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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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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당 조정육의 그림과 인생 스크랩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진시황과 한비자
무진당 추천 0 조회 1,537 11.07.01 12:31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조정육의 옛 그림 읽기♣-그림, 스토리에 빠지다⑩진시황과 한비자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

 

 

“이 사람이야말로 과인이 오랫동안 찾아 헤맨 사람이 아닌가? 이 사람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구나.”

『한비자(韓非子)』를 읽고 있던 진시황(秦始皇)이 무릎을 치면서 탄식했다. 『한비자』는 한(韓)나라 귀족인 한비(韓非)가, 끊임없이 진나라의 공격을 당하던 힘없는 한(韓)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발분하여 쓴 책이었다.

곁에서 이 말을 들은 재상 이사(李斯)가 자랑스러운 듯 대답했다.

“그자는 저와 순자(荀子)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람입니다.”

“오오, 그렇단 말인가? 그럼 지금 당장 한나라를 공격하라. 한비를 취할 것이다.”

소문은 금세 한나라 조정에 전해졌다. 진왕이 한비의 글을 읽고 공격한다는 사실을 안 한나라 조정에서는 원인제공자인 한비를 진나라에 보내 화의를 청했다. 한비를 본 진시황은 죽은 친구가 되살아난 듯 반가워했다. 비록 말더듬이였지만 한비의 탁월한 문장은 그런 신체적인 약점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가 곁에 있으면 오랫동안 꿈꿔왔던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시황은 한비를 곁에 두고 중용할 뜻을 비췄다. 배가 아픈 것은 재상 이사였다. 순자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울 때부터 한비한테 심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이사는, 친구 한비가 진시황의 총애를 받는 것을 보고 자신의 위치가 위태로움을 직감했다. 그는 진시황에게 이렇게 간했다.

“한비는 한나라의 공자(公子)입니다. 결코 진나라를 위해 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를 등용하지 않고 억류했다가 돌려보낸다면 후환이 될 것이니 이번 기회에 죽여야 할 것입니다.”

이사의 말이 옳다고 여긴 진시황은 한비를 옥에 가두고 사약을 내리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판단이 어리석었음을 안 진시황은 명을 거두게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한비를 살리라는 왕의 명령이 감옥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한비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진시황과 한비자>

 

전국칠웅의 패자 진시황,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다

한비(기원전 280-?)는 법가(法家)를 대표하는 철학자다. 그가 살았던 한(韓)나라는 전국칠웅 중에서 영토가 가장 작고 힘이 약한 나라였다. 주(周)나라가 무너지고 제후들을 통솔할 힘을 잃게 되자 제후들 중에서 강한 자가 스스로를 패자(覇者)로 일컬으며 맹주(盟主)를 자처했다. 패자가 되기 위한 제후들의 각축전은 춘추전국시대 내내 계속되었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약소국의 겪어야 하는 전쟁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한비는 약한 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엄격한 법 집행으로 통치자가 강력한 통치력을 장악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한나라 왕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는 커녕 어진 인재를 내치고 소인배들만을 등용했다. 한비는 왕에게 법으로 나라가 다스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여러 차례 건의했다. 그의 진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절망한 한비는 더듬거리는 말로 왕을 설득하는 대신 빛나는 문장력으로 자신의 사상을 정리했다. 이것이 바로 진시황이 읽고 감탄해마지않던 책 『한비자』였다. 패자를 꿈꾸었던 진시황은 전쟁을 일으키면서까지 한비를 얻고자 했다.『한비자』는 제왕학의 모든 것이었으며 부국강병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한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 진시황을 만났으나 불행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한비자』에 밝혀 놓은 한비의 철학은 진시황의 천하통일과 통치철학의 바탕이 되었다. 13세에 왕이 된 진시황은 22세 때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재상 여불위(呂不韋)를 몰아내고 문란한 선태후(宣太后) 일족을 주살한 뒤 친정체제로 돌입했다. 그리고 39세 되던 기원전 221년에 중국 최초로 천하를 통일하는 통일왕조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위대함이 삼황오제(三皇五帝)를 능가했다고 여겨 스스로를 왕이 아닌 황제(皇帝)라 호칭했다. 진시황은 여러 나라를 합병한 후 정치체제를 완비하고 문자, 화폐, 법률, 도량형을 통일하여 혼란했던 정국을 안정시켰다.

 

<병마용갱1호 軍陣 示意圖>

 

<진시황병마용>, 230m(동서)×62m(남북), 산서성.

 

진시황릉이 있는 산서성의 병마용갱(兵馬俑坑)을 보면 통일왕국의 위용이 어느 정도였는 지를 짐작할 수 있다. 모두 4개의 갱(坑:땅굴)에서 발견된 도용(陶俑)은 군사 8000여명과 말 500여필, 전차130여대 등인데 실제로 진시황이 거느렸던 사람과 말을 본떠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람을 순장(殉葬)하는 대신 사람의 형상을 흙으로 빚어 무덤 속에 넣은 도용(陶俑)의 높이는 1.75m에서 1.95m까지 실제 사람과 비슷하거나 더 높다. 도용의 몸은 먼저 본을 떠서 만든 다음 손으로 빚고, 붙이고, 쌓는 수법을 통해 세부적으로 다듬었다. 마지막으로 그 위에 채색을 올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도용은 서로 비슷비슷하면서도 세부는 조금씩 달라 섬세하면서도 사실적이다.

