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교회에서 벗을 사귀고 청년기에 교회에서 활동해 온 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특별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기도 하고, 소속감이기도 하고, 자신과의 동일시이기도 하고, 또 어쩌면 중독 같기도 합니다.
이사를 가거나 분란이 있거나 다른 무슨 일로 정들은 교회를 떠나게 되면 마음은 마냥 허전하고 삶의 중심이 없어지고 믿음이 공허해지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것을 자연스레 채워준다고 믿던 것이 없어지니 역시 교회는 중요하구나, 교회야말로 이 땅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하늘나라의 모형이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게도 됩니다.
(사실은 자기 신앙생활이란 것이 왜 그리 공허한지 돌아볼 기회인데 교회의 중요성으로 문제가 비켜가 버리지요.)
그런데 교회에 매어달린 이런 '느낌적인 느낌'이 과연 실체적 근거가 있는 것인지,
교회의 중요성이란 것이 내 느낌을 합리화하고 포장하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은 의심해 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무의식적으로는 내게 심리적으로 중요하니까 '교회는 과연 중요하다'는 느낌을 가진 것인데
의식적으로는 '교회는 하늘나라의 모형이니까', '교회는 피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몸이니까' 등등의 성경에서 배운 말로 자신의 마음과 입장을 설명하는 것은
사실을 직시하는 것에도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교회가 교회되게 하겠다'는 것을 외치며 양쪽으로 갈라 싸워 없어지는 교회를 심심치 않게 보게 되는데
무엇이 교회인지가 서로 이해되지 않은 상황에서 각자가 그냥 '교회가 (내가 생각하는) 참 교회 되게 하겠다'며
그에 걸리는 사람들과 싸운다면 사실 인간적 싸움에 십자군 옷만 입힌 꼴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싸우는 양상을 보면 애당초 그게 교회가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보면 생겨난 교회라고 다 개혁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닐 겁니다.
천으로 만든 봉제 호랑이를 훈련시켜 호랑이를 만들 수는 없는 것처럼.
또 그리고 보면, 이 교회는 정통이니까, 합법적 총회 인준을 받았으니까, 회계처리가 깨끗하니까, 사회봉사도 잘하고 평판도 좋으니까, 진짜 교회이다 라고 할 수는 있는 것인지 역시 불분명해집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신 말씀, (마18:20)
또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것이라는 (요한일서 1:3 )
교회의 기본을 말씀하신 것을 곰곰히 다시 생각해 보면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거꾸로 듣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우리가 이 귀절의 '우리'라는 것은 당연히 사실인 것으로 치부해 놓고
그래서 '우리가 모였으니 주께서 같이 하시고 그와 사귐이 있는 교회이다' 하면서
아무리 썩어도 교회는 교회고 아무리 못배웠어도 교회는 교회다, 이단빼고, 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의 근원을 맥락과 배경, 화자와 청자의 입장을 놓고 재생해 보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이 그렇게 조직으로 모여서 공적으로 이름을 내세웠다는 뜻일 수 없고
애초에 예수님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에 생각이 멈추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 두세사람과 함께 있게 된다 하는 말씀의 뜻이 어떤 사람들이든 예수의 이름을 내걸고 모이면 예수님이 자동개입되어 와 계셔야 하는 무슨 한미동맹같은 협약을 말씀한 것은 아닌 것이지요.
오히려 '예수님이 계신 것'이 교회의 조건임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즉 예수님이 그 가운데 계시면 그 두세사람은 이미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것이 아닌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에 구별이 안될 뿐이지요.
그걸 확실히 구별하겠다고 우리가 여러 제도와 인증절차를 거쳐서 교회라는 모임을 만들면 성립되고 작동되는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최영장군 혼도 아닌데 그렇게 인간에게 소환되어 불려다닐 리가 없는 것이지요.
어디까지나 이것은 '제자'에게 일어나는 일이고 또, 제자라면 저절로 일어나는 일인 것입니다.
요1서의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린'다는 말씀도
그 앞을 보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가 있습니다.
보고 들은 바를 전달받아 '제자'가 되지 못하면 사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달받아 그와 사귀게 된 제자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두명이든 세명이든 그 안에 이미 예수님이 계시고
거기다 대고 교회의 정의를 다시 더 거론하여 새삼 자격 수여를 할 일도
심지어 교회라는 이름을 따려고 연연할 이유도 없는 자체 충만한 모임이 되겠지요.
반면 제자가 된 적이 없이 각자가 그대로 세상 사람들인 상태라면
기독교에 동의하여 교회에 도장찍고 가입한 사람들이 모여 시간을 정해 놓고 아무리 장엄한 의식을 집행한다 해도
예수님이 그 예배 시간에 불려오셔서 친분도 없는 사귐을 강제로 당하실 일도 없을 것입니다.
첫댓글 유익한 글 올려주신 맑은내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고마운 문제 제기입니다
현재에 교회개혁 시각에서 아쉬운 점은 교회라는 어의를 성경적으로 재조명하는데 있어 제도적, 제의적, 관습적 시각에서 바라보지 말고(가토릭 교회론에 개신교 교회론을 덧칠하여 1500년 가까이 된 낡고 상투적인 교회론) 미래 교회를 염두하는 조건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유럽과 미국의 개신교가 점점 사회적 영향력에서 점점 멀어져 가듯이 한국도 그 싸이클에 급격히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죠 이래서는 미래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도 멀지 않은 미래에 텅텅 비는 예배당이 우후죽순으로 생길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그때에가서야 새로운 교회론을 쓸 것인지 지금 그것에 대비해야 되는지는 각자의 선택이 될 것 같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