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졸업 당시 합기도 3단, 태권도 4단 단증을 획득했다. 우슈와 격투기 등도 배운 탓에 운동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복싱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일종의 이루지 못한 한(恨)이랄까. 지방이라 복싱을 배울 곳이 마땅치 않았다. 아마도 이때 복싱을 배웠다면 세계챔피언까지 오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 만큼 그 때는 체력이나 순발력, 파워에 있어 모두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팔이 길어 유리했다.
나는 곧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도장을 여는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애당초 가정형편상 개관은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학창시절 운동에만 집중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내노라 할 이력조차 없었다. 당시만 해도 부모님이 찾아오지 않는 한 도장에서 대회 출전자격을 주지 않았다. 실력이 아니라, 부모들의 입김이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내겐 그러한 것이 없었다. 시범단으로 활약할 만큼,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큰 대회를 단 한번도 나가보지 못했다.
1980년대 초반, 운동을 그만두겠다며 도복 등을 모두 태워버렸다. 서울행을 택했다.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일단은 상경해 이왕이면 큰물에서 놀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운동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돈을 벌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아는 사람도, 자격증이나 이렇다할 특기도 운동 외엔 없었기에, 취업할 만한 곳이 없었다. 별 수 없이 서울의 한 도장에서 사범생활을 하며 지냈다.
| ▲체육관 개관 후 관원들에게 합기도와 우슈를 직접 시범을 보일 당시(1984)© 무예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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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우연찮게 현재의 아내를 만났다. 당시 태권도 사범이었던 아내에게 나는 한 눈에 반했다. 이 사람을 놓치면 평생 후회하겠다 싶었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순수한 마음 하나로 아내에게 다가갔다. 결국 아내도 내 마음을 알아줬다. 그렇게 3년여, 마침내 나는 아내와의 결혼에 성공할 수 있었다. 처가쪽에서 도장을 차려줬다.
서울 신림동에 문을 연 용무관, 내 생에 첫 도장이었다. 지금도 그때 당시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개무량하다. 역시나 운동과는 떨어져 살 수 없는 운명이라 생각됐다. 이곳에서 나는 합기도와 우슈를 가르쳤다. 도장은 상승곡선을 그리며, 관원 200여명이 넘어설 만큼 탄탄대로를 그렸다. 책상 서랍에 돈이 가득했다. 당시 관비는 월 1만 5천원에서 2만원 정도였다. 많은 돈이 들어왔다. 곧 큰 부자가 되겠다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썬데이서울이라는 잡지를 보게 됐다. 이소룡 관련 기사를 보면서 ‘내가 한국의 이소룡이 돼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30대 나이, 또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만큼 여유가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마침, 잡지에는 영화배우학원 광고가 나와 있었다. 곧바로 충무로에 위치한 국제영화배우학원에 등록했다. 무명의 영화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영화판은 만만치 않았다. 힘든 일도 많았고, 설움도 컸지만 참고 견디다 보니, 사람들도 사귀어 가며 점차 입지를 넓힐 수 있었다. 영화판과 도장 두 곳을 오가며 제2의 인생을 설계했다.
그 즈음, 생각지 못했던 내 인생 최대위기가 찾아왔다. 아내가 골반에 임신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 곧바로 수술에 들어가야 한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도 들려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도장을 넘겼다. 다행히 수술은 잘 마무리 됐다.
하루는 충무로에서 홍콩 영화감독이 우리나라 액션스타들을 전부 불렀다. 중국의 길성영화사와 한국의 동혁상사가 공동으로 ‘소림사 태극문’이라는 영화를 제작하는데, 국내 배우가 필요했던 것. 다시없는 기회라 생각했다. 나는 한 치의 말설임 없이 오디션에 지원했다. 유명한 국내 배우들을 오디션 현장에서 볼 수 있었다. 단 한명의 배우를 뽑는 자리, 가능성은 희박했다. 가장 자신있던 묘기 발차기를 선보였다. 내 발차기 시범을 본 홍콩감독은 그 자리에서 나를 낙점했다.
그는 내 발차기를 본 뒤 “운동 테크닉이 이소룡 스타일”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날부로 ‘오발차기’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영화판에서 외발차기를 퍼트린 것은 사실상 내가 최초였다. 주인공 사부 역할을 맡아 나름 열연했다. 아세아 극장에서 꽤나 오래 걸려있었고,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흥행에 성공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자연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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