀있었던 것 같았지만 난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똑 똑 똑, 윤진아 뭐해? 내려와서 밥 먹으래."
"어?...어 알았어 금방 내려갈게."
역시 내 아버지라는 사람은 부자였다. 난 그때 처음 식탁이라는 것에 앉아 밥을 먹었다. 물론 그 집에서는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 많았지만.
거기다가 형형색색 오색 반찬이다. 계란말이였다. 금방 군침이 사르르 돌았다. 물론 계란말이보다 더 좋은 반찬은 더 많았다. 하지만 내 눈엔 계란말이가 최고의 반찬이었다.
"윤진이 뭐해?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을 꺼야? 밥 먹어야지, 어서 와라 이 스프는 아빠가 한 거고 나머지는 다 니 누나가 실력발휘 좀 했다."
"잘먹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이 집에 적응해 갔다. 어느덧 하얀 눈이 이 아름다운 별장을 눈사탕으로 만들어 놓았을 때, 나는 비로소 내 몸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하루 한번씩 오는 과외선생님들, 국어, 영어, 수학은 물론이고 바이올린, 피아노. 일본어, 거기다가 골프까지...... 난 정말 몸이 10개라도 부족했다. 내 수업시간표는 거창했다.
오전 6시 기상. 7시 30분 아침식사를 하고서 아침운동으로 10시까지 골프를 한다. 그리고 바로 12시까지 바이올린을 배우고 그리고 가까스로 휴식에 들어간다. 휴식. 고작 식사를 하는 시간에 불과하지만 내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은 식사때 뿐이다. 그리고 바로 1시 부터는 국어와 영어 공부를 한다. 그다음엔 3시까지 일본어, 5시까지 중국어, 7시까지 수학 그리고 마지막으로 9시까지는 일본어다. 난 고아원에서처럼 혼자 공부하지 않아도 됐고, 무엇보다도 누나보다도 내게 더 신경 써 주시는 아버지의 자상함 때문에 난 자유를 찾지 못했다.
나는 오늘밤 또 기도를 한다. 달님에게 별님에게... 고이 새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나는 두 손 모아 기도를 했다.
"달님, 별님. 나는 자유도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아빠가 제 곁에 있을 수만 있게 해 주세요. 정말 정말 아빠를 많이 사랑하게 됐습니다. 아빠가 내게서 빼앗은 그 자유까지도.....
제발, 제가 아빠의 진짜가 되는 대신, 달님 별님껜 제 자유를 드리면 안 될까요? 네? 역시 안되겠죠? 달님 별님께는 자유가 많잖아요. 그러니까 제 자유까지는 필요 없는거겠죠?"
'난 여기서 만족하지 않아. 아빠에게 최고가 될 거야, 그래서 진짜가 될거야.'
이젠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난 어느새 10살이 되었고, 다은이 누나도 11살이 되었다. 누나는 내가 볼 때,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거의 집안에서만 움직였고, 집밖을 나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주 정원 앞 사과나무를 가꾸기를 좋아했다. 누나는 내가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보다 많이 왜소해진 듯 했다. 얼굴엔 검은 구름도 가득했을 뿐 더러 이젠 휠체어에 의지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왠지 그 앞 사과나무 앞에서만은 활기가 넘쳤다.
"누나, 어디가 많이 아픈 거야?"
"응, 하지만 이제 조금 있으면 윤진이처럼 건강해질꺼야. 그 때 되면 누나가 너랑 많이 놀아줄게."
"정말? 누나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어딘지 모르게 힘들게 웃음 짓고 있던 누나의 모습. 하지만 금방 건강해진다는 다은이 누나의 말에 나는 10살의 개구쟁이답게 즐거워했다.
"누나, 근데 사과나무가 그렇게 좋아?"
"응...... 사과나무는 내게 특별한 존재거든. 정말 특별한 존재야."
특별하다고 말하는 누나의 두 눈엔 볼그스레한 복숭아 두 알이 뚝 떨어지는 거 같았다.
"아, 누나 사과 정말 좋아하는 구나, 내가 나중에 크면 사과 정말 많이 사줄게. 아니다 아예 내가 사과나무를 많이 심어서 누나한테 실컷 먹게 해 줄게."
"후후후!!~~ 뭐라구.....?"
"누나 이제 안 우는 거다. 그래도 사과보단 이 동생이 더 좋지?"
"그럼, 우리 윤진이가 최고지......"
