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165층탑석) 남혈사와 서경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쌍수산성雙樹山城의 옛 이름은 공산성公山城인데
인조 2년 갑자(1624)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가 성안의 두 그루 나무 아래서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쌍수雙樹라고 이름하였다.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산성山城에 파천播遷하셨을 때
두 나무 사이에다가 영정影亭을 지어
돌에다 공업功業을 새겨 기렸는데,
그 후 백성들이 풍요風謠로 그 덕을 사모하고 그 정자를
쌍수정雙樹亭이라 하고 그 성을 쌍수산성雙樹山城이라고 하였습니다.
위 쌍수산성 유래에 대한 설명들은 모두 19세기의 기록이다.
그런데 사실 공주산성 안에는 17세기 초,
인조의 공주 주필 이전에 이미 ‘쌍수영청雙樹營廳’이 있었다.
1602년 9월에 충청도관찰사에 제수되어 1604년 초까지
충청감영에 재임했던 유근(1549~1627)의 문집인 서경집에는
「공산성쌍수영청옥상량문公山城雙樹營廳屋上樑文」이 실려 있다.
이는 유근이 충청도관찰사로 재임 중
공산성 수축을 하면서 쌍수영청을 지었고,
직접 이에 대한 상량문을 지었기 때문에
1662년에 간행된 그의 문집에 수록된 것이다.
이 쌍수영은 곧 당시의 충청감영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공산성 안에는 원래 ‘쌍수’가 있었고, 1603년에 이곳에 감영 건물을
지으면서 이를 ‘쌍수영’이라 하였으며,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산성 안에
위치한 충청감영 즉 쌍수영에 주필한 이후에는 공산성의 명칭이 ‘쌍수산성’으로
불리우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이상의 글은 공주 박물관에서 있었던 (2013년 11월 13일)
임 선 빈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강의록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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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이라는 분은 서경이라는 호를 썼고
그가 돌아 간 뒤에 외손과 증손이 힘을 써서
유근의 시문을 모아 서경집을 개간합니다.
그중에 한구절 공산성의 공북루와 관련한 시가 있습니다.
우로부터 네번째 줄입니다
一片公山錦水頭 湖西控扼此咽喉
經營未半身先去 尙有巍然百尺樓
짧은 글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은데
눈 밝은 이의 도움을 요합니다.
공산성의 한쪽은 금강물이 맞닿았는데
호서를 다스리(통제하)는 인후와도 같네
공산성 고치기를 반이 안되어 몸이 떠나지만
오히려 백척이나 되는 공북루는 우뚝하도다
우로부터 두번째 줄입니다
공산북성구무문 신작북문설위포
루이통강로 미급필역이거
(공산의 북성은 옛부터 문이 없었기에
새로이 북문을 만들고 포를 설치하였네
북루는 강으로 통하는데
다 마치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네)
대략 이런 내용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유근이라는 관찰사는 공산성을 개축하고
충청감영 건물을 건설하며 공북루등을 신설하면서
애를 쓰다가 미처 일을 다 마치지 못하고
다음 임지로 떠나가는 심경을 시로 남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유근의 시문을 모아서
우암 송시열이 서문을 쓴 서경집이 나온 때는
1662년으로 외손자대에 이르러
충청관찰사 오정위에 의해 시집이 개판되고
다시 삼척부사 외증손자 김진표에 의해
1665년에 문집이 보완되어 개판되는데
그 서경집을 처음 개판한 장소가 어딘가 하는 것이
오늘 글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바로 1662년 공산의 남쪽에 있는
남혈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려서 남혈사를 남산절로 불렀습니다.
남산에 있는 절이라는 의미인데
삼국유사에도 공산의 남쪽 남산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공산의 남산이라면 금학동의 수원지 인근과
주미산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산이 될것입니다.
신령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남산이
지금은 생태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모습이 크게 변하고 있습니다.)
좌에서 두번째 줄 하단에
'개판어공산남남혈사' 라고 나옵니다.
간략하게 말해서 남혈사라는 절은
1660년경에 스님들이 모여 살면서 수행을 하는 동시에
문집을 간행할만한 여건을 갖춘 사찰로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하는 사실입니다.
