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드라마 ‘파랑새는 있다’에서 차력팀 ‘코리아 브라더스’를 가르치던 무술감독. 그는 그렇게 시작했다. 이후 운명 같은 제안으로, 직접 드라마에 출연해 차력을 대중에 알린 오재성 감독.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인생이야말로 드라마 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고들 입을 모은다. 드라마 밖, 오재성 감동의 굴곡 많았던 인생사를 들어봤다.
나는 1955년 3월 3남 2녀 중 3째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우리 집은 전북 남원에서 제일가는 부자소리를 들을 만큼 유복했다. 하지만 부유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노름으로 전 재산을 탕진한 아버지가 울화병으로 돌아가진 직후, 가세는 크게 기울었다. 어린 나이에 가난부터 배울 만큼, 우리 집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밥을 굶기 일쑤였고, 어린 나이에도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어머니는 채 같은 것을 만들어 판매했다.
어릴 때부터 건강 체질을 타고 났다. 천성적으로 몸이 강질이었는지, 예방접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던 그 시절, 특별히 아프거나 한 일이 없었다. 형제들은 모두 키가 컸지만, 유독 나만 작았다.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안타까웠다.
| ▲드라마 ‘파랑새는 있다’ 촬영 전 목에 죽창을 받는 장면을 지도할 당시(1997, 사진 왼쪽)© ©무예신문 |
| 1962년, 영광에 위치한 영광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과목 중에서도 체육과목을 특히 잘했다. 물 만난 물고기라고나 할까. 사이클과 축구, 달리기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대회에서는 1등을 도맡았다. 학교대항전도 때마다 출전했다. 전국 규모의 달리기 대회에도 출전해 상을 휩쓸었다.
공부도 중상위권 정도는 유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부도 어느 정도 하고, 운동도 잘했으며 성격까지 쾌활해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이즈음, 우리 집은 여전히 가난했지만, 나는 큰 형의 추천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태권도를 배울 수 있었다. 태권도는 이후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해서 배워나가게 된다. 아무리 형편이 좋지 않아도 운동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들도 나를 이해해줬다.
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나는 우리 동네 골목대장이었다. 싸움을 무척 잘했고, 내로라하는 말썽꾸러기로 심한 장난을 많이 쳤다. 하지만 이로 인해 된통 당한 사건도 있었다. 5학년 때였다. 한번은 학교를 다녀온 후, 수박밭으로 아이들을 이끌고 대규모 서리를 감행했다. 따먹다 먹기 싫은 건 발로 차서 버리던 중 오두막을 지키며 잠을 자던 밭주인에게 발각됐다.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이 어른의 보폭을 뛰어넘기는 어려웠다. 이날의 멤버들은 하나둘씩 모두 잡히고 말았다. 밭주인은 10여명의 아이들을 완전히 발가벗긴 후, 새끼줄로 꽁꽁 묶어 동네를 끌고 다녔다. 어찌나 창피했는지,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날 이 사건이 집에 알려져 엄청나게 혼이 났다. 어머니가 밭주인에게 수박 값을 물어준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중학교는 전북 전주에 위치한 상명중학교에 진학했다. 이 학교로 진학한 이유는, 낮에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 중학교는 야간반이 없었지만, 이 학교는 야간반이 있었다. 집에서는 거리가 멀어, 전주 외숙집에서 생활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학교에 가는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당시 심부름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 지금으로 치면, 대형마트 개념의 동네 큰 가게에서 배달 일을 하곤 했다. 창피하지 않았다. 이 당시만 해도, 힘들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던 시절이었다. 한 달 꼭박 벌었던 아르바이트 급여는 1천원이었다. 적지 않은 돈이었다. 돈을 벌어 꼬박꼬박 어머니에게 전해 드렸다. 어머니께서 힘들게 일하고 계시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형제들 모두 주경야독식으로 학교를 다녔다. 얼마 뒤, 큰 형이 노름을 해서 그나마 남은 재산마저 모두 탕진했다. 이즈음, 나의 일탈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누가 쳐다보거나 건들면 바로 싸움을 일으켰다. 당시 가정형편이 어려워 예민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나로 인해 집안에서는 걱정이 많았다.
중학교 졸업 후, 상명정보종합기술학교로 진학했다. 상명중학교와 한 건물이었다. 고등학교에서도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녔다. 점차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다니다 말다가를 반복했고, 공부와는 점차 멀어졌다. 대신 운동쪽으로 파고들었다. 운동을 할 때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고, 또한 열심히 임했다. 운동이 적성에 맞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태권도와 함께 합기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사실상 가는 곳마다 도장이 있으면 일단 입관부터 할 만큼 운동욕심이 많았다. 문제는 운동을 하나 배우면, 그것을 밖에 나오면 써먹곤 했다는 것이다.
발차기를 배우면, 그날 다른 사람을 상대로 발차기 기술을 실전에 사용했다. 마음속으로는‘누가 건드리면 배운 걸 바로 써먹어야 되겠다’고 마음먹곤 했다. 만약 그런 일이 없으면, 일부러 어깨를 부딪치는 등 시비를 걸어써먹었다. 다행히 경찰서까지 불려가진 않았다. 무예신문 (http://mooy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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