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출연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자, 스스로의 만족감이 대단했다. 꿈만 같았다. 당시만 해도, 외화는
보통 2주 정도 극장에 걸렸지만 ‘소림과 태극문’은 장장 6개월 동안 극장에서 상영됐다.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중국에서도 영화가 상영됐고, 나에 대한 인지도도 실로 높아졌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기와 달리 돈은 벌지
못했다.
크게 두 가지 이유였다. 우선 영화 개런티로 받은 출연료는 길거리에서 싸움이 일어 한방에
모두 탕진했다. 교도소에 가지 않기 위해 합의금으로 모두 줘버린 것. 꽤나 큰돈이었다.
영화 후 수많은 CF 제의도 나와는 연이 닿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무명배우였던 탓에 매니저도 없었고, CF를 찍어도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주변 영화판 선배들의 ‘더 받아야 한다’는 조언에 액수를 올리다 불발되기 일쑤였다. 얼마 뒤, 내게 조언했던 선배들이 내게 제안이 들어왔던 CF를 촬영하는
모습을 보며 영화판에 크게 실망했다. 그래도 영화판을 떠날 수는 없었다.
인지도가 오르자, 영화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겐
액션 영화가 적성에 맞았지만, 제의 들어온 영화는 멜로였다. 다양한
작품을 해보고자 출연 제의를 받아들었지만 내겐 맞지 않았다. 껴안는 장면에서는 엉덩이가 뒤로 빠지고, 키스하는 장면에서는 어색함이 묻어났다. 애당초 애로배우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자리에서 그만뒀다. 이후 본격적으로
영화판을 뛰어들었다. 인지도가 좀 있다 보니, 비교적
비중 있는 단역을 맡게 됐다. 30여편의 작품에 참여했다. 공중파
방송에도 출연했다. 액션배우로 성공하기 위해, 스케줄이
아무리 바빠도 꾸준히 운동을 병행했다.
이중 하나가 차력이었다. 중학교 때 장터에서 우연히 유랑극단의 차력 시범을 본 후, 고등학교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차력을 연마했다. 실상 무대포로
흉내만 내다 다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1979년 어느 날, 한모씨를 만났다. 그는 ‘서울홍길동’이라고
대본을 갖고 다니면서, 출연자들을 섭외했다. 출연을 위해서는
자신에게 영화무술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배우지망생들을 모아 영화무술 시범단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군부대와 종교단체들을 돌며 시범을 보였고, 이후에는
야간업소를 돌았다. 한씨는 차력을 잘했지만, 결코 우리에게
차력을 가르쳐주진 않았다. 차력은 한씨가, 나머지는 다른
배우지망생들이 맡았다. 나는 태권도와 합기도 시범을 선보였다.
야간업소에서는 ‘차력은 볼거리가 안 된다’며
받아주지 않았다. 홍보 차 전국을 돌았다. 3개월 후부터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인기가 높아지자 한씨는 모두 감당하기 어렵다며 차력을 대충 알려주고 밤무대에 서게 했다. 계속해서
꿈꿨던 액션배우가 되기 위해 열심히 연마했지만 ‘서울홍길동’이라는
영화는 끝내 촬영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한씨와 결별을 선언했다.
영화판 후배였던 박남현을 알게 된 것이 이때였다. 그는 철저히 무명배우였다. 후에 ‘파랑새는 있다’에서
달봉이 역을 맡았던 박남현과 나는 2년 정도 함께 밤무대에서 차력시범을 펼쳤다. 그러던 중 박남현이 드라마 스탭들을 모셔왔다. 자신의 차력시범을
선보이기 위함이었다. 이때 드라마 작가와 PD 등이 나의
차력 시범을 보고는 내게도 드라마 속 무술감독을 제안했다. 믿겨지지 않았다. 드라마 스탭이 됐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다. 그렇게 드라마는
촬영을 시작했고, 박남현은 배우로, 나는 무술감독으로
촬영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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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무술단 시범단원 시절(사진 원쪽 첫번쨰. 1981) © 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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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드라마에서 소림사씬이 있었다. 작가였던
김윤경 선생이 나를 불렀다. 다짜고짜 머리 한번 깎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한씬만 출연하면 된다며 나를 설득했다. 그 자리에서 깎겠다고
말했다. 다시 한번 정말 깎을 수 있느냐 물었고, 두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머리를 밀고, 소림사 씬 한 컷을 찍었다. 거기에서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 후부터, 머리 깎은 사람은 왜 등장하지 않느냐는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나의 고정 출연이 결정됐다. 내 역할도 만들어졌다.
드라마는 인기가 높아 당초 예정보다 늘어난 64회까지 방영됐다. 이후부터 맨 얼굴로는 다니지 못할 만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신경을
쓰게 됐다. 공인이라는 것이 참으로 불편하다 싶었다. CF도
촬영했다. 공인으로써,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실상 아직까지도 우리나라는 액션배우에 대해 인색하다. 영화 시상식에서도 액션배우에 대한
시상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내가 될 성부른 액션배우를 가르치는 데 내 일생을 바치기로 마음먹은
것도, 오늘도 체육관에서 제자들에게 차력무술을 가르치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끝>
무예신문 (http://mooy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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