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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네 메네 데겔”의 하나님(단5:25)
요즘은 한국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아요. 놀거리 많고 죄짓기 좋은 한국, 연일 터지는 교회의 혼탁한 모습, 정치적인 공세, 언론의 왜곡된 기독교 죽이기 방송들 때문이죠.
그런 차제에 다니엘의 모습이 귀감이 돼요. 다니엘이 살았던 시대가 오늘과 비슷한데, 다니엘이 그 속에서 멋진 신앙인으로 살았기 때문이에요
본문에서 바벨론 왕 벨사살이, 귀족 천 명을 왕궁으로 초청해서, 성대하게 축제를 열어요.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왕은 약탈해온 예루살렘 성전 그릇에 술을 부어 마시면서, 자기들의 신을 찬양했어요.
그러자 참으시던 하나님이, 이 불경하고 교만한 왕을 심판하시기 시작해요. 왕의 맞은편 벽에, 갑자기 사람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글자를 썼어요. 순간 술에 취해 흥이 올랐던 왕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고,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두 무릎이 부딪쳐 떨렸어요. 주변의 참모들도 공포와 혼란에 빠져요.
이런 상황 속에서 왕과 신하들을 더 두렵게 한 것은, 벽의 글씨가 무슨 뜻인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이때 왕비가 다니엘을 추천해요. 2장, 4장에서 느부갓네살 왕 때, 두 번이나 해몽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자 왕은 다니엘을 찾게 되는데, 다니엘의 나이 82세였어요.
그런데 왕이 다니엘을 무례하게 대하고 무시해요.(13절) 허세도 부려요. 해석하면 금은보화를 주고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겠다고 큰 소리쳐요(16절)
그러자 다니엘이 대답해요. “왕의 예물은 왕이 친히 가지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17절) 속 시원하고 통쾌하게 말해요.
다니엘은 15세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팔순의 노인이 될 때까지 바벨론 세속에 물들지 않았던 거예요. 그것도 바벨론 정치판 권력의 심장부에서 평생을 보냈는데도, 신앙이 변질되지 않았어요. 다니엘의 믿음의 정절이 존경스러워요. 돈맛을 봐도 신앙 맛은 그대로였어요. 세상 재미 맛을 봐도 신앙 맛은 싱거워지지 않았어요. 더 진해지고 더 강해졌어요. 권력 맛을 봐도 하나님이 희미해지기 않았어요. 전혀 허영 끼가 없어요.
다니엘의 믿음의 정절이 이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어요. 다니엘을 세상 사람보다 10배나 더 뛰어나게 하심은 마땅한 거였어요.
뿐만 아니에요. 18절~28절을 보면 왕의 교만을 질책해요. 18절, 21절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이야기하면서, “그 하나님이 주관자이거늘, 왕은 어찌 마음을 낮추지 못하느냐? 왜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느냐?” 질타해요.
다니엘의 믿음의 기백이 부러워요. 그는 자신의 출세와 부를 위해서, 글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었어요. 왕이 두려워서도,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었어요.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습게 보는 왕에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어요. 예루살렘 성전의 그릇들로 술잔 삼고, 하나님과 신앙인을 안주삼아 비웃고, 세상 것을 자랑하고 있는, 왕과 1천명의 귀족들 앞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서였어요.
하나님이 이런 다니엘에게 지혜와 능력과 권력을 주심은 당연한 거였어요.
사무엘상 성경에 두 종류의 기념비가 있어요.
하나는, 사무엘이 세운 기념비인데, 블레셋을 물리친 후, 하나님의 도움을 감사하면서 세운 “에벤에셀”이라는 기념비죠.(삼상7:12)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숨기고 낮춰요. 그러자 하나님은 다니엘을 높여 주세요.
그리고 또 하나는 사울 왕이 세운 기념비인데,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에 “자기를 위하여”(삼상15:12) 세운 기념비에요. 같은 기념비였지만 내용은 달랐죠. 사울의 기념비는 자신을 위한 거였어요. 세상과 사람들이 주는 칭찬에 헛 멋이 생겨 타락한 거였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사울의 명예를 땅에 떨어트리세요. 자신을 높이려고 하나님 은혜를 드러내지 않는 사울을 낮추셨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맛 때문에 헛 멋이 들거나 허영 끼 생기는 것을 조심합시다! 그래서 신앙의 맛을 유지하고 믿음의 기백을 지켜냅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워 주세요. 다니엘처럼, 사무엘처럼 높여 주세요.