 

 

다양한 모습의 병마용 

 

<거마도>(부분), 진(秦), 기원전 3세기 말엽. 함양궁 유적지 벽화, 섬서성 秦都 문물관리위원회

 

중국 최초 통일왕국의 찬란했던 회화 수준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항우(項羽)가 진나라에 입성할 때 궁전인 아방궁에 불을 질러 모두 타 버렸기 때문이다. 진나라 때의 회화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림으로는 <거마도(車馬圖)>를 들 수 있다. 함양궁3호 궁전 복도에서 발견된 벽화로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 일곱 대의 행렬을 묘사한 벽화의 일부분이다. 말은 몰골법(沒骨法:형태의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바로 먹이나 물감으로 그리는 화법)으로 화려하게 채색을 했다. 과장스럽게 다리를 벌리고 헉헉거리며 뛰어가는 말의 묘사가 생생하다.

그림은 아니지만 섬서성 서안의 진시황릉 근처에서 발견된 <동마차>는 4마리 말이 끄는 마차와 마부를 조각한 작품으로 사실적인 조각 수법과 수준 높은 금속공예 주조기술의 완벽함을 보여준다.

 

<1호 동마차(銅馬車)>, 진(秦), 기원전 3세기 말엽. 청동에 채색, 섬서성 임동현 진시황릉 부근 출토, 섬서성 秦都 문물관리위원회

 

 

한비자의 법가사상

한비의 법가사상은 혼란했던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며 개혁사상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법이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周) 이래로 공경대부와 같은 귀족들은 예(禮)로 다스렸고 형(刑)이 적용되지 않았다. 반면 서민들은 형(刑)으로 다스렸을 뿐 예가 내려오지 않았다. 한비는 당시까지 내려오던 귀족과 서민의 구분을 과감하게 없애 버릴 것을 주장했다. 즉 귀족이나 서민이나 법을 적용함에 있어 예외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원칙을 성문화하여 전국적으로 공포한 후 통일성있게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군주에게만은 법 적용이 예외였다. 한비의 법 사상은 군주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강력한 군주의 권한으로 부국강병을 실현하기 위해 법치주의를 적용하겠다는 뜻이다.

이러한 한비의 법 사상은 당시까지 내려오던 법가의 여러 학설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당시 법가는 법(法), 술(術), 세(勢)를 주장하는 세 파로 나뉘어 있었다. 법(法)은 상앙(商?)이 주장했는데, ‘법령에 의한 통치’가 목적이었다. 법은 문서에 실려 관부(官府)에 설치되고 일반 백성들에게 공포되어야 하는 성문법이다. 이 성문법은 황제를 제외한 만인에게 똑같이 상벌(賞罰)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때까지 대부 이상은 형벌 적용에서 제외되었으나 군주가 강력한 통치력으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법에 의해 상과 벌을 내리면 국가는 부국강병의 기틀이 잡힌다는 사상이었다.

술(術)은 신불해申不害)가 주장한 것으로 신하를 다스리는 방법이다. 군주는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신하들을 관리해야 한다. 군주는 자신이 아무리 아끼는 신하라 할지라도 신하의 지위나 권세를 군주보다 높게 해서는 안되며 분수에 맞는 봉록과 권한만을 갖게 해야 한다. 군주가 쉽사리 속내를 드러내서도 안된다. 군주의 신임과 총애를 받는 신하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딴마음을 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군주는 신하를 다스리기 위해 관료제를 정비하여 관리들을 귀속시키고 충신과 간신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 신하들이 국왕을 두려워하고 신성시하도록 해야 한다.

세(勢)는 신도愼到)가 주장했는데 군주에게는 오로지 군주만이 가질 수 있는 배타적이고 유일한 권세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국정을 운영하기 위한 군주의 위세는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이며 그 권리는 감히 신하가 넘볼 수 없는 신성하고 위대한 것이다.

한비는 이런 법가의 학설을 종합하고 집대성하여 군주철학을 완성했다. 한비는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을 바탕으로 이론을 세웠기 때문에 특히 공자, 맹자의 유가(儒家) 사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므로 인(仁)과 예(禮)를 강조하는 유가의 방식으로는 결코 군주가 신하를 다스릴 수 없다고 했다. 그에게는 오직 두 자루 칼, 형(刑)과 덕(德), 즉 상벌만이 있을 뿐이었다.

<죽간>, 호북성 운몽수호지(雲夢睡虎地)에서 출토된 죽간에는 진(秦)의 법률이 기록되어 있다.

