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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성경, 성경 해석 1
문화-"사람은 문화적 존재이다"
제가 문화와 선교를 전공했는데, 문화만큼 쉬우면서 또 문화만큼 어려운 개념이 없습니다. 수십 년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문화를 연구하고 문화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하나하나 살펴보면 사실 거의 다 비슷비슷합니다. 문화에 대한 정의가 이렇게 많은데 비슷하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문화는 누구나 다 아는 쉬운 개념인데, 글이나 말로 설명하려면 복잡해지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문화를 본능적으로 압니다. 왜냐하면 태어난다는 것이 어머니의 자궁을 떠나서 문화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만해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강원도의 감자 문화, 새마을운동으로 상징되는 경제성장 중심의 한국문화에 둘러싸였습니다. 제가 이 문화들, 특히 강원도 감자문화의 세례를 듬뿍받았다는 것은 나중에 서울로 와서 받은 문화충격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서울에 왔는데, 사람들이 감자를 쪄서 설탕에 찍어 먹는 겁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강원도에서는 감자를 설탕에 찍어먹지 않습니다. 고추장에 찍어먹습니다. 감자가 간식이라기보다 주식에 가까운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제 어머니의 경우 감자는 따로 찌지도 않으십니다. 밥할 때 넣어서 감자밥을 만드십니다. 그러니 밥에 설탕을 뿌려먹지 않듯이 대부분의 강원도 사람들은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울 사람들은 밥과 같은 감자를 설탕에 찍어먹고 있었습니다. 제가 놀라는 건 당연한 겁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저도 한번 서울 사람처럼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어봤는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저를 둘러싼 강원도 문화가 저를 강원도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이것 만이겠습니까? 여섯 살 때부터는 교회문화가 제게 더해졌고, 고등학교 때는 보수 장로교의 문화, 복음주의 문화와 영국 장로교의 문화도 더해졌습니다. 이 외에도 수없이 다양한 문화들이 제게 세례를 주었고, 오늘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제 생각과 말, 태도, 행동은 철저하게 그 문화들이 빚어낸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저는 비록 문화가 무엇인지 간결하게 정의하지는 못해도 문화가 무엇인지 정말 잘 압니다. 저만 그렇습니까? 여러분 모두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은 철저하게 문화적 존재입니다.
문화와 성경-"성경은 문화의 옷을 입고 있다"
성경을 문화와 연결만 시켜도 동공지진을 일으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성경을 하늘에서 떨어진 성물(聖物)로 보기 때문에 성경의 신적인 측면만 지나치게 확대해서 강조합니다.
하지만 신학으로 들어가지 않고, 상식으로만 생각해도 성경은 당연히 문화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대표적인 인간 문화의 요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툭 던져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저자를 선택하셔서 그 사람의 언어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성경에 언어라는 인간 문화의 옷을 입혀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심지어 유대교도 이 사실을 거의 본능처럼 인지했습니다. 그 증거는 성경번역의 역사입니다. 유대교도, 기독교도 성경에 새 옷을 입히는 번역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니다.
유대교는 헬라문화권에 있을 때,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칠십인 역(LXX)이 나왔습니다. 4세기에는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해서 불가타 성경이 나왔습니다. 안타깝게도 이후에 급속도로 타락한 교회는 라틴어 이외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이때도 교회는 성경번역 자체를 금하지는 않았습니다. 라틴어 성경은 계속 개정판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14세기에 드디어 영국의 존 위클리프가 사제들이 독점한 성경을 모든 사람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고, 15세기에는 윌리엄 틴데일이 영어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16세기에는 종교개혁과 함께 루터의 독일어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 후로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곳에서 성경이 그 나라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우리 말 성경도 1882년과 1885년에 각각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이 번역되었고, 1900년에는 신약 전체가, 1911년에는 구약까지 번역되어서 한글성경전서가 우리 손에 들려지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성경이 모든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약 2000여 민족이 최소한 신약의 일부는 자기 언어로 번역된 것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거의 모든 교회가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들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사실은 정말 엄청난 겁니다.
