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적 마사지의 역사
신체의 어느 부위에 통증이 있거나 경결을 느꼈을 때 무의식적으로 그 곳을 손으로 문지르고, 두드리며, 어루만지는 반응들을 나타내게 된다. 이는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는 자가치유(self healing) 반응이다.
Manual therapy는 손을 이용하여 신체의 이상부위를 치료하거나 원활한 움직임을 위하여 시행하는 것으로 의학이 발달하기 이전의 먼 옛날부터 인간이 신체의 이상을 느낄 때 이를 경감시킬 목적으로 시행하였던 민간요법으로서의 치료행위이다. 마사지는 피부와 근육을 비벼 문지르고, 주무르며, 두드리고, 쓰다듬으며, 누르고, 흔드는 등의 여러 가지 손의 율동적 놀림으로 시행되어져 왔다.
고대의 의학기록에 따르면 마사지는 치료법의 한 형태로서 언급되고 있고 역사를 통해 그 사용이 계속되어져 왔다. 치료사, 철학자, 시인과 역사가의 기록을 보면 문지르거나 기름을 바르는 형태는 원시시대 때부터 미개한 종족이나 문명화된 민족들에게서도 사용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사지의 기원과 역사에 관한 기록은 주로 고대 동양의 중국, 인도와 이집트, 아시리아, 그리스, 이탈리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의 마사지에 관한 가장 오래된 유명한 문헌으로는 약 B.C. 2598년 경 춘추시대에 쓰여진『황제내경』이 있다. 이에 따르면 "인체는 위협을 느끼면 신경과 혈관이 막혀 마비를 일으키지만 그것은 안마(按摩)로 치유된다."고 하여 마사지 치료법의 일종인 도인술(導引術)을 기술하고 있다. 이 것은 동물의 움직임을 흉내내는 동작과 호흡운동을 결합한 움직임을 통하여 신체의 조화를 이루어 더욱더 유연하고 활력을 유지하게 하려는 것이다.
기원전 1800년경 고대 인도의 『베다 성전』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요가 제식에 종교적인 목적과 치료목적을 위하여 호흡운동이 이용되었으며, 『마누 법전』과 기원전 9세기에서부터 3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야유베르 비문』에는 치료 체조와 마사지의 두드리기 방법과 누르기 방법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인도 신전에 새겨진 산스크리트 원본에는 부처님이 마사지 치료를 받고 좋아졌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고대 이집트는 인도, 중국과 더불어 인류문명의 발상지로서 세계문화사적인 수많은 역사적인 유물을 남기고 있는데, 의학에 관한 기록은 피라미드, 석관, 비문, 파피루스의 상형문자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41년 이집트 군장의 석관에서 발견된 파피루스에는 여러 가지 마사지의 시행방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베를린 박물관에는 기원전 705년부터 681년에 이르는 아시리아의 산 헤리브 궁전에 있던 설화 석고의 조각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것과 같은 마사지 방법이 묘사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의 헤로디커스(Herodikus, B.C. 500?), 헤로도투스(Herodotus, B.C. 484∼425),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B.C. 460∼377), 아스클레피아디스(Asclepiadus, B.C. 128∼56) 등은 마사지와 운동처방에 대한 업적을 남겼다. 기원전 430년경에 히포크라테스는 견관절의 탈구를 예방하기 위하여 어깨를 문질러 부드럽게 해줄 필요가 있다고 하였으며, 그 후 아스클레피아디스는 마사지, 체조, 식이요법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으며 마사지의 효과를 인정하고 기계적 치료를 실시하였다. 이 시대의 마사지는 치료 목적뿐만이 아니라 예방과 건강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갈렌(Galen, 129∼199)은 마사지를 강, 유, 약의 여러 강도의 마사지 방법을 제시하였다(Tappan, 1978).