나는 행복했다. 나를 아껴주는 아빠, 그리고 누나. 왠지 누나에게 정감이 갔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 속의 인물과 너무 닮았으므로....... 그것이 또한 나를 숨막히게 하기도 불안하게 하기도 했다. 만약 다은이 누나가 내 진짜 누나라면....... 아니, 이 사진 속 우리 엄마의 친딸이라면 이제 난 어떡해야 하지? 나는 벌써부터 머리가 혼란했다.
왠지 아빠와 누나가 예전 같지 않다. 왠지 서먹서먹해 졌다고나 할까? 누나는 많이 아픈 것 같은데 아빠는 왜 누나를 미워하는 건지. 정말 바람이라도 불면 휙 하고 날아갈 꺼 같은데...
누나와 아빠는 말이 없었다. 그 활발하던 누나가.. 내가 처음 이 집에 왔을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난 그 이유를 물어볼 수 없었다. 아빠는 누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걸까? 누나가 정말 안쓰러워 보인다. 누난 이제 이 집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게 됐다. 울먹이며 금방 낫겠다고 하던 누나가 나처럼 금방 건강해지겠다고 한 다은이 누나의 얼굴이 날이 가면 갈수록 수척해져만 갔다.
"응, 그래야지. 근데 누나 윤진이랑 퍼즐게임은 못해줄꺼 같아. 그대신 윤진이가 키우는 사과는 꼭 먹어줄게. 꼭. 약속, 도장, 복사, 코팅. 그러니까 윤진이 너는 누나가 어딜 가더라두 너랑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누나가 니가 키우고 싶어하는 사과 꼭 먹고 싶어한다는 거 잊지만 마. 그럼 누나가 니 사과 꼭 얻어먹을 수 있을거야. 그리고 누나가 만약 니 눈앞에 없다면 아니 잠시 여행을 떠난다면 사과나무를 보면 조금 갈라져서 특이하게 불룩나온 게 있을거야. 거기 안을 보면 열쇠가 있거든. 그럼 두 번 째 서랍을 열어봐. 이게 내가 주는 선물이야."
'윤진아 너 만나서 정말 행복했던 거 같아. 왠지 그런 기분이 들어. 나 곧 너랑 헤어져야 할 거 같은 기분, 그리고 아빠랑도 근데 너까지 위험해질 지도 몰라. 이렇게 희생되는 사람 나 하나로도 충분한데. 그러니까 너는 모든걸 잊어. 모든걸 잊어야만 너라도 너라도 살 수 있어. 난 이렇게 되지만 넌 꼭 지켜 주실거야. 난 믿어."
언제 잠들었는지도 몰랐다. 난 내방에 와 있었다. 누나대신 나는 이제 내가 사과나무를 관리하게 되었다. 차츰차츰 봄이 되고, 여름이 오면서 사과나무는 여성스런 여인의 자태로 최고의 아름다움을 뽐냈다.
"와, 이제 조금 있으면 사과도 열리겠네. 다은이 누나가 좋아하겠다."
나는 곧장 누나 방으로 뛰어갔다. 누나는 한동안 잘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이윽고 출장을 떠나 버리셨다. 여름이 오는 게 싫다고...... 겨울이 되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누나, 누나 이제 조금 있으면 사과나무가 열릴 것 같아. 정말 아름답다, 나무가 저렇게 예쁜 거 처음 봤어. 꼭 사람이 웃는 거 같아. 정말 예쁘다. 햇살에 비추이니까 정말 이쁘다."
"그렇지. 정말 이쁘지? 다시 태어난 걸까? 아니겠지? 후후."
"응? 누나 뭐라고?"
"아니야. 우리 윤진이가 하도 좋아 하길래 누나가 농담 좀 해 봤어. 켁켁 쿨럭쿨럭."
"누나 또 기침하네 요샌 좀 잠잠하더니만. 안되겠다. 나 나가볼게 누워."
정말 사과나무가 꼭 사람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 아름다웠다. 길게 늘어드린 머리카락 같은 나뭇잎들. 그리고 화사하게 웃고 있는 저 미소. 정말 사람이었다면 이 세상 남자들의 마음을 마음껏 뒤흔들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따르릉... 따르릉..."
아침부터 난데없이 울리는 전화소리에 난 단잠을 깼다.
"여보세요."
"어 나다. 아빠야 윤진아."
"아빠? 아빠가 이렇게 일찍 왠일이세요? 출장 끝나고 돌아오신 거예요?"
