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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당 조정육의 그림과 인생 스크랩 ⑦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기를- 정선, <인왕제색도>
무진당 추천 0 조회 236 11.06.30 11:29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조정육의 『동양화가 말을 걸다』⑦정선, <인왕제색도>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6월 12일, 음력으로 5월 11일 사시(巳時)였다. 1921년에 태어나 91세의 수(壽)를 누리시고 귀천(歸天)하셨다. 그만하면 장수하셨고, 주무시다 돌아가셨으니 사람들은 호상(好喪)이라 했다. 아버지가 스스로의 소멸을 호상으로 생각하셨는지는 파악되지 않는다. 살아생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저승이 아닌 이승의 땅을 밟기를 원하셨으니 꿈속에 떠나는 귀천행을 엉겁결에 당한 봉변으로 여기셨을 지도 모르겠다. 비록 천상병 시인의 염원처럼 ‘이슬’과 ‘노을’의 손짓 속에 이루어진 귀천은 아닐지라도 저승의 문턱을 넘으실 때 이승에서의 시간이 ‘아름다웠더라'고 말씀하셨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기억만 간직한 채 다음 생으로의 여행을 시작하시기를. 떠나시던 날 여행길을 열어주던 맑은 하늘처럼 두려움을 떨치고 당당하게 걸어가시기를......

‘삶과 죽음의 길이 예 있으매 두려워 나는 가노란 말도 못 다 이르고 갔는가?’

신라 경덕왕 때 월명사(月明師)가 지은 「제망매가(祭亡妹歌)」의 첫 구절이다. 이 향가는 죽은 누이를 위해 재(齋)를 올릴 때 부른 노래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서 가는 곳 모르겠구나’로 이어지는 노래 속에는, 생사의 갈림길에 선 오누이의 애별리고(愛別離苦)가 눈물처럼 젖어있다. 육친(六親)과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지순한 아픔은 당해 본 사람만이 안다.

 

정선, <인왕제색도>, 1751년, 종이에 먹, 79.2×138.2cm, 삼성 리움미술관

 

 

이레 동안 비가 내린 후 오후에 개다

죽음과 관련된 그림 중에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가 있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의 대표작이다. 비온 뒤 맑게 갠 인왕산의 모습을 포착하여 그린 그림으로 습윤한 현장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명작이다. 며칠 째 계속 내리던 비가 갠 후 물기 젖은 암벽이 육중하게 위용을 드러냈다. 바람이 불자 나무 사이에 깔려있던 안개가 맹렬하게 산허리를 향해 진군한다. 안개에 반쯤 잠긴 산 아래 나무에서는 아직도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듯하다.

인왕산은 특히 흰 바위가 눈에 띄는 산이다. 정선은 비에 젖은 암벽의 축축한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흰색 바위를 검은 먹으로 칠했다. 흰색 바위를 흰색으로 칠하면 곧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바위의 무거운 성질이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꿈틀거리며 피어나는 안개와 차별이 되지 않는다. 정선이 전하고 싶은 것은 인왕산의 외형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그곳에서의 감동이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마치 인왕산 앞에 서 있는 듯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대상을 왜곡, 과장, 축소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한 화면에 서로 다른 시점(視點)을 적용한 것도 같은 이치다. 산 아래 나무와 집이 있는 풍경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고, 산 위쪽 암벽은 저만치서 위로 쳐다보는 시점이다. 이런 점이 정선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일반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와 구분되는 특징이다. 이런 탁월한 현장감 때문에 천암만학(千岩萬壑)의 수려함이 노련한 대가의 붓끝에서 실감나게 전해진다.

 

정선, <시화환상간>, 비단에 연한 색, 26.4×29.5cm, 간송미술관

“내 시와 자네 그림을 서로 바꿔 보니, 그 사이 가치의 경중을 어찌 말로 논할 수 있겠는가.”

 

 

친구 이병연의 일생을 회고하며

<인왕제색도>는 단순히 비 개인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작품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림에 스토리가 개입되면 그 그림은 특별해진다. 연구자들은 이 점에 주목했다. 인왕산은 정선이 어린 시절부터 살았던 곳이고, 정선의 옆집에는 시인 사천(?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이 살고 있었다. 둘은 인왕산 기슭에서 평생을 절친한 친구로 살았다. 이병연이 시로 이름을 세웠다면 정선은 그림에 특장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가와 시인을 칭송하여 ‘좌사천우겸재(左?川右謙齋)’라 했다. 정선이 양천 현령으로 부임해 갈 때는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을 하자고 약조했다.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는 뜻이다. 시인과 화가로서의 위대성을 서로 인정해주는 동시에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한 말이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그림과 시가 부지런히 오갔다.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금강산 화가로 알려진 겸재가 한강 주변의 명승지를 화폭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사천이라는 시인의 추임새가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친구였고, 예술적 동반자였으며, 작가와 소장가였다. 정선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판매한 사람이 이병연이었다.