그리스와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마사지가 유행이었고, 의사들은 마사지를 운동, 미네랄 목욕과 함께 건강관리의 한 부분으로 권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호머의 『오디세이』에는 마사지를 '피로에 지친 영웅들에게 좋은 피로회복 방법'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의학의 기초를 다졌다는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마사지가 치료에 있어서 핵심적인 원리라는 걸 발견하고 의학수업에 마사지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관절이 탈구된 어깨의 치료법을 설명하면서 "치료사는 많은 경험이 있어야만 하며 어깨주위 근육을 부드럽게 천천히 문질러줘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같은 치료방법이라 하더라도 같은 효과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찰은 이완된 관절을 결합시킬 수 있고 강직된 관절을 풀어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상태의 어깨를 부드럽게 문질러야 하고 무엇보다도 천천히 시술해야 한다. 그러나 관절은 난폭하지 않게 최소한 고통이 줄어들 수 있게 치료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플루타르크는 그의 저서에서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 B.C. 100∼44)가 자신의 간질 예방과 신경통(neuralgia)의 완화, 엄청난 피로에서 회복하기 위해 매일 마사지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로마의 위대한 자연주의자 원로 플리니는 천식 때문에 매일 목욕할 때마다 신체 부위를 스스로 문질렀다고 한다(Wood, 1974).
16세기 전 중세시대 유럽에서는 거의 마사지를 할 수 없었고, 육신의 쾌락과 관련된 모든 행위는 금기시되었다. 마사지는 중세에 그 발전이 중단되었는데, 이는 금욕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하고 신체보다 정신의 육성만을 중시하였던 사상으로 말미암아 신체에 대한 교육이 무시되어 고대 의학에 대한 탐구는 중세에 거의 중단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마사지, 침술, 지압, 시아추(Shiatsu; 마사지와 지압의 혼합방식)가 탁월한 치료효과 때문에 각광을 받았다.
마사지에 관한 새로운 관심이 시작되게 된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프랑스 외과의사인 '파레(Pare, 1518∼1590)'가 기계적 요법을 위한 해부생리학적 연구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 Pare는 처음으로 마사지의 시술방법이나 치료효과에 대해 발표하였고, 특히 의사의 입장에서 마사지의 효과나 체조법을 세상에 소개한 것은 암스테르담(Amsterdam)의 의사 Mezger, Bergmann 등이 였으며, 네델란드의 의사 Mezger는 체조와 마사지의 밀접한 관계를 학문적으로 밝히고 운동치료(Therapeutic Exercise)를 제창했다.
그 후 기계적 요법에 관한 많은 저술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행하게 된 것은 스웨덴 체조의 개척자인 '링(Ling, 1796∼1839)'에 의해서였다. 중세에 들어와 자취를 감추었던 마사지는 링에 의해서 부활되어 발전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는 펜싱과 체조 교사였는데 자신의 팔에 있던 관절염을 마사지로 치료한 후 마사지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의료체조와 마사지를 혼합한 방법을 고안하였으며, 마사지에 대한 생리학적 이론을 제시하였고, 각 국의 마사지를 체계화시키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마침내 동양은 1800년대에 링의 노력으로 서양과의 접촉 기회를 갖게 되었다. 1776년 태어난 링은 오늘날에도 가장 친숙하게 여겨지는 마사지 방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스웨덴식 마사지(Swedish Massage)이다. 19세기가 동틀 무렵, 링은 불어로 번역된 책을 통해 동양의 마사지 기술에도 손을 뻗고 『Holistic Health』라는 체계적인 접근법으로 새로 고안해 내었다. 그것은 로마나 그리스의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마사지 이상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는 광천수의 사용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정기적인 미네랄 목욕과 목욕 후 점진적인 운동을 추천했다. 링의 이론은 생리학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의 마사지 방법은 "링식 방법(The Ling System)" 또는 "스웨덴식 운동 치료법(The Swedish Movement Treatment)"으로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에 알려졌고, 1813년 스웨덴 정부가 스톡홀름에 세운 왕립중앙체조대학(Royal Gymnastic Central Institute)의 교과과정에 마사지가 정식과목으로 채택되었다. 이 방법이 유럽에서 호응을 얻어 여기에 기초한 학회가 설립되기도 했다. 이른바 스웨덴식 동작치료학회라는 것으로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에서도 건립되었다. 스웨덴 공립학교에서는 정부의 권고로 이 방법을 채택했으며, 오늘날 미국 마사지 치료협회(American Massage Therapy Association; AMTA)에서는 이를 마사지의 기준을 설립하기 위한 청사진으로 보고 있다.