나무에 판각을 할 글씨는
문중에서 썼거나 아니면 스님들이 썼을 수도 있으나
그 글을 나무에 새겨서 다시 인출하는 과정을 살펴 본다면
이는 분명 남혈사에 목재와 먹의 성질에 정통한 스님이나
글을 새기는데 능통한 각수 역할의 스님들이 있었다 보여집니다.
혹시 더하여 종이를 생산하는 역할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설령 스님들이 그같은 일을 하지 않았고
관에서 양공들이 파견나와 개판하는 작업을 했다해도
그들이 머물 수 있는 당우와 뒷바라지 하는 역할을
남혈사의 대중들이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추측이 가능한 것은 임진란 이후에
스님들이 승군으로서의 조직적인 역할을 계속하며
공산성 영은사와 망일사?(오정위가 두개의 절을 보수하였다 함)
등에 머물며 수행과 축성 건축및 훈련을 계속하였을 것이니
이런 추정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게 됩니다.
*(호서(湖西) 우도의 관문(關門)이된지 60년만에
불초가 첨직(忝職)하여 성이 무너진 것을 수축하고
누각(樓閣)이 헐은것을 수습(修習)하여 두 절을 중창하고
승도(僧徒)를 모집하여 살며 지키게 하였으니
일은 누기(樓記)에 보였다.)
*오정위(吳挺緯)
1616(광해군 8)∼1692(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군서(君瑞) 또는 서장(瑞章), 호는 동사(東沙).
아버지는 관찰사 단(端)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심액(沈#액08)의 딸이다.
당숙 전($전05)에게 입양되었다.
1645년(인조 2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52년(효종 3) 부교리·수찬을 지내고, 1659년 승지를 역임하였다.
1664년(현종 5) 예조참의가 되었으며 그뒤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는데,
이때 공주의 옛성을 개축하고 두 곳에 절을 세워 성을 지키게 하는 등
크게 치적을 올렸다.
*[편찬/발간 경위]
1665년(현종 6) 유근의 외증손 김진표(金震標)가 삼척부사로 있을 때 간행하였다. 원래는 외손 오정위(吳挺緯)가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가장시(家藏詩) 약간과 『황화집(皇華集)』에 수록되었던 유근의 시만을 모아 1662년 상·하권으로 간행하였던 것인데, 김진표가 누락된 것을 보충하고 교정을 가해 재간한 것이다. 권두에 김진표의 지(識)와 송시열(宋時烈)의 서(序)가 있고 권말에 오정위의 지가 있다.
위로 *세가지는 인터넷 인용문임
그런 남혈사가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금학동 수원지 좌측으로 지금은 사지만 덩그라니 남아 있고
사지 위로 100여미터 오르면 남혈이라 불리우는 동굴이 있으면서
지은지 오래지 않은 작은 법당과 요사채가 남아 있지만
관리인만 드나들며 보살필 뿐 스님들이 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신라말 고려초에 국사로 계셨던 정진 국사가 출가한 사찰이요
유근의 서경집을 개판한 사찰이라면 그 사격이 적지는 않았을 터
그런데 지금은 남혈사지로 오르는 길조차 사유지로 변하여서
차가 오르지 못하게 막혀져 있는 상태입니다.
(정진국사:양부선사의 제자로
남혈사에서 출가하여 서혈사에서 수행하고
중국에 유학을 다녀와서
라말려초 시기의 선풍을 크게 진작시키고
문경 봉암사에 머물면서 국사로 추존되었고
청원군 남이면이 물에 잠길 것을 예언하였으니
지금의 대청호로서 중부권의 식수원이 되고 있음.
정진국사탑비가 봉암사에 모셔져 있다)
무려 천오백년전 백제시대부터 있었던
공주의 사대 혈사 가운데 하나인 남혈사가
이대로 방치되어 외면되게 한다는 것은
백제문화 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에 등재된
공주시의 위상과 체면에 손상이 가는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남혈사의 복원은 어렵겠지만
바라는 바는
공주시 차원에서 남혈사에 오르는 길을 확보하여
역사 탐방차 외지에서 오는 손님들이나 공주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로이 드나들면서 불심과 역사의 향기를 맡을 수 있도록
힘써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이 글은 역사학도가 아니므로
혹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고 보십시요.
허왕욱 선생님에게 남혈사와 서경집 이야기를 듣고
이해준교수님에게 연락하여 서경집 복사본을 받아 들고
사진 몇장 찍은 뒤에 복사소에 맡겼습니다.
공주 상왕산 원효사 심우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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