이슬람교만 해도, 번역된 코란에 경전의 권위를 주지 않습니다. 오로지 원어로 기록된 코란만 권위를 가진 알라의 말씀으로 인정합니다. 사실 번역도 근대에 이르러서 하기 시작한 것이지, 그 전에는 번역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도 이슬람교를 믿으려면 번역본만 봐서는 안 되고 반드시 원서도 봐야합니다. 알라는 오로지 아랍어로만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언어로 말씀하십니다. 모든 언어로 말씀하시기에 처음부터 성경에 언어의 옷을 입혀서 주셨고, 복음의 확장을 따라 성경이 계속 여러 언어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한글로 기록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읽는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경이 문화의 옷을 입고 있다는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해석-"모든 사람의 성경읽기(해석)는 주관적이다."
앞에서 살펴본 사실, 곧 "사람은 문화적 존재다", "성경은 언어(문화)의 옷을 입고 있다"에 근거하면 성경읽기(해석)는 문화적 존재인 사람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해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성경읽기(해석)는 문화적(주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성경읽기가 굉장히 객관적이라고 믿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자신의 성경읽기가 주관적 해석이 가미된 문화적 성경읽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모두가 공유해야만 하는 객관적인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설교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설교자들은 강대상의 권위를 빌어서 자기 해석이 마치 가장 객관적인 하나님의 뜻인 냥 선포하고 성도들에게 믿음을 강요합니다. 여기에서 요즘 신문지상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한국교회 문제가 시작됩니다. 꼭 신문에 실릴 만큼은 아니더라도 비신앙적이고 비정상적인 일이들이 이것 때문에 교회에서 일어납니다.
제 지인 A가 다니는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인천의 한 택지에 백억 대 건물을 짓고 이사한 후에 급성장한 교회입니다. 강대상의 권위를 절대시하는 모 장로교단 소속인데, 처음 몇 년은 괜찮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교회 표어를 “성전봉헌의 해”라고 정하더니, 강단에서 학개서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A에게 듣는데, 느낌이 왔습니다. 그래서 A에게 “아마 담임목사님이 예배당을 건축할 때 진 은행 빚을 올해 내로 갚으려고 하는 것 같다. 교인으로서 마땅히 공동체에 헌신해야겠지만, 아무 생각 없이 설교를 듣고 무조건적으로 아멘하지는 말아라. 그 대신 적극적으로 사고하면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스스로 분별한 후에 헌신해라”라고 말해줬습니다. 그리고는 가끔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남의 교회 일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그냥 묻어두고 시간이 지나 갔습니다. 여름 쯤 되었는데, 역시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A가 남편 몰래 거액의 헌금을 작정하고, 전전긍긍 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당장 불러서 말렸습니다. 하지만 A는 이미 세뇌가 되어서 남편 몰래 은행대출까지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여러 말로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A가 돌아간 후에 도대체 그 교회 목사님 어떻게 학개서를 이용했는지 들어봤습니다.
예상한 그대로였습니다. 수십억 빚이 남아있는 예배당은 학개서의 성전이 되어 있었고, 목사님은 성전이 빚 때문에 헌당이 안 되고 있는데, 어떻게 성도들이 집을 사고 여행 다니고, 맛있는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냐고 다그쳤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성전 봉헌이다”라는 주장과 그 말에 우렁찬 아멘으로 화답하는 천여 명의 성도들이었습니다.