"아니, 사실은 윤진이한테 부탁 좀 하려구. 다은이 누나가 몸이 좀 안 좋잖아, 그래서 아빠가 약 좀 졌거든, 택배로 보냈으니까 하루 3번씩 전자렌지에 데워서 꼭 좀 챙겨주라구."
"아, 네. 그거 먹으면 누나 금방 낫는거예요? 와! 잘됐다."
"그럼 아빠 끊는다. 아빠 금방 갈게, 그리고 아빠가 서랍장에 보면 쪽지 써 놨거든 그거 누나한테 좀 전해줄래? 꼭 좀."
신이 났다. 누나와 아빠 사이가 다시 좋아진 거 같다고나 할까? 이제 누나의 병도 고쳐질 것이고 아빠의 따스한 편지로 인해 우리 집은 다시 화목해 질 것이다. 난 생각만 해도 벌써 너무너무 달콤한 꿀단지에 빠졌다.
"누나, 누우나~ 아빠가 이 쪽지 누나한테 전해주래. 그리고 누나 약도 보내주신다고 데워서 주라구."
"응. 그래? 이리 줘봐."
미안하다. 아빠는 정말 최선을 다 했어. 엄마가 가난이 싫다고 해서 하루 365일 정말 쉬는 날 없이 열심히 일 했다. 그건 다은이도 알지? 근데 엄마는 가난을 이기니까 아빠가 바쁜 것을 탓했어. 그리고 새로운 남자를 만났지. 그리고 니 곁도 떠났고 내 곁도 떠났어. 넌 엄마를 용서할 수 있었니? 근데 아빤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어. 난 니 엄마가 가지고 싶다는 건 뭐든지 사줄 돈이 있었고, 또 니 엄마는 그걸 원했으니까.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왜 엄만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을까? 그건 아빠 잘못은 아니겠지? 널 많이 사랑했다. 많이 사랑했는데 난 정말 이제 니 엄마 때문에 썩어가던 심장이 다른 곳까지 썩어들어가는 거 같아. 난 나도 모르게 니가 먹는 밥에 손이 갔어. 정말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나도 날 제어할 수가 없어. 니가 사과나무 밑에 니 엄마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난 정말 너무 당황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인 다음이었지. 아빤 그럴 수밖에 없었어. 아빤 그렇게 그 사과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니 모습이 싫었다. 아니 내 자신이 싫었다. 미안하다, 다은아, 아빠를 용서해라."
'아빠, 아빠......... 윤진인 안 되요. 윤진인 안 되요.'
룰루랄라. 오늘따라 윤진이는 기분이 참 좋았다. 아빠와 누나가 드디어.....
하지만 조금뒤에 있을 일을 윤진은 알고 있기나 한 건지. 초록빛 하늘도 너무 맑아 보였고 다만 사과나무 한 그루만 덩그러니 그 다음에 있을 일을 짐작하며 어두운 기를 발산하고 있을 뿐 이었다.
'용서할 수 있을까? 나 근데 아빠 용서 못 할 거 같아. 아빠 그동안 엄마 때문에 많이 힘든 건 알았지만 용서 못할 거 같아.'
이미 다은은 정신이 없었다. 두눈을 꼭 감고 행복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녀의 입술에선 붉은 색 선혈이 흘렀다. 이젠 엄마에게로 편안히 가려는 것일까? 그동안 혼란했던 그녀의 머릿속보다 지금이 훨씬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너무도 곱게, 너무도 아름답게 그녀의 영혼은 식어갔다.
"누나 내가 약 가지고 왔어. 약 먹자. 약을 얼른 먹어야 나같이 씩씩한 어린이가 되는 거야."
"누나, 누나. 왜 그래? 이 피는 뭐야? 어? 일어나봐? 누나아~~!"
"누나 내 사과 맛 봐준 댔잖아. 그건 다 거짓말이었어? 이젠 다 나았다고 했잖아. 나처럼 건강해질 거라고. 누나......... 누나 그래도 행복한 거지? 누나 그렇게 웃는 모습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 그동안 항상 누나 너무 힘들어했는데. 그래. 누나. 누나가 편해 보여서 나도 좋아. 누나 대신 내가 사과나무 잘 키울게. 그리고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내 유일한 누나였는데...... 행복해야 해."
아버지에게 난 이 사실을 알렸다. 누나가 죽었다고. 아빠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래..... 아빠 곧 내려가마. 오늘은 서울 가는 비행기가 없어서 아마 모렛쯤 도착할 거야. 아빠가 옆 집 아줌마한테 부탁해 놨거든. 그러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말구."