1854년에서 1920년 사이, 마사지는 더 많은 발전을 하였다. 마사지는 비교적 전문적 기술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몇 명의 유명한 의사들은 스톡홀름에 자리한 링의 「센트럴 인스티튜트」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이들은 약물치료, 수술, 그리고 더 자연적인 치료방법 사이에서 평균치를 도출해 냈다. 1860년 의학박사 타일러(Taylor)는 링의 방법에 관한 저서『운동과 건강』을 펴냈고, 유럽을 본떠 뉴욕에 협회를 건립하였다. 또한 의학박사 트라인(Trine)은 이 방법을 시카고에 도입했다. 의학박사 켈로그(Kellogg, 1852∼1943)는 미시간주 배틀크리크에서 건강의 십자군으로 명성을 날렸는데, 그는 많은 마사지사를 고용했고, 1895년에는 『마사지 기법』이라는 유명한 책을 출판했다. 또한 다른 스웨덴 사람들도 그들의 고국에서 링의 「센트럴 인스티튜트」에서 교육을 받고 미국에 건너와 많은 업적을 남겼었다. 수많은 마사지 교본이 영어로 번역되었는데 그 중에는 1890년에 출판된 오스트롬(Ostrom)의 『마사지와 최초의 스웨덴 동작』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마사지 기술 가운데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경찰법의 절차에 대하여 자세히 기술하게된 것은 1897년 스웨덴 마사지의 영향을 받은 독일에서 호퍼(Hoffa)가 『마사지의 기술』이라는 책을 발간하면서부터이다. 이 책은 현재까지도 마사지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교재로 되어 있다.
19세기 말경에 유럽 각국의 의사들은 크게 마사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여 독일과 스웨덴계의 2대파가 인정되었다. 네덜란드의 Mezger, 독일의 Mossengell, Zabludowski, Hoffa, Kirchberg, 프랑스의 Norstrom, 오스트리아의 Bum, Reibmayr, 스웨덴의 Ling, 이탈리아의 Maggiora, Colombo, 러시아의 Trabadski, 미국의 Kellogg 등 여러 대가들이 잇달아 나타나서 임상응용 과학적 기초를 주는 동시에 현대 마사지의 체계를 확립하는데 공헌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Jacquet는 「Plastic Massage」를 제창하였으며, 이는 제자인 Leroy, Meyer, Kamenetz에 의해 더욱 발전했다. 한편 스포츠마사지가 Costo, Ruffier의 저서로 출간되고 Gunn은 최초로 마사지를 인공호흡에 활용하는 길을 열었다.
20세기를 특색짓는 마사지는 뭐니뭐니해도 반사 마사지(reflex massage)일 것이다. Cornelius는 Henry(1861∼1940)의 업적으로 알려지는 반사대(reflex zones)에 마사지로 적용했는데 이것은 그 자신의 치료체험이 큰 힘이 되고 있다. 유사한 방식이 Barczewski를 거쳐 Dicke에 이르러 완성하게된 결합조직 마사지가 그것이다. 결합조직마사지는 특히 분절치료(segment therapy)라고도 한다.
독일 Muller의 「Hartspann Massage」, 오스트리아 Hartmann의 「Gelosen Massage」, Ruhman의 「Tast Massage」가 각각 발표되어 치료뿐만 아니라 진단적 의식을 갖는 면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또 스위스의 Terrier는 Mennell의 「Manipulation」이나 Ruhman의 「Tast massage」를 계통화 하고, Vogler는 Cornelius, Muller, Lange의 기법에 개량을 가한 「Periosteal Massage」를 고안했다. 이들 모든 방식은 손가락 1∼2개를 사용한 가벼운 마찰법이며, 강한 압박을 가하지 않는데 그 특색이 있다.
근년의 업적으로는 Pohlman에 의해 도입된 초음파를 응용한 「Micromassage」가 있다. 또 Fuchs가 말초성 혈관장애 치료에 심장의 리듬과 동화시키는 「Syncardial massage」를 완성하고 있다.
1902년 미국의 철저한 마사지 옹호자인 그라함(Graham) 박사는 "마사지의 역사, 그 적용법 및 효과"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 논문은 미국 의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917년 영국 런던에 있는 성 토마스 병원 부속학교의 마사지 강사였던 멘넬(Mennell)은『운동과 수기와 마사지에 의한 물리치료』란 책을 출판하였고, 1929년 독일의 디케(Dicke)는 인체내의 독특한 반사감각대, 즉 「Bindegewebs Massage」로 알려진 결합조직마사지를 개발하였다. 1937년 미국의 버드(Beard) 여사는 물리치료 평론잡지에 마사지에 관한 논문을 게재하였고,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마사지 강의를 하여 마사지를 전국적으로 보급시켰다. 그 후 스톰스(Storms)와 시리악스(Cyriax)에 의하여 마사지 기술이 발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Tappan, 1988).