담임목사의 주관적인 주장이 강대상의 권위를 등에 업고, 객관적인 하나님의 진리로 둔갑해 버렸고, 성도들은 이를 분별없이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일인데, 사실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그리고 자주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 모두의 성경읽기가 심지어 설교자의 성경읽기도 자기 해석이 가미된 문화적 성경읽기임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는 해석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설교자를 포함해 성도 모두가 자신의 성경읽기가 객관적이지 않고 주관적임을 인식하는 교회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교회에 당장 그리고 가장 필요한 것은 해석의 객관화 작업입니다. 모든 성도가 각자 자기 소견에 오른 대로 성경을 읽고 행동한다면, 그곳은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필연적으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성경읽기를 도출하기 위해서 해석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예언하는 사람은 둘이나 셋이서 말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분별하십시오”라고 말한 것처럼, 한 사람의 해석을 절대화 시키지 않고, 공동체가 함께 해석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상고하고 나눔과 토론을 통해 공동체적으로 아멘할 수 있는 해석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두 다른 해석이 충돌하기도 하겠지만, 그런 긴장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의 해석도 문화적이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길게 오랫동안 말씀을 같이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공동체적인 합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혹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부분이 생긴다면 그 부분에는 서로 침묵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누구의 해석도 문화적이라는 전제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공동체는 함께 말씀 해석에 동참하고 객관화된 해석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객관성이 확보된 말씀에는 순종함으로 말씀의 권위를 곤고히 합니다.
굉장히 이상적으로 들리시겠지만, 제가 스코틀랜드에 있을 때 이런 공동체를 봤습니다. 작은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400명 이상이 모이는 영국적 콘텍스에서 메가처지였습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소속이었는데, 교단이 게이 목사 안수를 가결하자 당회가 교단에서 탈퇴를 해서, 잉글랜드 장로교단인 IPC에 가입하자는 제안을 공동체에 내놓았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복음적인 교회였기 때문에 게이 목사를 반대하는 문제에는 쉽게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여성 장로를 반대하는 IPC에 가입하는 건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습니다. 이미 교회에 여성 장로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견의 핵심은 고린도전서 14:34-35의 해석문제였습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분들은 그동안 교단의 권위에 순종하느라 어쩔 수 없이 여성 장로를 세웠지만, 교단에서 탈퇴하고 IPC로 가려는 이상 말씀대로 여성 장로 제도를 없애자고 주장했습니다. 반대쪽은 이 말씀을 시대적 배경 및 당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해석하면 오늘날에는 문자적으로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회는 이 문제를 두고 1년 이상 토론했습니다. 토론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변경하는 분들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교회는 충분히 토론했다고 여겨지는 시점에서 공동의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IPC에 가입하지 않고, 여성장로제도를 유지하는 독립교회가 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에 반대하던 분들도 공동체의 결정에 순종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의 성경읽기가 문화적 성경읽기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성경을 읽는 것과 이 사실을 인식하고 성경을 읽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말씀의 권위를 강조하는 한국교회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어쩔 수 없이 강대상의 설교자에게 막강한 권력을 쥐어줄 수밖에 없고, 이런 교회는 설교자 한 사람만 타락하면 다 같이 무너집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면 말씀의 권위를 자연스럽게 공동체적 해석에서 찾습니다. 이런 교회는 설교자가 타락해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설교자에게도 회복의 기회를 줄 수 있습니다.
간단히 문화, 성경, 성경해석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교회가 반드시 해석 공동체가 되어야 할 필요성을 살펴보았습니다. 앞으로 또 기회가 되면 모든 사람의 성경읽기가 문화적(주관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나눌 예정입니다.
-세즈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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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을 올려주신 세즈윅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반가워라~ 글을 재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경의 기록과 해석에 관한 놀라운 통찰의 글입니다.
음 ㅡ
좋은 글입니다. 학개서를 인용하여 성전건축을 독려한 그 목사는 무식하거나 사기꾼이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무조건 그 교회에서 탈출해야 할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못난 선장때문에 아깝고도 순박했던 학생들이 죽게 된 세월호처럼 됩니다.
그런데 감자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혼 법정에 선 어느 부부가 갈등의 발단이 감자를 설탕 찍어 먹는가, 소금 찍어 먹는가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판사가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랬습니다. 판사는 이 부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강원도 출신인 판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니, 감자는 고추장찍어 먹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