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돌사신(曲突徙薪)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불 나가는 굴뚝을 밖으로 굽히고 근방에 있는 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뜻으로, 재앙을 미연(未然)에 방지함을 비유하는 말. 초두난액(焦頭爛額)이라고도 함.
「事言故事․事物譬類」,
防患未然 曲突徙薪
곡목구곡목(曲木求曲木)
굽은 나무는 다시 굽은 나무를 구하게 된다는 말로, 곧은 나무를 안 쓰면 공연히 헛수고만 거듭된다는 말.
* 춘추 시대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하루는 궁중 마굿간을 맡아 돌보는 관리를 만났다. “그대가 하는 일에 가장 힘든 것이 무언가?” 그러자 그는 별 것을 다 묻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야 마굿간 만드는 일이죠.” 그러더니, 곧은 나무가 흔치 않아 아랫사람들이 대개 굽은 나무를 깎아 마굿간을 만드는데, 그러다 보니 마굿간 전체가 삐딱하게 세워지거나 견고하지 않아서 다시 굽은 나무토막으로 이어 대거나 얼기설기 엮어 매게 된다는 설명을 했다. “처음부터 곧은 나무를 쓰게 되면 마굿간도 튼튼하고 보기 좋거니와 나무도 덜 들고 일손도 덜텐데 말씀입죠.” 환공은 이 말을 듣고는 뭔가를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사람을 골라 쓰는 것도 그와 같으니까.’
곡무호 선생토(谷無虎先生兎)
범 없는 골에 토끼가 선생 노릇함이란 뜻으로, ①강자가 없어지면 약한 자가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횡포를 부린다는 뜻. ②군자가 없는 곳에 소인들이 횡행한다는 뜻.
곡미풍협(曲眉豊頰)
활처럼 굽어서 예쁜 눈썹과 토실토실 탐스러운 뺨을 뜻하는 말로, 아름다운 여인을 형용하는 말.
「韓愈 送李愿歸盤谷序」,
曲眉豊頰 淸聲而便體
곡복사신(穀服絲身)
먹는 것과 입는 것. 사신곡복(絲身穀服)이라고도 함.
곡부득기소(哭不得己笑)
울어야 하는데 마지못해 웃는다는 뜻이니, 하기 싫은 일을 마지못해 함을 이르는 말.
곡수연(曲水宴)
⇒곡수유상(曲水流觴) 참조.
곡수유상(曲水流觴)
지난 날, 음력 3월 3일에 곡수에 술잔을 띄우고 시가를 읊으며 놀음.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가 영화(永和) 구 년(九年) 3월 3일에 내빈을 모아놓고 연히를 열었다고 함. 곡수연(曲水宴) 또는 유상곡수(流觴曲水)라고도 함.
「古文眞寶」,
淸流激湍 映帶左右 引似 爲流觴曲水
곡자(이)상명(哭子(而)喪明)
자식이 죽자 몹시 슬퍼하여 장님이 되었다는 고사.
「禮記」,
子夏喪其子 而喪其明 曾子弔之 子夏曰 天乎予之無罪也
곡절(曲折)
복잡한 사정.
「史記 魏其武安侯列傳」,
吳楚反時 潁陰侯灌何爲將軍 屬太尉 請灌孟爲校尉 夫以千人與父俱 灌孟年老 潁陰侯强請之 鬱鬱不得意 故戰常陷堅 遂死吳軍中 軍法 父子俱從軍 有死事 得與喪歸 灌夫不肯隨喪歸 舊曰 願取吳王若將軍頭 以報父之仇 於是灌夫被甲持戟 募軍中壯士所善 願從者數十人 及出壁門 莫敢前 獨二人及從奴十數騎馳入吳軍 至吳將麾下 所殺傷數十人 不得前 復馳還 走入漢壁 皆亡其奴 獨與一騎歸 夫身中大創十餘 適有萬金良藥 故得無死 復創少瘳 又復請將軍曰 吾益知吳壁中曲折 請復往 將軍壯義之恐亡夫 乃言太尉 太尉乃固止之
吳楚七國의 난이 일어났을 때, 관영의 아들인 영음후 灌何가 장군으로서 太尉 周亞夫에게 예속되자 관맹은 校尉로 임명해 줄 것을 청했다. 아들 灌夫는 千人部隊의 대장으로 그의 부친과 행동을 함께 하게 되었다. 태위는 처음 관맹이 나이가 너무 들었다고 해서 그의 종군을 하락하지 않으려 했으나 영음후의 청이 간절했기 때문에 겨우 승낙을 한 것이다. 관맹은 그것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싸울 때마다 일부러 적의 견고한 진지를 골라서 공격하곤 했는데 吳나라 군사와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군법에 의하면 부자가 함께 종군할 경우 어느 쪽이든 한쪽이 전사하게 되면 남은 한쪽은 그의 유해와 함께 집에 돌아가도 좋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관부는 유체를 호송하여 귀향하기를 거절하고 분연한 기색으로 이렇게 말했다. “오왕이나 아니면 적장의 목을 베어서 부친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그런 다음 관부는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창을 든 다음 부대 안의 장사들 가운데 평소에 친교가 있고 기운찬 자를 모집했더니 함께 가기를 청하는 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막상 진문을 나서자 감히 나아가려는 자가 없었다. 다만 두 사람의 장사와 관부를 따라 종군했던 집안 하인 십여 명만이 관부를 따라서 오나라 본진까지 달려들어갔을 뿐이었다. 마침내는 오나라 장군이 본진까지 뚫고 들어가서 적병 수십 명을 살상했으나 그 이상은 더 나아갈 수가 없어서 말을 돌려 한나라 진지로 도망쳐 왔다. 이 싸움에서 관부는 하인 전부를 잃고 장사 한 사람과 함께 돌아왔을 뿐이다. 관부 자신도 10여 군데나 큰 부상을 입었다. 때마침 귀중한 좋은 약이 있어서 죽지는 않고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관부는 상처가 조금 아물고 나아지자 또다시 장군에게 청했다. “저는 이제 吳나라 군사의 진지 내부를 더 소상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한 번만 더 가서 싸우게 해 주십시오.” 장군은 이를 용감하다고 생각은 했으나, 관부를 잃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太尉에게 상의했다. 태위 역시 굳이 말렸다.
「史記 李將軍列傳」,
廣已見大將軍 還入軍 大將軍使長史持糒醪遺廣 因問廣食其失道狀 靑欲上書報天子失軍曲折 廣未對 大將軍使長史急責廣之幕府待簿
李廣은 大將軍을 회견하고 군영으로 돌아왔다. 大將軍은 長史(비서관)에게 말린 밥과 탁주를 들려 이광에게 보내고, 이광이 조이기(趙食其)가 길을 잘못 들아 헤맨 사정을 묻게 했다. 衛靑(大將軍)은 서면으로 황제에게 자세한 사정을 상주할 생각이었다. 이광은 좀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위청은 장사에게 막사로 가서 문서에 의해 문답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이광을 엄중하게 문책하고 막부에서 심문하려고 차비를 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