그런 친구가 죽었다. 이 그림을 완성할 즈음인 윤5월 29일에 죽었다. 5월 29일『조선왕조실록』에는 이병연의 부고 소식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한성 우윤 이병연(李秉淵)이 졸(卒)하였다. 이병연의 자(字)는 일원(一源)으로 한산(韓山) 사람이며, 호(號)는 사천(?川)이다. 성품이 맑고 드넓었으며, 어려서 김창흡(金昌翕)을 종유(從遊)하였다. 지은 시(詩)가 수만 수(首)인데, 그의 시는 강건하고 웅장하여 이따금 옛 것을 압도함이 있어, 세상에서 시를 배우려는 자들이 많은 본보기로 삼았다. 음사(蔭仕)로 벼슬길에 나와 아경(亞卿)에 이르러 그쳤다.”

 

<인왕제색도>가 이병연의 죽음과 관련되었으리라 생각한 사람은 고(故) 오주석 선생과 최완수 선생이다. 선학들의 연구를 바탕으로『승정원일기』와『조선왕조실록』을 다시 살펴보니 당시 기상상태와 인물 동정이 자세히 적혀 있다.『승정원일기』에는 윤5월달 날씨가 ‘맑음(晴), 흐림(陰), 비(雨)’ 또는 ‘아침에 흐리고 저녁에 맑음(朝陰晩晴)’,‘아침에 맑고 저녁에 비(朝晴夕雨)’등으로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다. 장마철이었는지 초하루(1일)부터 열 여드레(18일)까지는 날씨가 변화무쌍했다. 그런데 정선이 제시에 적은 ‘신미윤월하완(辛未閏月下浣)’에 해당하는 ‘하완(下浣)’ 즉 하순(20일에서 30일 사이)의 날씨를 보면 19일부터 24일까지 엿새동안 계속 ‘비(雨)’가 내렸다. 비는 이레째 되는 25일 아침까지 계속 내리다 저녁이 되어서야 개었다(朝雨夕晴). 그때부터 30일까지는 28일 아침에 잠깐 흐렸을 뿐(朝陰夕晴) 맑은 날이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을 그린 날은 언제였을까? 24일까지는 계속 비가 내렸으니 25일 이후가 될 것이다. 오주석 선생은 그림 그린 날짜를 특별히 25일이라고 확신했다. 그림 속에서 세 곳의 폭포가 맹렬하게 쏟아지는 장면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안개가 산허리를 휘감을 정도로 많이 피어나는 날이라면 장마가 막 끝난 시점이다. 25일에 그렸다면 생사를 알 수 없는 친구의 회복을 빌었을 것이다. 29일 이후라면 친구와 함께 했던 추억을 회상하며 저승에 간 친구의 명복을 빌었을 것이다. 죽기 전에 그렸든 죽은 후에 그렸든 <인왕제색도>에는 죽음이 담겨 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는’ 세월의 무상함과, 한 가지에서 난 나뭇잎 같은 친구와의 별리(別離)를 아쉬워하는 애틋함이 담겨 있다. 1751년 윤5월 25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7월 17일이다.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

“네가 벌써 결혼을 해?” “네가 고등학생이야?” “넌 군대 갔다 왔고?” “오빠는 여전하시네요. 어떻게 나이가 드셨는데도 영화배우처럼 멋있으세요?”“언니가 벌써 노인수당을 받아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일가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만남은 놀람의 연속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가 엊그제 같더니 벌써 결혼날짜를 잡았다는 조카가 있고, 몇 년 전 결혼한 조카는 통통거리며 뛰어다니는 딸이 있었다. 세월이 쏜 화살같다는 옛 어른들 말씀이 하나 틀리지 않았다. 4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거동이 불편하다는 큰 집 오빠는 칠십을 훌쩍 넘겼고, 평생 늙지 않을 것 같던 작은집 올케도 세월을 비껴가지는 못했다.

더욱 놀라운 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세대교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영정을 모셔놓고 손님을 맞이하는 빈소(殯所)에는 가장 싱싱한 조카들이 모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음식을 차려놓은 옆방에는 결혼해서 살림을 하고 있는 조카들이 음식 서빙을 하고 있었고, 맨 안쪽 상석에는 집안 어른들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예전에는 감히 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어른들 틈에 내가 끼어 있었다. 결국 인생은, 태어나서 걸음마를 끝낸 다음 빈소와 식당으로 상징되는 일터에서 활동하다 집안 어른들이 앉아 있는 곳까지 걸어오는 과정까지인 것 같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날 때 우리는 영정 속에 추억으로 모셔진다. 남겨진 사람에게 그리운 추억이 될 지, 지우고 싶은 추억이 될 지는 그 사람이 살아 온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월명사는 스님답게「제망매가」의 결론에서 ‘극락세계에서 만날 나는 도 닦으며 기다리겠노라’며 이별의 슬픔을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한용운은「님의 침묵」에서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애별리고의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는 그렇게 멋지게 선언할 수가 없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붓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조정육)

 

*이 글은 [주간조선] 2162호(2011.06.27년)(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162100023&ctcd=C09)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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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6.30 16:48

    첫댓글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염불 공덕 지어 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11.06.30 21:02

    ㅠㅠ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11.06.30 21:03

    극락왕생 발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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