다니엘이 왕에게 당당하게 말한 후에, 25절에서 글을 가르쳐 줘요. 25절이죠.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먼저 “메네메네”를 살펴볼까요? “메네”는 “세어본다.”는 뜻이에요. “메네”를 두 번 반복했으니까? “세어보고 세어본다.”는 뜻이죠.
하나님은 “메네메네의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빈틈없이 다 세시는 하나님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날들이 그냥 지나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다 세어지고 있어요. 이 순간에도 나를 셈하고 계세요.
이것이 때로는 위로가 되고, 때로는 오싹해져요.
눅 12:7절에서 말씀하세요.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심지어 머리털 하나까지 세고 계세요. 셈할 필요 없는 것, 하찮은 것 까지도 셈하시니 두려워 말라 하세요. 큰 힘이 되고 큰 평안을 얻어요.
시 56:8절에서 다윗이 고백해요.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다윗이 억울하게 떠돌아다니는 아픔과 그로 인해 흘리는 눈물을 다 세세요. 내 슬픔, 내 상처를 다 세세요. 고마운 하나님이세요.
욥이 고백해요. “하나님은 내가 하는 일을 낱낱이 알고 계신다. 내 모든 발걸음을 하나하나 세고 계신다.”(욥31:4) 내 삶을 하나하나 다 세신다는 것이죠.
주일성수, 봉사, 헌금, 희생, 손해... 모두 다 세고 또 세시며 정확하게 다 셈하세요. 그래서 욥은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고 병이 생기는 힘든 일을 겪으면서도,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써요.
하나님은 그런 욥을 사탄에게 자랑했어요. 그리고 그런 욥에게 역전의 복과 갑절의 복을 주셨어요.
이런 욥을 보면서, ‘아무리 고달파도 바르게 살아야지! 아무리 힘겨워도 신앙생활 제대로 하기위해 몸부림하고 발버둥 쳐야지’ 다짐하게 돼요. ‘그래서 메네메네 의 하나님이 위로와 평안이 되고, 메네메네의 하나님으로 역전의 복과 상급도 받아야지’ 욕심도 내요.
우리 교회 성도님을 장례할 때, 편안하고 은혜로울 때가 있어요. 고인에 대해 할 말이 많을 때에요. 고단한 인생을 사셨어도 신앙의 흔적이 많을 때, 아름다운 삶을 사셔서 전하고픈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죠.
그러나 때로는 우리 성도인데 고인에 대해 할 말이 없는 장례식이 있어요. 세상적으로는 성공했는데, 신앙적으로는 실패해서이죠. 세상의 흔적은 많은데, 예수의 흔적이 없어서이죠. 가족들에게 남긴 것은 많은데, 하나님께 남긴 것이 없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할 말이 있는 인생이 됩시다! 셈할 것이 많은 인생이 됩시다! 단지 목사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말이죠.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주께서 입이 닳도록 자랑할 것이 많은 성도가 됩시다!
다음은,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에서 ”데겔“을 볼까요. ”달아보다“는 뜻이죠
다이어트 하시는 분들, 날마다 저울에 올라가시죠. 그게 “데겔”이에요. 하나님도 그렇게 우리를 날마다 달아보세요. 27절에.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설명해요. 왕을 달아보았더니 함량 미달이라는 것이죠.
뜻밖이었어요. 벨사살은 대 바벨론 제국의 왕이에요. 부귀영화와 권세를 가지고 있어요. 자기 저울에 달아보니 넘쳤어요. 사람들의 저울에 달아보니 무겁고 컸어요. 조금도 모자랄 게 없었어요.
그래서 믿음의 사람 다니엘을 우습게 봤던 거예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하고, 먹는 것 하나도 조심하는 다니엘을 어리석은 자로 봤어요.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사는 다니엘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니 반대였어요. 벨사살은 함량 미달이었고, 다니엘을 함량 초과였어요. 세상의 저울과 같지 않은 하나님의 저울이 참 좋아요. 왕이라도 가벼울 수 있지만, 범인(凡人)이어도 무거울 수 있다는 게 참 다행이에요.