 

한비 사상의 한계와 진시황의 죽음

 

중국의 문백인(文伯仁:1502-1575)이 그린 <방호도(方壺圖)>는 동해(東海)에 떠 있는 방장산(方丈山)을 그린 작품이다. 신선이 산다는 방장산은 봉래산, 영주산과 더불어 대표적인 삼신산(三神山)으로 알려져 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항상 암살의 위험에 시달렸고 불로장생을 꿈꾸었다. 진시황은 삼신산에 불사약(不死藥)이 있다는 어느 방사(方士:마술사)의 얘기를 듣고 귀가 솔깃했다. 그는 불로초를 찾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수 천 명을 삼신산으로 보냈다. 그러나 진시황은 기원전 210년 순행(巡幸) 중 사구(沙丘)에서 50세의 나이로 병사(病死)했다. 통일 제국을 이룬 지 겨우 11년만이었고, 중국 최초의 통일왕국은 그의 사후(死後) 4년 후에 멸망했다.

오파(吳派)의 대표적인 화가 문백인은 ‘달려가 보면 홀연 물밑으로 꺼져버리고, 또 다시 도착했다 싶으면 난데 없이 바람이 불어 섬이 사라지는’ 통에 아무도 가본 사람은 없다는 신산(神山)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화려한 청록산수화(靑綠山水畵)풍으로 그렸다. 수평선을 매우 높이 설정했으며 섬에는 금니(金泥)를 칠하고 봉우리의 중앙에 소나무가 둘러쌓인 곳에는 선궁(仙宮)을 배치하였다. ‘황금과 옥’으로 지었다는 선궁 위에는 마치 신성한 구역이라는 듯 구름이 원형으로 감싸고 있다. 석양 무렵인지 섬 전체가 적갈색으로 빛나고 있다.

한비의 사상의 핵심은 철저히 법에 의해 나라를 다스려야 것이다. 그러나 그 법은 오로지 군주를 위한 법일 뿐 일반 백성들을 위한 법은 아니었다. 군주의 권력 강화는 백성들을 착취하고 억누르는 데서 세워질 수 있었다. 군주의 권한이 비대해질수록 백성들의 고통은 더 증폭되었다. 전국을 통일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진나라가 진시황의 사후 4년만에 무너지게 된 것도 농민 반란에 의해서였다. 아방궁, 만리장성, 진시황릉(驪山陵)과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일 때 70만명이 동원되었다. 분서갱유같은 혹독한 정책도 민심이 떠나는 원인이 되었다.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반란으로 시작된 농민 봉기는 기원전 206년, 한(漢) 고조 유방(劉邦)이 함양에 입성함으로써 끝났다. 진나라도 함께 끝났다. 그것은 또한 진나라의 건립의 토대가 되었던 법가 사상의 붕괴를 의미했다.  

 

문백인, <방호도>, 중국 명, 종이에 색, 120.6×31.8cm, 대북 고궁박물원  

 

작자미상, <만리장성>,《연행도 제3폭》,조선, 1784년 이후, 종이에 색, 34.9×44.8cm, 한국기독교박물관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연행도(燕行圖)》는 조선 사신(使臣)이 중국으로의 동지사 연행(燕行)때 사행의 길목에서 실견한 중국 명승고적지를 그린 기록화이다. 그 중에서 제3폭의 <만리장성>은 화면 중심에 사선으로 만리장성을 배치하여 험준한 산세와 거친 능선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만리장성은 춘추시대부터 중원에 나라를 세운 나라들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성을 만든 성이다. 진시황은 통일 후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북쪽의 장성을 연결하여 서쪽으로 더 연장시켰다. 그 길이가 무려 6,000 km에 달하는데 현재는 거의 명나라 때 축조한 성이다. 이렇게 강고하게 축조된 만리장성도 내부에서 시작된 붕괴를 견디지 못했다. 진나라의 궁전이었던 아방궁이 불타는 장면을 그린 기무라 부잔의 <아방겁화(阿房劫火)는 영월할 것 같은 황제의 권한도 한낱 불꽃처럼 명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조정육)

 기무라 부잔, <아방겁화(阿房劫火), 일본, 1907년, 비단에 색, 141.4×241.0cm. 일본자성현 근대미술관

 

*이 글은 『Art price』2011년 7월호에 실렸습니다 

 

V.A. - Pirates Of The Caribbean (2004): He’s A Pirate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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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7.01 19:18

    첫댓글 공평무사한 법집행 참으로 말하고 행하기 어려웠을 시절에도 한바지는 부르짖었군요 오히려 지금이 더욱 필요한 시점인듯 합니다()()()

  • 11.07.02 18:41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관해 토론하며, 한비의 사상과 삶에 관한 비교를 한 적이 있는데,
    강력한 통치력을 군주에게 집중시킬 수 밖에 없는 그 시대의 상황과 현실정치에 중점을 둔
    두 사상가의 비슷한 맥락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 * 기무라 부잔의 <아방겁화>를 감상하며,
    진시황의 허망한 최후와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뛰어난 사상을 펼친 한비도 이사의
    질투와 시기심에 사약을 마시고 숨을 거두는 무상한 모습이 떠올라, 삼계가 불타는 집과 같다고
    설파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이 새삼 가슴에 와닿습니다! &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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