옆 집 아줌마가 오셨다. 두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아이고, 안 그래도 이 집 아이가 병이 깊다고 했지. 그래도 이렇게 빨리 갈 줄 누가 알았누. 아이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누나한테 병이 있었단다. 무슨 병이었을까? 나한텐 금방 난다고 했는데. 많이 아팠겠지?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너무 많이 아팠겠지? 누나....... 그곳에선 아프지마. 하늘나라엔 사과나무가 있을까? 누나 사과나무 정말 좋아했잖아.
아빤 정말 모레 아침에 왔다. 많이 수축해진 모습으로. 그리고 한쪽 눈에선 두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아빤 누나를 화장을 시켰다. 하지만 아빤 그 화장시킨 누나의 뼈 가루를 바다에 뿌리지 않았다. 아빠의 두 손에 들려 우리 집으로 가져왔다. 난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응, 이거? 니 누나가 혼자 있으면 너무 무서워할 까 봐. 그래서 다은이가 좋아하던 사과나무 밑에 묻어주려고"
아빠는 누나가 좋아하던 사과나무에 묻어 준다고 했다. 정말 누나가 좋아하겠는걸.
아빤 아침부터 분주했다. 누나가 쓰던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제 누나가 죽은 지 겨우 3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누나가 쓰던 물건을 다 정리하고 있었다.
"아빠, 누나가 쓰던 물건 다 버릴 거예요?"
"응. 니 누나도 그걸 원할 거야. 이승에 이렇게 많은 걸 남겨놓고 혼자 저승으로 가면 이승에 있을 때가 질투날 거니까. 모두 없앨 거야 하나씩, 하나씩. 날 방해하는 것들은."
'날 방해하는 것들은'
하나씩 하나씩을 말할 때 아빠의 눈에선 불이 났다. 난 처음으로 아빠가 무서워 보였다. 나에겐 너무 자상한 아빠였는데. 방금 전엔 딴 사람을 본 것 같았다. 누나가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내가 멀리 여행을 떠나면 내게 선물로 주겠다던 그 열매. 나는 바로 정원으로 뛰쳐나갔다.
'사과나무. 사과나무 특이하게 불뚝 솟아오른 거. 저깄다. 여기 열쇠가 있댔지. 어 정말 구멍이 있네?"
열쇠였다. 정말 열쇠였다. 나는 누나 방으로 뛰어갔다. 누나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남긴 선물은 뭘까? 나는 두 번째 서랍에 열쇠를 가져갔다. 드드득...... 드디어 서랍이 열렸다.
'뭐야? 사과잖아. 누나 끝까지 이렇게 사과타령만 할래? 음.... 이건 일기장?'
누나의 일기장이었다.
제일 앞면엔 '윤진아 나 너를 만나서 어느 정도는 희망이 있어. 꼭 밝혀 줘야해. 너까지 위험해 질까봐 이러지 않으려고 나 그러지 않으면 편안히 하늘로 올라가지 못할꺼 같아. 미안해.'
밝혀 달라니? 도대체 뭘?
나는 황급히 일기장을 넘겼다.
○○월○○일 맑음
나는 오늘 정말 내가 아빠 딸이 아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쩜 그렇게 잔인한 짓을 우리 아빠라는 인간이 저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분명 봤다. 어두운 그림자 뒤에는 분명 우리엄마였다. 사과나무 밑을 파고 빠른 손놀림으로 엄마를 묻었다. 그러다 아빠는 나랑 눈이 마주쳤다. 나는 도망갔다. 아빤 살인자다. 나는 아빠가 무서웠다. 그래서 달리고 또 달렸다. 미워, 미워. 눈물이 흐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태어나 두 번째로 배신이라는 걸 느꼈다.
○○월 ○○일 흐림
나는 오늘도 쓴 밥을 먹었다. 요즘 왜 이렇게 밥이 쓸까? 정말 이상하다. 항상 악몽에 시달렸다. 꼭 밥이 약을 먹는 거 같았다. 왠지 밥을 먹으면 먹을수록 내가 밥에 중독되는 거 같았다. 하루가 가고 또 이틀이 가고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그 밥이 먹고 싶었다. 하지만 그 밥은 먹으면 먹을수록 숨이 가빠왔다. 정말 이런 느낌이 싫었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밥을 먹기가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걸까?
○○월 ○○일 비 온 후 갬.