그리고 한 편으로는 걱정도 돼요. 목사라는 타이틀이 있다고 무거울 수 없기 때문이죠. 약이나 음식이 함량 미달이면 가짜고 사기라고 말해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함량 미달이면 가짜 목사, 가짜 성도에요.
사람들의 저울, 세상의 저울만 생각하면 가짜 되기 쉬워요. 하나님의 저울을 생각하고 세상 욕심과 세상 재미를 다이어트 해야 해요. 그래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의 무게를 늘일 수 있어요.
마치 과실나무 가지치기와 같아요. 봄이 되면 가지치를 해요. 열매를 생각해서 불필요한 가지는 과감히 잘라요. 하나님의 저울에 묵직하려면, 가지치기, 다이어트를 잘 해야 해요. 늦기 전에, 세상의 재미와 정욕을 다이어트 해야죠(히12:1, 2)
그러나 벨사살은 이 생을 자랑하고, 세상을 즐기다가 함량 미달이 되고 말았죠.그래서 어떻게 되나요?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 “우바르신” 돼요. “우바르신”에서 “우”는 “그리고” 라는 뜻이고, “바르신”은 “갈라지다, 나눠지다”라는 뜻이에요.
“메네메네”, 세고 세보니 셀 것이 없었어요. “데겔”, 달아보니 함량 미달이었어요. 그래서 바벨론을 둘로 쪼개서 메대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넘긴다는 뜻이에요. “벨사살 왕 너는 이제 끝이라”는 것이죠. 아닌 게 아니라 바로 그날 밤에 벨사살이 하수구로 몰래 들어온 바사의 저격수에게 살해당해요. 그리고 6개월 후에 바벨론이 둘로 쪼개져서 망해요.
벨사살은 그것도 모르고, 1천명의 귀족을 초청해서 성대한 잔치를 벌이면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믿음의 사람들을 우습게 여겼어요. 그날 밤에 죽을 줄도 모르고, 자신이 가진 돈과 권력을 과시하면서, 마냥 세상을 즐기고 있었어요.
벨사살을 통해 타산지석의 지혜를 얻어요.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 저울을 염두고 두고 살아야 한다.”는 지혜요. 어제는 “벨사살”이지만, 오늘은 “나” 일 수 있고, 오늘은 “저” 이지만 내일은 ‘여러분“일 수 있어요. 자꾸만 미루지만 말고, 세상 것 다이어트 좀 하고, 하나님의 저울에 맞춰서 살아갑시다.
삼상 2:3절에서 한나가 고백해요.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사무엘 모친 한나의 고백이죠. 불임이었던 한나가 아들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사무엘을 주시자,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고백한 말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을 당신의 저울에 달아보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이죠. 대충 응답하시지 않아요. 괜히 우리가 슬픈 표정을 짓고, 우는 소리를 낸다고, 쇳소리로 하나님을 윽박지르고 위협한다고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한나는 그저 기도 한 번 잘 해서 소원을 이룬 여인이 아니에요. 기도 한번 잘 해서 아들을 위대하게 키운 여인이 아니에요. 말에서 행동에서 하나님의 저울을 충족시켰기 때문이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입과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믿음의 삶을 저울질하는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해요. 지금보다 조금만 더 힘을 씁시다!
그래서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소망해요. 불임이었던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3남 2녀를 더 낳는 기적의 은총을 받은 것처럼, 불가능했던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은총을 받으시길 축원해요. 한나의 아들 사무엘이 이스라엘 최고의 사사가 되듯, 우리 자녀들에게 그 축복이 임하기를 축원해요.
마쳐요. 렘 36:23, 24절을 볼까요.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 왕과 그의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유다의 국운이 기울던 여호야김 왕 때의 이야기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말씀을 찢고 불에 던져 태워요.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죠. 그러다 결국 망했죠.
혹 이런 우를 범하지 맙시다! 성경공부도 중요하지만 성경순종도 중요해요. 설교은혜도 중요하지만 설교 순종도 중요해요. 골라서 순종이 아니라 모든 말씀에 순종이어야 해요.
마음을 찢고 옷을 찢는 마음으로 오늘의 말씀을 새깁시다. 너널너덜해진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되게 합시다!
그래서 “우바르신”, 찢겨지는 삶이 아닌 세워지는 삶을 살게 되기를 축원해요. 기울어져 가는 우리의 삶과 우리의 교회와 우리 한국교회가 일어나기를 축원해요.