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 가까이 되었네요. 2012년은 인류에게 다사다난했습니다. 어쩌면 1차 성간전쟁 시절 보다 훨씬 말이죠. 민메이가 은퇴하고 가요계는 동년배 인기 스타인 아이유의 시대가 열립니다. 같은 해 스캔들로 부침을 겪게 되지만요. 사실 많은 평행이론을 보인 둘이 2012년을 기점으로 성년이 되었음에도 행보에서 차이가 있네요. 그외 인류는 장거리 이민선단 '메가로드'를 외우주로 보냈고 지구권에선 런던에서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뭔가 이상해보인다면 마크로스 쪽이 극중극이라 그러니,(혹은 글 작성자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냥 이해하시면 됩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오래된 경구죠. 인류가 아주 예전부터 줄기차게 써먹은 말이고 감시자란 영화에서 정우성이 맡은 인물은 실제로 펜 한자루로 칼 든 사람들의 경동맥을 끊고 다니는 묘기를 보여주기도 했지요. 보통 칼이 상징하는 것은 무력이라 할 때, 펜이 상징하는 것을 놓고 여러 의견이 있지만 저는 보통 '문화'라고 해석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제게는 "'문화'는 '무력'보다 강하다."라는 의미로 다가오는 문장입니다. 실제로 인류역사가 증명해낸 일이기도 하지요. 동서양의 제국을 무너트린 것은 유목민족들이지만 오히려 그들은 제국이 쌓아 올린 문화 속으로 흡수되고 말았으니까요.
2012년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지요. 런던 올림픽이 열렸던 해입니다. 보통 올림픽 개막식하면 이색적인 볼거리의 향연이었죠. 자국 고유의 문화들, 무언가 색다른 그들의 전통들이 수놓아지고 개막식을 보는 사람들은 아, 저 나라는 이런것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간접 문화체험의 장이 열립니다. 평창에서 인면조를 접한 외국인들처럼, 저도 살아온 나날 동안 올림픽 개막식은 늘 그랬습니다. 새롭고, 신기했지요. 하지만 런던 올림픽은 달랐습니다. 아주 익숙한 피터팬이 나오고, 007이 나오고, 아주 익숙한 해리포터가 나오고,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나오고, 이제는 친숙한 엘리자베스 2세가 나오고, 클래식 애호가로서 좋아하는 지휘자 중 한 분인 사이먼 래틀이 아주 익숙한 곡인 '불의 전차' 메인 테마곡을 연주하고, 아주 익숙한 코미디언인 미스터 빈이 나와서 인상적인 꽁트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아주 익숙한 비틀즈의 폴 메카트니가 나옵니다. 와! 개막식에 나온거 내가 다 아는거야! 우와아! 조용히 눈물이 흐르더군요. 영국이라는 나라가 문화적으로 얼마나 강력한 나라인지 와닿았습니다. 아마 개막식을 보는 사람들 중 90% 이상은 적어도 개막식에서 한 장면 이상은 그게 뭔지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게 '문화'의 힘이고 영국이라는 나라의 저력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느 시점부터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영국이지만 그럼에도 영국이 쌓아올린 힘과 마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봤자 핵무기 한 방이면 모두 잿더미가 된다? 그럴리가요. 사람은 죽어도 문화는 죽지 않습니다. 영국이 쌓아올린 문화의 편린은 지구 반대쪽 나라에서 카페에 가도 접할 수 있을 정도(이따금 카페에서 비틀즈의 노래가 흐르기도 하니까요)입니다. 영국의 현 문명이 석기시대 수준으로 파괴되어도 이미 지구문명에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게 문화가 가진 힘입니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는 중심축에 여러 볼거리가 있습니다.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은 삼각관계지만 훗날 함장과 시장이 되는 커플의 출발점, 즉 최초의 성간연애도 굉장히 인상적인 부분입니다. 그리고 발키리들의 도그 파이터라던가 상황을 뒤집는 마크로스 캐논, 마크로스 어택 등도 볼거리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작품의 진짜 중심 키워드는 '문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크로스는 굳이 '5만 명의 민간인의 동승'이라는 것을 선택합니다. 물론 그 군대를 이해할 수 없는 5만 명의 민간인은 그 자체로 갈등요소이기도 하겠고 불안에 떠는 모습등, 좋은 소재거리가 되겠지요. 하지만 작품의 큰 틀을 생각해보면 굳이 의미가 있는 합류인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 5만 명이 그저, 5만 명의 피난민으로 끝났다면 그야말로 의미 없는 5만 명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1차 성간전쟁에서 지구가 살아남은 이유는 마크로스라는 전함이 아닌, 환상의 반응병기라는 반응탄도 아닌, 저 5만 명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들은 거주구가 설치된 전함 안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일들을 벌입니다. 불안과 공포도 존재하지만 그들은 미스 마크로스를 뽑고, 사비를 모아 소백룡이라는 영화도 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굉장히 능동적으로 '문화'를 생산해나갑니다. 브리타이 함대를 전율하게 한 키스 사건(....)도 사실은 문화의 연장선입니다. 브리타이 함대는 지구의 문화와 마주했고 브리타이의 생각을 뒤흔들게 됩니다.