오늘은 다른 날보다 조금 빨리 눈을 떴다. 아 갈증나, 물 좀 마셔야겠다. 아빠는 밥을 푸고 계셨다. 근데 한 공기엔 왜 하얀 가루를... 나는 아빠가 보실 까봐 얼른 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밥을 먹었다. 역시 그건 내 밥이었다. 왜 아빠가 내 밥에 약을 탔을까? 그동안 내가 중독된 거 같았던 건 바로 이것 때문. 눈물이 났다. 더 이상 더 이상 난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 요샌 윤진이와 아빠가 유난히 친해 보인다.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힘이 든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난 일기장을 보는 두 눈에 화가 치밀어왔다. 왜 지금까지 난 아무것도 몰랐을까? 누나가 그렇게 힘들어했다는 걸.... 그리고 아빠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왔다. 도대체 나는 왜 입양한 것이며 누나의 죽음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누나의 엄마는......
난 일기장 맨 마지막을 펼쳤다. 신문기사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종이를 봐선 꽤 오래 간직해 온 거 같다.
- 미모의 탤런트 안선녀, 그녀의 행방은? -
갑자기 증발해 버린 미모의 탤런트 안선녀, 지금까지 최정상자리에서 한번도 자리를 내 주지 않았던 그녀가 3년째 소식이 없다. 그 측근에 의하면, 친척집으로 요양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안선녀, 그녀를 다시 최정상자리에서 만나 볼 수 있는 날은 올 것인지......
- 약물에 의한 독극사, 그동안 시기했던 연예계의 파문인가, 자살인가? -
99년 데뷔한 이래 한번도 정상의 자리를 내 주지 않은 안선녀. 그는 2001년 3월 독극사로 밝혀졌다. 안선녀씨는 선녀라는 이름답게 청순한 외모와 개성 있는 연기로 사랑을 받아오던 탤런트였다. 그런 그녀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는 많았다. A모씨와 가수 B모씨가 그 예이다. 하지만 2001년까지 강모 씨와 동거하던 중 강모 씨와 헤어지고 모 여관에 투숙하다 오늘에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있다. 이 소문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순간 일기장을 놓쳤다. 갑자기 심장에선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머리 뒷부분은 누가 조그마한 압정을 박는 것처럼 아파 왔다.
'안선녀, 설마 내 어머니. 하지만 미모의 탤런트라니. 우리 아빤 집 한 채도 없는 알코올중독자라고 들었는데. 역시 이건 말도 안 돼. 하지만 나한테 밝혀내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나한테 모든 걸 떠맡기고 그냥 가버리면 어떻게 해. 나 지금 너무 혼란스럽단 말이야. 왜 내게 이 열쇠를 줬어. 왜 이 문을 열게 한 거야. 이건 꿈이야.'
나는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버지는 아직도 누나의 짐들을 정리하고 계셨다.
나는 일기장을 내팽개치며 말했다.
"도대체 뭐죠? 날 왜 입양한 거예요? 누나는, 누나는 또 어떻게 된 거고요? 이게 정말 사실인가요?"
"윤진아,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아빠는 도무지 하나도 알 수가 없구나."
"이제 그 가면 좀 벗으시죠. 이제 당신의 짜여진 각본에 맞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하하하, 너무 빨리 알게됐군. 역시 너무 시시해. 너 같은 애송이가 이렇게 니 복을 차다니. 역시 애송이다워."
"너를 입양한 목적이 뭐냐구? 쿠쿠쿠... 그거 정말 웃긴 사연이야. 너무 웃겨서 눈물이 다 날 사연이니까 말이야. 하하하하...... 넌 니 아버지 대신에 니가 나한테 희생당해야 해. 난 니네 아빠 때문에 좋은 남편이 됐을 때 이미 내 자리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내 분노를 못이겨 내 딸까지 죽게 했으니까. 이 정도면 내가 널 입양한 목적 충분하지 않나?"
"원하는 게 뭐죠? 나한테 원하는 게 뭐죠? 내 아빠란 사람이 진 빚을 지금 나보고 갚으라는 건가요? 미안하지만 내겐 그런 능력이 없는걸요? 내 목숨이라도 원하나요?"
"오! 말귀하나는 빠르구나. 난 또 내 입 아프게 한참을 설명해야 하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내 아내, 내 딸을 대신해 니 한 목숨으론 안 되지만 이건 가능하겠지? 널 죽이진 않을 꺼야. 널 죽이면 내 한이 다 풀리지 않거든. 널 혹사시키고 또 니 자식까지 혹사시켜줘야 동점이라 할 수 있지 않나? 난 빚진 사람한테 빚을 못 갚으면 목에 가시가 돋아서 말이야. 후 후 후! 결정은 니가 해. 넌 여기서 해방 될 수도 있어. 니가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물론 아주 쉬운 일이지만 말이야. 이 일기장에서 본 것 이 별장에서 겪은 것 모두 잊을 수 있겠나?"