1920년대에는 의사이자 물리치료학 교수인 맥켄지(Mckenzie)가 전문적인 물리치료 교수가 되어 해부학 및 생리학과 관련된 수업에서 마사지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맥켄지의 주장은 채택되지 않았다. 실용적인 치료요법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번성하고 있을 때, 미국에서는 문화적인 규범으로 인해 마사지가 정착되지 못했던 것이다. 의학이론이 발달하고 19, 20세기에 의학적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실용적인 마사지 요법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1943년 미국의 치료사들이 미국 마사지사 협회를 창설했고, 이것이 현재 마사지치료협회(AMTA)로 알려진 기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음파 같은 새로운 치료기술 때문에 시간이 소요되는 마사지는 더욱 입지를 잃어갔고, 손으로 하는 마사지는 의학의 주류에서 떠돌다가 마침내 휴양지나 헬스클럽, 미용실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마사지는 다시 환영받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시계추는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발행된 스포츠의학서적에는 과학적 연구를 통해 수많은 마사지의 이점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스포츠마사지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선수들에게 시술함으로써 많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아마추어 선수나 프로 선수, 그 외 많은 선수들은 마사지의 예방적이고 회복적인 가치를 직접 경험하였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경쟁적인 스포츠에 참가하면서 마사지 치료사들을 볼 수 있는 기회도 그만큼 증가하고 있다. 사실, 치료의 효과가 있는 스포츠마사지의 필요성이 계속 대두되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건강관리라는 관점에서 형성된 한 유행이라 할 수 있다. 운동, 식이요법, 근육이완, 그리고 스트레스를 줄임으로써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전통적이고 대체적인 치료와 건강관리의 기본적인 철학은 불신과 오해로 산산조각이 났지만 운동선수들을 위한 마사지는 이러한 파탄의 틈을 메워주고 있으며, 다시 한번 스포츠의학에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스포츠마사지에서 "1온스의 예방이 1파운드의 치료보다 낫다."라는 격언은 그야말로 딱 맞는 말이다. 스포츠인의 세계에서는 연습을 완전히 중단하지 않으면서, 가능하다면 수술이나 약물치료가 아닌 다른 방법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예방적인 마사지를 한다면 선수들의 부상이 만성이 되기 전에 또는 조기에 이를 발견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좋은 점은 그러한 부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로 마사지 치료요법은 새로운 전문분야로 빠르게 발전해왔다. AMTA는 법령을 통해 마사지의 신용을 높이고자 노력하고 있고, 히포크라테스의 시대처럼 마사지 치료사를 건강관리 제도권의 인력들과 기본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기 위한 계획도 마련되어 있다. 역사는 되풀이되기 시작한다(Johnson, 1995).
우리나라의 마사지에 대한 기록은 세종 27년(1445년) 10월에 편찬 완성되어 성종 8년(1477년)에 발간된 「의방유취」205권 양생도인법 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1442년 세종대왕께서 「바라문안마법」이 어떤 방식의 체조이며, 어떤 효과를 지닌 안마술인가를 연구하기 위하여 신하들에게 자료를 수집, 편찬하도록 한 것에서 천축국(인도)의 안마법이 우리나라에 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과 비슷한 여러 가지 마사지 동작과 체조 동작 등 18가지 운동으로 구성된 이 안마법은 위장이 신체건강의 기본이라는 생각에서 위 부위의 자극촉진운동을 중요시했으며, 골격, 관절, 피부 등에 대한 안마를 통하여 혈액순환을 촉진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안마와 체조를 이용한 건강법으로 시행한 바라문안마법은 주로 학자나 고위층에 국한되어 항상 실내에 앉아서 생활하기 때문에 고정화되기 쉬운 신체활동을 가진 특수층의 건강을 유지 증진시키려는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전 국민에게 보급되지는 못하였다. 이 외의 문헌으로 이황의 「활인심방」이 있는데, 이 책의 도인법에는 고대 중국의 의료체조에 관한 문헌을 참조하였음이 나타나고 있는데 활인심방과 도인법의 동작 도해는 중국 팔단금 운동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스포츠마사지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스포츠마사지의 효과에 대한 인식부족과 제도적 지원의 부족으로 아직 그 기반 자체가 미비한 실정이다.
근래 들어서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치르면서 마사지의 효과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였고, 현재 스포츠 현장을 중심으로 그 중요성이 조금씩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