오독하기 쉽지만, 린 민메이는 노래 한 곡 불러서 젠트란디를 전율 시키고 전세를 뒤집은 궁극 울트라 슈퍼 은하 명가수 같은게 아닙니다. 극장판에서 나온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라는 곡이 프로토 컬쳐의 평범한 유행곡이었던 것처럼, 민메이도 평범한 아이돌 가수입니다.(물론 포화 속에서 노래를 부른 가수가 평범하다고 하긴 좀 그렇지만 이후 마크로스에 나온 가수들마다 죄다 그런 모습을 보인 관계로) 민메이가 가지는 것은 그런것이 아닌 절망의 상황에서 소수의 인류가 끝내 포기하지 않은 '문화'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TV판에서의 인간으로서의 민메이는 평범하게 양다리(?)....는 아니지만 평범하게 노래도 하고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하고 그런 평범성을 지닙니다.(후속작 가수가 괴인에 가까운 기행을 선보인것과는 반대로.) 문화라는 것은 독특성 보다는 일상 속에서 보편화 되기 때문에 '현상'으로 발현되는 것이죠. 민메이의 일상은 바로 그 평범성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평범성 속에서 민메이가 만들어 내는 노래들 역시 지구에서 흔히 나오는 노래들입니다. 저는 민메이가 무슨 우주를 뒤흔들 노래를 불러서(극장판에서 사랑 기억하고 계십니까가 울리는 장면은 정말 엄청난 임팩트의 향연이지만 작중에서 굉장히 분명한 어조로 평범한 유행가였다고 합니다. 즉, 노래가 가진 특수성이 아닌 노래가 상징하는 문화가 핵심인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성간전쟁에서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민메이로 상징되는 문화가 만들어낸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간전쟁은 일생을 싸움 속에서만 살아가는, 칼의 종족이 멸망 속에서 문화라는 것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종족에게 보내는 일종의 헌사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성간전쟁은 끝났고 인류는 살아남았으며 인류가 만들어내는 문화는 계속해서 존재하게 됩니다. 젠트라디 안에서도 유독 호전적인 캄진이 성간전쟁 이후 사망한 것도, 어떤 면에선 칼(무력)의 몰락과 펜(문화)의 힘을 보여주는 장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문화는 적어도 외적 요인으로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문화가 죽을 때는 문화의 향유자가 그 문화를 포기했을 때 죽습니다. 아마 마크로스에서 지구의 복수를 한다며 생존자들이 마크로스 함을 양산해서 젠트라디에 돌격했다면 지구의 '문화'는 소멸했겠지요. 지금 시대는, 문화 찬탈이 시도되는 세상입니다. 그런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마크로스를 보며 새삼 떠올려보게 되네요.
첫댓글 문화를 가지고 전쟁을 하고 있는 세상이 아닐까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세계가 이토록 하나로 연결되어 가는 추세라면, 마음을 사로잡는 문화가 힘이 아주 쎄다는 거군요. 정말 좋은 글이라서, 이 곳 2과 카카오 지부 및 단톡방에서 좋은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함을 새삼 다짐하게 됩니다 ^^ 이클립스님 애정을 담아 감사를 표합니다. 이번 주도 좋은 한 주간 되십시오!
공감이 많이 가네요.ㅎㅎㅎ
제가 마크로스를 보면서 느낌점은 결국 젠트라인도 인간이였다라는 것이였습니다.
초반엔 마치 전투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건 결국 전투밖에 살아가는 방식을 몰랐던 것 뿐이였던 것 뿐.OTL
솔찍히 첫 전투시 젠트라인이 캄진처럼 본능대로 그냥 공격을 해버렸다면 마크로스고 지구고 순식간에 끝이 나버렸을껍니다.
그러나 젠트라인에서도 인간처럼 여러스타일이 있었으니...
특히 적 참모라는 자가 호기심이 왕성해서 지구나 마크로스에 정찰을 보내거나 포로를 잡는등 하다가 문화에 접해버려서
마크로스란 작품이 태어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린민메이가 아닌 다른 캐릭터가 미스콘테스트를 우승했더라도 결과는 같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마크로스에 잠입했던 젠트라인들도 기본적으론 린민메이가 아닌 노래와 문화에 바뀐거니까요.
다만 이러면 히카루, 린민메이, 미사의 삼각관계는 사라졌겠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