"아주 쉬운 질문이지? 그렇지 않아? 너는 이 질문을 거부하면 평생을 아니 저승 가서도 가시밭길을 걷는 거 갔을 꺼야. 그것도 아주 재밌지. 자 이제 결정을 하지."
"난 밝혀야 해. 누나가 그랬거든 내가 밝혀야 한다고....... 내가 밝히지 않으면 너 같은 인간쓰레기가 땅에서 꿈틀거리거든.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증거는."
"난 정말 우리가족이라고 생각했어. 누나도 그리고 당신도. 근데 그게 모두 짜여졌던 극본에 내가 등장한 것뿐이라고...... 그리고 지금은 또 고뇌하는 학자 역이라도 시켜주는 건가? 차라리 나 같은 인간한텐 정의로운 기사가 어울리지. 당신은 눈사람이고 말이야. 겨울을 무서워하는 이유. 말해볼까? 당신이 왜 겨울을 무서워하는지. 녹아 버릴까봐. 죄책감 때문에 여름이 오면 당신은 항상 출장을 갔어. 당신 아내 보기가 부끄러웠던 거야. 이래도 내가 애송이라 생각하는 거야?"
"그래. 나도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어. 난 내가 설자리가 언제부터 없어졌어. 나보다 한참 어린 너한테 이런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나에겐 IMF가 무서운 게 아니었어. 우리가정이 무너지는 게 무서웠지. 내가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난 해줄게 없었어. 난 능력도 있고 회사에선 어느 정도 대접받는 관직이었지. 근데 집에 들어오면 항상 난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래도 내가, 내가 이렇게까지 망가질 줄은 몰랐다. 처음엔 좀 망설였지만. 두 번째는 쉬웠어. 난 왜 이렇게 상처만 받아야 하지? 난 잘 하려고 했어. 최선을 다 했다고. 근데 나만 망가져 버렸어. 흑흑......"
"아빠 맘 이해해요. 하지만 방법은 이것만 있는게 아니잖아요. 아빠는 물론 최선을 다 했지만 엄마는 부족했었나봐요. 엄만 돈이 필요한 게 아니었나봐요, 조금 더 집에 일찍 들어오고 자상한 아빠를 원했나봐요, 하지만 아빤 돈이 전분 줄 알았어요. 엄마한텐 진정 필요한 건 돈이 아니었는데. 아빠의 사랑이었는데...... 둘 다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못 찾았을 뿐이 예요. 아빠, 아빠 이젠 모두 다 잊고 새로 시작해요. 엄마도, 누나도, 그리고 사과나무도....."
그 날 저녁 아빠는 조금은 편안한 얼굴로 경찰아저씨들과 함께 경찰서로 연행돼갔다. 이젠 아빠는 교도소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왜 함께 있을 땐 깨닫지 못 했을까?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것을 깨닫기엔 인간의 일생이 너무 짧기만 한 모양이다. 징역 10년. 이제 내 나이도 20대 후반이 훌쩍 넘었다. 이제 아빠도 3년 후면 다시 가족이 되는 것이다. 사과나무. 누나가 정말 아꼈던 그 사과나무. 그 땐 왜 인지 몰랐다. 사과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누나가 사과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줄만 알았던 나.
오늘 누나의 기일이다. 제사상엔 사과가 수북히 올라져 있다.
'누나, 약속했지? 내가 지은 사과야. 매년마다 꼭 맛있게 먹어 줘야해. 이렇게 누나와 두 번 째 약속을 지키게 돼서 너무 기뻐. 어린 사과나무가 다 자랄 때까진 너무 많은 세월이 걸렸어. 그래도 이렇게 약속을 지키게 돼서 너무 기쁘다. 누나, 그리고 엄마. 어쩌면 사과가 너무 신물날지도 모르겠다. 오래 동안 사과나무에 뿌리를 맺었잖아. 아참, 이제 아빠가 나 입양했으니까, 내 엄마 맞지? 엄마, 누나. 아빠 이제 그만 용서해 드려. 그냥 다들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잖아. 그리고 아빠는 엄마, 누나를 정말 사랑했어. 그거 알지? 엄마, 누나 정말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